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de for me!
문제는 내 첫 소설과 내 첫 텔레비전 시나리오가 너무 비슷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주제 면에서가 아니라 방식과 스타일 면에서 말입니다. 들여다볼수록 내 소설은 대화도 방향도 시나리오를 닮아 있었습니다. 이런 점은 어느 정도까지는 괜찮았지만, 그즈음 나는 '오직 책을 통해서만'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이 텔레비전을 보면서 책을 읽는 것과 비슷한 경험을 얻을 수 있다면 소설을 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형태의 매체가 줄 수 없는 고유한 어떤 것을 제공할 수 없다면, 소설이 어떻게 영화나 텔레비전의 강력한 힘에 맞서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_26~27
"다른 형태의 매체가 줄 수 없는 고유한 어떤 것"
비단 문학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게는 숙명과도 같은 질문에 답해야 할 때가 온다.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유일무이한 나의 존재"에 대한 인식. 왜 사는가, 나는 누구일까, 무엇이 나를 기쁘게 하고 슬프게 할까.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나도 (이를테면, 가즈오 이시구로 작가님의 '20세기 저녁'처럼) 나의 전환점이었다고 어떤 한 때를 꼽을 수 있을까.
세상은 소품종 대량생산에서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졌다 이겁니다ㅠㅠ
다른 많은 경력에서도 그렇겠지만, 한 작가이 경력에서 중요한 전환점은 이런 것들입니다. 종조 사소하고 추레해 보이는 순간들이 중요한 전환점 역할을 합니다. 이런 전환점은 조용하고 은밀한 계시의 섬광입니다. 그런 순간은 종종 멘토나 동료의 인정도, 팡파르도 없이 그냥 옵니다. 그 순간은 종종 그보다 더 요란하고 더 긴급해 보이는 요구들과 경쟁해야 합니다. 때로 그 순간은 기존의 지혜와 상반되는 듯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이 온다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 순간은 당신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말 테니까요.
여기서 나는 사소하고 은밀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것은 내 작업의 본질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조용한 방에서 글을 쓰는 한 사람이 다른 조용한, 혹은 그렇게 조용하지 않을 수도 있는 방에서 책을 읽고 있는 다른 누군가와 연결되고자 애씁니다. 이야기는 재미있을 수도 있고, 뭔가를 가르치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게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가 느낌을 나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야기가 국경과 여러 차이를 넘어서 우리가 인간으로서 공유하는 것에 호소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야기를 둘러싼 거대하고 화려한 산업이 있습니다. 출판, 영화, 텔레비전, 연극 산업 말입니다. 하지만 결국 이야기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느끼는 방식입니다. 내 말이 이해되시나요? 여러분도 이렇게 느끼시나요?
_44~46
“종종 사소하고 추레해 보이는 순간들", "조용하고 은밀한 계시의 섬광".
나만을 위해 마련된 것 같은 순간이 있다. 오늘도 역시 그런 때가 있었다.
탠저린 두 조각이 올라간 카페 시그니처 아이스 라테, 테이블 양 쪽 모서리에 각각 놓인 해바라기 한 송이들, 뒤돌면 통창으로 시원하게 쏟아지는 비. 쏟아지는 비를 어떤 이들로부터 막아주고 있는 초록이 거대한 나무. 정말 비를 안 맞고 계실까, 비를 맞아도 좋은 걸까, 쓰잘데없는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실외 손님들. 사내 메신저 알림으로 불규칙하게 울리는 왼쪽 손목의 애플 워치, 내 앞과 옆에서 예쁘게 종알거리는 뽀글뽀글 푸들이랑 순둥순둥 흰둥이.
오늘의 조용하고 은밀한 계시의 섬광은 사소하지만 추레하지는 않았다. 발견하기 나름.
"하지만 결국 이야기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하는 것"
예전에 그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집단의 공적인 비참보다 개인의 사적인 불행이 더 큰 공감을 일으킨다는 뉘앙스의 글. 사람의 선악을 떠나 사람에겐 그냥 오감이 있고, 그 오감을 통해 무엇을 판단하고 느낀다. 저 멀리 산사태보다는 당장 눈앞의 돌부리를 신경 쓰게 마련인 것.
가즈오 이시구로 작가님의 말씀 중 가장 공감하는 부분은 바로 이야기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하는 것이라는 거다. 각각이 같은 상황일 수도 다른 상황일 수도 있지만, 이러저러한 여타 나머지 것들을 떠나 결론적으로는 개인과 개인의 아주 사적인 만남이라는 거. 사진과 함께 올린 이모티콘 하나에도 그 사람의 무언가를 파악하는 요즘 시대에 한 줄의 글이란 건 얼마나 많은 스스로를 소개하고 있는 것인지.
이제 한 가지 호소로 이 연설을 마무리 짓게 해 주십시오. 원한다면 이것을 나의 '노벨 호소'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세계 전체를 바로잡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적어도 우리가 읽고 쓰고 출판하고 추천하고 비판하고 상을 주는 '문학'이라는 이 구석, 세계의 이 작은 구석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이 불확실한 미래에 꼭 필요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현재와 미래의 작가들로부터 최선을 것을 취하기 위해서는 더 다양해져야 한다고 나는 믿습니다. 특히 다음 두 가지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우선 문학적 공감대를 넓혀 엘리트주의에 물들어 현재에 안주하는 제1세계 문화의 경계를 넘어서서 더 많은 목소리를 수용해야 합니다. 오늘날까지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다른 문화권의 문학에서 보석을 찾아내는 데 좀 더 역동적으로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 작가가 멀리 떨어진 나라에 살고 있든, 우리 공동체 안에 살고 있든 말입니다. 두 번째로 무엇이 좋은 문학인가에 대한 정의를 지나치게 편협하거나 보수적으로 설정하지 않도록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다음 세대는 중요하고도 훌륭한 이야기를 서술하는 데 온갖 종류의 새로운 방식을 동원할 것이고, 그중에는 때때로 당혹스러운 것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줄곧 마음을 열고 있어야 합니다. 특히 장르와 형식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그들 중 최고를 키우고 격려할 수 있습니다. 위험할 정도로 분화가 가속화되는 이 시대에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좋은 글쓰기와 좋은 책 읽기는 장벽을 허뭅니다. 그런 선순환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아이디어, 위대한 인도주의적 전망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_50~52
“최선을 것을 취하기 위해서는 더 다양해져야 한다고 나는 믿습니다"
-> 저도 믿습니다!!!!!
'쏜살'은 1966년 창립된 출판사 민음사의 로고
'활 쏘는 사람'의 정신을 계승한 작은 총서입니다.
가벼운 몸피에는, 이에 어울리는 인생의 경구,
때로는 제법 묵직한 사상과 감정을 담았습니다.
우리의 활시위를 떠난 화살들이 아름다운 글줄로
독자의 가슴에 가닿기를 희망합니다.
쏜살
세상에 네상에. 쏜살 문고가 민음사에서 파생된 줄은 알았지만, 이런 의미인지는 몰랐다. 우오오, 너무 좋잖아. 할 수만 있다면 손 안 짚고 옆돌기 두 번 연속할 만큼 좋습니다. 참말루!
올림픽이 끝난 지 오래지 않아 그런지 몰라도, 가끔 사는 게 활시위를 당기는 것 같을 때가 있다. 모두 똑같은 마음이겠지만, 나도 할 수만 있다면 10점 만점에 10점짜리 활을 쏘고 싶다. 바람은 점점 세차게 불어오는데 어느 순간 방향도 모르겠고, 가뜩이나 좋지 않은 시야는 폭우 속 차창처럼 흐려져만 가고. 어째 하나 둘 나이가 들어갈수록 쏜살의 중요성도 책임감도 무거워지는 것만 같고(같고,라고 적긴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건 기우가 아니라 현실이다.). 활대가 커지고 활이 무거워지는 것보다 정말 무서운 건, 실은, 진짜 영영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아서, 겁이 난다. 말 그대로 쏜살같이 날아갈 내 쏜살이 뽑을 수 없는 대못처럼 만질 때마다 거슬리는 거스러미처럼 남을까 봐. 내가 쏜 모든 화살이 나의 화살인 것만으로 가치 있을 거라고 호언장담하며 활시위를 당기기엔 나는 아직 너무 쪼렙이라서 자꾸 조바심이 난다.
그래서 오늘의 쏜살은 특히 의미가 있다. 길이 아니면 가지 않을 것 같은 친구들이 걷고 있는 게 도로가 아니라 샛길이었다. 이미 완성된 포장도로가 아니라 각자가 아직 만들어가고 있는 길이란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길이라서 간 게 아니었다. 그냥 뚜벅초들이 걸으니까 각자의 길이 됐다. 그것도 따라가고 싶은 길.
P.S. 오늘의 추신.
200퍼센트의 확신이라는 건 얼마나 실낱 같은지, 차라리 29퍼센트의 낙관에 조금 더 믿음이 간다. 허무맹랑한 낭만과 천진난만한 낙관에 건배를. 치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