봄을 지나온 어느 날

지나왔기에 더 애틋한

by 상숙씨

주말 아침 늦잠을 늘어지게 자고 일어났다. 허리가 조금 아플 만큼 잤으니 이제 그만 침대에서 벗어나도 좋을 텐데, 더 늘어져있고 싶어 티브이를 켰다. 어제 한 언슬전을 보다가 커피 마시는 장면에 급 커피가 땡겨서 몸을 일으켰다. 커피를 내리는 김에 아침도 먹어야지. 간단하게 닭가슴살 소시지를 데우고 냉동해 놓은 고구마를 전자레인지에 해동했다. 반숙란까지 놓고 커피랑 같이 마시니 이거야 말로 다이어트식이다. 사실 아침에 몸무게를 쟀는데 앞자리가 바뀌어 있어 적지 않게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 의도된 식단이라고 볼 수 있다. 밥 준비를 하며 애인에게 집 안 창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했다. 암막 커튼을 젖히고 방마다 창문을 여니 봄바람과 햇살이 쏟아진다. 아! 오늘은 꼭 밖에 나가야겠다. 의지가 솟구친다.


얼마 되지 않는 음식이라 빠르게 식사를 마쳤고 서둘러 준비해 집을 나섰다. 목적지보다 두 정거장쯤 일찍 내려서 걸었다. 어제보다 바람이 차가운 것 같더니 내리쬐는 햇살 때문인지 조금씩 더워진다. 중고 서점에 들러 책을 조금 봤고, 목표했던 옷가게들이 많은 홍대 거리에서 쇼핑을 했다. 요즘 애들은 저렇게 치렁치렁한 옷을 입는구나… 피팅했을 때 어떤 느낌일지 나로선 도저히 상상도 안 되는 난해한 옷들이 가게 안에 가득했고, 그 옷을 예쁘게 소화하는 젊은 친구들을 보며 꼭 딴 세계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많은 옷들 중에 손이 가는 옷이 하나도 없다니… 이제 나는 유행이랑은 거리가 멀어졌구나. 추구미도 힙스터보다는 올드머니 쪽이라 당연한 거라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갑자기 나이가 많이 든 것처럼 느껴져 씁쓸했다. 고급스러움을 추구하기에 백화점은 너무 비싸고 로드샵은 너무 여러운, 추구하는 옷처럼 나라는 사람도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사람인 것 같아서. 그래도 어찌어찌 유행하는 스타일의 상의 하나와 무난히 입을 수 있는 가디건 하나, 탑 2개를 건졌다. 다음엔 로드샵 말고 백화점 말고 적당한 spa브랜드로 가봐야겠다.


쇼핑 후 떨어진 당을 채우기 위해 츄로스 맛집을 찾아 망원동으로 넘어갔다. 아담한 츄로스 전문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아이스크림과 딥초코 소스에 츄로스를 먹었다. 막 튀긴 바삭하고 따뜻한 츄로스가 너무 맛있어서 감탄을 하고 열린 가게 문 밖으로 흔들리는 나뭇잎이 햇빛에 반짝이는 걸 보며 또 감격했다. 봄이구나. 이대로 집에 가기에는 날씨가 아까우니까 망원한강공원까지 걷기로 한다. 둘 다 편한 옷, 편한 운동화를 신고 나오길 너무 잘했다고 서로를 칭찬했다. 산책하는 귀여운 강아지들을 만나고, 버스킹 하는 사람들과 그 음악에 맞춰 고개를 흔들고 박수를 치는 사람들, 돗자리 깔고 앉아 피크닉 즐기는 사람들, 러닝을 하거나 배드민턴을 치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걷다 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잠깐 한강 가까이 앉아 자동차 모양으로 생긴 배가 강 위를 통통 지나는 걸 봤다. 언젠가는 나도 꼭 타봐야지 다짐하며.


망원시장 큐스닭강정을 사서 집에 가기로 했다. 한강 공원에서 또 한참 걸어야 했지만 망원동 곳곳에 숨은 맛집과 카페 구경하는 걸 좋아하는 우리에겐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기 때문에 천천히 동네 산책하듯 걸었다. 가게 곳곳, 문을 활짝 열어놓거나 야외에 테이블을 놓고 앉아 한 잔 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까지 마음이 여유로워지는 것 같았다. 이 계절에만 누릴 수 있는 즐거움과 활력. 많이 걸은 만큼, 원래라면 에너지가 소모되어야 맞는데 오히려 충전되고 점점 더 텐션이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이래서 봄은 청춘이고 시작이라고 하는구나. 그 어느 때보다 봄의 기운을 가득 느끼고 있는 5월이다. 닭강정을 사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바라본 한강 노을도 말할 것 없이 아름다웠고, 깨끗하게 샤워하고 새로 산 노란 잠옷을 입고 침대에 기대어 책을 보고 일기를 쓰는 지금 이 순간도 참 좋다.


어쩌면 나는 이제 봄이나 청춘과는 조금 거리가 멀어졌는지도 모른다. 운동을 하고 식단을 해도 자꾸 살이 찌는 30대 중반. 더 이상 유행을 쫓아가기엔 너무 여러워진 나이. 그래서 작년까지는 잘 몰랐던 봄이라는 계절이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이제는 지나온 것들이라,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어떠한 애틋함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아쉽냐? 물론 조금 씁쓸하고 조금 많이 아쉽다. 하지만 활기와 반짝임, 그 소란스러움에서 벗어나 한 발자국 뒤에서 감상할 수 있는 지금의 여유로움이 더 좋다. 그 안에 속해있을 때는 몰랐던,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지금, 나의 세계가 그만큼 더 깊고 넓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앞으로 나에게 남은 봄이 더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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