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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엔이방인 김상엽 Sep 25. 2023

[글로벌 이슈] Concert of Europe

예방외교 1편 - 예방외교의 초석

예방(외교)은 치료(분쟁 후의 평화유지) 보다 낫다.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유럽의 강대국들이 또 한 번의 대규모 분쟁을 막기 위한 통일된 목표를 가지고 하나로 뭉쳤다고 해보자. 그것이 바로 Concert of Europe (유럽협조체제)의 꿈이었다.


이 모든 것은 1791년 카우니츠 백작이 보낸 편지에서 시작되었다고 하고, 레오폴드 황제를 대표하는 카우니츠는 유럽 열강들이 평화와 조약의 충성을 지키기 위해 단결할 것을 촉구했다. 이 유럽협조체제는 20세기에 훗날 많이 거론되는 예방외교라는 아이디어에 대한 초석을 다졌다고 본다.

1815 빈회의

그럼 유럽협조체제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일까? 그 당시 주요 강대국들 - 특히 오스트리아, 프랑스, 영국, 프로이센, 러시아 (나중에 튀르키예와 합류) - 은 연합된 외교적 노력에 참여함으로써 유럽을 전쟁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었고, 다행히 1830년 벨기에 반란 때처럼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다른 경우에는, 특히 크림 전쟁 동안, 그 체제가 심각히 흔들렸다.


그러나, 협조체제의 실낱같은 작은 빛은 1870년 이후 사라지기 시작했다. 프로이센과 덴마크, 오스트리아, 프랑스와 같은 다른 나라들 사이의 전쟁에 직면하면서, 시스템은 무너졌다. 그 몰락은 유럽이 이 안전망 없이 격동의 20세기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시 1815년 빈 회의로 돌아가 보면, 전쟁으로 질서가 승리하는 세계라는 비전에 이끌려 강대국들이 한자리에 모였고, 이 회의는 많은 이들이 협조체제의 중추라고 여기는 '의회 체제'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 시대의 필수적인 문서인 방위동맹조약(Treaty of Defensive Alliance)은 유럽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정기적인 회의를 개최할 것을 요구했다.


"To facilitate and to secure the execution of the present Treaty, and to consolidate the connections which at the present moment so closely unite the Four Sovereigns for the happiness of the world... the High Contracting Parties have agreed to renew their meeting at fixed periods... to consult upon their shared interests, and for the consideration of the measures which at each of these periods shall be considered the most salutary for the repose and prosperity of Nations, and for the maintenance of the peace of Europe." - 존 로우, 유럽협조체제: 국제관계 1814-1870 (런던, 1994)


힘의 균형? 그것이 협조체제의 목표(?)였다고 한다. 영향력 있는 국가들의 역할을 강조하고, 일방적인 결정에 반대하는 합의를 촉진하고, 집단적 의사결정을 추진했다.

1815 빈회의 이후 유럽 지도

1856년 선구적인 조치로, 유럽협조체제는 현대 예방 외교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하며, 파리 선언 (Protocol 23 of the Declaration of Paris of 1856)은 국가들이 전쟁을 벌이기 전에 중재를 모색할 것을 제안했다. 이는 상당히 기념비적이었다고 한다. 영국 총리 윌리엄 글래드스톤은 전쟁의 재앙에 반대하는 뜻으로 그것을 예고했었고, 런던 타임스는 유럽이 통일된 항소법원 역할을 할 수 있는 미래를 내다봤다.


"The Plenipotentiaries do not hesitate to express in the name of their governments the desire that States... should, before appealing to arms, have recourse, so far as circumstances allow, to the good offices of a friendly Power. The Plenipotentiaries hope governments not represented at the Congress will unite in the sentiment that inspired the desire recorded in the Protocol." - 존 로우, 유럽협조체제: 국제관계 1814-1870 (런던, 1994)


그러나 이러한 예방외교 정신의 실질적 실현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헤이그 평화회의에서 비로소 다시 나타났다.


본질적으로, 유럽협조체제는 대담한 실험이었다. 그것은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강대국들의 야망을 메우기 위한 것이었다는 부정적인 시각도 있지만, 그 협조체제가 오늘날의 다자외교의 관행에 씨앗을 뿌렸다고 해리 힌슬리 영국 역사학자가 언급했다.(해리 힌슬리, 권력과 평화의 추구, 캠브리지, 1967)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 1807.8월 나폴레옹의 군사적 야망에 항의하여 외무부 장관직을 사임

여담으로 그 당시 유럽협조체제 기간에 역사책에 나오는 주요 인사들 중 오늘날까지도 수세기에 걸쳐  인정받고 있는 인물들은 누구였을까?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 페리고르 프랑스 외무부 장관 (1754-1838),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후작 겸 오스트리아 외무부장관 (1773-1859), 로버트 스튜어트 자작 겸 영국 외무부 장관 캐슬리그 경 (1769-1822)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사진 출처: 개인 소장, 스페인 및 프랑스 언론)


Disclaimer - This post was prepared by Sang Yeob Kim in his personal capacity. The opinions expressed in this article are the author's own and do not reflect the view of his emplo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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