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슬 Feb 06. 2024

쿄코와 쿄지

가끔 좋아함은 이렇게나 편리하죠. 모든 걸 설명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전 이제 ㅁㅎ 매니저님의 책 후기를 기다리면 되는 것이겠지요~~!~!~!! 제목이니만큼 책의 메인 스토리인 쿄코와 쿄지가 제 최애 글인데 ㅁㅎ 매니저님은 어떤 글을 가장 조아하실지 기대되는 거시에욥  기다리구 있겠습니다... 야호 "

  ㅅㅇ 매니저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다면 열 일 제쳐두고 후기를 작성하는 것이 인지상정. ㅅㅇ 매니저님께서 우리의 연결 고리인 한정현 작가님 신간을 생일 선물로 택배 상자에 네잎클로버 키링과 깐식까지 더해 보내주셨다. 일찍이 『소설 보다 2021 여름』에서 서로를 가로지르며 만났던  「쿄코와 쿄지 」와 『관종이란 말이 좀 그렇죠』 에서 감탄하며 읽었던 「리틀 시즌」을 이렇게 다시 만나 반가웠고, ㅅㅇ 매니저님의 기대에 보답하자면 역시나 「리틀 시즌」이 첫문장부터 단도직입적으로 좋았다. 물론 모든 단편이 애타게 좋지만서두.




매해 연말이 되면 그런 생각을 떠올린다, 올해 여름은 수박을 마음껏 먹지 못했다는 것.
_103, 리틀 시즌

  제철 과일 없는 계절 없다지만, "여름=수박". 이 공식은 거의 뭐 특히나 대전제에 가깝다. 덧붙여, 아무리 먹어도 만족할 수 없다는 것마저. 해가 길어진다 싶으면 복숭아, 청사과, 수박, 색색깔 싣고 동네를 지나는 과일 장수 트럭을 손꼽아 기다리고, 찬바람 불면 작년에 붕어빵을 샀던 주변을 어김없이 서성거린다. 이번 주 월요일 드디어 붕어빵을 개시했다. 팥붕2, 슈붕2, 3천원. 한여름 수박, 한겨울 붕어빵에 대해서만큼은 만족의 느낌이 들지 않는다. 각잡고 올겨울은 진짜 질리게 먹어야지, 다짐해도 절대 질리지를 않는다. 자매품으로는 여름날 콩국수와 겨울날 밀크티가 있다. 나한테는 콩국수를 먹어야 진정한 여름이 시작된 거고, 겨울이 다 가기 전 꼭 받침잔에 온전하게 구색을 맞춰 밀크티를 마시며 겨울을 보내줘야 한다. 하루를 마무리하고서도 해가 지지 않고 있어야 여름이고, 뜨끈한 캔음료를 잡든 친구 주머니에 손을 넣든 언 손 입김으로 호호 불어줘야 겨울이다. 봄날 흩날리는 벚꽃에도, 가을날 온세상 물드는 저녁놀에도, 나는 평생 노련할 수가 없는 사람이다. 세상은 온통 내가 어쩔 수 없는 것 천지다.




  "아니 뭐, 사실 거기서 주인공 둘이 콩국수 먹고 버스 정류장에서 서로를 기다려주거든? 레쓰비를 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리는 장면도 나오고. 난 그냥 그거 좋아했어."
  너도 수안 씨랑 콩국수 먹으러 가, 이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데 정작 류스케는 가벼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쳤다.
  "콩국수가 사랑의 음식이로군요."
  "그렇게 되려나. 아 맞다, 생각나는 대사도 있다. '우리 오늘을 살아요. 내일을 살지 말고 제발 우리 오늘을 살아요.' 이런 대사."
  "오늘을 살아요, 오늘을."
_125, 리틀 시즌

  뭐 하나가 좋아질 때는 그게 뭐든 운명 같을 때가 있다. 나한테는 위 구절이 그랬다. "오늘을 살아요, 오늘을." 심채경 박사님께서 지난 달 연차 쓰고 찾아간 강연에서도 어느 tv 프로그램에서도 하신 말씀 "오늘 할 일 오늘 다 하는 게 제 꿈이에요"이 연말을 맞이하는 내 자세였다. 이건 뭐, 사람도, tv도, 책도, 온통 나한테 '오늘'을 살라고 하니까 나로서는 방법이 없다. 운명을 받아들이고 오늘을 살 수밖에.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오늘치 몫을 살아간다.

  그렇게 사는 와중에 언제 봐도 다시 봐도 나를 울리는 것들에 저항없이 운다. 열 번이면 열 번 재깍재깍 나를 울리고야 마는 것들. 그러니까 나의 슬픔이라 다행인 것들. "자신의 몸만 한 고구마 자루를 끌고 가는 상화 선생님의 뒷모습", 미자 이모의 흰 머리를 보고 호주머니에서 뭘 부스럭대며 꺼내며 친구 녀석한테도 부탁했다면서, 너무 마음고생했을 것 같다고 말하는 미자 이모의 전남편, "그저 이모가 누군가를 사랑했고 또 존중받았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다. 어쩐지 안심이 되는 것만 같았다"는 영소, "자자에게 항상 “자자야, 오늘은 날씨가 좋아. 너는 무엇을 생각하니?” 물어주는", "여태까지처럼 자자에게 그저 밥을 가져다주고 딴청을 하며 기다릴", "굳이 눈을 마주치고 웃어달라 하지 않고, 억지로 목줄을 매고 산책을 시키지도 않는" 누군가를 알게 되어 다시는 바다에 뛰어들지도, 목을 매지도 않을 거라는 한주, "자신을 위한 것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는 깨달음을 준 영소의 엄마 그러니까 경자까지.



  "좋아하는 일, 나는 평생 그런 적이 없어서 그런가.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사는 사람 있으면 신기할 것 같네. 아무튼 영소야, 내 걱정은 마. 나, 여기서 운이 아주 좋아."
  "네? 어떤 운이요?"
  "여섯 명이 같이 방을 쓰잖아, 여기가."
  "네."
  "내 방엔 코를 고는 노인이 한 명도 없어."
  "그게, 운이 아주 좋은 거예요?"
  "그럼. 평생 운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야. 밤에 다들 아주 점잖게 주무셔. 아! 생각났다."
  "네? 뭘요?"
  "나, 산책보다도 이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싶다. 밤에 잠 푹 자기. 이걸로 해두면 나 요즘은 날마다 좋아하는 일 하고 사는 거네?"
  우리 자자도 이젠 좀 자요. 그래? 잘됐네, 영소 네가 한시름 덜었네. 네, 아, 정말 푹 잔다는 거, 너무 좋은 거긴 하네요, 나는 이렇게 대화를 이어가면서도 이모가 자신을 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에 마음이 아파왔다.
_136, 리틀 시즌

  나만 아는 귀여움으로 마무리해본다. 지난 달 말에 회사에서 해외 시찰 워크숍으로 몽골 울란바토르를 다녀왔다. 호텔에서는 2인, 3인으로 나눠 자고, 둘째날만 4인실 게르에 다섯이서 잤다. 게르가 너무 건조해서 코가 막혀 자지 못하고 나는 천장 가운데 동그란 창문으로 구름 지나가는 것만 한참 바라봤는데, 그때 누구 하나 코 골거나 잠투정없이 곤히 자는 걸 보고 보육교사가 아가들 낮잠 시간에 재우면 이런 기분일까 싶어 되게 귀여워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몽골 4박 5일, 운이 참 좋았다.

  P.S. ㅅㅇ 매니저님, 생일 선물 감사합니다! 답장으로 「쿄코와 쿄지」 최애 구절로 동봉합니다. 모든 걸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이렇게나 편리한 '좋아함'에 기댈 때도 계시기를 바랍니다!

  혼란스러운 마음은 그 웃는 얼굴과 말 속에 흩어집니다. 그래, 네가 행복하다면……. 가끔 좋아함은 이렇게나 편리하죠. 모든 걸 설명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_59, 쿄코와 쿄지
매거진의 이전글 편지에는 그냥 잘 지낸다고 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