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보 아저씨
점심시간 가게에 개량한복을 입은 노부부가 함께 들어섰다. 소셜커머스에 음식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티켓을 올려놓았는데, 연세가 있으신 분들이 스마트 폰을 이용해 티켓을 구매해서 왔다는 사실이 무척 신기하면서도 젊은 세대에 뒤처지지 않는다는 생각에 참 보기가 좋았다. 그 연세의 대부분의 노인들이 가게에 오면 서로 별다른 대화 없이 식사만 하시는 경우가 많은데, 이 노부부는 서로 많은 대화를 정겹게 나누는 모습이 기분 좋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나와 아내는 저 나이가 되어서도 지금 저분들처럼 서로 마주 보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
여자 분은 아주 단아한 인상이었고, 남자 분은 구레나룻과 턱수염, 콧수염이 길고 볼에도 털이 소복하게 나있었다. 그 남자 분을 보면서 속으로 누군가와 많이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한참을 누구와 닮았는지를 떠올리다가 문득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세상을 살다 보면 자기 가족이나 친구 같은 이들을 제외하고도 평생토록 기억에 남을 고마운 사람이 한 명은 있게 마련이다. 나에게도 그런 분이 한 분 계신다. 아주 잠깐의 인연이었지만,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평생 잊을 수 없을 그분.
1999년의 초여름이었다. 당시 나는 대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1학년 1학기를 두 달 정도만 다니고는 더 이상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어릴 적 꿈이 과학자, 군인, 경찰 사이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며 수시로 계속 바뀌던 나는 솔직히 꼭 무엇이 되겠다는 명확한 꿈을 가지진 못했었다. 내가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도 모른 채 막연한 꿈으로 지원했던 육군사관학교에서는 1차 서류전형에서 바로 떨어져 버렸다. 그렇다고 위대한 과학자가 될 자신도 없었고, 마찬가지로 훌륭한 경찰이 될 자신도 없었다. 나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려 했지만, 집에서는 어떻게든 뒷바라지를 해줄 테니 꼭 대학은 가야 한다고 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려면 그래야만 한다고 했다.
결국 나는 강원도에 있는 한 대학교의 경찰행정학과에 진학을 했지만, 공부를 잘해 장학금을 받아서 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등록금과 생활비 등이 집에는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두 달 정도 지나면서 집에서는 나에게 생활비를 보내기가 힘들어졌고 나는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아무리 대학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그보다는 우리 가족의 생계가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경찰이 꼭 되고 싶다는 명확한 신념도 없었다.
내 위의 두 누나들이 모두 그랬듯이 그렇게 나도 대학을 그만두었다. 그리고는 우연히 친구의 소개로 서울 김포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면접을 보러 갔는데, 단기간 이었지만 당시 웬만한 아르바이트보다는 보수가 더 괜찮았다. 나를 면접하는 담당자 분이 나에게 서울에 지낼 곳이 있냐고 물어봤다. 나는 지낼 곳이 없었지만, 친구가 소개해 준 괜찮은 일자리를 잃고 싶지 않아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면접을 마치고 당장 다음날부터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지낼 곳이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근처에 있는 허름한 싸구려 여인숙에 일주일치 선불을 건네고 머물기로 했다. 아주 오래된 여인숙이었는데, 방에는 냄새도 퀴퀴하게 나고, 이불도 아주 오래되고 낡았었다. tv도 채널을 손으로 돌리는 아주 낡은 것이었는데 그마저도 지지직 거리며 잘 나오지가 않았다. 사람의 목소리보다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아서 거의 보지를 않았다. 화장실과 세면대도 공용으로 사용하게 되어있었다. 가스 불을 사용하는 취사장도 함께 사용하게 되어있었던 것 같은데, 그곳은 한 번도 사용해 보지를 않았다. 우선 취사도구가 없었을뿐더러, 일을 마치고 무언가를 사서 조리를 해먹을 만큼의 넉넉한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참을 수 없을 만큼 배가 고팠을 때 빵 하나와 우유를 하나 사서 먹었었다.
아침과 점심은 회사에서 해결할 수가 있었다. 일이 아침 일찍부터 하는 일이라서 보통 3시 30분에 마쳤는데 나는 오히려 그렇게 일찍 마치는 것이 더 싫었다. 왜냐하면 5시에 마치는 날에는 시간을 조금 버티다가 6시쯤 되면 가끔 저녁도 그곳에서 해결을 하기도 했었는데 3시 30분에 마치면 몇 시간씩 그곳에 머물러 있을 명분이 없었기 때문에 저녁을 굶거나 우유 하나와 빵 하나를 사서 먹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더 큰 문제는 주말이었다. 토요일에는 1시에 마쳤고, 일요일에는 아예 출근을 하지 않으니 토요일 저녁부터 다음날까지 쫄딱 굶거나 우유 한 두개와 빵 한 두개로 버텨야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주말에 어울릴 사람도 없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평생을 김해에서만 살아온 내가 서울에 친구가 있을 리 없었다. 친척도 없었고 어떻게 건너 건너서 어울려 볼만한 사람도 전혀 없었다. 월급이 나오려면 한 달이 지나야 했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수중에 몇 푼 있지도 않은 돈을 잘 나눠 쓰며 아껴둬야만 했다.
빠르게 일주일이 지나고 여인숙에서 짐을 챙겨서 나왔다. 나는 가방 하나를 등에 메고, 농구 가방이라 부르던 둥글고 긴 가방 하나를 또 어깨에 메고 출퇴근을 하게 되었다. 처음 여인숙을 나왔던 그 날 아마 오후 3시 30분 회사를 마치고 나왔던 것 같다. 초여름의 햇볕이 내리쬐는 김포 거리를 정처 없이 가방 두개를 메고 돌아다녔다. 걸어 다니다가 다리가 아프면 앉아서 쉬었다가, 또 걷다가를 반복했다. 걷는 내내 생각했다. 당장 잠자리가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그런 고민을 하며 한참을 걷고 있는데 문득 이 세상이 너무나 낯설기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 하지만 모두 나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사람들이고, 내가 지금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어떠한 상황인지에는 누구도 관심이 없었다. 길가에 우뚝우뚝 서있는 건물들은 나에겐 왠지 모르게 날카롭고, 거칠게 느껴졌다. 갑자기 여인숙의 방이 무척 그리워졌다. 퀴퀴하고 낡고 냄새가 나는 지저분한 방이 그토록 그리울 수가 없었다. 낯선 곳에서의 유일한 나만의 공간이었던 그곳. 그 날 몇 번이나 그 앞을 지나며 속으로 생각했다. 수중에 있는 돈을 탈탈 털면 며칠 정도는 더 머물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월급을 타려면 아직 3주가 넘게 남아 있었는데, 그렇게 돈을 다 써버릴 수는 없었다.
나는 고민을 하다가 밤을 새워보기로 했다. 다행히 날씨는 초여름 날씨라서 밤새 밖에서 얼어 죽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밤을 새우더라도 그렇게 계속 돌아다니며 밤을 새울 수는 없었다. 다리도 아팠고, 허기도 졌다. 어디서 쉴 곳이 필요했다. 하지만 어디서 쉬어야 하는지가 난감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것이 계속 신경이 쓰여 계속해서 구석진 곳을 찾아다녔으나, 어느 곳이건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곳은 없었다. 나는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불이 다 꺼진 한 학교가 보였다. 문이 굳게 닫힌 학교에는 아무도 없었고, 사람들이 그 안으로 들어올 일도 없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담을 넘었다. 깜깜한 학교의 운동장 그곳으로 은은한 달빛이 비쳤다. 도시의 불빛으로 전혀 느낄 수 없었던 달빛이 그 도심의 한가운데 자리 잡은 불이 꺼진 깜깜한 학교 운동장에 살며시 푸른빛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운동장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렇게 앉아서 하늘을 바라봤다. 그 어두운 운동장에서는 바라볼 것이 하늘밖에 없었다. 잘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주 미세하게 별이 보이기도 했다.
밤과 달 그리고 별. 이들은 전혀 새로운 세계를 잠시나마 만들어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낯섦과 외로움은 기꺼이 그들의 새로운 세계로 나를 밀어 넣었다. 그 새로운 세계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래서 더욱 슬퍼졌다. 내가 처음으로 잠을 잘 곳이 없어 노숙을 하던 날 세상은 너무나 차갑고 무섭게 느껴졌다.
잠시 그 새로운 세계에 빠져있던 나는 몸이 아주 지치고, 피곤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초여름의 날씨라도 밤이라 제법 쌀쌀했지만 학교 운동장 한쪽에 웅크리고 누웠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다는 게 그리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새 눈이 스르르 감기고 잠이 들어버렸다. 그렇게 잠시 눈을 붙이고,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아직도 새벽이었다. 달빛과 별빛은 한 층 더 밝아졌지만 추위는 더욱 매서워졌다. 순간적으로 학교 안으로 들어가서 추위를 피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이불이 없었기에 옷을 몇 벌 더 꺼내서 덮어봤지만, 다시 잠들기는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일어나 앉았다. 가만히 앉아 있으니 한기가 드는 것 같아서 덮었던 옷들을 주섬주섬 가방에 집어넣고는 다시 담을 넘어 학교 밖으로 나왔다. 새벽의 거리는 조용했다. 터벅터벅 걸으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서서히 아침이 밝아오고 내가 갈 곳이 있다는 것이 그렇게 반갑고, 고맙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며칠을 공원 벤치나 구석진 길가, 학교 운동장을 전전하다가 하루는 늦은 시간 지하도를 지나게 되었는데, 어떤 아저씨 한 분이 신문지를 덮고 거기서 자고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곳이라 이전에는 부끄러워서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누군가 자고 있으니 나도 해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주위를 살피다가 잠시 동안 다니는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퍼뜩 주위에 굴러다니는 신문지를 얼굴에 덮고 벽 쪽을 향해 누웠다. 원래 누우려고 하는 그 순간이 부끄럽고 힘들어서 그렇지 일단 누워서 자리를 잡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곁에 자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 왠지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든든하기도 했다. 그리고 신문지라는 것이 참 신기했다. 처음에는 부끄러워서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 급하게 덮어쓴 것이었는데,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나는 크게 깨달았다. 신문지가 얼마나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지를. 어느 새 신문지를 덮어쓴 얼굴이 훈훈해졌다. 나는 누워서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발자국 소리가 뜸해졌을 때 얼른 일어나서 주위에 흩어져있는 신문지들을 주워 와서 몸을 덮었다. 그리고 다시 얼굴을 덮은 뒤 잠을 청했다. 몸이 따뜻해지는 신문지의 포근함과 신문지 특유의 냄새가 너무나 다정하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나는 아주 곤하게 잠이 들었다. 아마 노숙을 한 이후로 처음으로 숙면을 취하고, 몸에서 추위가 아닌 온기를 느끼며 잠에서 깼던 것 같다. 그때 생각했다. 이제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오늘은 또 어디서 밤을 보낼지 고민할 필요 없이, 자면서 몇 번씩 추위에 떨며 일어날 필요 없이 신문지 몇 장을 구해서 이곳에서 해결을 하면 되겠구나 하고. 마치 아주 소중한 보금자리를 하나 얻은 것 같은 행복한 기분이었다.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신문지를 걷어내고 일어났을 때 이미 그곳엔 여러 명의 사람들이 잠을 자고 있었다. 몇몇은 어린 학생으로 보이기도 했다. 나는 일어나 출근을 했고, 그렇게 또 며칠을 거기서 밤을 보냈다.
노숙을 하기 전 내가 처음 김포에 와서 여인숙에 머물 때, 여인숙 골목길 입구에서 오며 가며 마주치는 아저씨가 있었다. BYC라는 간판을 커다랗게 걸어놓은 속옷 집이었는데, 아저씨는 얼굴에 털이 소복했다. 그리고 속옷가게를 홍보라도 하시는 듯 주로 하얀색 러닝셔츠만을 걸치고 계셨다. 가끔 그 앞을 지날 때면 속옷 집 아저씨는 동네 어르신이나 친구분으로 보이는 분과 함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바둑을 두고 계셨다. 당시 낡은 TV라 방송도 제대로 안 나오던 여인숙 방에서 마땅히 할 것도 없었던 나는 지나가다가 바둑을 두시는 것을 보고는 가끔 구경을 하고는 했는데, 어느 날 아저씨가 나에게 바둑을 둘 줄 아냐고 물어보셨다. 내가 조금 둘 줄 안다고 말하자 아저씨가 한 판 둬보자고 하셨고, 잠깐이지만 그렇게 서로 알고 지내게 되었다. 하지만, 여인숙에서 나온 이후로는 그곳으로 갈 일도 없었고, 바둑 한 두 번 뒀던 아저씨에게 짐을 잔뜩 들고 다니며 내가 노숙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왠지 아저씨나 주변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저씨는 어디를 다녀오시는 길인 듯했는데 나와 길에서 마주쳤다. 아저씨는 요즘 잘 안보이더니 어디 갔냐고 물었다. 나는 사실대로 말하기 부끄러워 그냥 주변에 다른 곳으로 옮겼다고 말했다. 두툼한 가방을 두개씩이나 메고서 말이다. 아저씨는 잠시 나를 훑어보시더니 바둑 한 판 두러 가자고 하셨다. 나는 밤이 되기 전까지 계속해서 거리를 돌아다녀야 하던 터라, 시간을 보내기 좋겠다 싶어서 아무 말 없이 아저씨를 따라 아저씨 가게에 가서 바둑을 두었다. 바둑을 두면서 아저씨가 물었다. 진짜 머물고 있는 데가 있느냐고.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내 곁에 놓여있는 짐이 가득한 가방들을 힐긋 보고는 아저씨가 이미 짐작하셨을 거라 생각하고 사실대로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아저씨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봉고차에서 잠을 자도 좋다고 말씀하셨다. 아저씨의 가게 앞에는 아저씨의 봉고차가 한 대 있었는데, 그곳에서 잠을 자도 좋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몇 번 만나지도 않은 사람에게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선뜻 자신의 차를 내어줄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더군다나 나 같이 어린 노숙자에게 말이다. 나는 예의상 한두 번 거절을 했지만 아저씨께서는 괜찮다고, 봉고차에서 잠을 자라고 하셨다. 지하도에서 이전보다 편하게 잠을 잔다고는 하지만, 길에서 자는 것과 차에서 잠을 자는 것은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결국 아저씨께 너무너무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그날 밤 나는 아저씨의 봉고차에서 잠을 잤다. 길거리에서 잠을 자다가 처음으로 봉고차에서 잠을 자게 되었을 때, 봉고차는 결코 좁고 불편한 곳이 아니었다. 나에게 있어서 그곳은 세상 어느 곳보다 포근하고 아늑한 공간이었다. 누구에게도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곳.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이 아닌 폭신하고 따뜻한 의자. 이 세상에 내가 마음 편히 몸을 눕힐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 그토록 소중하고 행복한 것인지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더 이상 무겁고 불편한 짐을 들고 다닐 필요도 없었다. 짐을 봉고차에 놔두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봉고차에서 일주일이 조금 넘게 지내며 무사히 한 달을 채울 수가 있었다. 나는 고향인 김해로 내려가야 했다. 단기계약직이라 한 달만 일을 하기로 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첫 월급을 받은 그 날 나는 음료수 한 박스를 들고 아저씨의 가게로 향했다. 아저씨는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는 한사코 받으려 하시지 않으셨다. 돈이 없어 길거리에서 잠을 자던 사람에게 뭔가를 받기가 부담스러우셨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신세를 지고도 그 정도밖에 보답을 못해드리는 것이 오히려 못내 아쉬웠다. 나는 아저씨의 손에 그것을 억지로 쥐어드리고는 이제 고향으로 내려간다고 건강히 잘 지내시라며 작별인사를 건넸다. 그때 아저씨께서 한 말씀하셨다.
"그동안 고생했습니다. 보니까, 이렇게 지낼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고향에 돌아가서 잘 지내세요."
아저씨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남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한 번도 반말을 하신 적이 없었다. 아저씨께서는 인사치레로 그렇게 말씀을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말이 아직도 마음속에 남아있다. 이렇게 지낼 사람이 아닐 것 같다는 그 말. 아저씨께서는 그때 하셨던 말을 기억하지 못하고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그 말은 나에게 너무나 큰 힘이 되었다.
누구에게도 주목받거나, 칭찬받거나 위로를 받을 수 없었던 그때, 이렇게 지낼 사람이 아닐 거라는 아저씨의 그 말은 내가 나 스스로 너무 보잘 것 없고 초라하다고 느낄 때 나를 일으켜 세워주고, 버팀목이 되어주는 크나큰 한마디였다.
옛날 털보 아저씨 생각에 가게에 온 노부부 손님에게 괜히 서비스를 더 챙겨 드린다. 언젠가 멋진 모습으로 아저씨께 나타나 보답을 해드려야지 하는 생각만 할 뿐 아직 멋진 모습이 되지 못한 내가 그와 비슷하게 닮은 사람에게나마 작은 서비스를 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얼마 전 인터넷 로드맵으로 그곳을 찾아봤더니 속옷 가게가 아닌 다른 곳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털보 아저씨를 과연 찾을 수 있을까 하고 걱정이 되었다. 내가 언젠가 멋진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차일피일 미루다가는 평생 기회를 잡지 못하게 될 것이고, 두고두고 후회를 하게 될 것만 같다는 불안이 엄습해 왔다. 빠른 시일 내로 잘나진 못했지만, 평범한 모습으로라도 아저씨의 앞에 나타나 그때 정말 감사했다며 인사를 드리고 싶다.
당시 나는 몸으로 마음으로 모두 많이 지치고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경험이 너무나 소중한 추억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어렵고 힘든 시절의 경험일수록 더욱 값진 보석이 된다는 것을 지나고 나서야 조금씩 깨닫게 되는 것 같다.
누구에게나 그것이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힘들고 어려운 시절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인생의 사계절 중에서 언제나 봄에 머물 수 있는 행운만이 있으면 좋으련만 혹독한 추위의 겨울은 누구나 겪게 되는 필연의 것이다. 겨울을 빨리 벗어나느냐 그러지 못하고 오랫동안 머물러 있느냐 하는 것의 차이가 있을 뿐. 그리고 겨울이 찾아오는 것이 필연의 것이라면 봄이 찾아오는 것 또한 필연의 것이다. 지금 너무나 힘들고 지쳐서 모든 것을 놓아버린 사람이 있다면 내가 털보 아저씨에게 들었던 말을 그에게 해주고 싶다.
“당신은 이렇게 사실 분이 아니에요.”
겨울의 나무는 죽은 듯 고요하지만 그 속엔 이미 봄을 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