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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Sep 14. 2022

2022년 07월 02일

날씨의 아이 신샤인


우연히 만나 가볍게 운명을 꿈꾸고 싶지도, 금방 사랑에 빠졌다가 쉽게 실망하고 싶지도 않았다. 낙담이 지치고, 염세는 지겹다.  마디든 수천 마디든 결국 각자가 하는 말은 전부 자기 한밑천 그거 하나일 텐데 길고 잦은 만남이 반복되다가 얕은 깊이와 빈약한 부피감에 서로  몰라라 뒤도  보고 달아나면 어떡해.


아침 아홉 시 반에 이제는 서로 익숙해진 장소에서 만나 저녁 여덟 시가 다 되어 헤어졌다. 하루 삼시 세끼 중 두 끼니를 함께 먹었고, 새로운 카페 한 곳과 전에 갔던 카페에 가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눴다. 시답잖은 말을 할 거라면 안 하느니만 못한 거라고 자주 생각했으면서 깊이 부피 밀도 밑천 그런 거 겁이 날 틈도 없이 와르르 쏟아냈다. 그래도 될 것 같았다.


오늘 지금 여기라서 더 좋은 대화들. 제 몸을 긁는 제비의 유연성과 날쌤, 최근 읽은 소설의 제목과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빙수와의 공통점, 초당옥수수와 찰옥수수, 친구 포스팅을 통해 봤다가 울음이 난 광고, 벅차오르고 부럽기도 했던 누군가의 인터뷰, 내가 생각하는 촌에 살기 좋은 점 중 하나, 일기장을 대하는 자세와 솔직함의 정도, 지금과 과거와의 공통점과 차이점, 증명사진과 그 시절 앞머리. 비 오는 날에만 먹을 수 있는 같이살자 지구카페 시그니처 커피, 땀을 내는 것만이 줄 수 있는 희열, 개정판 아기 돼지 삼 형제, 둘레길과 정상길, 김치말이 국수를 좋아하는 이유, 같은 날 문을 열고 닫는 마요네즈 식당과 텍스처 베이커리, 요리하는 틈틈이 주변을 닦고 정리하는 멋진 손, 우리가 다 먹고 나올 때 가게 밖 주변을 쓸던 비질, 나의 뉴욕과 친구의 스페인.


여름의 기나긴 낮이 지나 하늘이 어둑해질 때까지 떠들다 헤어졌다. 왜 조금 더 빨리 내 인생에 나타나지 않았느냐고 다그치기엔 앞으로가 무수하고, 쌓아온 지금까지를 듣는 것만도 감사하다. 본방사수와는 또 다른 드라마 몰아보기 정주행의 즐거움. 늦덕은 놓쳤던 것들까지 찾아 예뻐하느라 바쁘다 바빠.


만나는 날마다 날씨가 좋다며 나에게 정말 날씨 요정이라고, 신샤인 덕분이라고 말하는 채바라기야. 해바라기 꽃말은 ‘당신만을 바라봅니다’라더라. 비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는 인디언들처럼 채바라기는 해가 들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함께할 테니 네가 바라보는 곳엔 결국 빛이 드나들 거야. 그러니까 우리의 만남마다 햇볕 쨍쨍 맑음인 이유는 날씨 요정 3% 채바라기 97% 덕분이라고 해두자.


입에 사탕 물고 말하는 다디단 사람을 알고, 좋을 때 좋은 줄을 너무 잘 알겠다. 가득 찬 마음이 여물다 못해 터지고 있어!


P.S. 십센치(10cm) 신보 그라데이션 많관부 많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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