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묵히 일하는 아저씨와 나의 첫 장사

묵묵히 일하는 아저씨와 나의 첫 장사

묵묵히 일하는 아저씨와 나의 첫 장사


늦게 대학교에 들어가서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고 노인복지기관에서 어르신들과 함께 일을 한 적이 있었다.

어르신들과 함께 일해 보면 대략적이나마 어르신들의 성향을 알 수 있다.


노인복지기관에 일을 하러 오셨다고 하셔서, 그리고 이미 일을 오래 하셨다고 하셔서 모든 분들이 다 만족을 하고 일을 하시는 것은 아니다.


물론 대부분 일에 대해서 완전히 만족을 하시진 못하시겠지만, 그래도 밝고 즐겁게 일하시는 어르신이 계시는 반면 불만 표현을 지나치게 하시는 어르신, 욕을 잘하시는 어르신, 이것저것 잘 챙겨주시면서 뭔가를 요구하시는 어르신 등 아주 다양하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조금이라도 더 관심을 가지고 챙겨보게 되는 어르신들은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시는 분들이다.


그런 분들은 아무런 말씀을 하시지 않기에 더욱 조심스럽고 어렵고 또 한편으론 대단해 보이시기까지 한다. 그렇게 묵묵히 일하시는 어르신들을 뵐 때마다 생각나는 분이 한 분 계신다.


내가 2003년 겨울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할 때였다.


부산 해운대에 살고 있을 때였는데, 아침 5시 30분까지 인력소로 가면 거기서 그날의 일터를 지정해줬다.


보통 한 조에 트럭 있는 사람 한 명을 끼워 넣고 조원들이 그 차를 타고 함께 일터로 움직이고는 했었다.


그 당시 해운대에는 모델하우스를 짓는 곳이 많았다.


나 역시 그 많은 모델하우스 건설현장 중에 한 군데에 배정을 받아서 이름 모를 아저씨의 트럭을 얻어 타고 일을 했다.


내가 갔던 인력소에서 4명 정도 그곳에 가서 일을 했었는데 전혀 알지 못하던 우리들도 같은 인력소에서 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약간의 동료의식 같은 것들이 있었다.


당시 나는 가장 어린 나이였기에 함께 갔던 아저씨들 사이에서 일하는 사이사이 잔심부름도 해드리곤 했는데, 그래서였는지 아저씨들이 제법 귀엽게 봐주셨다.


그곳의 모델하우스 현장에는 수십 명의 건설인부들이 있었다.


건설회사에 소속이 되어 있는 회사 직원 인부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인력소를 통해서 오게 된 인부들이었다.

인력소 인부들의 일과는 이랬다. 아침 5시 30분까지 인력소에 도착해서 인력소에 걸려오는 전화에 귀를 기울이며 기다린다.


인력소의 소장은 아침마다 전화기를 붙잡고 분주하다.


이런저런 건설현장에서 연락이 오면, 소장은 인부들을 나눈다. 차가 있는 사람, 없는 사람. 기술이 있는 사람 없는 사람. 남자와 여자. 가끔 청소도우미로 오시는 아주머니들도 계셨다.


이렇게 대충 조를 짜서 각자의 일터로 향한다. 일을 배정받지 못한 사람은 그냥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보통 7시나 7시 30분부터 일을 시작하고, 9시쯤 찬을 먹는다. 찬은 보통 라면 또는 국수 같은 면 종류가 나온다.


밥을 먹을 수 있는 함바집이 옆에 있으면 그곳에서 먹고, 없으면 봉고차로 참을 실어서 현장으로 가져다준다.


참을 먹고 나면 다시 일을 시작한다. 12시가 되면 점심을 먹는데 이것도 마찬가지로 함바집이 없으면 차로 밥을 실어서 온다. 점심을 먹고 나면 오후 한 시까지는 오침을 하거나 각자 쉬는 시간을 가지고 한 시부터 다시 일을 시작한다. 그리고 3시에 또 한 번 참을 먹고 오후 5시나 5시 30분에 일을 마친다.


그럼 다시 인력소로 돌아가서 그 날 일당의 10%를 인력소 수수료로 떼고 나머지를 받아서 집으로 간다. 나는 일당이 5만 원이었기에, 수수료 5천 원을 떼고 4만 5천 원을 지급받았었다.


하루 종일 공사장에서 일하고 손에 쥐는 그 4만 5천 원은 아주 의미가 큰 돈 이었고 결코 쉽게 쓸 수 없는 돈이었다.


그렇게 다니 던 중. 하루는 해운대 지역의 모델하우스가 아닌, 다른 지역의 모델하우스에 배정을 받았다. 부산의 어느 곳이었는데,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해운대에서 트럭을 타고 2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곳이었다.

그 날은 일요일이었다. 막노동을 하시는 분들 중에는 일요일에 쉬는 분들이 제법 많았다. 그 당시에는 의아해했다. 비 오는 날에 어차피 쉬어야 하는데, 일요일에 꼭 쉬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이제 생각해보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참 어리석었던 것 같았다. 그 사람들도 모두 가정이 있는 사람들이고 한 가정의 가장들인데 말이다. 가족들하고 보내는 시간을 나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튼 그 날 나는 어떤 아저씨 한 분과 단 둘이서 그곳으로 향했다. 아니, 아저씨라고 하기에는 조금 더 나이가 많고, 노인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젊은 그런 분이셨다. 키가 작고 몸이 비쩍 마른 분이었다. 아저씨와 둘이 도착한 그곳의 모델하우스 규모는 좀 작은 편이었고, 다른 인부들은 전혀 없었다.


그곳에는 분양 상담 준비를 하고 있는 직원들 몇 명만 분주했다. 아저씨와 나의 일은 모델하우스 건물 밖에 쌓여있는 생나무 목재를 모델하우스 3층까지 올리는 일이었다.


생나무는 그리 굵지 않았지만 아주 길었다. 그리고 각목이 아닌 생목이었기에 어깨에 올려 메고 걸으면 걸음을 옮길 때마다 긴 나무가 휘어져 휘청 거리며 흔들렸다.


한 번에 두개씩 어깨에 짊어지고 3층까지 올리는 일이었는데, 계단을 한 번 올라가야 1층이 나왔다. 그리고 계단을 올라가면 중간에서 한 바퀴를 꺾어 또 계단을 올라가면 2층 이런 식으로 총 다섯 번의 계단을 올라가야 3층이 나왔다.


그리 힘들거나 하진 않았지만 계속 오르내리다 보니 다리가 제법 아팠었다. 그곳에는 공사 현장의 규모가 작다 보니 함바집이 없었다.


그리고, 일요일이라 아저씨와 나 이렇게 일하는 사람이 두 명이다 보니 우리 두 사람을 보고 참을 가져오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아침 9시와 오후 3시에 먹는 참을 그날은 모두 걸렀다. 그렇다고 돈을 더 주거나 하는 것은 전혀 없었다.


분명히 다른 사람 같았으면 뭔가 불평불만을 했을 텐데, 그 아저씨는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묵묵히 일을 하셨다.


“막노동은 힘이 아니라 요령!”이라고 했다.


군대를 다녀온 젊은 나도 다리도 아프고 힘에 부쳐 헉헉거리는데 아저씨는 땀도 별로 흘리지도 않고, 그리 힘든 내색 없이 묵묵히 일을 하셨다. 점심식사비용은 이미 지불이 되어있는 근처 식당에서 먹었다. 점심을 먹고 나면 잠을 자든 자지 않든 1시까지는 쉬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그 아저씨는 점심을 먹고는 조금 쉬더니, 나에게는 조금 더 쉬다가 하라며 말씀하시고는 일어나서 바로 일을 하기 시작하셨다. 보통 막노동이라는 것이 중간중간 쉬었다 하는 것이 보통이다. 마실 것들을 마시기도 하고 담배도 한대 태우고 참도 먹고 하면서 말이다.


내가 일을 하면서 느낀 점은 그런 행동들이 일을 하기 싫어서 그렇다기보다는 그런 시간적 틈을 둠으로써 하루하루 몸으로 먹고사는 바로 그 몸뚱이를 조금이라도 아껴두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목수나 미장이 같은 기술을 가진 사람들은 괜찮았지만 아무런 기술 없이 몸으로 때우는 우리 같은 잡부들은 쉬지 않고 했다가는 어디 하나 고장 날게 뻔했다.


그런데 그 아저씨는 묵묵히 쉬지 않고 일을 했다. 아무런 불평불만을 하지 않고서. 나이 드신 어른이 그렇게 일을 하시는데 혼자만 쉴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만약 다른 사람들도 제법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쉬고 그 아저씨 홀로 그렇게 일을 한다면 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섞여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하며 쉬엄쉬엄 일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단 둘이 있는데 아저씨께서 그렇게 열심히 하니 나로서는 쉬엄쉬엄 할 명분이 없었다. 나는 요령이 없어서인지 오후가 되어 시간이 점점 흐를수록 힘겨워졌다.


그나마 버티게 해 준 건 아저씨의 그 묵묵하고 성실한 모습이었다. 그곳에는 일요일이라 작업을 감독하는 작업반장도 없었다. 십장도 없었다. 우리를 지켜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를 감독하거나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저씨는 부지런히 목재를 날랐다. 고등학교 수능을 마치고부터 수차례 막노동 현장에서 일을 했지만, 그렇게 미련할 정도로 우직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날 마칠 때가 다되어 나의 몸은 이미 녹초가 되어 있을 때 생목 두 장을 어깨에 턱 메고 계단을 묵묵히 오르는 그 아저씨의 뒷모습을 봤을 때 나는 어떤 경외심까지 들었다.


그날 일을 마치고 온 나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 샤워를 하려고 양말을 벗다가 깜짝 놀랐다. 왼쪽 엄지발가락 발톱이 시커멓게 피멍이 들어 있었다. 이상하게 오른쪽 발가락은 괜찮았는데 왼쪽 엄지발가락만 그렇게 멍이 든 것이었다. 나의 습관상 왼쪽에 무게가 더 실려서 그렇게 된 듯했다.


하지만 그리 큰 통증은 없었기 때문에 크게 걱정을 하지는 않고 샤워를 하고 간단히 저녁을 먹고는 곧바로 잠이 들었다. 일찍 잠이 들었던 탓인지 새벽에 출근할 때 일어나야 할 시간보단 조금 더 일찍 잠에서 깼다. 다리가 욱신거렸지만 일어나서 간단히 세안을 하고는 거실에 앉았다.


그런데 왼쪽 엄지발가락 발톱이 이상했다. 시커멓게 멍든 발톱이 계속 덜렁덜렁거려서 살짝 잡아당겨 봤더니 발톱이 통째로 쑥 하고 빠져버렸다. 나는 깜짝 놀랐다. 엄지발가락 부분이 크게 아프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상태로 계속 몸을 무리하기는 버겁게 느껴졌다. 뭔가 몸에 이상이 생길 것만 같았다. 아무런 기술도 학력도 없던 나는 덜컥 겁이 났다. 몸 하나 부지런히 굴려서 먹고살아야 하는데, 몸에 이상이 생기면 어떻게 하나 하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 날 일을 하러 가지 않고 집에서 쉬었다. 나는 고민을 했다. 당장 일을 해야 하긴 하는데, 어디서건 일을 하게 되면 계속 발에 무리가 갈 것 같았다.


우선은 발이 나아야 무슨 일이건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생활비는 계속 들어가니 가만히 집에서 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대학도 못 나오고 아무런 기술도 없는 내가 어디 편히 앉아서 일하는 곳을 구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내 일을 한 번 해보자는 것이었다. 물론 내 일이라고 해서 발에 어느 정도의 무리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닐 테지만, 적어도 내 몸을 돌보아가면서 할 정도는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광고 신문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발견한 것이 잉어빵 장사였다. 당시 나의 수중에는 30만 원도 채 없었다. 그런데 잉어빵 기계를 10만 원에 대여를 해준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월에 10만 원이 아니라, 처음에 한 번만 내면 내가 그만둘 때까지 계속 사용하면 되었다.


대신 그들은 나에게 잉어빵을 만드는 반죽과 팥을 판매를 하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의 기술이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반죽을 만들어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어도, 아무런 기술도 없던 나에게는 오히려 본사에서 제공해 주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일단 본사에 연락을 하니, 먼저 장소를 정해서 연락을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본사에서 그곳으로 잉어 빵틀과 거기 들어가는 집기들을 배달해 준다는 것이었다.


나는 당장 집에서 나와 거리를 돌아다니며 괜찮은 자리를 물색했다. 이리저리 둘러봤는데, 해운대 좌동의 재래시장으로 들어가는 입구 쪽의 골목길이 아주 괜찮은 것 같았다.


앞에 횡단보도도 끼고 있는 큰 대로변 이었다. 내가 괜찮다고 생각한 자리에는 슈퍼마켓이 하나 있었다. 작은 구멍가게였는데, 내가 장사를 하기 위해서는 어차피 그 앞에서 해야만 했다.


슈퍼마켓으로 들어가 주인아주머니께 말씀드렸다. 그 앞 도로에서 장사를 하고 싶다고. 그러자 아주머니께서는 길에서 장사하려면 그냥 하면 되지 왜 그것을 자기에게 말하느냐고 말씀하셨다.


나는 가게 앞쪽에서 장사를 하니까 당연히 말씀을 드리는 게 맞는 것 같다고 말씀을 드렸다. 아주머니는 어차피 내 땅도 아니지만 하고 싶으면 하면 된다고, 흔쾌히 그러라고 하셨다.


솔직히 나는 가게 앞이라 안 된다거나 딴 곳에서 해라는 등의 부정의 말을 들을 것만 같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우리들 모두가 누군가에게 어떤 부탁을 할 때에는 모두들 어떤 두려움, 즉 거절에 대한 두려움을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당시 나의 상황은 아니, 우리 가족의 상황은 그동안 그랬듯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였다. 오랜 시간 그렇게 지내다 보니 사회에 대한 불신, 타인에 대한 의심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더욱 두려움이 컸고, 말을 꺼내면서도 거절당할까 봐 무서웠던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쉽게 허락을 해주셔서 너무나 감사했다.


나는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다음 날 잉어빵 체인의 본사에 연락을 해서 그곳으로 물건을 받아 그곳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 장사는 두 달이 채 가지 못했다. 당시 나는 잉어빵과 어묵 장사를 함께 했는데, 하루는 어묵을 꼬챙이에 꿰어 만든 것 한 바구니와 간식으로 먹을 것들을 자전거에 메고 장사를 하러 갔다.


그런데 내 잉어빵 틀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내가 멍하니 그 자리에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으니, 슈퍼마켓 아주머니께서 나오셔서 말씀하셨다.


구청에서 단속반이 나와 잉어 빵틀을 실어 가려 하기에, 아주머니께서 직접 하시는 거라며 가져가지 말라고 말리셨는데, 그 구청 직원들이 하는 말이 민원이 계속 들어와서 철거를 할 수밖에 없다고 하며 전봇대에 매어 놓은 쇠사슬을 끊어 가져가 버렸다고.


나는 잠시 품었던 희망이 그렇게 꺼져 버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 사회와, 인간에 대한 믿음 역시 또 한 번 부서져 버렸다.


나는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는 다시 터벅터벅 자전거를 끌며 집으로 향했다. 자전거의 핸들 양쪽에는 어묵이 꽂혀있는 꼬지가 가득 들어있는 바구니 하나, 그리고 내가 장사를 하면서 먹으려 했던 간식거리 하나가 걸려있었다.


참 황당하고, 우습기도 했다. 내가 있던 곳 조금 떨어진 곳에는 버젓이 단밤을 파는 노점이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또 조금 떨어진 곳에는 매운 떡볶이와 어묵을 파는 아저씨의 노점도 그대로 있었다.


우리들 노점 세 곳은 조금 떨어져 있었지만, 똑같은 길 위에 똑같이 있었다. 그리고 건너편에는 노점이 제법 많았는데, 건너편의 노점들 중에도 단 한 곳 철거된 것이 없었다.


그런데, 나의 노점과 나의 물건들만이 사라져 버렸다. 물론 길거리에서 불법 노점을 했었다는 것이 떳떳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도로정비라던가 해운대구의 정책상의 이유 등 어떤 필요에 의해 철거가 되었다면 수긍을 할 수가 있겠지만, 별다른 이유도 없이 다른 노점은 놔두고 오직 나의 것만을 철거해 갔다고 하니 정말 당황스러웠다.


누가 왜 그랬는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그 당시 나의 노점이 없어졌다고 해서, 신고를 했던 그 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당시의 그 누군가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한 가족이 의지하고 살아갈 힘이 될 수 있었던 소중한 것을 무참히 빼앗아 갔다는 것을 말이다.


어쨌든 결론은 그렇게 되었지만, 나는 아직도 당시의 그 과정을 너무나 사랑한다.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할 수 있었던 그 시절.


남들 눈에 비치는 내 모습에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 보다는 내가 열심히 살아간다는 것에 더욱 큰 의미를 둘 수 있었던 그 시절.


아직도 어머니께서는 말씀하신다. 우리 아들이 가장 멋있었을 때가 바로 그 때였었다고. 나 역시 그 시절이 사무치도록 그리워질 때가 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던 시절, 오히려 내 스스로에게 가장 충실했고, 자랑스러운 시절이었다.


오히려 가진 게 없었기에 더욱 거칠 것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가진 게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몸을 사리게 되고 조심하게 되는 게 인간의 본성이니까.


어쩌면 그래서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은 걱정을 가지며 불행하게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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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세부에 살던 때,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는 SM과 아얄라 몰이라는 2대 쇼핑몰이 있었다.

영화를 볼 때는 주로 아얄라 그룹에서 세운 아얄라 몰에서 봤는데, 그곳에서는 영화를 보기 전 아얄라 그룹의 기업홍보를 했다.


그때 나오는 말들이 정확하게 기억이 나진 않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문구.


‘이루기에 너무 큰 꿈도, 너무 작은 꿈도 없다’


우리가 꾸는 꿈은, 남들이 말도 안 되게 거창한 꿈이라고 하든, 그렇게 하찮은 게 무슨 꿈이냐고 하든 상관없이 모든 꿈들은 꿈 그것 자체로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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