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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Sep 15. 2023

공룡의 이동 경로

멀리서 보기를 잘했다 그리고 가까이에서도


  솔아씨는 어떤 동물 좋아해요? 새기고 싶은 동물 있어요?
  지원이 그렇게 물어서 나는 신이 나서 대답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뭘 물어주면 좋았다.
  뿔 달린 동물이요. 몸에 새긴다면 뿔 달린 동물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코뿔소나 유니콘 같은.
  그러자 지원의 얼굴에 재미있어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런 순간이 좋았다. 내 이야기가 저 사람을 신나게 하는 순간. 표정으로 맞장구를 치는 것 같은 순간. 그런 순간이면 왠지 내가 조금쯤 저 사람 마음에 들었을 것 같다고 여겨지고 그러면 마음이 좀 놓였다. 그런 데서 안심을 했다. 너무 오래되어 언제부터인지 알 수도 없었다.
  그거 좋다. 멋지다.
  지원이 그렇게 말해서 나는 으쓱했다.
  그럼 트리케라톱스는 어때요? 뿔이 세 개잖아.

_55, 나의 작은 친구에게
  네, 너무 좋아요. 뿔이 있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솔아가 좋았다. 단단해지고 싶구나. 솔아는 타투를 무척 마음에 들어했고 피망이라고 이름도 붙여주었다.

_105, 나 여기 있어


  마음을 먹어버렸다. 와구와구. 타투를 새긴다면 뿔이 있는 트라케라톱스다. 나도 단단해지고 싶다. 무려 뿔이 세 개!!!(그런 의미로다가 느낌표도 세 개) 언제나처럼,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자꾸 마음 먹게 만든다. 누워 있는 나를 일으켜세우고, 가만 있는 나를 나아가게 만든다. 모르던 길로 돌아가볼까. 배우고 싶던 걸 시작해볼까. 빗길 운전을 강행해볼까. 귀여운 선물을 고르고 손편지를 적어볼까. 집을 지척에 두고 외박해볼까. 다음 계절 약속을 미리 잡을까. 아주 먼 미래를 잠깐 당겨 상상해볼까. 그리고 오늘처럼 이렇게 뭐라도 끄적여볼까. 그러다보면 잠깐 납작해졌던 내가 금방 빵빵하게 부푼다. 오예예~

  피망이처럼 귀여운 이름도 지어줄 테다. 음, 뭐가 좋을까. 오이로 정했다. 먹는 걸 좋아하지는 않지만, 향기는 너무 좋아하니까. '오이'라는 이름에 초식 공룡을 내 팔에 새겨넣으면 내가 나를 안을 때마다 오이 비누향이 날 것만 같다. 뽀득뽀득 산뜻하겠지!

  <나주에 대하여>도 그랬지만, 화진 작가님의 이번 작품을 읽으면서도 정말 너무 좋았다. 책을 읽는 장소가 어디든 상관하지 않고 와락 눈물을 글썽일 만큼 좋았다. 단편집 속에는 주희, 솔아, 지원, 현우, 그리고 피망이가 나온다. 나는 하나고 화자는 다섯인데, 다섯 각각한테서 내 모습이 보이면 그렇게 신기하고 반가울 수가 없었다. 가까이 있었다면 냉큼 손을 잡아다가 하이파이브라도 치고 싶은 심정.

  "나에게 사랑은 태도이자 습관, 규칙이자 성격. 원칙이자 자랑. 그리고 내 몸집만한, 내 영혼의 크기만한 콤플렉스"라고 말하는 주희에게서, "사람을 상상하는 일. 겉으로 보이는 행동이 전부라고 애써 믿으면서도 그 안을 조금이나마 헤아려보는 일. 나는 그런 걸 그만둘 수는 없는 것 같아. 사람은 주머니 같다. 나는 그 안이 궁금"해하는 주희에게서, 나를 봤다. 우리는 실패하고 실패하면서도(가끔 도가니가 아파도) '주머니' 탐험기를 포기하지 말자!

  "다시 새겨주겠다고 왜 얘기 안 해줘요. 나는 서운했다. 언제나 그런 것이 서운했다."라는 구절에서 솔아가 너무 귀여웠고, "먼저 슬퍼하는 능력"은 애틋해서 눈물이 조곰 났다. 나도 솔아처럼 "내가 가진 걸 다 망가뜨리거나 못 쓰게 만든대도 바깥에서 들어온 비라는 것, 흠뻑 적시는 것, 힘찬 기세로 내려 집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 좋"다. 우리는 산책을 '잘'하는 사람이 될 때까지 '속수무책'과 '전형적인 것'을 좋아하자! 조금 티가 나도 괜찮아!

   "내가 하지 않는 말을 진심으로 하는 사람이어서"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아무데나 내키는 곳으로 책을 접는 솔아의 모습을 담아두는 지원이는 나와 닮았다. 반면에 "내가 절대 쓰지 않는 단어들"로 "머릿속에 생각이 너무 많이 들어 있으면 자꾸 무거워서. 그걸 덜어내려고 쓰는" 지원이는 나와는 다르고 멋지다. 우리는 "내가 서 있는 곳이라면 벽과 천장과 바닥을 모두 느끼며 살"자!

  "온종일 같이 있는 건 난데 위로는 이상한 데서 받는다"고 귀여운 투정을 부리는 현우. "타인에 대한 모든 고민들이 결국 나를 향하고 나를 위한 것으로 흘러가는" 현우의 '깔때기'는 내가 싫어하는 나를 닮았다. 되고 싶은 건 딱히 없지만 이왕지사 무엇이 된다면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게 되고 싶어하는 건 내가 좋아하는 나를 닮았다. 우리는 기꺼이 우리가 더 좋아하는 사람을 하자!

  채식 공룡 피망이는 묘한 데서 행동력이 있고, 마음대로인 점이 나와 닮았다. 우리는 멀리서 보기를 잘했다. 그리고 가까이에서도!!

  솔아의 말랑한 팔에 있던 피망이는 부채 끝으로 자리를 옮긴다. 솔아를 바라보며 "멀리서 너를 보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는 피망이는 다정하다. 그러면서도 한편 '멀리서라도' 너를 보기를 잘했다 같은 말은 못하겠다. 거리를 두고나서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들도 있을 수 있으니까.



  오늘의 추신은 멀리서 봤기에 알 수 있었던 것들.


1. 사랑이 "태도이자 습관. 규칙이자 성격. 원칙이자 자랑. 그리고 내 몸집만한, 내 영혼의 크기만한 콤플렉스"인 주희는 "우는소리 하는 사람이 되기 싫어 그저 울"기를 택한다. 싫은 소리 않고 알아서 잘하는 사람들이 마음에 걸리는 이유가 이걸지도 모르겠다. "시절 지난 신문지를 물에 불리고 찢고 다시 뭉쳐 종이 그릇을 만드는 것처럼" "크고 작은 상처에서 잘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인 동시에 "아플 때도 주희는 강하"다.


2. "배려를 받는 사람이 받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배려를 하는 느낌". 지원이가 솔아에게서 느낀 진심이 뭔지 안다. 왜냐면 여러 사람한테 너무 많이 받아왔으니까. 너무 멋진 배려를 받을 때마다 그 사람에게 먼저 그런 배려를 한 사람이 누굴까를 떠올리게 된다. 좋아하는 향수를 뿌려서 옷을 빌려준 사람이 누굴까. 빌렸던 반찬통에 사탕을 가득 채워 돌려준 사람이 누굴까. 식당에서 반찬으로 나온 꼬지 고기를 미리 일일이 빼놓은 사람은 누굴까. 더운 날 자동차 타기 전에 미리 에어컨을 켜둔 사람은 누굴까. 자기가 아니라 다음 사람을 위해 매뉴얼이나 기본 양식을 먼저 만들어준 사람은 누굴까.


3. "뒤틀린 마음이면서 겁은 많아서 누군가를 해치지는 못하고, 그 꽉 막힌 욕구불만을 이런 쪽으로 푸는 것 같"다고 자신의 타투를 자신만큼 복잡하고 불순하다고 지원이는 말했지만, 설아는 지원의 손등에 있는 나무 타투를 보며 "지원의 도안인 것이 분명하게 아주 심플"하다고 단박에 알아차린다. 자기가 생각하는 것보다 각자는 훨씬 더 근사하다. 설사 뒤틀렸대도 그것마저.


4. 솔아는 지원의 한숨에 자주 움츠러들고,  지원의 "내주지 않는 표정"을 두려워 했다. 하지만 지원의 한숨은 숨통이 트여서 겨우 편한 마음에 쉰 숨이었고, "그리고 지원은 소리 없이 자주 웃었다. 자주 솔아를 신경썼고 물끄러미 보았다. 고개를 돌리고 웃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솔아가 보지 못하는 웃음도 있었다."


5. 지원이 보기에 현우는 "꼬인 사람"이다. "서로가 다른 모양을 보여줄 때, 우리는 누군가를 이해할 수 없고 단지 존중할 뿐이라는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하는 유형의 사람"이고, "굳이 자신이 믿는 가정까지 입 밖으로 꺼내는 사람. 그게 중요한 줄 아는 사람." 아이러니하게도 지원이 보기에 "'내가 당신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당신의 의사를 존중해요'라고 말하지 않고 오롯이 '이해해요'라고 말"하는 주희는 남자친구 현우에게는 "자신을 설명하는 부류가 아니었"고, 현우는 "주희가 나에게 자신을 설명하기를, 너만은 나를 이해해줄 거라고 믿어, 하고 터무니없이 기대고 기대하기를 바랐다."

  적다 보니 역시나, 화진 작가님의 <작가의 말>이 맴돈다. 슬프고 안쓰럽다. 슬프지만 어쩔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좋아하는 것 뿐이다.


 누가 누구를 더 좋아하는 마음은 슬프고 안쓰럽다. 누가 누구를 덜 좋아하는 마음은 슬프지만 어쩔 수 없고. 가끔 삶을 사는 방식이 더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가 덜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가 기우뚱거리는 것이 전부인 것 같을 때가 있다.

_226,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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