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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원 Apr 09. 2021

'좋아요' 라는 종교

이 브런치의 가장 처음에 등장했던 질문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는지?  그것은 바로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이다. 결론을 내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 하고 그것과 비슷한, 디자이너는 과연 무얼 하는 사람인가를 살펴보자.(1)


크리스토퍼 드레서는 19세기에 등장한 최초의 산업 디자이너라고 일컬어지는 인물로 'Art Knowledge'가 개인이나 국가를 위해 부를 창출하는 것이라 설파했다. 한 예로 화분을 들었는데 별 것 아닌 점토라는 재료를 18펜스짜리 화분이나 50파운드짜리 꽃병으로 변하게 하는 것이 Art의 가치라고 보았다. 그 용어에서 전근대성을 느끼게 되나 사실 그가 만든 금속 주전자를 보면 그 현대성에 입이 딱 벌어지게 된다. 건축에서 근대를 시작한, 고전 건축의 장식을 대놓고 죄악시했던 아돌프 로스보다도 살짝 이전의 일이다. 


근현대 디자인사 과목의 시작에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 윌리엄 모리스와 예술공예운동이 아니라면 - 언제나 독일의 바우하우스이다. 발터 그로피우스는 초대 교장으로서 디자이너가 키워야 할 자질을 형태의 모방에서 재료와 기술의 실험으로 바꾸어 놓았다. 우리에게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으나 알토, 꼬르뷔제, 라이트, 미스와 함께 (왜 미스만 first name으로 부르는 걸까?)  근대를 대표하는 거장 중 한 명이다. 교수진으로 폴 클레, 모홀리 나기, 바실리 칸딘스키 등을 끌어모았다니 그 똘끼(!)가 하늘을 찔렀으리라.  

 

군수공장 같이 생긴 미대건물. "Das Bauhaus" by Maarten Dirkse is licensed under CC BY 2.0 

 

20세기 대량 생산으로 인한 폐해는 걸출한 사상가를 등장시켰는데 빅터 파파넥이란 분이다. 그는 디자이너가 쓰레기를 생산하고 공기를 오염시키는 원흉이라고 보고 인류를 위한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비슷한 시기에는 노벨 경제학상과 튜링상 수상자인 허버트 사이먼이라는 최후의 르네상스형 천재가 나타난다. 그의 말이 뜬금없이 디자인학계에서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는 이유는 그가 내린 디자인에 대한 정의 때문이다. 그는 '디자인이란 현재를 더 나은 상태으로 바꾸는 것'이라 하였는데 그런 의미에서 '디자인은 과학'이며 '후세에게 더 많은 선택지와 더 나은 지식을 전달해 주어야 하는' 임무가 있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는 이런저런 유명세 + 여기저기 한자리를 하신 존 마에다라는 분이다. 그는 디자이너를 (1) 물리적인 제품을 만드는 Classical 디자이너, (2) 소비자를 관찰하여 혁신을 이루는 Commercial 디자이너, 마지막으로 (3) 프로그래밍 스킬과 데이터를 사용하여 수십억의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는 Computational 디자이너로 구분하였다. 솔직히 그 당위성에 쉽게 동의하기 힘들다. IT 기술의 막대한 scalability와 독과점으로 새 직종 하나가 추가된건데, 도대체 그게 뭐 어쨌다고. 

 



어쨌든 컴퓨터는 디자인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째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최근의 화두는 재미있게도 바로 우리 자신, 구체적으로는 우리의 attention이다. IT 공룡들은 소셜 네트워크와 추천 시스템을 통해 어떻게든 우리의 취향을 알아내고자 하였고, 무슨 마법을 부렸는지 머문 시간을 돈으로 환산, 거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우리는 공짜나 다름없는 서비스에 취해 혁신과 경쟁을 이겨 낸 새 시대의 주인공을 칭송하였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시작, 적어도 촉발되었다. 오바마의 후임으로 누구도 예상 못한 트럼프가 당선되었던 것. 그는 대통령의 권력이란게 어디까지 막나갈 수 있는지 보여주었는데, 사실 각종 스캔들이 그를 재임 내내 괴롭히기도 하였다.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해도 러시아 선거 개입으로써, 트럼프는 특검의 조사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수사방해에 대한 혐의까지 얹어졌음에도 기소만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터진 facebook 스캔들은 대중의 소셜 미디어에 대한 다시는 회복 못할 불신을 가져 온 일대 사건이었다. 트럼프의 캠프가 facebook의 개인정보를 활용, 개인 성향에 맞춰진 선거 정보를 제공했으며 이를 본 유권자들이 몽유병에 걸린 것처럼 홀려 투표소로 향했다는 것이다.  

   

자초지종은 이렇다. 알렉산더 코간이라는 캠브리지대학 연구원은 자신이 만든 앱 This is digital life을 통해  보상금을 제시, 27만명의 설문을 모았다. facebook을 통한 설문이었는데, 당시 facebook API는 친구 정보까지 접근할 수 있어 무려 1000만명에 가까운 미국인의 지역구를 포함한 정보가 모였다. (초기 페이스북 서비스들이 친구 정보 달라고 한 것을 기억하는지!) 이 데이터는 트럼프의 자문이었던 극우ㄲㅌ 스티브 배넌이 관여한 Cambridge Analytica라는 데이터 분석회사와 공유되었다. 이 회사는 facebook 광고를 활용하여 swing voter들을 적극 공략함으로써 트럼프 캠프의 승리, 더 나아가 Brexit에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n8Dd5aVXLCc

Cambridge Analytica 전 CEO Alexander Nix 가 선거전략을 설명하는 장면. 지금 보면 자신의 입을 꼬매버리고 싶을거다


이 사건의 중심에 facebook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가 남기는 'like'는 우리의 성향에 대한 매우 강력한 지표이기 때문이다. 수천만원을 들여 빌딩 꼭대기에 광고판을 만들어 본다 한들 얼마나 타겟 소비자층에 전달되는지 알기 어렵다. 그러나 친구가 산 커피머신을 보고 like를 누른 사람들은 네스프레소가 사활을 걸고 영업을 해야 할 상대이다. 개인의 취향에 대한 매우 직접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말인데 학계에서는 잠재되어 있는 다양한 요인들간의 상관관계를 밝혀내었다. '과학' 이나 '꼬인 프렌치 프라이'는 높은 지적 수준과, '낮잠자다 깨면 혼란스럽다'는 성적 취향과, 그리고 '헬로키티'는 정치적 성향과 상관관계과 있음이 나타났다 (2). 물론 인과관계가 아닌 상관관계이나, 머나 먼 미래에 헬로키티가 어떻게 우리를 세뇌하는지 밝혀질 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더 큰 곳에 있었다. 미국에서는 임기 내내 들끓던 무언가가 트럼프의 재선 실패와 함께 초유의 의회 유혈사태로까지 이어지게 된 것. 언론은 그것을 조장하고 방조한 배후로 트럼프를 비난했으나 사실 선거 조작이 있었다는 군중의 믿음은 거의 광기에 가까웠다. 트럼프의 거친 레토릭만으로 사람들이 선동당했다고 하기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구글에서 뛰쳐나온 Tristan Haris에 따르면, IT회사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 사람들의 심리를 어떻게든 최대한 이용하려 한다. 가장 확실한 사례는 구글 메일의 '알림' 버튼이다. 종모양 아이콘 옆의 빨간 동그라미는 소셜 미디어 이후 인간들을 거의 파블로프의 개로 만들어 버렸다. 유투브가 사람들을 붙들어 놓는 가장 노골적이지만 효과적인 방법은? 뭐니뭐니해도 바로 자동 재생 기능이다. Netflix는 UI 디자인에 경악할 수준으로 다양하고 복잡한 알고리즘을 적용해 보고 있다. Snapchat은 Snapstreaks 라는 기능을 만들었는데 두 사람의 채팅이 연속해서 이어진 기간을 보여준다. 10대들은 기록을 깨지 않기 위해 본인이 로그인이 어려울 때 주변인에게 비밀번호를 주며 부탁한다고 한다. 이렇듯 사람들의 attention을 잡아두려는, 더 크게 특정 행동을 유도하는 trick들을 통틀어 디자인 쪽에서는 dark patterns (3), 스탠포드 연구실에서 나온 심리학 용어로는 persuasive technology라고 한다 (4). 


https://www.youtube.com/watch?v=C74amJRp730


Tristan이 말하는 우리를 좀 더 자극하는 방법은 우리를 '화나게' 하는 것이다. 화(outrage)라는 것은 즉각적으로 치솟는, 조절하기 어려운 감정으로써 사람들이 쉽게 클릭하고 또 전파하게 만든다. 이런 면에서 음모론은 아주 좋은 미끼이다. 백신이 자폐증의 원인이라는 것, 지구는 평평하다는 것, 기후 위기란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 우리는 달나라에 간 적이 없다는 것, 그리고 동네 피자가게 지하에 아이들이 인질들이 잡혀있다는 것까지. 우리의 attention을 붙잡고자 하는 알고리즘은 우리의 호기심이 극대화되고 이성이 취약한 부분을 파고들어 토끼굴 (rabbit hole)에서 허우적대게 만든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 - 적이나 아군이나 똑같이 복잡하고 비루한 존재라는 것 - 은 그 누구에게도 인기가 없다.  


알고 보면 이는 전통적인 미디어가 하던, 자극적인 뉴스로 구독자와 광고주를 동시에 끌어들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훨씬 더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더 극단적으로 재단된 현실들이, 공공성이 배제된 채 오로지 비즈니스 모델에 기대어 이뤄지고 있다는 것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통신 미디어는 대안의 현실에 공조하는 사람들을 더 쉽게 결집시킬 수 있다. 우리 중 일부를 오도하여 세계 최고 권력의 주인공을 바꿀 수 있었다고 하니, 이것이 정녕 사실이라면 소셜 미디어란 사회적 행위를 멈출 수 없는 인간들을 움직일 수 있는 전례없는 프로파간다 머신이다.




잭 도로시는 트위터의 CEO로 참 미스터리한 기운을 풍기는 사람이다. 국회청문회에서 탈탈 털릴 때, 피차이나 주커버그, 샌드버그가 무조건 납작 엎드리는 것에 반해 도로시는 특유의 긴 수염과 음험한 말투로 꿋꿋이 자신의 논리를 편다. 뉴욕타임즈와 인터뷰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딱 하나 바로 꼬리를 내리는 지점이 있었으니, 바로 twitter가 양극화의 주범 중 하나로 지목되는 이유가 '인센티브 구조'에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때였다. 심지어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바꾸고 싶다고 하였는데, twitter가 내리는 design 결정의 파급효과를 예측 하는 데에 행동경제학자, 게임이론가와 같은 사회과학자의 도움이 필요했다는 말이다 (5). 


구체적으론 트위터 프로파일 옆에 크게 굵은 글씨로 팔로워 수를 표현하는 것, 좋아요 버튼 옆에 숫자를 표시한 것, 그리고 어떠한 트윗을 실제로 보지도 않고 리트윗할 수 있게 한 것을 예를 들었다. 이러한 디자인은 숫자를 빨리 증가시키고 싶도록, 또는 더욱 viral 한 트윗을 만들고 싶도록 유도한다. twitter가 이러한 부작용에 대해 고민을 안 한 건 아니었다. "너 읽지도 않고 retweet 할래?" 라고 경고하든지, tweet 에 대해 찬성/중도/반대의 의견 모두를 다 균형있게 보여주는 것 등을 실험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잭 도로시는 이는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에 언제나 존재했고 또 미래에도 존재할 트롤 짓일 뿐, 일거에 타파할 근본적 해결책은 환상이라고 일갈했다. 중재되지 않은 미디어로서 양극화를 확산시켰다는 혐의를 적극 부인한 것이다.

 

별 버튼이 하트로 바뀔 때의 트윗 (좌) 와 BTS 트윗 (우). 버튼 옆 숫자가 생긴 것에 주목해보자


카톡의 빨간 동그라미를 보면 결국 누르게 되는, 팔로워 수를 보면 높이고 싶은 욕망을 뭐라고 하면 좋을까? 미디어 연구에서는 이를 affordance 라고 부른다. 혹시 요전에 Don Norman에 의해 제시된 디자인 원리로 affordance를 기억하는지? 어떠한 제품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될 수 있는지를 암시하는 것을 말하는데, 바로 그것과 같은 용어다! 사실 이 단어의 창안자는 James Gibson 이라는 생태심리학자였다. Gibson에게 affordance는 "자연환경이 동물들에게 제공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예를 들어 불은 따뜻함, 조명, 요리, 혹은 피부에 대한 상처를 afford 한다. Gibson은 동물이 생태계를 시각 정보로만 읽은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제공하는 행위를 기반으로 해석한다 주창했고 affordance는 이러한 관점의 핵심 개념이었다.


이를 디자인에 전용한 것이 바로 Don Norman이다. 다만 그에게 affordance는 단순히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제품이 그 형태나 재질을 통해 적극적으로 제공하는 '암시된 사용법'이었다. 동그란 것은 회전을, 슬롯은 집어 넣는 것을, 유리는 깨지는 것을, 공은 튀는 것을 afford 한다. 디자이너가 이를 적절히 사용하면 메뉴얼을 최소화하면서 동시에 제품의 사용성이 극대화할 수 있다. 이 개념은 미디어 및 커뮤니케이션학으로도 확장되었는데, 미디어에서 제공되는 기능이나 행동을 유도하는 방식이 사람들 간의 소통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소셜 플랫폼은 여러 디자인 decision으로 이루어진, Gibson이 말한 새로운 생태계가 된다 (6). 

  

한 예시로 Youtube를 살펴보자. 소비자는 '좋아요'나 댓글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고 '구독'을 통해 특정 생산자의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공급 받는다. Youtube는 이를 기반으로 추천 알고리즘을 만들 뿐만 아니라 광고주들을 위한 컨텐츠 선택 기준을 마련한다. 광고주들은 API를 활용, 광고를 올릴 컨텐츠를 선택하고 광고료를 지불하며, 일부는 생산자에게 인센티브로 전달된다. Youtube가 내세우는 원칙은 단순하고 명확하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컨텐츠에 더 많은 수익이 간다'는 것. 이러한 비즈니스 모델과 이를 구현하는  버튼들은, 소비자들의 자연스러운 클릭 행위를 작금의 거대한 에코시스템로 변모시켰다 (7). 

   



이러한 미디어 affordance가 디자인의 affordance와 다른 것 하나는 그 성격이 정의되는 방식이다. 디자인 affordance가 형태나 재질이 암시하는 돌리기, 열기, 넣기, 깨뜨리기, 휘기 등의 행위로 정의되는 반면, 미디어 affordance는 보다 높은 수준의 editability, visibility/persistance, portability 등의 성격으로 규정된다. 이는 소셜 미디어가 기존 미디어에 비해 수정이 가능하고, 더 노출도가 높고, 모바일 기기 등에 의해 휴대가 가능하다라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들은 기존 미디어와 새로운 미디어를 구분하는 차별 요인으로 지목되었다.


트위치 로얄티 배지


그런데 디자인 affordance의 새로운 차원이 드러나는 곳이 있다. 바로 유투브, 아프리카, 트위치 등 실시간 방송 미디어이다. 가장 주목할 것으로는  '별풍선', '슈퍼챗', '캐시' 등으로 불리는 유료 아이템들인데 이는 스트리머의 환심을 사는 것을 넘어서 특정 행동을 요구, 방송의 내용을 결정하기까지 한다. 뿐만 아니라 채팅방 아이디 옆에 붙는 자그마한 이모지도 흥미롭다. 트위치에서는 '충성도 배지'라고 불리는 것으로 구독기간이 길수록 더 화려하거나 커다란, 혹은 희귀한 모양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아이템의 모양이나 지속 시간은 그 액수에 따라 다른데, 이는 디자이너가 메세지의 휘발성, 노출의 강도와 범위, 그리고 디자인의 자유도를 활용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이 지향하는 것은 명확하다. 시청자들의 인정받고 싶은, 더 나아가 타인을 조종하고 싶은, 그리고 남과 다르고 싶은 욕구를 노골적으로 자극하는 것이다. 디자인 자체가 수익 모델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청 행위 중 이러한 자극은 우리를 강력하게 지갑을 열도로 유도, 중독의 세계로 안내한다. 이렇듯 사뭇 새로운 형태의, 그러나 노골적인 디자인 affordance는 트럼프의, 유투브의, 그리고 트위치의 왕국 건설에 개국공신이 되었다. 


틱톡 라이브 홈쇼핑. 실시간으로 선물이 날라가다 (좌, 장미) 누군가가 초 울트라 우주선을 쏘았다! (우)

   


 

필자의 가족에게 주말 저녁은 모두에게 고생한 보람으로 주어지는 자유시간이다. 어느 날 돌아다보니  각자의 공간에 들어앉아 그 동안 참아왔던 컨텐츠를 흡입 중이다. 우리의 대화는 점차 줄어들다 미래 어느 한 순간 유투브 상식 채널을, 게임 스트리머를, 인스타 인플루언서를,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를 인용할 것이다. 서서히 각자의 세계는 더욱 파편화되고 현실 인식의 공통 분모는 쪼그라들 것이다. 어쩌면 우리를 그토록 갈라 놓은 종교나 뉴스데스크의 자리를 소셜미디어가 꿰찰지도 모를 일이다.  

  

의도하던 의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디자인 직능에 관한 존 마에다의 말은 옳았다. 소수의 디자이너, 기획자들은 전대미문의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힘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이다. 디자이너는 사회학자, 기술자, 그리고 기업가들과 협업하여 절벽으로 향해 걸어가는 우리를 구원해야 한다. 미국이 facebook을 해체해야 하나 고민하는 이 때 (8), 우리도 건강한 공존을 위협하는 그것에 재갈을 물려야 한다. 

   


(0) 배너이미지 소스:  "Facebook campus" by Marcin Wichary is licensed with CC BY 2.0.  

(1) http://aodr.org/xml/25003/25003.pdf

(2) https://web.archive.org/web/20180317162522/http://www.pnas.org/content/110/15/5802

(3) https://uxdesign.cc/dark-patterns-in-ux-design-7009a83b233c

(4) https://behaviordesign.stanford.edu/

(5) https://www.nytimes.com/2020/08/07/podcasts/the-daily/Jack-dorsey-twitter-trump.html


(6) Taina & Helmond (2016) The affordances of social meida platforms 

(7) Hector Postigo (2016) The socio-technical architecture of digital labor: Converting play into YouTube money 


(8)

https://www.nytimes.com/2020/12/17/podcasts/the-daily/facebook-zuckerberg-antirust-ftc.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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