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처소 Oct 19. 2020

편입의 단상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변화를 위해 노력하기 마련이다.

내 삶에도 변화를 위한 몇 번의 시도들이 있었다. 그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편입이다. 

전문대를 졸업할 그즈음에 찾아온 IMF는 당시 젊은 세대를 다양한 기준으로 가르고 나누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기준이 학벌이었고, 나에게 있어 이것은 사회적 폭력으로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4년제 안 나왔다고 무시하는 거야?”     


IMF 기간 동안 직장생활을 이어오면서 느꼈던 학벌에 대한 자격지심은 결국 나의 시야를 한 곳으로 좁아지게 만들었다. 그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1년이란 시간을 온전히 공부에 집중했고, 서울 근교에 있는 4년제에 어렵게 편입하게 되었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했던 90년대 초, 중반에는 경기 활성화와 대학 교육의 수요 급증으로 많은 대학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한편으로는 기존의 대학들이 정원을 늘리는 일도 많았다.

그러한 일환으로 편입은 대학들의 중요한 수입원으로 떠올랐고, 편입원서에 붙이는 인지 값만 해도 일반 대학입시의 6배에서 10배에 가까운 차이가 났다. 당시, 편입원서만으로 대학마다 몇억씩 벌었다는 소문들이 자자할 정도였다. 하지만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의 마음은 돈이 얼마가 들더라도 합격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러한 돈을 지불할 용의가 있었다. 심지어는 ‘자신이 고등학교 시절 공부를 안 한 대가’라고 자책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 여러 대학에 지원이 가능한 학생들은 원서 값으로 몇십만 원씩 썼던 것으로 기억된다.    

 

대학입시 때보다 더 치열한 경쟁을 뚫고 들어간 편입의 기쁨도 잠시, 입학한 학교에서 느껴야만 했던 조금은 다른 시선들을 편입생들은 감내해야 했다.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선배들의 경우, 자신들이 편입생이라는 것을 숨기면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나는 이미 사회생활을 몇 년 경험하고 들어간 터라 기존 학생들의 시선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함께 입학한 편입생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우리와 접선(?) 하자고 했던 선배들이 결국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은 걸 보면 그 당시 편입에 대한 선입견은 상당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나는 4년제 대학 생활에 대한 나름의 부푼 기대감이 있었다.

내가 가졌던 꿈 중 하나는 전문대에서 느끼지 못했던 캠퍼스의 낭만과 연애를 경험해 보고 싶었다. 넓은 캠퍼스를 사랑하는 사람과 손을 잡고 걸어보는 것, 그거야말로 진정한 대학 생활의 꽃이라 생각했다.      


“누구라도 하나만 제대로 걸려라! 오빠가 많이 이뻐해 줄게.”     


하지만 졸업 후에 나에게 남은 캠퍼스의 추억은 단 하나도 없다. 몇 가지 웃픈 에피소드 정도만 남아있을 뿐이다.     


편입 이후, 나는 동기들과 친해지기 위해 한동안 당구장을 열심히 들락날락했다. 원래 공을 다루는 스포츠를 못하는 성격이라 그날도 게임비 물릴 요량으로 학교 앞 당구장에서 점심 내기 당구를 한판 치고 있었다. 

마침 그날, 당구장에서 큐대를 잡고 공을 열심히 째려보던 나에게 갑작스레 뒤에서 덮치듯 안긴 여학생이 있었다.     


“오빠!”     


[이 학교에서 나를 격하게 반가워할 여학생이 없을 텐데, 가슴설레게 하는 이가 누굴까?]     


배시시 웃으며 뒤를 돌아보던 나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던 그 여학생.

처음 보는 예쁘장한 얼굴이었다.     


[나에게도 이런 일이! 흐뭇]     


그러나 뭔가 반응을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에 나는 실없는 농담을 그녀에게 던지고 말았다.  

   

“천천히, 음... 하던 거 계속하셔도 돼요. 헤헤.”     


이 말을 들은 여학생은 미안하다며 고개를 깊이 숙이고 남자 친구가 있는 옆 당구대로 도망치듯 가 버렸다. 그리고 부끄러워서인지 웃겨서인지 모를 눈물을 펑펑 쏟던 그녀. 나에게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겨주었다.     


또 다른 추억이라면, 가끔 같은 과 여학생들이 실습과제를 들고 와서 도와달라고 보채던 기억들만이 씁쓸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그렇게 단출한 추억들만을 간직한 채, 2년이란 시간은 너무도 빨리 지나갔다.     

그때까지 나는 편입에 대한 확고한 믿음 같은 것이 하나 있었다.  

   

“내가 바뀌면 세상도 바뀔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도 구시대적인 발상이었지만 그런 생각이 있었기에 편입에 더욱 집착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렵사리 들어갔던 4년제 대학과 이에 따른 졸업장은 학교를 마친 후의 나의 현실을 바꾸지 못했다. 아무리 나의 조건을 바꾼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IMF라는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경제는 IT와 컴퓨터와 같은 특정 분야를 제외한 모든 곳에서 침체를 이어가고 있었고, 기업들은 IMF의 경험을 바탕으로 기업 체질을 변경하였다. 그들은 최소한의 인원만을 신규로 채용했고, 경력자 위주의 계약직을 선호했다. 대학을 졸업한 세대들은 그만큼 치열한 경쟁에 내몰리게 되었다. 기업들은 채용의 조건들을 더 까다롭게 제시하기 시작했고, 졸업생들과 재학생들은 취업에 모든 것을 맞춰서 자신들의 능력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학생들이 전공과 상관없는 과외의 것들에 더 많은 것을 투자하기 시작했던 시점이었다.     


사실, 편입을 하고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 느끼는 것이지만, 내가 지금까지 먹고사는 모든 기술과 능력은 전문대에서 배운 것이 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의 전문대 학생 분포는 50%가 실업계(공고) 출신이었다. 인문계 출신의 나 같은 학생들과 비교했을 때, 그들의 실습 능력과 전공에 대한 기초 지식은 지금 생각해도 대단했다. 

아직도 전문대에서의 첫 실습수업이 기억에 남는다. 간단한 도면을 작성하는 수업에, 인문계 출신들은 2시간이 넘어도 못 끝내는 것들을 그들은 단 30분 만에 끝내고 맥주를 마시러 나갔다. 인테리어 투시도를 그릴 때도 도구 없이 온전히 자신의 손재주만으로 그려내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비교 대상이 있던 그곳에서 나는 그들을 멘토처럼 따랐기에 그나마 어렵게 실력을 쌓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편입 이후, 나의 수업과 공부 방식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많이 바뀌었다. 

내가 처음 느꼈던 것은 필요 이상으로 말이 너무 많아졌다는 것이다. 실습은 최소한의 시간만 배정되었고 이론 공부가 대부분을 차지한 수업들, 작업의 결과보다는 보고서(일명 리포터)와 말로 모든 것이 끝났던 수업들이 나로서는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보고서의 경우도 자료를 찾아 요약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내용을 책에서 베끼거나 인터넷에서 일명 긁어서 제출하는 것을 보고 나는 대학 공부에 대해 실망감이 컸다. 더구나 그들의 점수가 더 높게 나온 것에 답답함마저 느꼈다. 분명 그 당시의 상황이 지금의 현실과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90년대 말, 2000년대 초의 모든 대학이 대동소이했으리라 본다.

     



내가 편입을 했던 것이 이미 20년 전의 일이다. 하지만 그때 당시 내가 대학 생활을 하면서 가장 놀랐던 것은 이미 대학에서부터 각자의 출발점이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보통 교수님들이 첫 수업 시간에 하는 이야기가 있다.     


“대학 공부는 고등학교 공부와는 다르다. 

철저하게 자기가 목표를 갖고 실력을 쌓는 공부가 되어야 한다.”    

 

자신의 시간과 행동에 책임을 지라는 나름의 조언이라 생각한다. 일면 맞는 말이다.

하지만 100% 동의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내 실력만으로 할 수 없는 영역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내가 만났던 어린 동기들(?)과의 대화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이번 여름방학에는 뭐 할 거야? 특별한 계획이 있니?”     


“네, 단기로 어학연수 가기로 했어요. 몇 군데 알아보고 있는데, 호주로 갈 것 같아요.”    

 

좀 있어 보이던 친구들의 대답이었다. 


그에 비해 어렵게 학업을 이어오던 친구들의 경우는 상황이 달랐다.     


“저는 이번에 돈 벌어야 해요. 

몇 군데 현장 알바 알아보고 있어요. 2달 정도 일하면 그래도 등록금 일부는 충당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보았던 그 당시 학교의 현실이었다.     


‘지금의 대학 공부는 철저하게 돈이 공부하는 곳이다.’라고 누군가는 말한다. 

이 말에 동의한다. 그리고 이 현상은 IMF 이후 더욱 심해졌다.    

 

얼마 전, 대학 4학년에 재학 중인 사촌 동생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지금 취업을 위해 토익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요즘은 취업을 위해 일반 점수뿐만이 아니라, 토익 스피킹(토스) 또는 오럴 인터뷰(오픽) 점수를 받는 것이 일반적인 사항이 되었다. 영어 스피킹은 혼자서 준비하기 어려운 분야라서 전문 영어학원에 등록하고 몇 달에 걸쳐 집중적으로 공부를 해야 취업에 필요한 점수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주말마다 알바를 해야 하는 동생의 경우, 학원비는 감당하기에 만만치 않은 큰돈이다.


어쩌면 하나의 단편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리고 모두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현상일 수도 있다. 그러기에 나로서는 이 현상이 더욱 안타깝다. 여전히 어린 친구들은 일명 스펙(SPECIFICATION)을 만들기 위해 너무도 많은 시간과 돈 그리고 열정을 그곳에 갈아놓고 있기 때문이다. ‘돈이 공부하는 대학‘이란 말처럼, 그들에게 있어 어학연수, 방학 기간의 체험학습, 학술대회 참여, 공인 영어 점수, 자격증, 심지어 피까지 뽑아서 헌혈증을 모아야 하는 것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요즘 포털에 올라오는 ‘코로나19’와 관련된 기획 뉴스들을 보면,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것이 대학을 졸업하는 학생들의 어려운 취업난에 관한 기사들이다. 어떤 기사는 취업률이 IMF 이후 최저치로 떨어질 거라고 예상하는 뉴스들도 있다. 그리고 그와 관련해서 재학생들이 휴학 또는 졸업 유예를 하고 있다는 기사도 많이 올라오고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경험했던 IMF 시절과 너무도 똑같은, 아니 더 심한 현상이 지금 다시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지금의 현상을 대하는 기업들과 사회의 태도이다. 

아마도 IMF 시절과 마찬가지로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들의 특성상, 그들은 취업의 조건들을 더 까다롭게 제시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출발점부터 차이가 난 어린 학생들은 이러한 스펙을 채우지 못한 채 실패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기성세대와 미디어들은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각자의 실패로 치부해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을 단지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을 곡해하는 꼰대들처럼 “젊은것들은 좀 상처 입어도 돼. 젊어서 상처 입어야 성공하는 법이야!”라는 식의 인식을 우리 사회가 아직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개인적으로 몹시 두렵다.     


“아프니까 청춘이 아니라 아프면 환자다.”     


어떤 유명인의 말처럼 우리는 또다시 깊은 상처를 간직한 세대를 만드는 것이 아닌가 걱정스럽다.      


누군가는 편입을 통해 더 나은 삶을 꿈꾸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달랐다. 

내 삶의 변화가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는 부정적인 인식을 깊이 심어준 계기가 되었다. 

지금의 코로나 사태도 같은 맥락에서 나는 바라본다. 이미 벌어진 이 사태를 개인이 수습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무리 스펙을 쌓고 대학원을 들어간다고 해도 지금의 현 상황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무언가 변화를 모색하고 돌파구를 찾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이번 일로 인해 우리 안에 생긴 상처를 치료하고 보듬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중에서도 지금의 세대가 느끼는 차별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고, 그들이 가져야 할 공정한 기회를 갖도록 기성세대가 배려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중요하다고 본다.


이들이 또다시 잃어버린 세대가 되어 버린다면 누구도 이곳에서 그들의 미래를 꿈꾸려 하지 않을 것이다. 마치 내가 겪었던 그때처럼.


[그림은 심재국 화백님의 '단풍-1'입니다.]

https://www.facebook.com/jaekuk.shim


작가의 이전글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