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십 여년 전, (아마도)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오레곤 인텔 캠퍼스의 카페테리아. 필자는 점심 시간을 틈타 회사와 가족의 미래를 걱정하는 수다를 떨곤 했는데, 지금까지도 기억나는 비즈니스 용어가 있었으니 하나는 cannibalization이고 또 하나는 commoditization 이다. 전자는 '동족 식인'이라는 끔찍한 의미로서 자사 제품끼리 서로의 시장을 갉아먹는 현상을 말하는데, 막 출시하는 넷북이라는 놈이 기존 노트북 시장을 잠식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회자되던 말이었다. (추측컨대 자동차 회사에서 많이 고민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넷북은 초반의 반짝 성공에도 불구, 스티브 잡스의 말대로 '이도저도 아닌 제품'으로 판명났고 이내 시장에서 소리없이 사라지게 되었다.
후자인 commoditization은 시장의 제품들이 기술이나 디자인 같은 혁신에서 비롯된 상대적 우위를 잃어버리고 원자재(commodity) 같이 가격만으로 경쟁을 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메모리 반도체의 경우가 바로 그랬다. 일본이 인텔을, 삼성이 일본을 따라잡은 후에는 메모리 반도체 산업은 과연 누가 적기에 고가의 장비로 치킨 게임을 승리 하느냐의 문제가 되어 버렸다. 우리나라가 국부를 축적하는 계기의 단초에는 세기의 결정이라고 불리우는 인텔의 '포기'가 있었다는 것이 아니러니라면 아이러니. 그런데 비메모리의 경우에도 똑같은 상황이 일어나는 것은 시간 문제로 보였는데, 집적도를 높이는 데에는 누가 보더라도 물리적인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나 같은) 엔지니어들은 자사 주식이 vesting 되기 무섭게 다른 놈으로 팔아치웠다. 그러나 인텔의 주가는 이후 십 년 가까이 그 어떤 것보다 무섭게 상승했고 지금에 와서야 각종 악재로 휘청거리고 있다.
속쓰린 투자 이야기를 하려 했던 것은 아니고 commodity 때문에 꺼낸 이야기이다. commodity 중에서도 상 commodity 인데 마치 commodity 가 아닌 양 장사를 하는 시장이 있다면 무엇일까? 필자에게 난해하기만 한 패션 시장을 차치한다면, 제목에 암시된 커피 시장이 대표적일 것이다. 담뱃재를 우려낸 듯한 쓴 물에 웬만한 밥값을 받는 스타벅스는 좋게 말해 식음료계의 럭셔리 브랜드이지 솔직한 심정으로 현대판 대동강 물장사에 가깝다. 그럼에도 중심가 금싸라기 땅 1층의 코너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것도 모자라 블록마다 위치한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데 개인적으론 단 한 곳도 사라지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이를 눈여겨 본 한 커피 체인은 기발한 전략을 세웠으니 바로 스타벅스 옆에 점포를 세우고 차별 요소로 커피에 잘 어울리는 베이커리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Tully라는 시애틀 커피 브랜드였는데, 입지를 고르는 스타벅스의 노하우를 대놓고 베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 안 가 사업을 접고 말았다.
과연 수 십 년간 commodity 제품으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는 스타벅스의 비결은 무엇일까? 맛에서 그 차이를 느끼기 힘들다면 스토어 내부를 한 번 들여다보자. 여러장면이 있겠으나 중심적인 이미지는 뭐니뭐니해도 바리스타의 간지나는 움직임이다. 그 원형을 알기 위해서는 이탈리아 에스프레소 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하워드 슐츠가 밀라노에서 본 것들 - 바리스타와 고객과의 소통, 커피 내리는 현란한 동작, 공간을 메우는 향과 소리 - 은 미국에 이식해야 할 일종의 '문화'이자 그만의 비젼이었다. 이는 그가 스타벅스를 글로벌 브랜드로 세운 후 은퇴하였을 때 극적으로 드러난 것으로, 맥도날드에서 영입한 운영진은 (오로지 시간당 수입을 극대화할 요량으로) 컵을 스티로폼 재질로 바꾸고 선반을 스테인레스로 교체하였을 뿐만 아니라 바리스타와 고객 사이에 거대한 자동화된 커피머신을 설치하였다. 격분한 슐츠가 CEO로 돌아오자마자 한 것은 커피머신 사이즈부터 줄이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다음에 스타벅스에 가면 기계부터 잘 살펴보자. 바리스타의 손목을 희생하여 나온 정교하게 설계된 '극장'이니까.
또 다른 것으로 블룸버그는 스토어의 '문'에 주목하였다 (1). 이는 리저브 스토어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는데, 경험의 시작이자 '악수'를 의미하는 문 손잡이에 새겨진 R 로고는 사람들의 무의식에 최고급 브랜드를 각인시킨다. 그러나 우리가 정작 주목해야 할 것은 손잡이 재질로 쓰인 철이다. 마치 고성의 문을 열 때와 같이 밀고 들어가는 묵직한 문은 속세와 유리된 세계의 엄숙한 이벤트를 준비시키기 때문이다. 비슷한 사례로 필자는 S 클래스를 처음 탔을 때의 느낌을 잊지 못하는데, 그 육중한 철덩어리가 스스르 미끄러지는, 가솔린 먹는 하마가 나를 온전히 서빙하는 느낌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웠다. 이와 반대쪽 극단에는 마세라티의 컵 홀더 뚜껑이 있다. 가죽, 스웨이드, 메탈, 알칸타라로 가득한 내장 사이에 촐랑거리는 플라스틱 뚜껑은 오너들에게 가루가 되게 까이고 있다 (2). 튼튼하고 가볍다는 사용성이라는 문제는 역시나 대중을 위한 디자인 논리일 뿐인가 보다. 하긴, 우아한 카페의 분위기와 어울리는 건 사과 마크가 새겨진 빛나는 알루미늄 바디이다. 어깨가 빠지는 고통은 감성으로 이겨내시라.
브랜딩 또한 스타벅스만의 정교한 설계의 결과이다. '스타벅스' 라는 정체 불명의 이름은 모비딕 소설 인물에서 나왔을 뿐만 아니라 로고는 세이렌이라는 신화 속의 존재를 사용, 세련되고 이국적인 느낌을 완성한다. 게다가 매년 새롭게 바뀌는 브랜드 아이덴티티는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조금 감춰진 트릭으로 네이밍이 있다. 'Tall, Grande, Venti' 라는 이름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가지런히 적힌 가격표와 함께 충분히 유추가 가능하다. Short 가 주는 부정적인 인상을 아예 없어버렸는데 별 것 아닌 듯 하면서도 상당히 어려운 발상의 전환임이 분명하다.
사실 한없이 더 고급스러운 선택을 하는 것은 오히려 쉽다. 스타벅스에게조차 디자인 전략은 가지 못한 길에 대한 고민의 연속이자 비용과의 치열한 싸움이다. 달달한 음료를 포함할 것인지 (슐츠는 프라프치노에 처음엔 회의적이었다), 아침 식사까지 제공할 것인지, 카페인이 안 어울리는 저녁에는 어떤 메뉴로 운영해야 할 것인지, 원두/인스턴트 커피를 판매해야 하는지, 매장의 로컬화는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 직원의 고용 형태는 어떻게 할 것인지, 점포 위치는 어떻게 계산을 하는지 등의 문제에서 크고 작은 실패와 성공을 겪었다.
경험은 지각 (perception) 된 것의 합을 넘어선 신경 작용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보고 듣고 맛보는 것의 총합은 현실 세계의 매우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현실과 지각의 차이는 우리의 뇌가 기억에 기반한 상상력을 통해 채워 넣는다. 이게 도대체 어느 정도인가 하면 우리가 한 순간 집중해서 잘 볼 수 있는 시각 영역은 팔을 쭉 뻗었을 때 엄지 손톱만큼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 부분은 눈동자가 (인체의 그 어떤 것보다) 빠르게 움직이며 채워넣기 때문에 넓은 시야각을 한 순간에 바라 보고 있다는 착각을 하는 것이다. 믿기지 않는가? 유명한 심리학 실험으로 '보이지 않는 고릴라' 라는 것이 있다. 두 팀이 농구를 하는 장면인데 패스 횟수를 세어보라는 임무를 주고 중간에 고릴라 옷을 입은 마스코트를 천천히 등장했다가 사라지게 하는 실험이다. 절반에 가까운 참가자에게 고릴라는 아예 보이질 않았는데 (더 믿기 힘들다) 우리의 지각이 얼마나 한정된 것인지, 그리고 뇌는 그것을 어디까지 컨트롤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드라마틱한 사례이다.
이렇게 한정된 지각 능력을 커버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 주변의 세계를 재현 (represent)하는 나만의 모형 (model)을 구축한다. 이게 현실과 얼마나 가까운지 혹은 다른지는 알 방법도 요원한데, 심지어 같은 인간끼리도 보는 것, 맛보는 것, 그리고 냄새 느끼는 것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3). 이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사실 모델의 상당부분은 우리 DNA에 새겨져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떠한 풍경을 볼 때 인간 얼굴의 이미지를 무척이나 잘 찾는 이유는 타인의 눈치를 잘 보는 사람이 생존할 확률이 높았음을 의미한다. 어리숙하기 그지없는 눈동자도 동체 시력만은 매우 민감한데, 수풀 속의 호랑이를 먼저 본 조상들이 살아남았기 때문이리라.
이 모델의 한 가지 묘한 특징은 매우 적은 정보만으로도 적극적으로 인과관계를 엮으려 한다는 것이다 (4). 다시 말해 한정된 정보를 설명 가능한 방식으로 환원하기 위해 열심히 축소, 조작, 편집한다. 와인의 라벨링을 위조하여 가격을 사기 친 일당을 들어 본 적이 있는지? '이 맛에 이런 바가지를!'하고 광야를 외쳤다는 소믈리에를 들어 본 적이 없다. 가디언스 오브 갤럭시에서 순간 이동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지상의 존재가 한번에 50점프 하는게 건강하지 않다는 건 알지?"라는 대사를 듣는 찰나의 순간에 우리는 모든 필요한 정보를 꿰어 맞춘다. 우리가 꿈을 꿀 때 왜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을 많이 꾸는지 아는가? 잠을 자는 동안 '근간대성 발작'이라는 근육 수축을 설명하기 위해 뇌에서 만들어낸 이야기란다 (3, p47). 왜 스타벅스의 가장 작은 컵사이즈는 Short가 아닌 Tall 인가? Grande 는 Large 라는 의미인데, 왜 가장 큰 사이즈 Venti는 부피 20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로 바뀌나? 우리의 이성이 께림직하게 그 이유를 따지려는 찰나, 감성은 이탈리아의 그 어느 휴양지로 훌쩍 여행을 떠난다.
따라서 스타벅스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브랜드 주위로 첩첩히 싸여 있는 무의식 속의 연상을 의식의 단계로 끄집어내기 위한 효과적인 질문이 필요하다. 태초에 커피를 마신 사람들에게 그것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보리차보다 웬지 고상하게 느껴지는 그것은 언제, 무엇 때문이었을까? 커피콩이 흔하디 흔한 남미에도 스타벅스가 장사가 될까? 김밥천국의 이모님의 노하우와 바리스타의 그것은 정녕 어떤 차이일까? 반도체를 commidity로부터 구원하는 것은 CPU의 속도와 발열량, 그리고 그것에 기꺼이 돈을 더 지불할 고객들이다. 과연 사람들이 스타벅스 커피에 돈을 더 지불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이미 열심히 합리화하려 하는 것은, 이미 스타벅스가 우리의 멘탈 모델에 하나의 판타지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는 방증이다. 벽에 걸린 범상치 않은 사진들, 세련된 색의 조합과 배경 음악, 고객 하나 하나를 존중해 주는 직원들, 이국적 이름의 메뉴, 공간을 가득 채우는 스팀 소리는, 현실을 탈출하고 싶은 우리들의 마음 속에 캘리포니아이자 밀라노가 되었다. 그러한 전략은 갈수록 노골적이 되어 가는데, 최고급 호텔의 로비에 온 것과 같은 플래그십 스토어들은 채 만 원이 안되는 입장권으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황홀한 광경과 서비스를 제공한다. 스타벅스의 디자인을 총괄한 Massey Wright가 디즈니로부터 영입되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회의실에 앉아 있을 때 과연 어떤 커피를 갖고 싶은지를 생각해 본다. 콩을 태운 듯 쓰고 혀가 데일 듯이 뜨거운 골판지로 싼 스타벅스 vs. 훨씬 더 부드럽고 신선한 차이나에 담긴 원두 커피. 나 또한 누구나 그러하듯 나를 바라보고 있는 세이렌의 주술에 사로잡히길 원한다. 나는 오늘도 스타벅스로 향하는 기분 좋은 발걸음을 꿈꾼다.
https://youtu.be/EBZ9mcJuNy4?t=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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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2012050600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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