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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엔이방인 김상엽 Oct 23. 2023

[글로벌 이슈] 우 탄트(U Thant)

예방외교 2편 - 쿠바 미사일 위기


1962년 10월 16일에서 28일까지의 쿠바 미사일 위기는 단순한 냉전의 한 장면이 아니었다. 이는 핵전쟁을 앞둔 결정적인 순간이었으며, 인류의 존재 자체를 위협할 수 있었다.


소비에트 연방의 쿠바에서의 미사일 기지 건설에 대해 케네디 대통령은 무력시위라고 주장하여, 미사일 기지의 완공을 강행한다면 이를 선전포고로 받아들인다고 했다.


그는 소련의 과감한 움직임뿐만 아니라 가능한 오해에 깊은 우려를 표현했다. 미국의 해군이 쿠바를 둘러싸도, 그는 항상 외교적 접촉을 유지하려 했으며, 러시아 잠수함과의 충돌을 피하려 했다. - 로버트 케네디, 13일의 회고록: 쿠바 미사일 위기 (뉴욕, 1999)

우 탄트 유엔 사무총장(1961-71), JFK에서 기자회견

당시 유엔 사무총장이었던 U Thant는 그는 미사일 대응보다는 예방외교의 가치를 중시했고,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기 전에 해결하려 했다.  그는 안보리나 유엔총회의 청신호를 기다리지 않고 두 강대국 모두에게 48시간 외교의 장을 열어주는 것을 목표로 나섰다. 그 결과 이 위기에서 그의 주도성이 돋보였다. - U Thant, 유엔 시각: 우 탄트 회고록 (가든시티, 1978)


U Thant의 접근은 단순한 정치적인 것보다 두 가지 핵심 원칙에 기반하고 있었다. 평화를 위한 적극적인 행동과, 냉전의 양측에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시간대별 전개가 굉장히 영화적이었다. 케네디의 국정 연설, 새롭게 등장한 쿠바의 소련 지원에 맞서기 위한 미주 기구(OAS)의 만장일치 결의안, 그리고 U Thant의 적시 개입, 소련 선박들에게 검역을 존중할 것을 촉구하는 두 초강대국에 대한 서면 등


OAS 결의안 이후 1962년 10월 23일 자 OAS 사무총장이 유엔 사무총장에게 보낸 편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마주 앉은 케네디와 흐루쇼프

위기의 순간마다 전쟁이 터질 위험이 있었다. 미국 비행기의 추락, 잠수함의 핵 발사 권한, 그리고 불안정한 통신. 하지만 10월 28일,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흐루쇼프의 라디오 회유와 케네디의 반응은 세계를 안심시켰다.


U Thant는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 핵심 중재자였고, 그의 카스트로와의 만남은 핵 폐기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결국, U Thant의 리더십 아래 유엔은 잠재적 종말을 막고,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았다.

1962.10.30. 우 탄트의 쿠바 방문 관련 사진 및 뉴욕타임즈 기사

이 위기를 돌이켜볼 때, U Thant와 같은 인물들의 중요성과 외교의 힘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습니다. - 램시 나시프, 1961-71간 뉴욕에서의 우 탄트 (뉴욕, 1988)


1962.10월, 소련이 쿠바에 핵탄도 미사일을 배치하려 했던 시도 때문에 미·소는 핵전쟁의 직전까지 이르게 된 '쿠바 미사일 위기'가 있었다. 이 위기는 반세기가 지나도록 많은 이들이 잊힌 인류 멸망의 위험을 담고 있다. 아쉽게도, 이러한 거대한 위기가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여전히 존재한다.


(사진 출처: 유엔도서관웹사이트, BBC, 뉴욕타임스사이트)


Disclaimer - This post was prepared by Sang Yeob Kim in his personal capacity. The opinions expressed in this article are the author's own and do not reflect the view of his emplo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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