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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늬의 삶 Sanii Life Nov 08. 2023

보청기 낀 젊은이

한국을 떠나고 싶은 이유 5

이번 주제는 사실 떠나고 싶은 이유라기보다 한국에서 지내면 거슬릴만한 일들이 생길 것 같아 지레 겁 먹고 쓰는 글이다.


2023년 10월 원인 불명의 감각신경성 난청 판단을 받았다.

대화의 70%는 알아들으나, 일정 데시벨 이하의 소리를 듣기 힘들다는 내용이었다. 예시로는 '속삭이는 소리', '높고 가느다란 소리'가 있다.


이대로는 청신경의 노화 속도가 빨리 일어날 수 있으므로 건강을 위하여 보청기를 끼게 되었다. 보조기구를 사용하면 청신경 노화 속도가 정상적일 거랬다. 손상된 청신경을 회복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앞으로는 작은 소리를 크게 듣지 않고도 있는 그대로 캐치할 수 있게 되어 청신경 자극에 도움이 된댔다.


이 과정에서 의사는 "청신경이 죽었습니다. 회복할 방법은 없습니다."라고 했는데 청능사는 "누가 죽었다고 그랬어요? 죽은 게 아니라 손상된 거라 정밀검사 때마다 약간씩 결과가 다를 겁니다."라고 했다. 인터넷 세상의 누군가는 "청신경은 우리 몸에서 죽었다가도 유일하게 회복될 수 있는 기관이래요."라고도 했고, 청력이 아예 나갔다가 한 달여 쯤 뒤에 정상치로 돌아온 경험담도 읽었으니 희망을 가져보겠다.


그렇지만 검색 한 번 제대로 해본 적 없으면서 나를 위로하기 위해 '보청기 끼면 나중에 좋아질 수 있어.'라고 옆에서 설레발치는 건 싫고, 그것보다 더 싫은 건 위로 한 마디 없이 본인이 정밀검사 결과지를 받은 의사도 아니면서 주제파악 못 하고 타인의 아픔 앞에 회복이 쉽진 않을 거라고 판단하는 것 같을 때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 역시 인간인지라 마음의 짐을 덜어주는 사람들이 좋다.


아무튼 '이제는 보청기를 꼈으니 절간 같은 사무실에서 사람들이 속닥거리며 말 거는 소리를 단번에 들을 수 있겠다.', '보청기까지 꼈는데 못 듣는 거면 내 문제가 아니라 말을 엉망진창으로 하는 상대방 문제라는 게 더욱 확실해진다. 그러니 긴장하지 않아도 되겠다.'라는 생각에는 마음이 편한 것 같다.


하지만 걱정 되는 부분이 세 가지 있다.


하나, 불쌍히 여기는 시선이 없으면 한다.

시력이 안 좋아져 안경을 끼면 생눈보다 불편하다. 마찬가지로 보청기도 정상청력일 때보다는 불편해지는 게 맞으나, 나를 사랑해서 보청기를 착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잠깐 마음이 아픈 건 괜찮은데 그 이상의 동정은 사양하겠다. 모든 말을 크게 소리지르면서 한다거나 이런 건 나를 위한 게 아니라 기만이다.

청각장애가 아니라 경도와 중도 사이의 난청이니 보청기를 끼면 정상청력이다. 그리고 안 들리던 크기의 소리가 정상적으로 들리는 거지 모든 사운드가 더 크게 들리는 게 아니고, 이말인 즉슨 보청기 없이도 평범한 크기의 소리는 다 듣는다는 뜻이다.

시력도 마찬가지다. 시각장애라면 안경을 껴도 보는 게 힘들 수 있다. 하지만 시력이 낮고 난시가 없다면 가까운 곳은 안경을 끼나 안 끼나 변함 없이 잘 보이는 거고 먼곳일수록 안경을 껴야 잘 보인다.

병원에 다녀온 날 보청기를 껴야 한다고 말하자 가까운 사람들이 이야기하기도 했다.

"네가 그렇게까지인가? 내가 작게 트름하는 소리도 다 듣는데." (좋은 청력)

"나는 너랑 대화하면서 네 목소리가 크거나 작다고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어." (좋은 청력)

"어? 보청기를 껴야 한다고? 너 잘 듣는데? 나랑 똑같은데?" (정상 청력)


둘, 일하면서 이어폰 끼고 있는 사람으로 오해받지 않으면 한다.

보청기의 형태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귀 위쪽에서부터 얇은 줄을 매다는 형태이며, 나머지는 남들한테 안 보이도록 외이도 형태로 맞춤제작 해 안쪽에 꽁꽁 숨기는 모양이다. 나는 이어폰이나 귀마개를 조금만 끼고 있어도 불편해하는 사람이라 전자를 골랐다.

그런데 청능사분이 '이 디자인도 여자분들은 머리카락을 길러서 안 보이도록 하기도 한다. 머리 기르는 걸 추천한다.'라고 말했다. 그럴 생각 없다고 답한 뒤 안경이나 보청기나 그게 그거라고 생각하는데 귀쪽은 사회적 인식이 아직 안 좋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본인이 괜찮으면 괜찮은 건데, 유럽에서는 전자의 디자인을 많이들 택하나 한국에서는 왜인지 후자를 주로 택한다는 말을 들었다.

경쟁사회라 약한 청력이 본인의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장애인에 대한 배려와 복지가 제대로 마련되어있지 않은 나라이므로, 특히 청각장애인은 겉으로 티가 나지 않으니 상대가 못 들은 게 아니라 본인이 무시 당한다고 생각해 못된 짓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건가?

어르신들도 아예 노년이 아닌 이상 보청기를 끼기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고, 젊을수록 더욱 절망적일 수는 있겠다. 나 역시 "젊은 사람이 어쩌다 벌써부터."라는 말을 들을까 무섭긴 하지만, 전보다 인식이 많이 괜찮아졌기를 바란다.

어쨌든 자세히 안 보면 무선이어폰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회사에서 농땡이 치거나 예의 없는 사람으로 보여지고 싶지는 않다. 그러기 위해서 보청기를 착용하게 됐다는 말을 직장 내부 여기저기에 해두어야겠다. 누군가가 나를 오해하더라도 '저거 보청기래요.'라며 그들끼리 알아서 이야기하기를 기대해본다.


셋, 본인을 돌아보지 않고 상대 탓부터 하는 사람이 없으면 한다.

귀가 좋은 사람도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을 때 말을 걸면 못 듣기도 하고, 웅얼거리는 발음에 여러 번 되묻기도 한다. 긴장할 때 더 잘 듣게 되는 사람과 상황이 있는가하면 멍해지는 경우도 있다. 처음 만난 사람의 말투나 발음이 익숙지 않아 초반에 여러 번 되물으며 적응하는 경우는 너무나 일반적이다.

나 역시 3년 전까지는 청력이 정상치였으며, 작년까지도 왼쪽은 정상에 오른쪽도 이상소견의심 정도였으니 잘 안다. 그러니 누군가한테 대화를 걸 때는, 상대방과 가까운 거리에서 이목을 집중시킨 뒤 눈을 마주하며 말하는 게 맞다. 혼자서 얼레벌레 쏟아놓고 본인은 말했는데 상대가 못 들었느니 어쩌느니 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그리고 나는 보청기를 끼게 되었으므로 큰 상관이 없지만 누군가가 청력이 안 좋다고 직접 이야기까지 한 거면, 그와 대화할 때는 웅얼거리지 말고 계속해서 작게 말하지도 말자. 그 정도는 매너 아닌가. 약자를 배려하자.


2023년 11월 14일. 보청기를 처음 착용하게 되는 날짜다. 앞으로 보청기에 대한 타인의 언급들을 모조리 기록했다가 나라별로 빈도와 인식을 비교해보는 것도 좋겠다.


p.s. 어제도 내가 속삭이는 내용을 못 듣고 두 번 되묻길래 글로 적어서 보여준 사람이 있는데! 수많은 정상청력 사람들이 속삭이는 걸 못 듣는데 내가 그 정도인가, 싶어서 약간 억울하다.

하지만 정밀검사 결과 청신경이 손상되긴 했다니까 시력이 어느 정도 떨어져도 잘만 살다가 직장생활 시작하면서 회의 PPT 자료를 잘 보기 위해 안경 맞췄던 것처럼, 보청기도 더 수월한 사회생활과 전시회나 영화관 등에서 속삭임 받을 때처럼 필요한 상황에 더 유익하기 위해 끼는 거니까 크게 아쉬워하지 않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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