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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늬의 삶 Sanii Life Jun 18. 2024

밴쿠버 잉베, 스티브스톤, 리치먼드, 캐필라노 外

8주차 일기 : 05/06/24 ~ 11/06/24

6/5(수)



글쓰기 모임 사람들과 영상통화를 하면서 즐겁게 오전을 보냈다. 이틀 전에 스시 레스토랑을 그만 두고 어제 매니저님께 주급은 어떻게 받냐고 연락했는데 답이 없어서 오늘 한 번 더 연락했다. 문자, 카톡, 두 번의 전화 끝에 연락을 받은 매니저님께서 주급 날에 paycheck를 받으러 오라는 말을 하셨다.

그러고 나서는 차이니즈 푸드 레스토랑에서 일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치열한 고민 끝에 낸 결론이었다. 원래 목요일에 트레이닝을 하고, 금요일부터 출근을 해달라고 했는데 갑자기 연락이 와서 인력이 부족하므로 오늘 트레이닝 받고 내일부터 이틀 간 나이트시프트로 일해줄 수 있냐는 말을 들었다. 초반에 나이트시프트는 힘든데 혹시 데이시프트만 가능하냐고 분명히 물어봤었고, 사장님이 면접 잡기 전에는 '데이시프트만 할 수 있어.'라더니 면접 가니까 '근데 모두가 데이시프트를 원해. 주2회는 데이시프트로 하고 주1회는 나이트시프트 해줘.'라고 해서 그러겠다고 협의를 본 상황이었다. 그런데 첫 출근 주부터 주 2회를 나이트시프트로 일하라니 황당하기는 했다.

고민하니까 보상으로 김치전을 해준다고 했는데 그분 위생이 꽤 좋지 않아보여서, 한국요리를 해주겠다는 마음은 너무나도 고마웠지만 그분이 해주는 요리를 입에 대기 너무 힘들 것 같았다. 데이시프트는 하루 8시간, 나이트시프트는 하루 12시간을 일하므로 이 레스토랑에서 이분이 해주는 요리를 먹어야 할 때가 많을 텐데 그런 내 모습이 정말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근로자한테 불리하게 말이 계속 바뀌는 것도 24시간 대기팀이 된 것 같아서 그냥 일하지 않기로 했다.

이후 약 열흘 간 무직이었는데 인생모토가 '최대한 후회하지 않는 결정을 하자.'인 만큼 이곳에서 일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에 대한 후회는 단 한 순간도 없었다. 인생사 새옹지마, 전화위복이라는 말이 있으니 이후에도 일자리는 계속 찾아왔고, 가장 원하는 목표는 개발자 취업이므로 레스토랑은 생활비를 버는 일터인 만큼 너무 힘들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았다. 아니다 싶은 곳이니 안 가기를 정말 잘했다.

몸은 안 좋지만 기분 좋고 싶어서 산책 다녀왔다. 오후 7시면 캐내디언들 한참 공원에서 개랑 아기들이랑 놀 시간이다. 케직 공원에 갔다. 1층 문 열고 나가려고 할 때부터 행복해졌다. 이 공원 역시 냄새가 엄청 좋다. 캐나다는 정말 자연으로 힐링하는 동네다. Pricesmart 가서 아이스크림 사왔다. 델몬트 코코넛파인애플맛인데 코코넛이 많이 씹히고 파인애플맛은 거의 안 났다. 상큼한 게 끌렸었지만 아니어도 나쁘지 않았다. 오후 8시대부터는 유튜브 편집하다가 일찍 잤다. 오늘 스시 레스토랑 두 군데에 지원했는데 한 군데에서 면접 연락을 받았다. 내일부터 또 잘 살아봐야겠다. 친구가 약 10개월만에 호주에서 간호사로 취직했다. 기쁘고 축하하는 마음이다. 나도 최대한 포기하지 말고 즐기며 지내야겠다.


6/6(목)



나도 잉글리시베이에서 노을을 한 번 보고 싶어서 나가보았다. 활기찬 바이브, 모래성을 지으면 뛰어노는 아이들, 타로 봐주겠다고 팻말을 들고 다니시던 분, 발리볼하는 사람들,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들, 캐나다구스와 갈매기가 밴쿠버의 잉글리시베이 해변에 서있는 모습까지 너무나도 멋진 풍경을 즐길 수 있었다. 노을도 정말 아름다웠다. 해는 순식간에 산 뒤로 들어갔고 주홍빛과 분홍빛은 30분 이상 오랜 시간 유지 됐다.

그나저나 밴쿠버는 5월부터 9월까지 여름이라던데, 올해는 유독 이상기후가 심해서 6월이 넘어서야 겨우 여름이 될랑말랑 하고 있다. 해가 뜨겁다가도 가만히 있으면 여전히 춥고 6월 중순까지도 비가 올 때가 잦다. 여름이 가장 환상적인 도시라더니 언제까지 흐릴 셈일까? 기후위기가 지구를 망치고 있나보다.


6/7(금)



전자상거래 플랫폼이 메인인 한인 회사에 지원했다. 업무 목록을 살폈을 때 프로그래밍 언어를 쓰는 개발과 엄청 가깝지는 않아서 기존의 커리어랑은 크게 연결할 지점이 없나 싶다가도, 그래도 컴퓨터를 사용하는 직업이고 포지션 이름 자체도 IT Specialist니까 경험해보고 싶었다.

로히드몰 입구쪽에서 사람들이 한 짝 당 한 명씩 문을 붙들고 있더라니 안쪽에 까마귀가 있었다. 내가 의외의 동물에 크게 웃으니까 까마귀를 쫓아내던 백인 아저씨도 즐거워했다. 여기저기서 침착하게 까마귀가 밖으로 나가기를 바라면서 손을 휘저어댔다. 우리는 목적지인 버나비도서관으로 향했다. 동행인이 레쥬메를 프린트했고 일정을 처리한 뒤, 일하던 스시 레스토랑에 가서 캐나다에서의 첫 paycheck를 받았다. 은행 어플로 들어가서 주급명세서를 등록하면 바로 돈이 들어오는 시스템이라 신기했다.

큰 일 하나를 해치웠고, 이제는 온전한 백수 상태가 됐다. 이럴 때일수록 잘 먹어야 힘이 나서 구직한다는 동행인의 말과 여행객처럼 여행을 하며 일상을 환기하자는 나의 의견대로 리치몬드로 향했다. 영화 파친코 촬영지라는 스티브스톤에 가서 새우와 연어가 가득한 버터플라이 피자를 주문했다. 진짜, 정말 너무 맛있었다. 피자 안 좋아하는 내게도 피자를 좋아하는 동행인한테도 인생 베스트 5 안에 드는 피자였다.

스티브스톤 커뮤니티 파크에 한참 앉아있는 동안 근심도 걱정도 없는 상태였다. 초록색과 좋은 공기, 따스한 햇살, 환상적이고 청명했다. 이후에는 항구(피셔맨워프) 쪽으로 이동해서 조금 걷다가 리치몬드 나이트마켓으로 향했다. 여러 개를 맛봤는데 다 맛있었고 그 중 코코넛망고 음료수가 최고였다. 동행인은 인생 음료수라고 평했고 나 역시 레시피를 알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거 먹으러 리치몬드 나이트마켓에 다시 갈 의향이 있다. 그리고 북미에서 가장 큰 야시장인만큼 사람들이 꽤 많았는데 다들 퍼스널스페이스를 지키는 편이라서 불편하지 않았고 어깨빵 당하는 경우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6/8(토)



1시간이 1초로 느껴질 만큼 순식간에 낮잠 잤다가 깼다. 푹 잤다. 중간에 코 고는 내가 느껴졌고 동행인은 내가 눕자마자 잠들었다고 말해주었다. 피곤한 날이다. 그래도 3일 간 있던 어지럼증은 싹 사라졌다.


6/9(일)



캐나다 플레이스는 해가 엄청 눈부셨다. Harbour Green Park 여기 좋다. 바로 옆에 공중화장실이 있다. 대마냄새는 나지만 다른 냄새는 거의 안 난다. 그리고 핸드드라이어가 수동이다. 수동 핸드드라이어 거의 처음 보는 거 같다. 그리고 여기 분수에 다 큰 성인남성이 자전거 끌고 혼자서 몇 바퀴 돌고 나가고 백인 노부부가 손 꼭 잡고 분수 물 아래를 가로질러 뛰기도 했다. 낭만적이다. 쌍엄지를 치켜올려 드렸더니 할아버지께서 엄청 좋아하면서 "땡큐!"라고 하셨다. 천천히 걸으면서 콜하버 찍고 다시 캐나다플레이스로 돌아왔다. 기분전환 제대로 됐다.


6/10(월)



온라인으로 캐필라노 서스펜션 브릿지 표를 구매해서 노스밴쿠버로 출발했다. 워터프론트에서 무료 셔틀을 타고 약 15분 뒤에 도착했다. 돌아올 때도 셔틀버스 타고 왔다. 흔들다리가 진짜 미친듯이 흔들린다. 핸드폰 꺼냈다가 다리 아래로 떨어트릴까봐 무서워서 웬만하면 주머니에 넣고 지퍼 잠갔다. 천천히 여기저기 산책하기 좋았다.

캐필라노 서스펜션 브릿지는 기본이고 트리탑 어드벤처는 노인과 어린이도 무리하지 않고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안전한 공중 계단이었다. 랩터스 릿지에는 부엉이 혹은 올빼미가 있었다. 네이쳐 엣지 보드워크, 흔들리지 않아서 안전하지만 절벽을 걷는 기분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클리프워크를 걸었다. 클리프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구운 연어와 피쉬앤칩스를 먹었다. 옆 상점에서는 아이스크림을 사먹었는데 쿠키도우는 평범하고 쫀득한 바닐라에 초코칩쿠키 박힌 맛이었다. 레몬요거트쿠키맛 아이스크림이 진짜 맛있었는데, 진짜 레몬요거트쿠키맛이다. 먹어봐야 안다. 아삭아삭한 식감에 새콤달콤하다.

연어양식장이라는 Capilano River Hatchery는 운영시간이 빨리 열고 빨리 닫아서 못 갔다. 우린 아직 밴쿠버에서의 시간이 많으니까 다음 기회가 있겠지 싶다.


6/11(화)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깨달았다. 차이니즈 푸드 레스토랑 면접을 본 뒤 합격하고 마음이 가벼워져서, 하지만 안 가기로 결심하고는 또 다시 초조해져서, 그렇게 이날 새로운 스시 레스토랑에 캐셔로 면접을 보기까지 일주일 간 참 열심히도 돌아다녔구나 싶다. 8주차는 밴쿠버에서 주민으로서 살기보다는 조금 더 관광객처럼 열심히 여행한 주간이다.

오늘은 면접을 두 번이나 본 날이다. 며칠 전 지원했던 아이티 스페셜리스트 사무직 쪽에서 연락이 왔는데, 업무를 들어보니 윈도우나 MS Office를 설치하는 것도 포함이었다. 한국으로 치면 전산직이라고 보면 무방할 것 같은데 한국에선 고용안정성이 좋으나 여기선 언제든지 해고될 수 있으니 커리어를 이쪽으로 전환하기는 좀 그런 것 같다. 입사 전에는 회사 내부 분위기가 어떨지 알 수 없는 것도 리스크가 크다고 느껴졌다.

향후 10년 이상은 개발을 계속 하고 싶다. 하지만 영어를 써야 하는 환경이래고, 해당 회사 이전 구인글을 보면 비록 몇 년 전이라 현재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2주에 80시간을 넘기지 않도록 야근을 없애고자 하고 매일 점심을 제공하는 복지가 좋았다. 개발자 구직 전 캐나다 회사를 경험해본다는 걸 의의로 두면서 열심히 일하면 될 것 같은데, 희망연봉과 비자상태를 묻는 전화면접에서 희망연봉을 "가릴 처지가 아니라 최저임금도 괜찮습니다."라고 말해버린 게 너무 걸렸다. 대면면접 기회가 온다면 연봉협상을 다시 해봐야겠다.

캐나다 개발자는 초봉이 90,000 정도 된다. 나는 3년 경력이 있으므로 120,000 정도는 받으면서 일하고 싶은데, 최저시급으로 풀타임 근무 하면 직군이 어디든 30,000도 못 받고 사는 거다. 사실 전산직 업무만 보면 내가 오버스펙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주변에 상담을 해보았더니, 캐나다에서는 2004년생도 무조건 연봉협상 한다고 면접 때 네고해보라는 답이 돌아왔다.

다른 하나는 스시 레스토랑 캐셔 인터뷰였다. 사장님께서 디테일하게 업무 전반적인 부분, 매장에 대한 설명, 돈 이야기를 먼저 해주어서 좋았다. 대만인과 교포 직원이 있어서 영어로 일하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회사 생활보다는 조금 더 개방적이고 유연한 환경이라서 몸은 조금 고생하더라도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덜할 것 같았다.

그나저나 오늘은 캐나다 버스에서 마법 같은 일을 겪었다. 처음 가보는 길인데 구글맵 GPS가 잘 안 잡혀서 멈춰있는 정류장에 내릴지 말지 우왕좌왕 하던 때였다. 옆의 아시안 남자아이가 눈을 급하게 굴리는 나와 핸드폰 화면에 띄워둔 구글맵을 번갈아 보더니 막 변성기가 온 목소리로 "이 버스는 turn around해요."라고 말해주었다. 고맙다고 말하며 뛰쳐내리려 했는데 버스 문이 닫혀서 열리지 않았다. 욕 먹을 걸 각오하고 여성 기사님께 "Excuse me."라고 하니까, 한국이었으면 아마도 크게 한소리 들었을 텐데, 기사님이 빙그레 웃으면서 문을 열어주었다. 너무나도 감사하고 동화 같은 일이었다.

오늘은 준비해온 초기자금이 다 떨어져서, 쓰고 싶지 않았던 비상금을 꺼내야 했던 날이다. 동행인과 함께 앞으로의 워홀 계획을 다시 짰다. 몇 시간 고민한 끝에 비성수기 전에 일자리를 구하면 1년 간은 한국으로 돌아가거나 세계여행을 하기보다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를 경험하며 동시에 여기서 각자의 본업을 향해 도전해보기로 했다. 하여튼 밴쿠버는 예쁘다. 우리 집에서 내려다보는 밴쿠버는 더 예쁘다. 아름다운 도시다. 피곤한 날에도 인구밀도 적은 자연을 내다보면 스트레스가 싹 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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