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의 아이 신샤인
우연히 만나 가볍게 운명을 꿈꾸고 싶지도, 금방 사랑에 빠졌다가 쉽게 실망하고 싶지도 않았다. 낙담이 지치고, 염세는 지겹다. 열 마디든 수천 마디든 결국 각자가 하는 말은 전부 자기 한밑천 그거 하나일 텐데 길고 잦은 만남이 반복되다가 얕은 깊이와 빈약한 부피감에 서로 나 몰라라 뒤도 안 보고 달아나면 어떡해.
아침 아홉 시 반에 이제는 서로 익숙해진 장소에서 만나 저녁 여덟 시가 다 되어 헤어졌다. 하루 삼시 세끼 중 두 끼니를 함께 먹었고, 새로운 카페 한 곳과 전에 갔던 카페에 가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눴다. 시답잖은 말을 할 거라면 안 하느니만 못한 거라고 자주 생각했으면서 깊이 부피 밀도 밑천 그런 거 겁이 날 틈도 없이 와르르 쏟아냈다. 그래도 될 것 같았다.
오늘 지금 여기라서 더 좋은 대화들. 제 몸을 긁는 제비의 유연성과 날쌤, 최근 읽은 소설의 제목과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빙수와의 공통점, 초당옥수수와 찰옥수수, 친구 포스팅을 통해 봤다가 울음이 난 광고, 벅차오르고 부럽기도 했던 누군가의 인터뷰, 내가 생각하는 촌에 살기 좋은 점 중 하나, 일기장을 대하는 자세와 솔직함의 정도, 지금과 과거와의 공통점과 차이점, 증명사진과 그 시절 앞머리. 비 오는 날에만 먹을 수 있는 같이살자 지구카페 시그니처 커피, 땀을 내는 것만이 줄 수 있는 희열, 개정판 아기 돼지 삼 형제, 둘레길과 정상길, 김치말이 국수를 좋아하는 이유, 같은 날 문을 열고 닫는 마요네즈 식당과 텍스처 베이커리, 요리하는 틈틈이 주변을 닦고 정리하는 멋진 손, 우리가 다 먹고 나올 때 가게 밖 주변을 쓸던 비질, 나의 뉴욕과 친구의 스페인.
여름의 기나긴 낮이 지나 하늘이 어둑해질 때까지 떠들다 헤어졌다. 왜 조금 더 빨리 내 인생에 나타나지 않았느냐고 다그치기엔 앞으로가 무수하고, 쌓아온 지금까지를 듣는 것만도 감사하다. 본방사수와는 또 다른 드라마 몰아보기 정주행의 즐거움. 늦덕은 놓쳤던 것들까지 찾아 예뻐하느라 바쁘다 바빠.
만나는 날마다 날씨가 좋다며 나에게 정말 날씨 요정이라고, 신샤인 덕분이라고 말하는 채바라기야. 해바라기 꽃말은 ‘당신만을 바라봅니다’라더라. 비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는 인디언들처럼 채바라기는 해가 들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함께할 테니 네가 바라보는 곳엔 결국 빛이 드나들 거야. 그러니까 우리의 만남마다 햇볕 쨍쨍 맑음인 이유는 날씨 요정 3% 채바라기 97% 덕분이라고 해두자.
입에 사탕 물고 말하는 다디단 사람을 알고, 좋을 때 좋은 줄을 너무 잘 알겠다. 가득 찬 마음이 여물다 못해 터지고 있어!
P.S. 십센치(10cm) 신보 그라데이션 많관부 많사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