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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Jun 08. 2022

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

나에게 너는 아무리 읽어도 부족한 편지

발자크가 연인인 한스카 부인에게  편지에서, 저명한 문인의 글을 혼자 독점하는 편지가 얼마나  호사인가를 언급했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다. 편지는 수신인이 혼자서만 읽는 호사스런 문학이다. 그것은 혼자서 듣는 오케스트라의 공연과 같다.  책의 독자들도 모두 수신인이  기분으로, 그런 호사를 누려보기를 권하고 싶다.
_편지로 읽는 슬픔과 기쁨, 강인숙

  일찍이 강인숙 작가께선 <편지로 읽는 슬픔과 기쁨> 책의 서문에서 발자크 사례를 들어 편지가 얼마나 호사스런 문학인지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리고 여기 레드와 블루가 있다. 둘의 편지는 세상 어디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오직 둘의 안에서만 살아 숨 쉰다. 존재와 부재를 함께 안은 편지를 나무에 새기고, 찻물에 담아 부친다. 발신인도 수신인도 모르는 그저 '참조' 내가 둘의 호사스런 문학을 누릴  있어 영광이다.



  삐뚤빼뚤한 글씨에 담긴 마음을 가늠해보는 , 썼다 지운 편지 속지를 쓰다듬는 , 점점  다양해지는 편지지를 구경하는 , 지저분하게 번진 연필이나 볼펜 자국을 살피는 , 편지에 녹아든 누군가의 말투나 마음을 따라가보는 , 읽는 이의 호흡에 따라 생기는 쉼표와 마침표. 예상치 못한 도치까지. 여기까지가 나한테 편지라는 매개체가 주는 즐거움. 그리고 여기에 레드가 꼽는 편지의 즐거움을 보탠다.​

그러니까.  부러지게 얘기할게.
 너한테 편지를 쓰는  좋아.  편지를 읽는 것도 좋고.  편지를  읽으면 나는 남들 몰래  시간을 흥분한  보내곤 . 너한테 답장을 쓰면서,   답장을 어떻게 부칠지 궁리하면서. 나는 단어를 세심하게 골라 지은 문장  줄로 흥분제와 진정제를 조합한  같은 효과를 자유자재로   있어.  몸속의 공장은 내가 찾는 약물은 어떤 것이든 제련해 주니까. 하지만 편지를 읽고  부치는 행위에는 어떤 약물도 필적하지 못할 격정이 있단 말이지.
_117​, 레드
그러니까  편지 속에서 나는 너의 것이야. 가든의 표적도,  임무의 일부도 아닌, 오로지, 너의 .
나는 다른 방식으로도 너의 것이야. 너의 기척을 찾아 세상을 주시하는 동안, 동물의 내장을 보고 점을 치는 점쟁이처럼 상관도 없는 것에서 너와 연관된 점을 찾는 동안, 너의 것이야. 편지를 부칠 방법과 이유와 기회를 골똘히 생각하는 동안, 너의 것이고. 네가 적은 말들을 순서에 따라, 소리에 따라, 냄새에 따라, 맛에 따라 음미하는 동안,  기억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너무 바래지 않도록 보살피는 동안, 나는 너의 것이야.
_118​, 레드




  레드와 블루에게 배우는 편지 쓰는 

  편지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수신인  > 첫인사  > 본문  > 끝인사  > 발신인

  1) 편지의 시작. 수신인을 부르는 호칭은 다양할수록 좋다.

  블루가 부를  레드는, 사탕단풍, 딸기, 라즈베리, 사과나무, 환한 .

  레드가 부르는 블루는, 코치닐, 0000FF, 비스무트, 세륨, 게르마늄, 비소.

 2)  첫인사는 날씨 또는 계절의 변화가 무난하다.

    여름은 토끼풀에 내려앉는 벌처럼 찾아와. 금빛으로 바쁘게 움직이다가, 왔나 하고 보면 벌써 사라지고 없거든.  일은 산더미 같고. 나는  곳에 붙박이는 임무에서  부분이 정말로 좋아. 날이 저물 무렵에 완전히 녹초가  느낌. 이곳엔 회복 연못도 없고, 치유 수액도 없고,  골수 속에 잔잔하게 흐르는 초록빛도 없어. 그저 땀과 소금기와 등에 내리쬐는 뙤약볕분이라, 모두가 스스로의 몸을 속속들이 알고 자기 몸을 사랑해. 아름다운 춤처럼 움직이는  육체를.
_164, 블루

  3) 본문에는 마음을 담는다.

너는 편지를   내가 차마 쓰지 못하고 참은 것들까지  적어 버리는 경우가 가끔 있어.  말하고 싶었어. 네가 마실 차를 내가 끓여 주고 싶어. 하지만 말하지 않았지. 그런데  나한테 그렇게  주고 싶다고 적었어.  이런 말도 하고 싶었어.  편지는  안에서 살아가. 그건 내가   있는 가장 직설적인 표현이야. 하지만 말하지 않았는데, 너는 내게 보내는 답장에 구조물과 사건에 관해 적었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어. 말은 상처를 입히지만 은유는 중재할  알아. 다리처럼. 그리고 말은 다리를 지을  쓰는  같은 거야. 대지에서 파낼 때는 힘들지만 재료가 되지. 새로운 , 함께 나누는 , 하나의 묶음보다  많은 것을 만드는 재료.
하지만 나는 말하지 않았어. 그리고 너는 상처 이야기를 들려줬고.
이제 나는 말하고 싶어. 네가 나를 앞질러 말하기 전에. 레드,  입속에 있는  씨앗을 떠올릴 , 나는  손으로  씨앗을  입속에 넣는 광경을 상상해.  입술에 닿은  손끝을.
_173, 블루

  4) 끝인사는 '추신'까지 놓치지 않고 적는다.

추신. 코치닐! 무슨 색을 내는 색소인지 이제 나도 알아.
_69​, 레드


  5) 발신인은 멈추지 않는다.

멈추지 말고 읽으세요. 멈추지 말고 쓰세요. 멈추지 말고 싸우세요. 우리 모두 여기 이렇게 살아 있으니까요.
_277, 감사의 




  몇 천 킬로미터를 떨어져 지내고 있다고 해도 휴대폰이나 이메일 한 번이면 하루에 몇 번이라도 연락이 닿는다. 24시간 연중무휴 누군가와 마음만 먹으면, 손가락 몇 번만 두들기면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시대. 이런 때일수록 누군가의 손글씨가 그리운 것 같다. 레드와 블루에게서 배운 꿀팁으로 오늘은 우리 모두 손편지를 적어봅시다요!

  추신. 레드가 가장 아끼는 색상 코드 블루는 #0000FF. 레드의 색상 코드는 #FF00000. 데칼코마니 색상 코드까지 완벽하다. 데스티니! 참고로, 하양은 #FFFFFF, 검정은 #000000.​


  추추신. 273쪽에 따르면, 원문은 'Hyper Extremely Red Object' 머리글자를 따면 ‘HERE(영웅)’ 된다.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붉은 천체 의미하는 HERO 수십억 광년이 넘게 떨어진 우주에서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천체 또는 은하로서, 지구로부터 멀어지는 방향으로 이동할 경우에 지구의 관측자들에게 붉은빛으로 보인다. 그런데 실제로는 HERO ‘파란색 가능성도 있다. 140 광년가량 떨어진 곳의 젊은 은하일 경우, 생성된  얼마   파란색 별들로 이루어져 푸른빛을 띤다는 것이다.​


  추추추신. 22 6 5 코엑스에서 열린 서울 국제도서전 마지막  찾은 민음사 부스에서 <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 찾고 있다고 말씀드리니 노란 티샤쓰를 입은 직원님께서 "정말 좋아하는 책이에요!"라고 대답하시곤  그대로 해사롭게 웃으며  가져다주셨다. 얼굴에 표정이 실리는 순간은  경이롭다! 민음사 TV에서 아란 부장님 추천으로 읽게  소설이라서 아부님께 싸인도 받았다. 함께 오래오래 읽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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