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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통통샤인머스캣 Mar 31. 2021

영원을 추구하는 인간, 죽고 나서도 기억되는 존재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고맙게 기억되고 싶은 욕구란

 영국의 신경과 의사인 올리버 색스는 죽음을 앞두고 쓴 글에서 ‘두렵지 않은 척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내가 무엇보다 강하게 느끼는 감정은 고마움이다. 나는 사랑했고, 사랑받았다. 남들에게 많은 것을 받았고, 나도 조금쯤은 돌려주었다. 나는 읽고, 여행하고, 생각하고, 썼다. 세상과의 교제를 즐겼다. 특히 작가들과 독자들과의 특별한 교제를 즐겼다. 무엇보다 나는 이 아름다운 행성에서 지각 있는 존재이자 생각하는 동물로 살았다.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특권이자 모험이었다.’고 말하면서, 아름다운 행성에서 지각 있는 존재로서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기억을 고맙게 이야기하며, 독자들도 자신을 그렇게 고맙게 기억해달라는 마음을 은근히 내비쳤다.


 누군가에게 고맙게 기억되는 것은 자신이 다른 사람의 기억 속에서 고마움의 의미의 형태로 살아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는 우리 기억 속에 남아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라는 햄릿의 고민이 지금도 회자되는 것은 우리 마음에 그냥 사라지는 것에 아쉬워하며 고맙게 기억되고 싶은 욕구가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는 죽음이란 일생일대의 사건은 결국 자신을 찾아올 것이고, 자신의 장례식에서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나를 추억할 것이다. 그때 자신을 고맙고, 좋은 사람으로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은 좋은 기억을 남긴 사람이라는 점에 의미 있게 산 인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 그 사람 좋았네’라는 무난한 평가와 아쉬움을 남기는 것보다 좀 더 강렬하게 기억되기를 원한다면, 자신이 진정 원하는 삶은 어떤 삶인가? 고민하고, 그 고민대로 살아온 흔적이 누군가에게 기억될 수 있는 사랑의 열매로 분명히 나타나야 하겠다. 그렇지 않으면 시간은 그저 흘러갈 뿐이고, 나는 그저 흘러간 시간과 함께 바람처럼, 흔적 없이 사라질 수 있다.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이야기로 기억되기

 자신이 누군가에게 기억된다는 의미는 하나의 의미 있는 이야기로 남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기억되는 이야기의 하나의 이미지로 각인되려면, 나 자신이 어떤 식으로든 상대에게 묵직한 울림과 감동을 주어야 한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주었던 사람으로, 커피 한잔을 같이 했던 사람으로, 친절한 말을 했던 사람으로 선명하게 각인되어 남을 수 있겠고, 단지 하나의 에피소드의 희미한 점 같은 기억으로 흐릿하게 남을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것은 상대방의 욕구를 채워주는 강렬함의 정도와 경험의 빈도와도 관련 있다. 가령 남자는 상대가 자신을 인정해주는 것을 원하며, 여자는 공감해주는 욕구를 채워주는 것에 고마워한다. 얼마나 고마움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다가갔는지 얼마나 자주 그것을 채워주는 경험을 했는지에 따라 상대방이 자신을 기억되는 정도가 달라질 것이다.

 

 누군가를 기억하는 것은 그의 존재가 내면에 들어오도록 공간을 내주는 것과 같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존재가 내 내면에 들어오도록 공간을 쉽게 내주지 않는다. 한두 번의 친밀한 경험을 통해 그 사람이 사랑스러운 존재라고 받아들여진다면,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어주고, 그와 같이 있고 싶어 지며, 내면의 공간에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에 대한 기억으로 채워진다. 고맙게 기억되기 위해선 인상적인 무언가가 들어가야 하는데, 그것은 자신의 욕구를 희생하고, 상대방의 욕구를 좀 더 배려한 인간적인 감동의 요소가 어우러져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것은 결국 자신을 뛰어넘는 이타적인 형태의 사랑이다.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자신을 중요한 사람으로 대해주는 진심 어린 사랑받는 경험이 주어질 때 우리는 감동하고, 그 사람을 고맙게 기억하게 된다.


 가치 중심적 행동을 실천하며 즐거운 기억을 선사하기

 고맙게 기억된다는 것은 의미 있는 타인에게도, 자신에게도 기억되는 것을 포함한다. 그저 내게 주어진 삶에서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마음매력의 심미안을 잃지 않고, 삶의 아름다운 가치와 의미를 이뤄가는 즐거움을 누리며, 주변 사람들을 소중히 대하며 가치 중심적 행동을 꾸준히 실천하면 우리는 상대방에게 고마운 존재로 기억될 수 있다. 특히, 남들이 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가치 중심적 행동을 실천하는 노력은 상대방에게 참신한 감동을 주면서 인상 깊게 각인될 수 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어느 가난한 과부의 기부행위를 언급하셨다.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예수님은 그 여인의 과거의 출발점과 현재의 처지를 아신 상태에서 그런 기부는 그 여인의 처지에서 할 수 없는 행동임을 아시고, 그 마음에 감동하셨던 것이다. 우리 자신의 출발점은 저마다 다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힘을 다해 남들이 하지 못하는 창의적인 방식으로 남을 도울 때, 우리 삶을 더욱 가치 있고 풍요롭게 만들 수 있을 것이고, 누군가에게 고마운 존재로 기억될 수 있을지 모른다.   


 미국의 심리학자 애브라함 마슬로우는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이 되면, 안전의 욕구가 충족되기를 바라고, 순차적으로 사랑과 소속감의 욕구, 결국 자기실현의 욕구를 추구하게 되어있는 욕구 단계설을 주장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먹고사는 생리적 욕구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남을 돕거나 자기실현의 상위단계의 욕구로 나아가는 것이 무척 어렵다. 그런 점에서 이 가난한 여성은 과부라는 당시 열악한 사회경제적 위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활비 전부가 되는 돈을 드려 남을 돕는 헌신적 행위는 놀라운 것이었고, 예수님은 이 여인의 내면의 아름다움을 사랑스럽게 주목하셨을 것이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구제할 때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절대자가 보시는 시선만을 의식하라는 말씀일 것이다. 남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목적으로 한 선행은 이미 그 자체로 목적을 이루었다고 한다. 또 다른 시선이 있을 수 있다고, 그것이 내면의 양심의 눈일 수도 있거나 어쩌면 진정한 내면의 보상으로 나아가는 채널이 있을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많은 돈을 버는 일보다 고맙게 기억될 만한 정신적 의미를 남기는 것이 더 가치 있음을 알고,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한다면, 은밀하게 보시는 그 누군가에게 아름답게 기억될만한 의미를 남길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나는 누군가에서 그 무엇을 남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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