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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소 Nov 10. 2020

거울 속 아버지의 모습

IMF가 시작되기 일주일 전인 1997년 10월 마지막 주에 아버지는 지병이었던 중풍을 두 번째 맞고 모두가 잠든 사이에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언제나처럼 10월의 마지막 주말이 되면 아버지의 기일과 함께 IMF의 기억이 함께 떠오른다.     


그 후로 십여 년이 지난 2000년 중반의 어느 초겨울, 나는 다시금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때는 하루하루가 고통의 시기였다.

진행되지도 못할 프로젝트를 붙잡고 몇 날 며칠을 고생했다. 

저녁이 되면, 사무실 사람들은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회사 앞에 있는 대포 집을 찾았다. 

주거니 받거니 하던 술잔 사이로 어느새 안주는 사라지고 녹색병들만이 남게 된다.     

 

“아주머니!”     


“아, 왜요? 더 마시게요?”     


“한 잔만, 딱 한 잔만 더...”     


회사 창업에 참여했던 이사가 항상 하던 말이다. 

누구 하나 말리는 사람도, 동조하는 사람도 없었다. 

다만, 그가 원하면 그렇게 했고, 그가 원하지 않으면 우리도 안 했다.      


우리가 창업한 회사는 다들 나름의 경력들을 가지고 모였던 회사였다.

하지만 창업한 지 일 년도 안되서 회사는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사장은 회사 통장을 자신의 것인 양 사용했고, 돈을 투자한 이사들은 그런 사장을 불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달 후, 결국 회사는 공중분해 되고 말았다.

‘딱 한 잔만’을 외치던 이사는 투자한 돈을 모두 잃고, 그의 집마저 경매로 넘어갔다.    

  

회사를 나오던 날, 이사와 나는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김과장 고생 많았어. 잘 다니던 직장 때려치게 하고 데려왔는데, 

그래도 그땐... 모든게 잘 될거라고 믿었는데... 미안하게 됐어.”


말을 더듬던 그의 위로가 듣는 이로 하여금 더 힘들게 했다.     


“박 이사님은 어디로 이사하시나요? 아이들 학교는 어떻게 하기로..?”     


“음! 처가집으로 들어갈려고. 어떻하겠어! 지네들도 버텨야지.”     


그가 받아든 소주를 한입에 털어 넣는다.     


“마누라가 문제야. 경매 끝나고 드러누웠어. 

서울 근교에 집 하나 있는게, 큰 위안이었는데, 

그것마저 경매로 빼앗기고 나니 견디기가 힘들었던 모양이야. 

남편 잘못 만나서 고생이지.”     


“그래도 두 분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함께 하셨잖아요. 사모님이 이해하시겠죠.”     


되지도 않을 위로와 실현되지 못할 미래의 꿈을 이야기하다가 늦은 밤이 돼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긴장이 풀려서일까? 씻지도 않고 그대로 쓰러졌다. 

어차피 내일부터는 회사 일도 약속도 없었다.      




다음날, 나는 늦은 아침을 맞이했다. 눈은 떴지만 이불 안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이젠 뭐 해 먹고 살지?     


내가 배운 거라곤 ‘노가다‘밖에 없었다. 

내세울 만한 경력도, 남들이 알아줄 만한 학력도 없었다.

IMF이후, 나이에 쫓겨 닥치는 대로 이 회사 저 회사를 기웃거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알게 된 인맥들을 통해 그만그만한 일들을 해왔다. 

하지만 40이란 나이에 전처럼 일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 회사를 세우든, 영업직으로 옮기든 해야 했다. 

내 욕심처럼 단지 기술직으로 남기에는 이미 늦은 나이가 돼 버렸다.     


계속 누워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가서 밥이라도 먹자.      


느릿하게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그리고 세면대 거울에 비추어진 나를 봤다. 

전날 먹은 술로 인해 얼굴과 몸은 퉁퉁 부어 있었다. 

얼굴에는 기름기가 가득했고, 수염이 지저분하게 돋아 있었다.      


언제부턴가 거울에 비친 내 얼굴에서 다른 이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아버지’였다.


어릴 적 내가 알고 있던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항상 피곤함에 절어 있던 얼굴, 

술에 취해서 느지막이 일어나 부엌에서 물을 마시던 그 얼굴이 

마흔이란 나이에 나에게서 보이기 시작했다.      


이젠 그에 대한 증오도, 가지고 있던 감정도 사라진 지 오래다. 

다만, 내 속에 버려진 채 굳어진 상처들만이 그때를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너무도 무능했다. 어떠한 일도 할 줄 몰랐다. 무언가에 취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는 그의 아버지를 원망했고, 그가 살았던 시대를 원망했다. 

내가 말을 알아듣기 시작하던 때부터 그는 과거의 이야기들을 오물처럼 내 앞에 쏟아 놓았다.    

 

“그땐 말이지..., 네 할아버지가 그렇게 나를...”     


나의 첫 상처는 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부터였다. 

매년 아버지의 직업을 적어오라는 설문지는 답을 쓸 수 없는 시험문제 같았다. 

오답이 아닌 거짓말을 적어야 했던 나는 상처들을 마음속에 새기기 시작했다.      


중학교 시절, 그는 조용히 집을 나갔다.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서울에서 가까이 위치한 절로 들어갔다. 세상이 원망스럽고, 가족들이 싫어서 세상을 등지고 절로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3년이 조금 넘은 어느 날, 그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것도 중풍을 맞은 몸으로. 

세상 어디에도 그의 몸 하나 의지할 곳이 없었던 모양이다. 다른 친척들도, 마누라마저 버렸던 그를 나는 받아줘야 했다. 그저, 아버지였기에... 

나는 그를 매일 대면해야 했고, 그의 술주정을 다시 들어야 했다. 

10년이란 시간을 그와 함께했고, 많은 것들을 포기했다. 

그리고 자신이 없었다. 나의 미래도, 꿈꿔왔던 나의 가족마저도.  

  

그가 죽고 2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다. 

그에 대해 원망도 미움도 아직 남아 있지만 아주 고통스럽지만은 않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만의 삶을 찾기 위해 오랜 시간 그에 대한 기억을 하나씩 지워갔던 것 같다.      


하지만 어느새 나는 내가 처음 기억하는 아버지의 나이가 돼버렸다.

그리고 나에게서 비추어지는 그의 모습은 떼어 낼 수 없는 내 삶의 그림자처럼 느껴졌다. 

다만, 나를 바라보는 자식이 없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그림은 심재국 화백님의 '국화' 입니다.]

https://www.facebook.com/jaekuk.s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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