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여러분은 대학교 때 무엇을 배웠는지 기억이 나는지 모르겠다. 모교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필자는 도통 기억에 나는 것이 없다. 그래서 나도 강의 평가에 상처 안 받는다. 특히 설계 수업이 그런데, 마뜩찮은 결과물을 가지고 가서 오랜 시간동안 교수님과 이해가지 않는 말들을 주고 받으며 씨름한 기억이 전부다. 십수년을 주입식 교육을 받다가 갑자기 정답도 없는 창작을 하다보니 그 답답함과 모호함이 고역이었던가 보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번쩍 기억나는 때가 하나 있으니 바로 교수님의 단호한 'NO'를 들었던 순간이었다. 대충 아래 처럼 생긴 학교 건물이었던 것 같은데 교수님은 이유 불문하고 '무조건 완벽 대칭으로 만들 것'을 주문하였다.
대칭이 깨진 이유는 한 쪽 편에 개울 같은 건드리지 말아야 할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와 같은 대칭으로 나아갔다는 사실이 더 미스테리하다. 학교에 대한 일반적인 고정 관념이 있었던 것이었는지, 아니면 대칭에 대한 숨겨진 열망이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건물 형태에 대한 별 훈련도 취향도 없는 저학년 새내기는 이것저것 넣고 다듬어 거의 대칭에 가까운 모양은 만들고 말았다. 어쨌든 이것은 대학동안 최고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공간을 구성하는 원리 하나를 누군가가 시원하게 말로 내뱉어 줬던, 디자인에 관한 교과서적 지식과의 처음이자 유일한 만남이었으니까.
이러한 지식은 교수와 같은 '훈련된' 눈에만 보인다. 99%가 대칭이다가 깨어진 형태를 본 교수는 그 부분이 커다랗게 확대되어 보였을 것이고 갑갑한 마음은 '이유 불문하고 무조건' 이라는 조건을 붙이게 되었다. 언제 한 번 시각디자인 전공을 하신 교수님과 함께 공간을 구축한 적이 있었다. 공간 내에 글씨가 알파벳으로 크게 들어갔는데, 그 교수님은 그것을 본 날부터 발을 동동구르고 디자이너의 무지를 토로하다가 결국 직접 디자인을 하고 업자를 끌고 와서 다시 고쳐 달았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사실 그게 뭐 큰 대수일까 했다. 어딘가 보기에 어색하긴 했지만 그렇게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는데, 교체된 글씨를 보니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뭔가 설명하긴 어렵지만 더 반듯한 것이 누가보더라도 전문가의 솜씨였다.
이러한 말로하기는 좀 께림직한 그 무언가를 말로 설명해 낸 사람들은 디자이너가 아닌 바로 미학자, 심리학자들이었다. 개인적으로 Rudolf Arnheim 학자와의 조우가 신선하였는데 그가 남긴 시대를 초월한 저작물들을 보면 로얄티가 부럽다 그 냉철한 판단에 감탄을 하게 된다. 균형감(Balance)에 관한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도록 하자(1). 위 그림을 보면 정사각형 박스 안에 원이 한 개 위치해 있는데 이를 보는 우리는 어떤 즉각적인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바로 이 문장 - '우리', '즉각적', '불편함' -을 찬찬히 살펴보면 꽤 많은 힌트가 숨겨져 있다. 먼저 '즉각적' 이라는 말은 우리가 불편함을 알아차리기 위해 구지 수치를 측정하지 않아도 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미적 체험은 대개 절대적 수치보다는 상대적인 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이는 우리의 시지각 시스템에 빛의 속도로 인지된다. '우리' 라는 말은 모두가 동의한다는 뜻이다. 객관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명백함이 부족할수록 미적 모호함이 증대되고 이는 주관적인 판단의 빌미가 된다. 마지막으로 '불편함'이란 더 '편하고 안정적인 곳' - 사각형의 중앙 - 이 있다는 방증이다. 형태는 공간 속에서 전자기장(electromagnetic field)과 같은 에너지 준위 (potential)을 만들며 (a) 최소 에너지로의 끌림은 박제된 이미지에 역동성을 부여하는 원천이 된다.
자, 동의하는가? 뭐 딱히 어려운 건 없었다. 시원하게 설명해주니 고마울 뿐이다. 그러면 이제는 실전 문제다. 왼쪽 사진은 우리나라의 여의도 국회의사당이다. 건축 수업에서 들은 전해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원래 설계에는 돔이 없었다. 그러나 국회의원들이 해외 시찰 후 돔을 하도 강력히 원해서 - 왜 우리 나라만 저 멋있는 (서양의) 전통이 없느냐! - 살짝 납작하게 얹혔는데 (우) 기본 설계를 보면 모더니즘의 기운이 뿜뿜 넘쳐 흐르는, 남산의 여느 건물들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청와대는 당시 중앙청보다 무조건 더 높이 할 것을 주문했고 다가오는 마감 기간과 예산에 의해 쫓기던 담당 건축가는 대한민국 역사에 남을 '못난이'를 탄생시키는 데에 일조한다 (일동 묵념). 여기서 다시 질문은 왜 이런 '어좁이'를 못생기게 느끼냐는 것이다. 단연 층수를 높이고 웅장함을 더하기 위해 늘려진 돔 때문인데, 일단은 웅장하고 위엄이 있어야 할 돔이 웬지 모르게 친근한 동네 아이들의 통수를 연상시킨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돔 주위로 돌려친 창문 크기나 디테일의 부재로 인한 스케일의 왜곡에서 비롯된 듯 하다. 또한 돔의 완전한 구형에 가까운 형태는 아래 기단의 박스 형태와 매우 강한 대비를 이루고 있는데 그 주종관계가 매우 애매하다. 마치 넘치는 욕조가 거대한 공 하나를 힘겹게 받치고 있는 모습으로, 공은 바닥에 닿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떠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이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불편한 긴장감을 유발한다.
아름다움의 법칙은, 여러 디자인 법칙이 그러하듯 경험 법칙(rule of thumb)이다. 어떤 컨택스트나 범위에 대한 엄밀한 정의없이 이러한 편이 좋다, 대체로 저래야 한다는 식으로 표현된다. 정확히 얼마나 부족하다거나 과하다는 엄밀한 판단은 어렵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자들은 이를 정량적 차원으로 환원해 보려는 노력을 꾸준히 해 왔다. 그러한 노력의 동인을 가만 살펴보면 그것이 가능할 것 같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위 Arnheim이 제시한 형태로 인한 field를 다시 한 번 살펴보자. 마치 산의 등고선과 같은 굴곡을 그릴 수 있는데 이를 잘 따라 내려가기만해도 원을 중앙으로 옮길 수 있을 것만 같다. 3차원으로 확장한다면 우리나라 국회의사당 돔을 축소시키거나 혹은 튕겨내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노력에 비해 결과는 초라한 편이다. 가장 돋보이는 사례는 많은 사람들이 아낌없이 오해하고 있는 황금 비율이다. 이는 1:1.618..로 근사되는 무리수 비율로서, 고대 건축물, 생명체의 형태, 로고 디자인 등에서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피보나치 수열과도 연결되는 이 오묘한 숫자와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비율 간의 근사하고도 우연한 일치는 전혀 근거가 없다. 또다른 사례로는 조지 버코프라는 수학자의 제안인데 그는 미적 경험을 복잡성을 질서로 나눈 것의 함수, Beauty = f(C/O) 라고 보았다. 여기서 복잡성 C는 대상을 인지하기 위해 드는 노력을, 질서 O는 미적인 즐거움을 주는 대상의 특질을 의미한다. 난해함과 편안함 간의 균형을 미의 핵심 척도로 제시한 것인데, 매우 범용적이긴 하나 암묵적 법칙에 머물러 있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다른 사례로 잭슨 폴록이라는 대표적인 미국의 추상화가의 작품이 프랙탈의 성질을 갖는다고 알려져 있다. 프랙탈의 주요 특징이 아무리 확대/축소를 해도 원래 모양과 같다는 것인데 이는 폴록이 페인트를 떨어뜨리면서 무의식적으로 그림 전체의 패턴을 작은 스케일에도 반복했다는 뜻이다 (참고로 프랙탈 이론은 폴록 시대 이후에 등장했다). 문제는 프랙탈은 자연 속에서 나뭇가지, 잎의 모양 등에서 종종 발견된다는 것으로 추상화의 아름다움이 자연에서 보여지는 아름다움과 어떤 접점이 있음을 알려 준다. 개인적으로 박사과정 중 폴록 스타일 시뮬레이션 연구를 한 적이 있었다 (위). 스케일이 달라도 물감 패턴의 밀도가 어느 정도 비슷한 느낌은 받을 수 있었는데, 사실 점도가 높은 유체 방울의 모양과 스틱으로 흘려서 나오는 페인트 자국의 윤곽선이 엄격하게 닮아 보이진 않았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 희망이 있다면 인공지능의 등장이다. 딥러닝이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우리가 어떻게 어떤 이미지를 특정 사물로 인식하는지를 많은 양의 데이터를 통해서 스스로 찾아간다는 면이 미학의 난제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한 예로, 어떤 이미지를 A~Z 사이의 한 알파벳으로 판별하고 싶다 해보자. 딥러닝 모델은 input인 이미지 픽셀 데이터와 output인 알파벳 A~Z일 확률 26개 사이의 계산식을 구축한다. 이 계산식은 뉴런과 같이 연결된 많은 숫자들의 layer로 되어 있는데, 우리가 알파벳 이미지-알파벳 정답 쌍을 많이 주면 마법처럼 스스로 이 숫자의 값을 정해 나간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이 인공 두뇌가 "어떻게" 알파벳을 인식하는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이는 더 나아가 어떠한 오브제가 '아름다운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 만 '많이' 알려주면 모델은 저절로 만들어지며, 그 모델을 뜯어 보면 무엇이 왜 아름다운지, 누가 더 그렇게 생각하는지,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했는지 등등에 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솔직히 말해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데, '아름다움' 이 워낙 노답이라 그렇다) 그러나 조금 낮은 차원의, 객관적으로 구별이 가능한 아름다움의 원칙들 - 대칭, 대비, 반복, 균형 - 의 판별은 사실상 시간 문제에 가깝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딥러닝이 '구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생성'도 한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여러분은 진짜 사람같이 생겼으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얼굴 이미지들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어떠한 무작위 값들을 input으로 받아서 마치 진짜 얼굴 같은 output을 만들어내는 generator model (생성모델) 의 결과다. 이는 새로운 그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 디자이너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대단히 크다. 실제로 로고/타이포그래피 생성, 패션 이미지 수정, 컬러링 등 무수히 많은 연구 결과가 쏟아지고 있다. 더욱 고무적인 것은 이러한 생성 과정에서 어떠한 '조절'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생성모델의 input이 되는 무작위 값들 중 어떤 값들이 사람 얼굴의 눈색깔, 머리 스타일, 안경 여부, 나이를 결정하는지를 점차 알아가고 있다 (위). 이는 마치 인간의 특정 DNA가 어떤 형질과 연관되었는지 추적하는 것과 같은데 실제로도 이런 유전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생성모델은 주어진 데이터의 패턴의 범위 내에서 미처 우리가 발견하지 못했던 것들을 쏟아내는 것, 즉 외삽보다는 내삽에 가깝다 (수학적으로 엄밀하게 그렇다는 건 아니다). 창의적 측면에서 한계가 있다는 뜻인데, 사실 이런 것조차 뛰어넘는 수학적 모델도 우리는 이미 목격을 하고 있다. 이세돌을 이긴 알파고에게 주어진 것은 자신의 수가 최종적으로 이겼는지 졌는지에 관한 판정 뿐이었다. 밀림의 고수들이 자신만의 기풍으로 자웅을 겨루었던 낭만적인 모습은, 오로지 승리를 위해 변화무쌍하게 모습을 바꾸는 기계 앞에서 처참히 무너지고 말았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들보다 더 고민스러운 것은 우리는 도대체 왜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냐는 것이다. Arnheim의 말을 다시 빌리면, '불편해서'라고 그랬다. 천칭 저울을 예시로 들었는데 중력의 법칙에 의하면 양쪽 무게가 같을 때에만 움직임을 멈추게 된다. 따라서 무게감이 다른 두 개가 균형을 이루면, 또는 동일한 물건 간의 균형이 이뤄지지 않으면 우리는 어색함을 느끼고 이를 교정하고자 한다. 이는 결국 중력장이라는 물리 법칙이 아름다움의 기준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다만 이에 따르면 미의 기준이란 선험적이라기보다는 경험적 특성이 더 강하게 된다.
또 다른 가설은 없을까? 개인적으로 '개는 훌륭하다'와 같은 동물 교화 프로그램을 즐겨 보는 편이다. 가족들의 비아냥을 이기고 꿋꿋이 정주행을 하는 이유는, 훈련사에 의해 180도 바뀌어버리는 동물의 행동이 쾌감을 주기도 하고 또 동물의 행태가 너무도 사람의 그것과 닮았기 때문이다. 아래 둘은 모두 시바견 사례로서 성깔있는 이 견종은 만만한 견주를 넘어 집안의 지배자로 군림하였다. 공통적으로 보이는 상징적인 행동이 있는데 바로 마루의 정 가운데에 드러눕는 것이다. Arnheim의 그림 속의 인력과 척력이 팽팽하던 공간의 중앙은 이제 교통의 요지이자 주변을 감시할 수 있는 최적의 스팟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강형욱의 압박에 못 이겨 이 장소를 넘겨주는 그 순간, 문제견 자신도 그의 권위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온몸으로 시인한다.
https://youtu.be/lXEx3zC2xzw?t=190
https://youtu.be/xXw7IPxbhZg?t=1058
동물의 행태를 아름다움의 원리에 갖다 붙이다니, 너무 나간 건 아닐까? 그럼 조금 물러서서 보다 직접적인 생김새에 대해 살펴보자. 아름다움의 상징인 꽃, 현란한 색채의 공작새, 왕관과 같은 숫사슴의 뿔, 그리고 우리가 느끼는 매력적인 이성의 실루엣까지. 자연은 인간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들의 무궁무진한 레퍼런스이자 근원이다. 억겁의 세월을 견뎌 온 무한한 디자인 실험 공간이기도 하다. 다만 이곳을 지배하는 궁극의 규칙은 단 하나, '생존'이다. 커다란 뿔은 서열 전쟁에서 승리할 확률을, 화려한 색과 모양은 이성의 눈에 띄기 위함을, 그리고 특정 곡선은 가임 또는 생존에 유리한 유전자를 찾기 위함이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무언가 찜찜한 구석이 있다. 도대체 우리가 꽃을 아름다워하는 것이 생존에 무슨 도움이 될까? 이성의 눈에 뜨인다는 건 포식자의 눈에도 쉽게 뜨인다는 건 아닐까? 감당해야 하는 장식이 너무 과한 것은 아닐까? 숫사슴의 뿔이나 공작새 깃털의 크기만해도 좀 버거워보이는데, 자신의 살을 뚫고 나오는 하등 쓸 데 없는 뿔을 견뎌야 하는 멧돼지도 있다 (3). 이러한 자기 파괴적인 장식을 설명하기 위해 학자들은 '숨어 있는 쓸모' - 질병에 대한 적응력이나 지능과의 상관관계 -또는 '불이익까지 견딜 수 있는 생존력의 과시'의 증거를 찾아 헤맸다. 그러나 크게 재미를 못 본 모양인데, 이러한 기능적인 이론의 대안은 찰스 다윈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공작새의 치렁치렁한 꼬리를 보고 괴로워하던 그는 적자생존 (natural selection) 을 보완하는, 암컷이 수컷을 선택할 때 미적 표준에 근거한다는 sexual selection 매커니즘을 제안하였다. 물론, 곤충과 같은 하등 동물이 미적 자의식을 가졌다고 믿으려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적어도 최근 그의 추종자들이 생겨나기 전까진 그랬다 (4).
과연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올까? 마치 아른하임의 박스나 다윈의 고뇌처럼 하나의 설명으로 해결되지는 않을 것만 같다. 조물주가 우리가 대칭을 사랑하도록 뇌를 프로그래밍했을 수도, 선조의 유전자가 채도 높은 과일을 선택하도록 했을지도 모른다. 우리 기억의 한계가 보다 단순한 이론을 보다 아름답다고 느끼게 할 수도, 문화적 환경이 은근한 배흘림을 더 좋아하도록 했을 수도 있어 보인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가 생존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욕망과 대등한 차원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죽음도 불사하는 수컷의 노력과 이를 높이 평가해주는 암컷의 안목은, 어쩌면 해가 멀다하고 바뀌는 변덕스러운 우리의 디자인에 대한 취향과 일맥상통할지도 모른다. 과연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우리로 하여금 뇌 속에 강한 화학물질을 내뿜게 만드는 그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1) Art and VIsual Perception, Rudolf Arnheim
(2) https://dl.acm.org/doi/abs/10.1145/1124728.1124745
(3) https://www.chosun.com/premium/discovery/2021/10/19/QB52DTAIFVCOBIJJFUZZ2VAIQ4/
(4) https://www.nytimes.com/2021/03/21/podcasts/the-daily/evolution-beauty-darwin.html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newils2002&logNo=2210091168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