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슬 Apr 05. 2023

더 셜리 클럽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 안에서 우리가 된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사랑을 고백하는 방법이 달라졌다는 거, 재미있지 않아요? 문자가 발명되기 전에는 편지를 쓸 수 없었을 거 아니에요. 그러면 그때는 벽화를 그렸을까요? 여기 그린 물소 떼만큼 너를 사랑해, 너와 함께 이렇게 사냥을 다니고 싶어, 그런 의미를 담아서.
  문자가 발명된 이후에도 편지로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아주 적었을 거예요. 모두가 글을 쓸 수 있고 누구나 종이를 구할 수 있는 시대는 그보다 훨씬 늦게 도래했으니까. 그리고 전화가 발명되기 전까지는, 오로지 편지만이 바다 건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수단이었겠죠.
   물론 제일 오래됐으면서도 가장 동시대적인 방법은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면서 말하는 거겠지만. 인터넷이 발명되고 화상채팅이 가능해지면서 아주 멀리 있어도 서로의 눈을 보면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시대가 됐지만, 지구는 여전히 크고 둥글고 시차는 그대로 있죠……. 언젠가 날짜 변경선을 극복할 수 있는 수단도 발명될까요?
  내가 생각하는 고백의 역사 한 자락은 카세트테이프예요. 카세트테이프의 전성기는 아주 짧았지만 충분히 아름다웠을 거라고 믿어요. 내가 태어나기 전 아빠가 엄마에게 선물한 믹스 테이프를 들어본 적이 있거든요. 믹스 테이프라는 말 들어본 적 있어요? 간단히 말하면 자기와 상대방이 좋아할 만한 노래들을 직접 녹음해서 만드는 카세트테이프예요. 중간에 하고 싶은 말을 끼워 넣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단 한 사람을 위해서 만드는 라디오 프로그램 같은 거구나, 그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나요. 젊은 아빠의 목소리를 엄마 몰래 들으면서.
  사실 카세트테이프는 저장 장치로서는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아요. 저장 장치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튼튼하고 오래가는 것일 텐데, 카스트테이프는 예민하기 짝이 없거든요. 늘어나서 음질이 손상되기 쉽고 엉켜서 못 쓰게 될 수도 있죠. 자기력에 약해서 자석을 갖다 대면 아주 손쉽게 망가지기도 한대요.
  그렇지만 거기 담긴 곡들을 녹음할 때, 엄마에게 3분 14초짜리 곡을 들려주려고 아빠도 3분 14초를 똑같이 썼을 거예요. 원하는 지점에 제대로 녹음되지 않았거나, 소음이 섞여 들어간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여러 번의 3분 14초를 다시 견뎠겠죠. 들려주고 싶은 곡을 고르는 데 드는 시간, 말하고 싶은 것을 고민하는 시간 같은 걸 빼도 상당한 시간이 들었을 거예요. 나에게 카세트테이프는 그런 의미가 있어요.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간을 선물하려 할 때에는 먼저 똑같은, 때로는 더 많은 시간을 써야만 한다는 걸 알려 주는 도구.
  내게 그게 필요하다는 걸 당신을 알았던 거예요. 그것도 어쩌면 나보다도 더 정확하게.
_88~90


  보라색 목소리를 가진 꿈의 이상형 S가 설희에게 카세트 플레이어를 선물한다. 그리고 나는 2020년 “이십칠도 모자라서 이십팔”이라는 세상에 단 세 개밖에 없는 (어쩌면 네 개일지도..?) 카세트테이프를 새해 선물로 받았다. 아니다, 생각해보니 세상에 단 하나라는 정확하겠다. 왜냐하면 선물 받은 사람은 세 명이지만, 각각에 카세트테이프의 재생 목록은 달랐으니까. 거기 담긴 곡들을 녹음할 때, 설희 아버지께서 그랬듯이 내 친구도 그랬을 거다. 들려주고 싶은 곡을 고르고, 제대로 녹음되지 않았거나 마음에 들지 않게 녹음된 여러 번의 녹음을 견뎌냈을 거다. 우리에게 선물하려고 그 곡들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썼을 거다. 생색 하나 내지 않는 친구에게서 너무 큰 수고스러움을 봐버렸다. 친구 덕분에 나는 설희보다 빠르게 “카세트테이프의 전성기는 아주 짧았지만 충분히 아름다웠을”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친구가 내게 준 모든 것들은 카세트테이프를 닮았다. 제대로 시간을 들인 것들. 아웃풋도 큰데, 언제나 보이는 아웃풋보다 보이지 않는 더 큰 인풋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 어쩜 이렇게나 정직하신지.. 요령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게 빤히 보였다. 공들인 시간이, 켜켜이 쌓은 마음이, 제대로 떡하니 보이는 것들. 느껴지는 게 아니라 정말 보였다. 직접 그리고 칠하고 만든 오색찬란한 3D 입체 손편지지가 그랬고, 한 명도 겹치는 아티스트가 없는 가내수공업 카세트테이프가 그랬고, 친구가 물어다주는 콘서트나 공연 소식이 그랬고, 오아시스 포함 내 취향 스티커 모음이 그랬고, 나으 페이보릿 하얀 색 꽃들로만 채운 꽃다발이 그랬다. 어떻게 이렇게 시간을 쓰고, 마음을 쓰는 거야.. 친구의 마음이 담긴 선물을 받을 때마다 내 친구 시간 잡아먹는 시간 도둑이 있다면 그건 나일 거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한참 저었다. 어떤 현실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기괴하게 달콤하고,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게 사랑스럽다. 내 친구가 그렇고, 친구가 내게 해준 선물들도 하나같이 몽땅 그랬다.


 나보다 내 취향을 더 찰떡같이 알고 추천해주는 너한테 나는 특기 같은데, 나한테 너는 내가 너무 좋아하하기만 하는 취미 같아서.. 너를 기쁘게 하고 싶을 때마다 네가 내가 그러는 것처럼은 너를 기쁘게 할 수는 없을 것 같아 의기소침해지는 나를 네가 알까.


  나보다도 더 정확하게 내게 필요한 것이 무언지 아는 나의 소중한 친구야. 어제 오늘 비가 세차게 내린다. 내일까지 비가 올거래. 너 혼자 있는 밤이 외롭지 말라고, 네 곁에서 함께 하고 싶어서 비가 내리나봐. 수많은 빗방울들과 다정한 봄밤 보내길 바라! 다정하고 따숩게 보내다가 이번 주말에 만나!!!!!

매거진의 이전글 언더스토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