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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소 Mar 14. 2021

구식과 클래식의 차이

중고 신입 세 번째 이야기

나이를 먹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살 때가 많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현실의 상황이 내가 시간을 따라 늙어가고 있음을 알려준다. 가끔 만나는 친구의 아이들이 어느덧 커서 군에 입대하거나, 대학에 입학할 때면 내가 어릴 적 보았던 당시 부모 세대의 나이가 되었음을 느끼게 된다.      


그럴 때면 아이들에게 용돈을 쥐어 주면서 농담 삼아 부탁 아닌 부탁을 하기도 한다.     


”앞으로 형이라고 불러. 부담스러우면 ’ 형님‘이라고 하던가. “     


”형이라고 부르면 만원 더 줄게. 형이라고 한 번만 불러주라. “     


아빠의 친구가 던지는 농담에 어이없어하면서도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볼 때면, ’참 이쁘다 ‘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지나고 있는 이 시기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것을 느끼는 나는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나의 나이 듦이 먹먹해질 때가 있다.  

   

특히나 조직(?)에 몸을 담고 직장인으로의 삶을 살아가게 될 때면, 시간의 기준이 내가 맡고 있는 일이 될 때가 많다. 회사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경우 짧게는 몇 달에서 길게는 몇 년에 이르는 것도 있기에, 각자의 시간은 일에 맞춰지게 된다. 일에는 계절이 반영되지도 않고, 내 개인적인 삶도 배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어릴 적에 만났던 나이 많은 선배의 이야기가 뇌리에 깊이 남아있다.    

 

“처음에 회사에 들어올 때는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는데, 회사에 와서 프로젝트 몇 개 끝내고 났더니 벌써 은퇴할 시기가 되어버렸어. 이 안에 있으면 세월 참 빠르게 간다!”     


어쩌면 그는 행복하게 자신의 일을 해온 사람일 수도 있다. 자신이 원하는 일에 깊이 빠져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른 채 살았다. 그러나 요즘 나 자신을 돌아볼 때면 어느 것 하나 이루지 못하고, 어렵사리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패잔병 같은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세월이 흘러 회사에는 밀레니엄 세대들이 첫 취업을 하고 동료로서 나와 함께 일을 한다. 나의 경험을 부러워하고, 나의 지위를 동경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들은 아직 모른다.     



      

얼마 전, 나이와 관련해서 조금은 충격적인 일을 경험했다. 갑작스럽게 맡게 된 프로젝트의 팀장으로서 지금까지 일해 온 직원들과의 저녁 식사를 가지게 되었다. 처음부터 맡고 있던 30대 초반의 팀장이 부서장과의 의견 충돌과 작업의 부담감으로 회사를 떠나고, 그 부서 일원도 아닌 중고 신입인 내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이미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 팀장으로서 일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었지만, 나는 직원들의 마음과 상태를 파악하는 것이 먼저였다. 처음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느꼈던 것은 자신들을 이끌어 줄 리더 또는 선배가 없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따로 저녁식사 약속을 잡았고, 다음날 퇴근 후 그들과 고깃집으로 향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회사에서 회식이 사라진 지도 벌써 1년이 훌쩍 넘었다. 같은 사무실에 있는 동료들 간에도 식사를 피하는 처지가 된 지 오래였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온 동료들과의 저녁 식사가 나름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먹음직스럽게 익어가는 삼겹살의 향과 빛깔은 그들 내부에 잠재하고 있는 동료 의식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청량해 보이는 거품 가득한 맥주에 시원하게 살짝 얼린 소주를 섞어 폭탄주를 직접 만들어 팀원들에게 돌렸다. 그리고 연장자로서, 새로운 팀장으로서 그들에게 한마디 덕담을 건넸다.    

 

“미안하다. 나 진짜로 도망가고 싶다. 이번 일 못 끝낼 것 같은데, 어떡하지?”     


사실, 덕담이랄 것도 없는 진담 반, 농담 반의 내 말에 그들도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이 더 가관이었다. ‘너라고 별수 있겠냐?’는 식의 달관한 듯한 표정들이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을 대변하는 것 같아 더욱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래도 열심히 버텨볼게. 안되면 말고. “     


서로가 잔을 부딪치고 입으로 잔을 가져가려는 순간, 내가 우려했던 일이 그네들의 행동에서 나타났고  나의 눈을 상당히 거스르게 했다. 오늘내일하는 어른들 앞에서나 갖추어야 할 예절인 얼굴을 옆으로 돌려 술을 마시는 행동을 하는 것이었다.     


”잠깐, 잠깐. 그러지~마. 하~지마. 나, 당신들과 함께 일하는 동료야! “     


아무리 ’ 동방예의지국’이고 뭐고 간에 그들의 행동은 정말로 나에 대한 예의 없는 행동이었다. 아직 결혼도 안 한 나에게.      


하지만 그들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물리적인 나의 연식은 오래되었고, 그들에게 나의 존재는 함께 일하는 동료가 아닌 나이 많은 선배, 아재, 또는 노인네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아직은 나도 몸을 치대며 그들과 치열하게 일하고 싶고, 열정적으로 앞장설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라는 존재가 그들에게는 회사에서 예의를 갖춰야 하는 또 다른 존재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친구나 지인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옛날이야기를 할 때가 많다. 중학교 시절, 고등학교 시절, 그리고 군대 시절의 이야기를 할 때면 드는 생각이지만, ‘아직은 나의 미래를 이야기하고 싶은데’, ‘10년 후의 나의 모습을 나누고 싶은데’, 그들은 자꾸 과거의 자신에게 연민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뒤돌아보면 결코 우리의 젊었던 시절이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과거는 아름답게 포장된다’는 말처럼 우리도 과거의 자신의 모습에 애착을 갖는 것 같다.    

 

더군다나 사무실에 둥지를 치고 자신의 영역을 굳건히 지키는 나이가 지긋한 부서장들의 경우는 더욱 자신들의 과거에 집착한다. 갓 스무 살이 된 어린 직원들을 상대로 ‘나 때는’, ‘내가 네 나이 때는’을 여전히 스스럼없이 쓸 때가 많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최악은 ‘원래, 엔지니어는 말이야’라는 식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삶의 정의를 어린 친구들을 상대로 주입시키려고 한다는 점이다. 

내가 생각하는 지금의 코로나 세대는 모든 면에서 경제발전 세대보다 더 힘들게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과거에 과몰입한 그들은 지금의 세대를 게으른 세대로 규정할 때가 많다.    

  

”손 소장 애들 잘 감시해. 밤새 게임하고 출근해서 조는 애들이 있어. 일을 주고 몰아붙여야 정신을 차린다니까. “     


”회사가 지네들 취미 활동하는 데가 아니잖아. 어떻게 하면 일을 잘해서 회사가 돈을 벌고 나도 월급을 잘 받아 갈까를 고민해야지. “     


그러나 정작 그들은 점심시간에 쉬는 직원들을 끌고 나가 주변을 돌며 산책하고, 오후 일과시간이 시작됨과 동시에 세상에 없을 편한 자세로 꿈나라로 간다. 심지어 집중해야 할 시간에 사무실에서 코를 고는 것은 다반사다.      


이러한 그들의 모습을 볼 때면, 과거에 그들이 경험했던 경제발전 시대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회사 내의 ‘위계질서’를 과거의 모습처럼 다시 만들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군대에서 들을 법한 구호인, ‘회사가 시키면 무조건 한다.’ ‘선배가 까라면 깐다.’라는 식의 명령과 복종을 집요하게 요구하기도 하고, 잘못된 구조나 관행을 바꾸고자 노력하기보다는 원하는 결과만을 요구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이런 모습이 내 주변에 아직 존재하기에, 어린 직원들과 일하고 대화하면서 나 스스로를 관리직급의 기성세대들과 비교할 때가 많아졌다. 그럴 때마다 드는 생각은, 최소한 어린 직원들이 나를 볼 때에, 일에 있어서나 회사생활에 있어서 부끄러운 선배가 되지는 말아야겠다는 것이다.   

   

요즘 들어 젊은 세대들 간에 과거에 유행했던 문화가 그들 사이에 멋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보기에 좋고 새롭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이러한 유행은 세대를 돌고 돌아 하나의 문화가 되고, ‘클래식’으로서 자리를 잡게 된다. 과거의 철학과 문화가 지금 시대에 맞게 재해석되듯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인성도 마찬가지라 본다. 단지 과거의 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그것을 현재의 세대에 이식하고자 하는 것은 낡은 사고이고 ‘구식’이다. 과거의 방식과 논리 일지라도 지금의 세대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동경할 수 있게 만든다면, 생각 또는 인식까지도 존중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이 들어가는 나의 외적인 모습은 점점 낡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단지 ‘구식’으로 인식됨이 아니라, 그들에게 나이 듦이 ‘클래식’하게 느껴지도록 노력해 보고자 한다. 일말의 희망이지만, 또 누가 알겠나? 와인이 오크통에서 오랜 숙성을 거쳐 최고의 가치를 갖는 것처럼 ‘빈티지’를 좋아하는 젊은 친구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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