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가져가셔!

허기짐을 채우는 건...

by 강화진

가끔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골목길이나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곤 한다. 그림의 소재를 찾는 것도 이유지만 그림을 그리기 전에도 내가 살고 있는 작은 동네의 골목길을 찾아 걷고, 여행을 가서도 그곳의 옛 골목길이나 동네를 찾아 기웃거리는 것이 나에겐 즐거움이었다.

얼마 전 예전 우산철교가 있던 동네를 돌아보게 되었다. 야트막한 집들이 길가를 채우는 곳인데 키가 크지 않는 내 눈에도 지붕이 다 보일 정도의 낮은 집들이 이어져 있었다. 차도와 집들이 지어진 곳의 높이 차이가 나는 이유도 있지만 집의 높이가 요즘의 건물과는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이 더 큰 이유란 생각이 드는 동네였다. 그렇게 이어진 집들 사이에 간판도 없고 간판이 없으니 상호도 없는, 한쪽에 빈 과일 박스가 쌓여있고 다른 한쪽엔 바구니에 과일이 담겨있는 과일가게가 보였다. 무슨 이유였는지 갑자기 그곳의 과일을 먹고 싶어 져 과일을 고르고 카드를 내니 카드가 안 된다 하였다. 계좌이체 또한 안 된다 하였다. 어찌해야 하나 하고 있는데 가게 안쪽에서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게 안 작은 공간에 있던 어르신이 “나중에 지나는 길에 과일 값 주고 오늘 그냥 가져가셔!” 하는 것이었다. 어제부터 무슨 일인지 카드도 안 되고 계좌도 확인하기 어렵다며 그냥 가져가고 나중에 이 쪽으로 올 때 물건 값을 달라는 말에 이 동네에 살지도 않고 언제 올지도 모른다 하였더니 언젠가 오지 않겠냐며 안 오면 어쩔 수 없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럴 수 없다는 내게 괜찮다며 가져가라 가져가라 하는 어르신의 말을 뒤로하고 그 동네의 인출기를 찾아다녔다. 돈을 찾아 다시 가게로 가서 귤과 감을 사서 돌아오게 되었다.


일을 하는 엄마는 늘 바빴고 나는 늘 혼자 집에 있어야 했다. 엄마가 일을 가기 전 차려놓은 밥을 먹으며 하루를 보냈는데 밥을 먹고 난 후에도 과자도 먹고 싶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싶었다. 어린애가 밥으로만 배를 채우기엔 하루는 너무 길고 허기진 시간이었다. 군것질을 하고 싶다고 엄마를 졸랐는지 어쨌는지 엄마는 어린 내게 직접 돈을 주는 대신 동네 구멍가게 아주머니와 약속을 정하게 되었다. 그 약속은 먹고 싶은 것이 생기면 가게에 가서 물건을 골라 먹고 나중에 엄마가 돈을 갚는 외상이란 거래방법이었다. 혼자 놀다 군것질이 하고 싶으면 가게로 가서 먹고 싶은 것들을 가지고 와 신나는 시간을 보내곤 했다. 필요한 아무 때 엄마가 없어도 가도 되는 곳이 있다는 것은( 물론 엄마는 하루에 한 번이나 두 번 정도만을 허락했지만) 나의 허기짐을 채워주는 든든한 창고였다.

무엇인가 먹고 싶은 것이 없어도 하루에 한두 번 이상 가게에 가서 물건을 들었다 놓았다 할 수 있다는 것이 내겐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 그때의 나는 밥을 먹기 전뿐 아니라 밥을 먹어도 늘 다른 것이 생각났다. 그리 굶고 산 것도 아닌데 왜 그리 허기져했을까?

어린 그때의 그 허기짐은 단순히 밥의 문제가 아닌 정서의 허기짐이고 외로움의 허기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어른이 되어서야 하게 되었다. 엄마와 둘이 살던 그때 엄마가 없는 공간은 늘 크고 엄마가 없는 시간은 늘 길고 허전했다. 나는 나의 그 공간과 시간을 가게에 진열된 달콤한 것 들 중 하나를 골라 입에 넣는 것으로 채웠을지도 모르겠다.

과일을 조수석에 놓고 굴을 까먹으며 나는 그날 동네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과일을 즐기지 않음에도 서 너 개의 귤을 까먹으며 달콤하고도 새콤한 그 맛을 입 안에 가득 넣고 우물거렸다.

어릴 적 아무 때나 가도 항상 손에 무엇인가를 내 편에선 아무 지불도 없이 가지고 올 수 있었던 가게와 그냥 가져가라며 나중에 지나는 길에 주고 가라던 그 과일 가게가 그날은 왜 그리 겹쳐 보였는지.......

한 동안 그날의 기억은 내 안에 머무르게 되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에게 가져가라 가져가라 했던 사장님의 목소리가 언제든 가면 어서 오라고 하던 구멍가게의 지금은 얼굴도 생각나지 않는 주인아주머니의 목소리가 하나의 소리로 내게 남게 되었다.

허기짐을 채워주던 풍요로운 온기는 이렇듯 시간으로, 공간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날의 과일 가게는 우리 동네의 구멍가게였고 사장님은 주인아주머니였다.

어릴 적 허기짐이 지금도 이어질 수 있었을 텐데 그 허기짐은 잠시 그 시간에 채워지고 있었다.

영원할 순 없지만 그날의 그 시간은 한 동안 겨울의 시간을 봄날의 시간으로 바꿔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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