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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Feb 18. 2023

일곱 해의 마지막

(Feat. 이토록 평범한 미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 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디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게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에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장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다.

남쪽 신의주 유동에 있는 ‘박시봉’네 집에서.

그러니까 이것은 발신인의 주소.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는 사람 쓸쓸하기도 하겠다.

굳고 정한 갈매나무가 따로 외로이 선 줄 아는 저 사람 외롭기도 하겠다.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
  은지가 베개에서 머리를 들었다.
  "뭐?"
  “백석 시잖아. 아내도 없고 집도 없고 한 상황에 무슨 목수네 헛간에 들어와서 천정 보고 웅얼거리는……"
  "난 또……  근데?"
  "이게 신의주 어디 박시봉 씨네 주소를 그대로 적은 거잖아?"
  "그렇지."
  "고등학교 때 그 설명을 듣는데 그게 좀 먹먹하게 다가오더라고. 제목이 주소라는 게."
  "……"
  "뭐라더라, 시적 화자니 주제니 이런 건 모르겠고, 그냥 이 시를 떠올리면 좁고 어두운 공간에 갇힌 한 남자가 생각나. 자기가 누워 있는 초라한 장소의 주소를 반복해서 중얼대는 사내가."
  "……"
  ”그리고 낯선 데서 자게 되면 나도 모르게 그 주소지를 따라 부르게 돼.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하고."
  "왜?"
  "몰라. 궁금해서 자꾸 웅얼거리게 되는가 봐. 따라 하다 봄 쓸쓸하니 편안해지기도 하고."

_호텔 니약 따, 김애란

김애란 작가님의 단편집 <비행운> 속 <호텔 니약 따>를 읽은 후로는 갈매나무 같은 그 사람보다 그 사람이 누운 공간이 자꾸만 떠올랐다.

밤낮없이 알을 낳는 닭이 갇힌 A4 사이즈 닭장 같을까.

한 몸 뉘고 나면 그만인 뒤척일 여지 하나 없는 고시원 같을까.

좁을 텐데 불편하지 않을까, 어두울 텐데 무섭지 않을까, 갇힌 채로 답답하지는 않을까.


“백석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프레임을 부숴준 작품.

그리고 여기 하나의 작품이 더 기다리고 있다.

김연수 작가님의 2020년 작품 <일곱 해의 마지막>.


어떤 걸 떠올리면 금방 ‘처음’은 떠올리는데, ’마지막‘은 갸우뚱하곤 한다.

마지막으로 눈사람을 만들었던 게 재작년이었나? TV를 켰을 때는 미스터트롯이 나오고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뭘 봤더라?

처음 나왔던 포켓몬 띠부띠부실은 분명 꼬부기였는데, 마지막으로 나온 게 파이리였던가 해피너스였던가?


처음 백석 시인의 작품을 읽은 건 분명히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일제강점기에 출생하셔서 활동하셨던 것은 기억하는데, 이 분의 마지막은 그래서 어떻게 되었던가.

백석 시인의 마지막 일곱 해가 여기 소망에 대한 이야기로 존재한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한 일들은 소설이 된다고 믿고 있었다. 소망했으나 이뤄지지 않은 일들, 마지막 순간에 차마 선택하지 못한 일들, 밤이면 두고두고 생각나는 일들은 모두 이야기가 되고 소설이 된다.

_일곱 해의 마지막, 작가의 말


지난달 설 연휴 동안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읽으면서 너무 좋아 부러 간격을 두고 오래 시간을 들여 읽었다.

오른쪽부터 읽으면 결말부터 알게 되는 두루마리 같은 걸 어디서 떠올리셨을까.

미래를 알고 현재를 아는 삶을 언제부터 적고 싶으셨을까. 선행하는 마지막을 어떻게 이렇게 표현하실 수 있을까.

그 대답이 나는 <일곱 해의 마지막>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읽을 때는

교보문고 바닥에 떨어진 책갈피 같은 뭔가를 줍고 싶다가,

눈 내리는 추자도 바다 앞에 섰다가,

어머니랑 가봤던 비오토피아 수풍석 박물관을 떠올리다가,

고비 사막에서 필요할 수도 있으니 '카타무 호갸'라고 읊조리다가,

메릴랜드주 몽고메리 카운티 사슴들에게 용서를 구하다가,

일본 지바현 사쿠라시에 있는 DIC가와무라기념미술관에 '시그램 벽화'가 있는 '로스코의 방'을 검색했다가,

부암동 '앨리스의 다락방'에서 끓여주는 10월 하순의 은행잎보다도 더 샛노란 카레를 궁금해하다가,

내가 태어난 해 서울에서 대구로 가는 새마을호 기차 안에 잠깐 머물기도 했다.

여기저기 옮겨 다니느라 분주했다.


“사랑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불행해지는 것쯤이야 두렵지 않”은 기행의 마지막 일곱 해를 읽는 동안은 한 번 들어서본 적 없는 새로운 골목길 산책 같았다.

몇 년을 산 동네인데도 내가 모르는 길이 있구나, 세상에 이런 풀꽃이 있구나, 우리 동네 들고양이가 생각보다 꽤 많다, 이런 느낌들.

교과서에서 시도 꽤 읽고 심지어 나나흰 연극도 봤는데 내가 아는 게 별로 없구나, 1996년에 돌아가셨으니 심지어 4년은 동시대를 함께 살았다니.

아마 다 알 수 없고, 다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것대로의 운치가 있을 남아 있는 질문들이 내게 남았다.


그리고 덩달아 내 곁에 자리를 둔 표현들.

23쪽 부드럽게 융기하는 낮은 구릉들의 흐미한 윤곽 위로 ‘도글도글’ 떠 있는 별들.

35쪽 벨라의 마음을 울렸던, 폐허가 된 수도원에서 들리는 종소리처럼 ‘궁근’ 목소리와 41쪽 밤늦게 퇴근할 때 머릿속에 담아 가곤 했던 “종일 궁굴린 시구” 하나 정도.

83쪽 “고박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 상허의 85쪽 “까끈한 성격”과 87쪽 “담찬 표정”.

129쪽 벨라의 “어딘지 매시근”한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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