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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고나 Feb 15. 2024

대구탕집 2층 공방  1

시간을 달리는 신비로운 공방 이야기.

01. 대구탕.     


홍사장은 오늘도 씩씩 거리며 정부장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야! 정부장! 이것도 하나 제대로 확인 안 했어?!!”     


“죄, 죄송합니다. 사장님.”     


커다란 덩치의 정부장이 비쩍 마른 홍사장 앞에서 머리를 연신 조아리며 대답했다.     


 사무실에는 십여 명 남짓의 직원들이 각자 자신들의 할 일을 바쁘게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모두의 신경은 그쪽으로 가 있었다. 하긴, 사장이 부장을 사무실 한복판에서 혼내고 있는데, 그런 상황에서 누가 일에 집중할 수가 있겠는가!    

 

“내가 보고서 마지막에는 두 칸을 띄우라고 했어? 안 했어?!!”     


 정부장의 잘못은 명확했다. 보고서나 기획서의 마지막에는 ‘끝’이라는 글자와 마침표 ‘.’를 찍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렇게 넣을 때는 반드시 두 칸을 띄우고 ‘끝.’ 이라고 적어야 했는데, 정부장은 한 칸만 띄우고 ‘끝.’ 이라고 썼다.     


홍사장에게 있어서 그런 실수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홍사장이 허공에 서류를 뿌렸다.  

   

“다시 써 와!!” 

    

“네. 사장님.”     


홍사장이 던진 종이를 정부장은 커다란 덩치를 구부려 주섬주섬 주웠다.     


찌익     


구부리고 앉는 정부장의 꽉 끼인 바지가 경쾌한(?) 소리와 함께 쭉 찢어졌다.     


“엇헛!!”     


정부장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벌떡 일어섰다. 홍사장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가지가지한다! 진짜!”     


사무실 몇몇 직원들의 어깨가 들썩였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소리 내어 웃을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지금 이 불편한 상황의 불똥이 자신에게 튈 것이 뻔했으니까.     


홍사장이 몇 마디 잔소리를 덧붙이고는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정부장은 홍사장이 사무실에서 나가고 나서도 잠시 그렇게 서 있다가 홍사장이 완전히 떠났다고 여겨질 때쯤 바짓가랑이를 움켜잡고 옷을 갈아입으러 허둥지둥 뛰어갔다.   

  

사무실에서 나온 홍사장은 자신의 차에 올라탔다. 더운 날씨 탓에 차 안의 온도가 높아서 내부가 후끈했다. 홍사장은 얼른 시동을 켜고 앞, 뒤 4개의 창문을 다 내렸다.     


“에이 씨.”     


그의 입에서 버릇처럼 B를 빼먹은 기초 알파벳이 튀어나왔다.     


날은 덥고, 직원은 제대로 일도 못하고, 날이 갈수록 대출 이자는 오르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수입하는 부품 가격도 오르고, 이건 뭐 하나 제대로 굴러가는 일이 없었다.     


홍사장은 신경질적으로 차를 몰아 회사를 벗어났다.     


점심시간.     


홍사장은 점심시간에 다른 사람들과 식사를 함께 한 적이 거의 없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밥을 혼자 먹지 말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는데 개뿔이다.     


그건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들의 말이고, 자기처럼 바쁜 사람은 혼자서 빨리 밥을 먹고 얼른 돌아가서 다시 일을 해야만 했다. 모여 앉아 시시덕거릴 시간이 어딨어? 한심한 것들!      


 공장 근처에는 대부분의 식당이 뷔페식이었다. 뷔페식으로 먹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직원들과 가끔 마주치면 불편했다. 말을 나누자니 귀찮았고, 그렇다고 회사 직원들인데 말 한마디 안 나누고 밥을 먹자니 어색했고.      

그래서 홍사장은 주로 차를 타고 고개를 넘어갔다. 공장지대에서 고개를 하나만 넘어가면 식당들이 모여있는 식당가가 있었기 때문에.     


‘뭘 먹을까......’     


하루 중 거의 유일하게 홍사장이 흥미를 느끼는 시간이 바로 이 시간이다. 점심시간에 뭘 먹을지 고민을 하고 먹는 동안의 시간.     


‘간단히 국수를 먹을까? 아니다. 오후에 일을 하려면 든든히 먹어둬야지. 국수론 안 되겠어. 그럼... 곰탕을 먹을까..... 아니, 아니야. 기름기 많은 음식은 이제 좀 피해야지. 의사도 기름진 음식을 줄이라고 했으니. 보자... 생선 구이를 먹을까? 가시 발라먹는 것도 귀찮은데.... 냄새도 날 것 같고.... 날이 좀 더워도 국물이 뜨끈한 걸 먹어야 밥을 먹은 거 같긴 할 텐데....’     


식당가에 모여있는 여러 음식들을 떠올리며 행복한 고민을 하는데, 커브를 꺾어 돌아가는 도로에 대구탕 가게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흐음...... 그래! 오늘은 속 편안하게 대구탕으로 하자!’     


 홍사장은 이 대구탕 가게를 자주 찾았다. 특히 아침을 거르고 커피를 마셨을 때처럼 속이 쓰리고 따가울 때는 어김없이 대구탕을 찾았다. 맑은 국물의 대구탕은 자극적이지 않고, 기름기도 없어서 먹으면 속이 편안했다.     

화려한 카페와 멋들어지게 지어놓은 대형 음식점들이 많은 산속의 식당가에 유독 혼자서 오래되고 낡아 보이는 작은 대구탕 가게.     


 거기다 길가에 있다고는 하지만, 커브를 돌아가는 길 인 데다가, 다른 카페와 식당이 입구를 가리고 있어서 눈에 잘 띄지 않는 대구탕 가게.      


대구탕 매장의 주인은 재밌으라고 붙여놓은 것인지, 아니면 사실을 있는 그대로 써놓은 건지 건물 외벽에 이런 현수막을 걸어 놓았다.    

 

숨은 맛집! 진짜 건물 사이에 숨어 있습니다!     


지난번 혼자 밥을 먹으러 갔을 때, 옆 테이블 다른 손님이 이 가게를 표현하는 말이 홍사장의 마음에도 딱 와닿았다.     


 당시 옆 테이블 다른 손님은 먼저 와서 음식을 시켜놓고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전화를 하며 대구탕 가게에 대해 열심히 설명을 했다.     


“아직 못 찾았어? 어? 어디라고? 거기 커다란 고등어 식당 간판 안 보여? 그래. 그래. 옆에 국숫집 있고. 보여? 그래 그 국숫집 맞은편에 카페하고 보리밥 식당 사이에 허름한 건물 하나 있잖아. 보여? 다 낡아 가지고 허름~~해 보이는 가게. 어? 그래. 그래. 거기. 거기루 와.”     


 말 그대로 정말 허.름.한. 가게. 밖에서 보면 왠지 쉽게 들어와 지지 않는 가게. 입구 앞에서 망설이다가 결국 돌아서게 만드는 낡은 외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지 않는 이유 중에는 재미없는 현수막까지 덕지덕지 붙여놓은 게 한몫한다고 홍사장은 생각했다.


그래도 홍사장에겐 괜찮았다. 이 지역은 점심시간에 사람들이 무지하게 몰리는 곳이라, 대부분의 식당에는 점심시간에 혼자 밥을 먹으러 가면 눈치가 많이 보이기도 했고, 몇몇 식당은 ‘한 명은 받지 않습니다.’라고 써놓기도 했는데, 이곳은 눈에 잘 띄지 않고, 외관도 허름해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아서 혼자서도 눈치를 보지 않고 먹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식당 중 한 곳이었다.     


 숨어 있는 가게인 만큼 주차공간도 그리 넓지 않았다. 가게 앞쪽에 주차하면, 이중주차를 하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어서 나중에 차를 빼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홍사장은 옆의 다른 가게들 쪽으로 넓은 곳에 주차해 놓고, 걸어서 대구탕 가게로 밥을 먹으러 갔다. 다행히 넓은 주차장은 공용으로 사용하는 주차장이라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홍사장이 가게 입구 방충망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낭랑한 목소리.     


대구탕 가게의 남자 사장 목소리가 들려왔다. 홍사장은 대답하지 않고 빈 테이블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대구탕 드릴까요?!”     


남자 사장이 물을 가져다주며 물었다.     


“예.”     


홍사장이 짧게 대답했다.     


홍사장은 대답하면서도 속으로 생각했다.     


‘올 때마다 똑같은 대구탕만 먹는데 뭘 매번 물어보지? 참 비효율적이란 말이야......’      

    

 홍사장이 처음 이 대구탕 가게에 왔을 때는 원래 여기를 오려고 왔었던 것이 아니었다. 이 근처에 있는 곰탕 가게를 갔었는데, 무슨 일이 있는지 임시휴무라고 써놓고 문이 닫혀있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 옆에 고등어구이 매장을 찾았는데, 그곳에 들어갔더니, 2인분부터 주문이 가능하다고 했다. 기분이 잔뜩 상해서 그냥 돌아가려다가 문이 열려 있는 대구탕 가게를 우연히 보게 되었고, 그렇게 이곳 대구탕 매장에 들어오게 되었었다.     


 처음엔 너무 낡아 보여서 다른 곳으로 가거나 그냥 회사로 돌아갈까 생각하다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도 귀찮았고, 굶기는 싫었기에 간단히 한 끼 때우고 돌아가자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처음 대구탕 가게에 들어섰을 때도 오늘처럼 남자 사장이 큰 목소리로 ‘어서 오세요!’라고 인사를 건넸었다.     


뭐지? 남자 사장의 나이가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40대 초중반?     


 낡은 건물에, 대구탕 매장이라 괄괄한 할배나, 욕 잘하는 할매를 예상하며 들어온 홍사장은 살짝 당황했다.      

 대충 자리를 잡고 앉자 한 여자가 물을 가져와 테이블에 놓아줬다. 이 여자의 나이도 40대 초중반. 둘이 하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부부 사이다. 그러니까 남자 사장과 여자 사장. 부부 사장. 

     

주방 쪽에 인기척을 살펴봐도 둘 이외에는 없다. 설마 저 둘이서 대구탕 가게를 한다고?     


홍사장은 여자 사장이 놓아둔 물을 컵에 따라 벌컥 한 모금 마셨다.      


“주문하시겠어요?”     


 여자 사장이 물었고, 홍사장은 대구탕 매장이니 당연히 대구탕을 주문했다. 얼른 먹고 가자! 오늘은 밥 먹는 일진이 사납구나!     


 낡은 가게에 40대 초중반의 젊은 부부가 하는 대구탕. 맛은 안 봐도 뻔할 듯. 젠장! 젠장이었다.     


주방에서 지지고 볶는 소리가 나더니 곧 음식이 나왔다. 근데, 모양이... 어? 제법 흉내는 냈네?   

  

가지볶음, 오이양파절임, 깍두기, 김, 부추전, 두부구이. 그리고 대구탕과 흑미가 섞인 밥까지.   

  

홍사장의 입에 군침이 살짝 돌았다. 눈으로 찬찬히 음식을 관찰하고, 음식 하나하나를 음미하기 시작했다.     


먼저 가지볶음.     


 적당한 짠맛과 감칠맛. 기름을 둘러 생긴 반들반들한 윤기와 알싸하게 풍기는 마늘의 향. 그리고 마지막 은은히 코끝을 스치는 참기름의 꼬솜~한 향까지. 좋아! 참기름의 향이 너무 강하면 느끼하게 느껴질 텐데, 적당했다. 마늘의 향도 너무 강하게 나면 살짝 역하게 느껴지는데, 이것 또한 적당했다. 일단 이건 합격.   

  

다음은 오이양파절임.     


오이는 안 좋아하니까 패쓰.    

  

그다음 깍두기.   

  

왐마?!! 이것은 그냥 깍두기가 아닌데? 보통 식당에서 나오는 큼직큼직한 깍두기가 아니라 아주 얇게 저미듯 썰어 젓갈과 함께 무쳐 나온 깍두기. 거기다 젓갈 깍두기에서 날 수 있는 비린 젓갈의 맛을 잡기 위해 함께 넣은 잔파까지! 기계로 자른 모양이 아니라 직접 손으로 하나하나 썰어서 만든 깍두기! 엄청 손이 많이 갈 텐데!! 이거 진짜 찐이다!     


홍사장은 깍두기 맛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의외였다. 이런 맛을 기대한 것이 아니었는데, 그냥 그저 그런 맛일 거라 생각했는데! 어디서 사 오는 건가? 아니면, 주방 안에 솜씨 좋은 할매가 한 분 계시나? 저 사람들이 만든 거라곤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후우~”     


홍사장은 고개를 갸웃 거리며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다음으로 넘어갔다.    

 

그다음은 김. 물론 이건 이 사람들이 바다에서 건져 말린 것은 아닐 거니까 만들어 놓은 것을 사 오겠지. 괜찮은 김을 사용하는지, 값싼 싸구려 김을 사용하는지 한번 볼까?     


김을 한 장 들어 흑미밥을 싸서 간장에 살짝 찍어 입에 넣었다.     


바삭바삭한 김. 조미가 되지 않은 돌김의 종류인데, 훨씬 풍미가 좋고, 바다향이 가득 풍겼으며 김 특유의 단맛이 돌았다. 그냥 일반적인 돌김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맛이 좋았다. 홍사장은 이 맛을 잘 알았다. 이것은 돌김 중에서도 최고급으로 치는 곱.창.김! 일 년 중 딱 한 달만 채취가 가능한 최상급 돌김. 김 원초의 모양이 곱창처럼 생겼다고 해서 곱창김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김이었다.     


이것 봐라? 김도 상당히 좋은 걸 쓰는 것 같은데? 허허.....    

 

반찬 하나하나를 먹어보고 음미할수록 점점 더 놀라웠다.     


다음 것도 가 보자!     


이번엔 두부? 홍사장은 양념장이 올려져 있는 두부를 젓가락으로 집어서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앗. 뜨!”     


 차가운 두부구이인 줄 알고 한입 크게 물었다가 뜨거워 화들짝 놀라며 얼른 다시 뱉었다. 뭐야? 이거! 미리 구워놓은 게 아니었어?     


홍사장은 대부분의 식당에서 그러하듯 두부구이 역시 미리 구워놓은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차갑거나 기껏해야 온장고에 넣어둔 따뜻한 정도의 온도라 생각했다. 그런데 갓 구워낸 뜨거운 두부구이라니!! 옷을 입혀 튀기듯 구워낸 두부구이의 겉은 빠삭빠삭하고, 속은 두부의 부드러움과 특유의 고소함이 넘쳐나는 두부구이. 그 위에 살푼 올려놓은 간장에 파와 양파, 고춧가루 등이 들어간 감칠맛이 넘치는 양념장의 완벽한 맛의 하모니!!


놀라웠다. 바로바로 구워낸 바삭한 두부구이라니!! 거기다 양념장의 맛까지!


두부구이의 엄청난 맛과 가득한 정성에 홍사장은 엄지 척할 수밖에 없었다.   

  

두부구이는 정말 예상을 훌쩍 벗어나는 엄청난 맛이었다.      


좋아! 마지막 부추전이다!     


 와삭! 씹히는 소리와 동시에 알싸한 방아향이 입안에 그득 퍼졌다. 뭐지? 방아? 다행히 홍사장은 방아향을 그리 싫어하지는 않았는데, 경상도식 부추전인 방아가 들어간 부추전은 호불호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양초가 살짝 섞인 방아가 들어간 부추전. 팬을 불에 먼저 달궈서 올리면 나타나는 전 특유의 테두리 끝 모양과 빠삭한 식감! 방아와 부추가 함께 잘 어우러져 입속에서 춤을 추면서, 바삭바삭 씹어먹는 홍사장의 입맛을 흡족하게 해 줬다.     


‘제법이군!’     


 생각보다 젊은 사람들이 장사를 하기에 솔직히 맛에 대한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밑반찬이 의외로 정갈하고, 맛이 너무 괜찮았다.     


‘그래도 중요한 건 메인이지!’     


 홍사장은 꼼꼼하고 까다로운 성격의 사람이었다. 자신이 생각한 그 틀을, 고정관념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틀에는 젊은 사람들은 대구탕의 깊은 맛을 잘 낼 수 없다는 것도 있었다.       

한 그릇의 대구탕이 그릇에 담아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가는 대구탕을 홍사장은 매의 눈처럼 날카롭게 살폈다.     

대구살. 콩나물. 애호박. 청양초. 홍초. 간마늘, 무 그리고 파..... 음? 파?     


홍사장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대구탕을 평소 그리 자주 먹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복국이나 아구탕처럼 맑은 탕으로 먹기에 좋은 음식이라 가끔씩 먹고는 했는데, 파를 이렇게 넣어서 주는 곳은 처음 봤다. 대구탕 위에는 자고로 철에 따라 미나리 또는 쑥갓이 올라와야 했다. 그것은 일종의 국룰 같은 것으로 홍사장이 여태껏 가봤던 대구탕 매장에서는 모두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     


 밑반찬으로 입맛엔 흡족했지만, 자신의 예상과 달랐던 음식 맛에 살짝 당황했던 홍사장은 이제야 자신의 예상을 따라가는 것 같은 기분에 스스로 만족했다.     


‘이게 젊은 사람들의 한계지. 한계. 디테일하지 못하단 말이야.......’     


 홍사장은 스티브잡스를 좋아했다. 그래서 그의 여러 가지 어록들도 자주 빌려 쓰곤 했는데, 이날 대구탕 매장에서 떠오른 스티브잡스의 명언.     


사업의 성패는 디테일에 달려있다!     


쑥갓이면 쑥갓이고, 미나리면 미나리지 도대체 대파는 또 뭐란 말인가? 무슨 곰탕인가??     


 홍사장은 혼자 속으로 욕을 하면서 한 숟갈 푹 떠서 입에 넣었다. 근데!! 우황! 머, 머선일이고?! 이게 머선 일이고!!?? 와~ 이게 무슨 맛??     


홍사장은 얼른 두 번째 숟가락으로 국을 퍼서 입에 넣었다.     

 

“으~ 조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입이란 녀석이 제멋대로 맛을 느끼고, 말을 뱉고 있었다!     


 대구탕 특유의 담백하고 시원한 국물맛! 적당한 파의 향과 뭉근하게 익어 입속에서 순두부처럼 녹아내리는 무. 아삭한 콩나물. 쫄깃하고 탱글탱글한 대구살까지!! 크~ 지대루다! 지대루야!! 

     

홀로 감탄을 연발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대구탕 한 그릇이 싹 비워져 있었다.     


 홍사장은 순간 당황했다. 이것을 경쟁이라고 부를 순 없었지만, 자신의 틀을 벗어나는 맛이었고, 그것에 잠시 정신을 놓았다는 사실에 창피했다.     


“더 필요한 거 없으세요?”   

  

“예? 아, 네. 괜찮습니다.”     


‘여기가 무슨 레스토랑인가? 그런 것까지 물어보게?’     


 다른 트집을 잡을 게 없었던 홍사장은 주인장의 그런 친절함이라도 트집을 잡아버리고 싶었다.     


 홍사장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을 하고 나왔다. 대구탕을 먹고 회사로 돌아가는 동안 입안에 계속해서 맛의 여운이 남았고, 음식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홍사장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맛은 있.었.다.     


 그때의 색다른 맛 경험 이후로 홍사장은 이 대구탕 매장을 자주 찾았다. 땀을 흘리며 먹는 뜨거운 대구탕 한 그릇은 몸도, 마음도 힐링이 되는 기분이 들어 좋았다.     


오늘도 정부장 때문에 난 화를 대구탕으로 풀 생각이었다. 뜨겁지만 시원~하게!     

비효율적으로 오늘의 주문을 받은 주인장이 대구탕과 밑반찬으로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     


“맛있게 드세요~”     


 대구탕 서빙을 하고 경쾌하게 돌아서는 여자 사장. 오늘도 남자 사장과 여자 사장은 하하호호 웃으며 즐거워 보였다. 코딱지만 한 좁은 가게에서 하루 온종일 둘이 붙어 일만 하면서 뭐가 그리 즐거울까? 매출도 얼마 안 될 거 같은데. 가족들 건사는 제대로 하는 건가? 남자가 야망이 있어야지. 딱 보니 하루하루 벌어먹는 거에 만족하고 사는 거 같은데, 저래선 10년, 20년이 지나도 여기서 똑같은 장사나 하고 있겠지...    

 

홍사장은 이곳의 음식은 맛있었지만, 주인장들은 별로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자신이 젊었던 시절에는 발에 땀이 마를 새 없이 뛰어다니고, 구두 뒷굽이 닳는 게 예사였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그런 게 없는 것 같았다. 야망도 없고, 꿈도 없이, 변화가 두려워 현재의 불행에 안주하는 젊은 사람들.     


홍사장은 차려진 대구탕과 반찬들을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남자 사장은 오늘도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나와서 매장을 살폈다. 주방이나 잘 지키지 뭘 저리 또 나와서 돌아다녀? 밥 먹는 사람 부담스럽게.     


“안녕하세요?”     


남자 사장이 인사를 건넸다.     


“아, 예.”     


남자 사장은 홍사장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기 싫어하는 성격이란 걸 알고 인사만 살짝 하고 지나가 옆 테이블 사람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그쪽도 여기 단골인지 아는 척을 했다.    

 

“예~ 사장님. 오늘도 여윽시 대구탕 시원~하고 좋습니다!”     


손님이 엄지를 척 올리며 말했다.   

  

“하하. 감사합니다. 뭐 더 필요한 건 없으세요?”     


남자 사장이 물어보자 손님이 갑자기 목소리를 살짝 낮추면서 말했다.    

 

“저기.... 돈이 좀 필요한데...”     


 그러자 일행들이 웃었다. 그러자 남자 사장이 목소리를 비슷하게 흉내 내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방금 막 다 떨어져서...”     


손님과 일행들 그리고 남자 사장까지 다들 한바탕 자지러지게 웃었다.   

   

 웃기고들 자빠졌네. 홍사장은 그런 시답잖은 농담이나 하는 인간들을 경멸했다. 도대체 뭣 하느라 그런 쓸데없는 농담을 주고받는 건지 홍사장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홍사장은 인상을 구기며,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밥을 김에 싸서 입에 구겨 넣었다.     


띠링.     


홍사장의 휴대전화로 문자가 왔다.     


[web발신]

대출금 납입. 33,965,210원 5월 25일 출금예정.    

 

“하아....”     


 구겨진 홍사장의 인상이 더 구겨졌다. 이번엔 안면이 아예 못쓰게 될 만큼 망가진 표정이었다.     


 작년 가을까지만 해도 신용보증기금의 신용보증으로 대출을 받았기에 2%대의 대출로 1,000만 원대의 이자를 냈는데, 작년 겨울부터는 미국발 전 세계적인 금리 인상으로 이자가 5%가 넘게 올라가 3천만 원대 이자를 매달 내고 있었다. 한 달에 2천만 원 이상을 이자로 더 내고 있는 셈이었다.     


 홍사장은 숟가락은 탁 놓고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문자를 보고 나니 도저히 밥이 넘어가질 않았다. 러시아는 하필 이 마당에 전쟁을 일으켜 수입하는 원자잿값을 더 올려놓았다. 이대로라면 올해를 넘길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만약 자잿값이 더 오른다면? 아니, 아예 수입조차 어려워지는 상황이 온다면? 거래처에 납품을 할 수가 없어지는데? 거래가 끊긴 상황에 금리가 더 오른다면?     


그땐 정말 모든 게 끝이다! 평생을 피땀 흘려 쌓아온 회사가 한순간에 망하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나는 내 일을 열심히 할 뿐인데, 도대체 왜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내가 하는 일이 엉망이 되어야 하는 거지?’      


홍사장은 밥맛이 떨어져 벌레 씹은 얼굴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는데, 남자 사장이 매번 물어보는 말을 또 물었다.     


“맛있게 드셨어요?”   

  

 오늘따라 유달리 기분이 나쁜 홍사장은 매일 똑같은 질문을 하는 남자 사장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불쾌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남자 사장은 그런 홍사장의 표정을 슬쩍 보더니, 아무런 말 없이 계산을 하고선 가게를 나가는 홍사장의 등 뒤에서 또다시 매번 하던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조심히 가세요~”     


 홍사장은 자신이 불쾌한 표정을 보였는데도 불구하고, 경쾌한 어조로 등 뒤에서 인사를 건네는 대구탕집 남자 사장이 마치 자기를 놀리는 것 같아 더 기분이 나빠졌지만, 뒤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얼른 회사로 돌아가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할 때였다. 물론, 자신이 돌아간다고 해서 이자가 내려간다거나, 거래처에서 발주가 들어온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회사로 돌아가야만 했다. 마음이 그랬다.                                                            

02. 해장에 최고     


 주경씨는 어젯밤 속상한 마음에 맥주를 4캔이나 마셨다. 평소 한, 두 캔이면 충분했지만, 어제는 너무나 속이 상해 4캔이나 마셔버리고 말았다. 남편 역시 평소 한 병이면 충분한 소주를 두 병이나 마셨다. 주경씨 부부가 그렇게 평소보다 많은 술을 마실 정도로 속이 상했던 것은 아들의 성적 때문이었다.     


 그동안 학원도 열심히 보냈고,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학원으로는 부족하겠다 싶어 큰맘 먹고 영어, 수학 과외까지 시작했다.     


 요즘 교과과정은 중학교 1학년 때까지는 제대로 된 시험을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정식으로 성적이 기록이 되고, 진학에 영향을 미치는 시험은 중학교 2학년 때부터였다.    

 

주경씨의 아들이 바로 지금 중학교 2학년이고, 이번에 처음으로 시험을 치렀다. 주경씨는 아들에게 시험은 그리 잘 보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동안 열심히 했으니까, 평소 하던 대로만 하면 된다고 했지만, 내심 제법 기대를 하고 있었었다.     


 아들은 어릴 때부터 선생님들이 성실하고, 수업을 잘 따라온다며 칭찬이 자자했다. 유치원 다닐 때도, 초등학교에 다닐 때도, 모두 우수하고 모범적인 학생이었다. 학교에서 우수상, 독서상, 봉사상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상장들을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받은, 다방면으로 뛰어난 아들이었다.     


 같은 반의 아들 친구 엄마들도 아들이 어떤 학습지를 하는지, 어느 학원을 다니는지 물어봤다. 그럴 때면 주경씨의 어깨가 기분 좋게 올라갔다.     


 정비소에서 기름밥 먹으며 열심히 일하는 남편도, 식당에서 일을 하는 주경씨도 아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에 하루하루 고된 노동조차도 즐겁게 여길 수 있었다.     


그.런.데!! 어제 중학교 첫 시험을 치르고 받은 성적표를 보고선 그 즐거움이 와장창 깨져버리고 말았다.    

 

평균.... 74점?!!     


 어? 뭐, 뭐지? 내가 잘못 본 건가? 주경씨는 성적표를 몇 번이나 보고 다시 또 봤다! 믿을 수 없는 성적이었다. 아들이 부담스러울까 봐 말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전교 1등은 몰라도, 반에서 1등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다른 부모들이 어떤 공부를 시켜서 아이가 그렇게 공부를 잘하냐고 물어보면 무슨 말을 해줘야 하나 즐거운 고민도 했었다.     


 수학과 영어 과외를 하고 있다고 하면 과외 선생님 소개를 해달라고 할 텐데, 어떡하지? 소개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고 즐거운 고민까지 했었다.     


 그런 행복한 고민이 어제 산산조각이 나 버리고 말았다. 반에서 1등은 고사하고 중간 정도는 할 수 있을지도 확실치 않았다.      


 아들의 점수는 주경씨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아들 역시도 그동안 주위의 반응과 부모의 기대에 본인이 잘하는 편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제법 충격을 받은 모양인지 풀이 잔뜩 죽어 있었다.     


 그런 아들에게 주경씨와 남편은 차마 뭐라고 쉽게 말을 할 수 없었다. 괜찮다고 위로를 했지만, 그 위로는 아들에게도 자신들에게도 전혀 위로가 되진 않았다. 아들이 방으로 들어가고 남편과 둘이서 속상한 마음을 달래려 술을 마셨다.     


초등학교 때부터 다녔던 학원과 받아보던 학습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한 영어와 수학 과외.     


돌아서면 학원비고, 돌아서면 교재비고, 돌아서면 과외비였지만, 그래도 아들이 잘 배우고 있는 것 같아 그것으로 위안을 삼았는데, 그건 단지 주경씨만의 착각이었단 사실이 이번에 확실하게 증명되었다.     


오늘은 주경씨가 식당일을 쉬는 날이라, 친구와 함께 해장도 할 겸 대구탕을 먹으러 왔다.     


“아... 속 쓰려.”    

 

주경씨가 인상을 쓰며 말하자, 전화 통화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미 모두 다 들은 친구가 주경씨 구박을 했다.     


“그러게, 너도 못한 공부를 왜 자식한테 기대하고 그래? 한 달에 과외비로만 백만 원도 넘게 써가면서. 남편이랑 네가 그렇게 피땀 흘려가며 열심히 돈 모아서 그렇게 써버리면 아깝지도 않냐? 그냥 하지 말라니까?”   

  

“그게 그렇게 되니?”     


“안될 건 또 뭐냐? 그냥 과외 끊어버리고, 그 돈으로 여행이나 다니라니까? 그 돈이면 서너 달에 한 번은 가족들끼리 해외여행을 다녀와도 되겠다. 공부도 좋지만, 여행 다니면서 보고 듣고 스스로 느끼는 게 더 중요하다니까?”     


“그래도...아니, 과외를 해도 이런데, 하지 않았으면 더 시험을 망쳤을 거야. 일단 과외선생님한테 말해서 앞으로 점수를 좀 더 올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지.”     


“허이구~~ 너도 참......”     


“탕 나왔습니다~”     


대구탕 가게 여자 사장이 대구탕을 테이블에 올려 놓았다.     


“청양초 다진 것 좀 주세요.”     


“네~”   

  

주경씨는 맑은 대구탕에 청양초를 넣어 칼칼하게 먹는 것을 좋아했다.    

  

 속이 시원~하게 깔끔해지는 느낌? 신기했다. 뜨거운데, 시원~한 맛이 난다는 것이. 어릴 땐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어른이 되고, 술을 마시고, 아이를 키워보고 나니 뜨거운데 시원하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었다.     


“여기 청양초 다진 것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청양초를 푹 떠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대구탕에 넣고 휘휘 저었다.     


“너도 넣을래?”     


“됐어.”     


“진짜?”     


“그래. 너도 적당히 넣어. 속도 쓰리다는 애가...”  

   

주경씨는 친구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작은 그릇에 담겨있는 청양초를 숟가락으로 싹싹 긁어 대구탕에 모두 다 넣었다.     


“헐....”     


 주경씨는 친구가 그러거나 말거나 대구탕에 다진 청양초를 듬뿍 넣어 휘휘 저어서는 한 숟갈 떠서 입에 텁 넣었다.     


꿀꺽 넘어가는 소리와 동시에 입에서 탄성이 터지듯 흘러나오는 말.     


“어~~~시원~~하다!!”     


“야! 쫌... 조용히 해!”     


 주경씨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자, 다른 테이블에 앉아서 밥을 먹는 사람들이 주경씨 쪽을 힐끔거리며 쳐다봤다.     


음식에 남녀가 있겠냐만, 보통 그런 탄성은 전날 술을 잔뜩 마신 남성들이 해장을 하며 내지르는 탄성같은 그런 것이었다.     


“왜?”     


“아, 쫌 그렇잖아?”     


“그렇긴 뭐가 그래?  시원~ 해서 시원하다고 한 건데.”     


 친구는 주경씨에게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부끄러움 반, 안타까움 반이었다.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온 친구. 사춘기도 함께 겪었고, 수줍음 많던 소녀의 모습도 함께 나눴다. 그렇게 부끄러움도 많이 타던 친구가 지금은 막노동 공사판의 아저씨처럼 요란하게 음식을 먹고 있었다.     


‘에휴~ 자식이 뭐길래...’     


 친구는 주경씨가 자식이 아니었다면 절대 식당에 일을 하러 갈 성격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았다. 직업에 귀천이 있겠냐마는 평범한 회사도 아니고, 설거지에, 청소에, 손님들의 갖은 소리까지 다 들어가며 일을 할 수 있는 그런 외향적인 성격의 친구가 전혀 아니었다.      


주경씨가 대구살을 젓가락으로 집어서 와사비간장에 폭 찍어 입에 넣으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음~ 너무 맛있다. 난 먹을 때가 제~~일 행복해.”     


“풋.”     


 주경씨의 친구는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이 표정과 이 말투만큼은 학창시절의 주경씨 모습 그대로였다. 그때도 이런 표정으로 먹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던 주경씨.     


“아, 지애야. 주은이는 좀 어때?”     


 주경씨가 친구 지애씨에게 물었다. 지애씨에게는 딸 주은이라고 있었는데, 학교에서 학폭이니 뭐니 한창 시끄러웠다.      


“뭐, 그냥 그렇지 뭐. 나도 잘 모르겠어. 우리 주은이가 잘못한 거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내가 그렇게 말하면 엄마니까 그런다고 사람들이 또 뭐라고 하겠지?”     


 주은이는 친구들과 함께 단톡방에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들 중 누군가 다른 친구 한 명을 험담했고, 그 험담에 단톡방의 모든 친구들이 맞장구를 치자 함께 장단을 맞춰줬었다. 그런데, 그게 학폭이라며 신고가 된 것이었다.     


딸 주은이는 엄마 지애씨에게 솔직히 단톡방에서 친구를 험담한 것에 대해 전혀 미안한 마음은 없다고 했다. 학교에서 너무 잘난 척도 많이 하는 친구이고, 늘 혼자 잘난 맛에 사는 아이라 대부분의 친구들이 싫어하는 아이라고 했다.     


“아마 다른 애들도 엄청 걔 흉 많이 볼 걸? 우리처럼 톡을 주고받은 내용이 들키지 않아서 그렇지.”     


 알고 보니 단톡방에 들어와 있는 친구들 중 한 명이 평소 잘난 척을 많이 하고 다니는 아이와 친한 사이였고, 일부러 먼저 잘난 척 하는 아이에 대한 욕을 하며 다른 친구들의 동참을 유도한 것이었다. 단톡방에서 먼저 욕을 시작한 아이가, 다른 아이들이 욕을 한 내용을 캡쳐해 피해자라는 아이에게 건넸고, 피해자라는 아이의 부모는 그것을 학교와 교육청에 학폭으로 신고를 한 상황이었다.     


“조만간 학폭위가 열린다고 하는데, 아니 생각해봐. 우리 때도 서로 재수 없는 년들 뒤에서 욕하고 다 했잖아? 심할 때는 서로 치고받고 싸우고 하기도 했는데, 이런 톡 몇 번 주고 받았다고, 주은이랑 친구들이 평생 학폭이라는 낙인이 찍혀서 살아야 되는 거니?”     


 지애씨는 딸이 잘한 건 아니지만, 크게 잘못을 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학폭위가 열린다고 연락이 오고 주은이가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길래 캡쳐한 내용을 읽어봤는데, 심한 욕설이 적혀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냥 누구나 흔히 뒤에서 험담할 수 있는 그런 수준의 대화 밖에 없었다.     


“아니, 겨우 이런 내용으로 학폭이라구요?”    

 

지애씨가 담임선생님께 전화를 걸어 물었다.     


“어머님. 죄송하지만, 요즘에는 단체 톡 방을 만드는 것부터가 금지되어 있습니다.”     


“뭐라구요? 그럼 아이들끼리는 어떻게 이야기를 나누라구요? 설마 한 명 한 명 모두 따로따로 톡을 주거나, 전화를 해서 서로 소식을 전하라는 건가요?”     


“번거롭겠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습니다. 어머님. 단체 톡으로는 서로 연락을 주고받거나 유익한 정보를 주고받을 수도 있지만, 이번처럼 이런 불미스러운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희도 학교에서 단톡방 개설하지 말라고 늘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단톡방을 만든 학생도, 그곳에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누는 학생도 모두 똑같은 잘못이 있는 거죠.”     


선생님의 말에 지애씨는 고구마를 백 개나 한꺼번에 먹은 것 마냥 갑갑해져서 몇 마디 더 나누다가 전화를 끊었다.     


주경씨가 밥을 먹다가 말고 지애씨를 향해 물었다.     


“그래도 주은이가 공부는 잘하잖아?”     


“잘하긴. 그저 그렇지 뭐.”     


지애씨가 말은 그렇게 해도 딸이 공부를 잘한다는 사실을 늘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우리 승원이가 주은이 절반만 따라가도 좋겠다.”     


“참 너도 별소릴 다한다. 이제 겨우 시험 한 번 쳤는데, 뭘 그러니? 앞으로 더 열심히 하면 되지. 나야 말로 진짜 우리 주은이가 승원이처럼 바르고 건강하게 자라면 좋겠다. 이상한 애들하고 어울리지 않고, 밥도 잘 먹고.”     


“뭐, 들어보니 주은이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만. 너도 너무 걱정 마.” 

    

 주경씨와 지애씨는 말로는 서로를 위로하고 다독이면서도, 속으론 그래도 내 형편이 너보단 더 낫구나 생각하며 대구탕 한 그릇을 맛있게 비웠다.


                                                                                                                   

03. 낙지 한 마리 대구탕    



 홍사장은 대출금 이자가 빠져나간 통장을 보고선 숨이 턱 막혔다. 아니, 이게 도대체 말이 되냐고?! 무슨 몇 천 만원이 아이들 장난이냐?     


33,965,210     


이자로 빠져나간 금액이다. 한 달 이자로. 만약 1년 동안 이 정도 상태의 이자가 빠져나간다면, 은행에 이자만 4억 원이 넘게 들어가는 셈이었다. 작년 12월부터 지금 5월까지 벌써 반년이 지나갔다. 아마 1년도 금방 지나갈 것이다. 숨만 쉬어도 나가는 은행이자!  

 

“도대체 이자는 언제쯤 내립니까? 지금 전기세, 공과금 다 오르고, 이자까지 이렇게 오르면 사업을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홍사장은 주거래은행 담당자인 기업은행의 안정희 차장에게 따져 물었다.    

 

“아이쿠, 대표님. 많이 힘드시지요? 그런데 그게 잘 아시겠지만, 저희 마음대로 금리를 올리고 내리고 하는 게 아니거든요. 미국에서 금리를 인상하니까 전 세계적으로 금리가 인상이 되어서요. 저희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대표님.”     


홍사장도 알고 있었다. 창구에 앉아 있는 직원이 무슨 금리를 올리고, 내리고 할 힘이 있겠는가? 알고 있었지만, 갑갑하고, 하소연할 때가 없었다. 홍사장 혼자만 금리가 오른 것도 아니었다. 대한민국에서 빚이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이자가 다 올랐다. 아니, 전 세계에서 빚이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이자가 다 올랐다. 홍사장은 전화를 끊고 갑갑한 마음에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홍사장의 회사 주위에는 온통 다른 회사들의 공장들과 또 다른 회사들의 사무실들이 있었다. 


'아니, 저 회사들도 분명히 빚이 많을 텐데, 다들 어떻게 버티고 있는 거지?'  

   

 궁금했다. 빚이 있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버티고 사는 중인지. 근데, 저것들은 뭐가 즐겁다고 저리 깔깔거리는 거지?     


삼삼오오 모여서 사무실을 나서는 직원들이 보였다.     


'아, 맞다. 점심시간이구나.'     


 직원들이 홍사장에게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지나갔다. 직원이 많지는 않았지만, 지나가는 직원들 중에서 아무도 홍사장에게 점심식사에 대해 물어보는 사람은 없었다.     


너네들은 아무런 걱정도 없어서 좋겠다. 나는 지금 속이 썩어 들어가는데, 시간만 지나면 너네들은 따박~ 따박 월급이 통장에 들어오니.      


 이렇게 생각하자 홍사장은 더 속이 쓰리는 것 같았다. 밥맛은 별로 없었지만, 쓰린 속을 다스리려면 뭐든 먹어야 했다. 에잇. 가자! 대구탕이나 먹으러!


 홍사장이 매장 입구에 들어서자 오늘은 어쩐 일인지 제법 손님이 붐볐다. 너무 딱 점심시간에 맞춰서 왔나? 홍사장은 입구에서 살짝 망설였다. 괜히 점심시간에 혼자 먹는다고 눈치를 보기는 싫었다. 돌아서 나가야 하나? 망설이는데, 남자 사장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오세요!”     


 아, 저 남자 사장의 목소리는 수십 번을 들어도 적응이 안 된다. 꼭 저렇게 크게 인사를 해야 하는 건가? 나처럼 그냥 돌아나가려는 사람들 붙잡으려면 저 정도 목청은 되어야 하는 건가?     


 홍사장은 남자 사장의 인사도 받았기 때문에 돌아서기엔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며 신발을 벗고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는 매장이라는 것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번거롭게 말이야.   

  

“대구탕 드릴까요?”     


 오늘따라 그 대구탕 ‘드릴까요?’라는 말이 더 거슬렸다. 평소 늘 먹던 대구탕이었고, 맛있게 먹는 대구탕이었지만, 오늘따라 이상하게 넌 언제나 혼자 와서 대구탕 하나만 먹고 가지. 돈도 안 되게 말이야. 라고 자신을 무시하는 것처럼 들렸다.     


“아니요.”     


남자 사장이 순간 어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낙지한마리대구탕.”     


 이곳에는 일반 대구탕과 낙지가 들어간 낙지한마리대구탕이 있었는데, 일반 대구탕은 11,000원, 낙지가 들어간 대구탕은 17,000원이다. 대구가 들어간 연포탕 같기도 한 이 대구탕을 매장에서 사람들이 먹는 모습을 홍사장도 종종 보긴 했는데, 오늘은 딱히 낙지한마리대구탕이 먹고 싶어서 주문한 것이라기보단, 남자 사장의 늘 똑같은 인사말이 거슬렸기 때문에 주문했다.     


“아, 넵. 알겠습니다. 낙지한마리대구탕이요~”     


 남자 사장은 포스기에 주문을 입력했다. 젠장! 기분 따라 주문한 메뉴였는데, 6,000원이나 더 비싼 음식을 주문했다는 사실에 기분이 확 나빠졌다. 전기세도 오르고, 수도세도 오르고, 은행 이자도 계속 오르는데, 점심 메뉴도 비싼 메뉴를 시키다니!!      


 속이 쓰려서 왔는데, 비싼 점심을 주문하고서 더 속이 쓰려지고, 부글부글 끓기까지 했다. 언제나처럼 밑반찬이 나왔다. 부추전, 튀기듯 구운 두부, 가지나물, 오이무침, 깍두기, 곱창김.

      

“저기 사장님.”     


홍사장이 남자 사장을 불렀다.     


“네?”     


“혹시 이렇게 구운 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홍사장이 부추전의 테두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얇으면서 바삭하게 구워진 부추전의 테두리.    


“아, 바삭바삭하고 맛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멍청이! 누가 맛을 물어봤냐고!! 홍사장도 그렇게 전의 끝부분이 바삭하게 익은 걸 좋아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탄 음식을 먹으면 건강에 좋지 않다는 말이 계속 생각나 끝부분을 먹지 않고 있었다. 평소엔 이런 말을 나누는 것도 싫어서 하지 않았지만, 오늘은 6천 원이나 더 비싼 메뉴를 주문해 기분이 나빴기에, 뭔가 이 사장에게도 기분 나쁠 일을 하나 만들어주고 싶었다.     


“이 부분이 건강에 좋을까요?”     


홍사장은 애써 올라오는 화를 참으며 말했다.    

 

“어..... 건강에 나쁠 정도로 태운 건 아니라서 괜찮지 않을까요?”    

 

“그래요?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세요.”     


홍사장은 차마 화를 내지는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여긴 저 인간의 매장이고, 나의 부하직원도 아니니.  거기다 저렇게 해맑은 표정이라니!!


홍사장은 남자 사장에게 보란 듯 부추전의 테두리를 남겨두고 안쪽 부분만 먹었다. 구멍이 뻥 뚫린 웃긴 모양의 전 테두리만 남았다. 마치 도넛처럼. 이게 최선이라 생각되어 흡족했다. 이렇게 먹고 남기면 느끼는 게 있겠지. 최소한 기분은 나쁠 테고!     


낙지한마리대구탕은 여자 사장이 들고 왔다. 일반 대구탕을 먹을 때는 주지 않았던 가위와 집게를 옆에 가져다 놓았다.  

   

“가위로 잘라서 드시면 됩니다. 맛있게 드세요~”   

  

 일반 대구탕은 노르스름한 맑은 탕이었는데, 낙지한마리대구탕은 낙지에서 우러난 육수 때문인지 보랏빛이 났고, 건강식이라는 타이틀이 있어서 그런지 대추 한 알도 올려져 있었다.     


 홍사장은 오늘 처음 먹어보는 낙지한마리대구탕이었지만, 평소 다른 손님들이 이걸 먹는 모습을 몇 번 봤기에 어떻게 먹는지 알았다.     


 홍사장이 집게로 큼직한 낙지 대가리를 집어서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가위로 축 늘어진 낙지 다리부터 싹둑싹둑 자르기 시작했다.


  아~ 일 못하는 직원들도 이렇게 싹둑싹둑 잘라버렸으면 정말 좋겠다.  

   

홍사장은 얼마 전 어디선가 본 글이 떠올랐다. 직원은 딱 잘리지 않을 만큼만 일을 하고, 회사는 딱 그만두지 않을 만큼의 월급만 준다고. 그런데 홍사장에겐 직원들이 딱 잘리지 않을 만큼만 일을 한다는 말만 와 닿았다.     

 매달 나가는 월급에, 사대보험 비용에, 명절마다 줘야 하는 명절 보너스와 귀성비. 게다가 상여금에 각종 직원 복지를 위한 자기계발 비용. 거기다 지금 받아가고 있지는 않지만, 언젠간 받아갈 퇴직금 등등. 


이게 딱 그만두지 않을 만큼의 월급이라고? 와~ 씨! 나도 차라리 직장인을 하고 싶다!! 홍사장은 고개를 흔들며 애써 생각을 떨쳐냈다. 밥이나 먹자.      


낙지를 다 자르고 나서, 보랏빛 국물 한 숟갈 떠 입에 넣었다. 


오호~ 시원~하다! 


낙지한마리대구탕에서는 낙지나 문어 또는 오징어 등에서 나는 특유의 감칠맛이 입속을 휘젓더니 목구멍으로 쏙 넘어갔다.   

  

일반 대구탕도 시원하고 맛있었지만, 큼직~한 낙지 한 마리가 통째로 들어간 낙지한마리대구탕은 감칠맛과 시원한 국물 맛이 더 끝내줬다.    

 

보랏빛육수에 하얀 대구살도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초장에 살짝 찍고~ 입에 꽉 차게 넣고 씹어주니. 캬~ 꿀맛이어라. 거기다 몸이 보양되는 느낌까지 들었다. 낙지는 쓰러진 소도 벌떡 일으킨다고 하지 않는가!  음식으로 힐링을 한다는 표현이 바로 이런 기분 인가?

  

홍사장이 유일하게 행복을 느끼는 시간. 바로 먹는 시간. 대구탕 가게의 사장들은 정말 마음에 안 들었지만, 맛 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에췻!”     


 그때 뒤에서 기침을 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는 코를 팽 푸는 소리도 들렸다. 순간 홍사장이 느끼던 행복한 기분이 싹 가라앉았다. 에이씨, 밥 먹는데.......    

 

홍사장이 애써 마음을 다스리며 통통한 낙지 다리 하나를 초장에 폭 찍어 입으로 가져가는데,     

 

“캬캬캭, 칵, 푸어허헉!!”     


코를 푸는 것인지, 가래를 뱉어내는 것인지 희안한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자, 이번엔 정말 밥맛이 뚝 떨어지다 못해 화가 치밀어 올랐다.     


“에이~”     


홍사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뒤를 노려봤다. 그곳엔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 한 명과 딸로 짐작되는 여자가 앉아 있었다.  

   

홍사장과 눈이 마주친 여자와 노인. 말은 하지 않지만, 기침을 한 것에 대한 약간의 미안함과 동시에 기침이 나오는걸 어쩔 수  없잖아?! 왜?! 하는 듯한 화가 섞여 있는 표정.

     

“해도 정도껏 해야지!! 씨!”     


 홍사장은 씹어뱉듯 툭 뱉고서 성큼성큼 걸어서 카운터로 향하며 말했다. 등 뒤에서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상관없었다. 내 기분이 이렇게 더러워졌고, 밥도 제대로 못 먹었는데, 너네들 기분이 내 알바냐?!


 홍사장이 카드를 꺼내려고 하는데, 지갑에 꽉 끼인 카드가 오늘따라 더 꺼내지지가 않아 몇 번이나 카드를 잡고 놓치기를 씩씩거리며 반복했다. 겨우겨우 카드를 꺼내서 남자 사장에게 줬다.      


- 지이익     


영수증이 올라오자, 남자 사장이 카드와 전표를 건네줬다. 홍사장이 탁 신경질적으로 낚아채며 돌아서 입구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어라? 뭔가 이상했다. 


 평소 같으면 계산하기 전, 얼마 나왔습니다. 계산 후, 감사합니다. 라는 말이 기계처럼 튀어나와야 했는데. 그리고 문을 열고 나가면 조심해서 가세요~ 라는 인사가 나와야 했는데! 지금은 카드를 받아, 계산을 마치고, 홍사장에게 건네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에도!!  

     

 홍사장이 뒤돌아 남자 사장의 얼굴을 쳐다보자, 남자 사장은 단지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미소가 평소의 모습처럼 썩 유쾌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냥 입을 꾹 다물고 있다는 느낌?     


‘뭐야? 오늘 다른 손님한테 한소리 했다고 인사를 안 하는 건가? 근데, 뒤에서 먹던 노인이 잘못했잖아? 밥 먹는데, 밥맛 떨어지게 코를 풀고, 기침이나 계속하고 말이야!’     


 홍사장이 잘 들어가지 않는 카드를 지갑에 꾸역꾸역 쑤셔 넣고, 매장 입구를 나서려는데, 식당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홍사장은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며 후다닥 매장을 나섰다. 우와~ 씨! 인간들 뭐야? 다들 왜 저러는데? 내가 뭘 잘못했는데?!     


홍사장이 씩씩거리며 가게에서 나와 차에 올라타서 시동을 걸다가 무심코 백미러를 봤다. 거기엔 흉측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는 낯선 사람이 보였다.     

 

허억!! 뭐야?!! 홍사장은 거울에 나타난 사람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란 걸 알고 한숨을 후~ 내쉬었다. 내 표정이 왜 이렇지?? 홍사장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좌우로 돌려봤다. 평소 자신의 모습 아니, 그러니까 평소 자신의 얼굴이라 생각했던 그 모습이 아니었다. 남들은 알고 있었지만, 본인은 그동안 몰랐던 자신의 그 표정.

    

그때, 어라? 대구탕가게 남자 사장이 입구의 문을 열고 나오더니 홍사장이 타고 있는 차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뭐야? 매장에 있는 손님들 기분 나쁘게 했다고 나한테 따지러 오는 건가? 아니, 내가 뭘 잘못했는데?! 밥 제대로 먹지 못한 것도 기분 나쁜데! 이씨! 좋다. 오늘 한번 붙어보자. 넌 평소부터 별로 마음에 안 들었다!’   

  

홍사장은 다가오는 대구탕 가게 남자 사장을 노려보며 한바탕 단단히 겨룰 기세였다.     


똑똑. 남자 사장이 운전석 창문을 두드렸다.     


홍사장은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하고 창문을 내렸다. 그리고는 안 그래도 찌그러진 막걸리 통 같은 인상을 더 확 구겼다.    

 

“뭐요?!” 

    

그런데, 홍사장의 날 선 물음에 들려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2층 공방에 한번 와보실래요?”

     

“뭐, 뭐요? 공방?”     


홍사장은 순간 당황했다. 분명 한바탕 싸울 기세였던 것 같은데, 자신이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홍사장도 준비했던 화를 내지 못했다.    

 

“네. 2층에 공방이 있거든요.”     


 홍사장은 엉뚱한 말에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건 없어졌지만, 어이도 함께 없어졌다. 아니, 내가 무슨 자기처럼 시간이 남아도는 줄 아나? 난 회사 대표이사라고! 대표이사!! 대표이사가 공방에서 쓰잘데기 없는 만들기나 하면서 시간이나 때우라고? 이 인간이 제정신인가? 아니, 애초에 인간이긴 한 건가?    

 

“내가 좀 바쁩니다.”     


“그럼 더 잘 되셨네요.”  

   

“......?......”     


“저희 공방은 시간을 만들어 드리거든요.”    

 

 이 말에 홍사장은 다시 열이 확 뻗쳤다. 홍사장은 입을 씰룩거리며 욕을 퍼부으려다 창문을 올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 지이잉.     

- 끼이이이익!!     


 홍사장이 신경질적으로 가속페달을 밟자 바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헛돌다가 훙 하고 차가 튕겨 나가듯 가버렸다. 대구탕 가게 남자 사장은 사라져가는 홍사장의 차를 멀리서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다시 가게로 들어가 버렸다.                                                                                                                                      


04. 꿀막걸리.     

빗소리.

쏴아아.  

   

비가 세차게 내렸다. 

    

정섭씨는 밑반찬으로 나오는 부추전을 젓가락으로 쭉 찢어 입에 가득 넣고는 쿰척쿰척 씹으며 양은 막걸릿잔에 담긴 막걸리를 쭉 들이켰다.   

  

“크으~~조타!”     


정섭씨는 모든 종류의 술이 다 맛이 있지만, 잔에 따라서 맛이 완전히 달라진다고 생각했다. 각기 술에 어울리지 않는 잔에 마시면, 술맛이 반감되고, 어울리는 술잔에 마시면 맛이 배가 된다.  

   

소주는 작은 소주잔에 마셔야 제맛이고, 맥주는 투명한 유리컵에 마셔야 제맛이다. 그리고 막걸리는 역시 양은 막걸릿잔이 최고다.     


막걸리를 쭉 들이켠 정섭씨가 행복한 표정으로 창밖에 쏟아지는 비를 보면서 말했다.   

  

“거봐. 내가 오늘 비 많이 쏟아진다고 했잖아. 이런 날 무슨 일을 한다고.......”   

  

 정섭씨는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지만, 어쩐 일인지 정섭씨 주위에 앉아 대구탕을 먹는 일행들의 표정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별말 없이 대구탕의 뜨거운 국물만 후루룩 마셨다.   

   

몇 잔의 막걸리에 술기운이 살짝 오른 정섭씨가 주위 사람들의 얼굴을 쭉 둘러보더니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송팀장!”   

  

 목소리가 제법 컸다. 일행들이 정섭씨를 쳐다봤고, 일행이 아닌 대구탕 가게 손님들도 슬쩍 정섭씨를 쳐다봤다. 정섭씨가 부른 송팀장이란 사람이 대답했다.    

 

“아, 왜요?”    

 

송팀장의 목소리에도 짜증이 섞여 있었다. 아무래도 이런 일을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정섭씨가 자신의 가슴팍을 팡팡 두드리면서 말했다. 

  

“나는 괜찮아. 나는.... 그러니까 여기 다른 사람들 반대가리는 좀 쳐 줘. 오늘 다들 고생했잖아!”

     

정섭씨의 말에 송팀장이 대구탕을 먹다 말고 숟가락으로 테이블을 탁 쳤다.     


“에이 씨!”    

 

“야, 송팀장! 나는 안 받는다잖아! 다른 애들만이라도 쳐주라고!”    

 

 정섭씨가 말한 반대가리는 한 대가리의 절반. 그러니까, 오늘 절반 일한 걸 쳐주라는 말이었다. 하루는 한 대가리, 반나절은 반대가리.   

 

“아니, 형님! 나는 뭐 땅 파서 장사합니까?! 형님도 공사판 돌아가는 거 뻔히 알면서 술만 드시면 꼭 이상한 소리를 하시네?! 도대체 왜 이럽니까?”  

   

“야, 송팀장! 우리 RCS 라서 다른 팀보다 돈도 많이 벌잖아!”     


“많이 벌긴 뭘 많이 벌어요?! 한 동 올릴 때마다 타워크레인 기사들한테 뽀찌로 주는 돈이 얼만데요! 그리고 수퍼바이저 도둑놈들도 늘 술값 달라, 담뱃값 달라면서 돈 다 뜯어가고! 형님도 해봤으면서 몰라서 그래요?”     

송팀장과 함께 일하는 여기 있는 사람들은 공사현장에서 RCS라고 불리는 일을 하는 팀이었다. 

    

Rail Climbing System.     


 20층 이상 초고층 건물에 적용되는 외벽에 설치하는 조립식 발판인데 도면도 볼 줄 알아야 하고, 조립도 할 줄 알아야 하기에 작업의 숙련도가 어느 정도 필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일당은 일반 잡부로 일을 하는 것보다는 더 많았는데, 무거운 철 덩어리들을 손으로 들고 날라서 조립하는 일이다 보니 작업의 강도가 제법 높았다.      

“에이~ 씨.”     


정섭씨가 막걸리를 앞에 놓인 양은잔에 더 따라서 벌컥벌컥 마셨다. 송팀장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타워크레인 기사들은 현장에서도 악명높기로 유명했다. 공사현장에는 어쩔 수 없이 고층작업을 할 때나, 무거운 물건을 옮길 때는 타워크레인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현장에는 RCS 팀만 있는 게 아니었다.      

 시멘트를 타설하는 팀도 있고, 철근 하는 팀고 있고, 배관하는 팀도 있고, 무수히 많은 각각의 팀들이 현장에 존재했다. 그런데, 이런 팀의 일은 누가 우선이고 누가 뒤라고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현장에서는 무전으로 타워크레인 기사에게 부탁을 하면, 타워크레인 기사는 마음에 있는 순서대로 하나하나 일을 처리했다.     


 만약 RCS 팀이 타워크레인 기사에게 밉보였다면, RCS 팀에게는 타워크레인의 고리가 일을 마칠 때까지 내려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면 그날 공정은 진행하지 못하게 되고, 일을 하러 온 인부들은 담배나 피우고, 음료수나 마시면서 시간을 때워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일명 뽀찌라고 불리는 뒷돈을 안 줄 수가 없는 것이다. 공정이 진행되기 위해선.     


 거기다 수퍼바이저로 불리는 사람. 이 사람은 일감을 준 회사에서 파견 나온 현장 관리 감독관이다.      

 예를 들어 아파트를 짓는다고 하면, 시행사가 아파트 공사를 시공사에 맡기는데, 시공사는 이것을 또 하도급 계약을 맺어 하청업체 여러 곳에 부분부분 나누어 공사를 맡기게 되는 것이다.      


RCS 같은 경우에는 발판조립부품을 만드는 제법 규모 있는 회사가 시공사로부터 하도급을 받고, 이 부품을 조립하는 팀으로 송팀장 같은 조립팀에게 다시 하도급을 주는 방식이었다.   

  

 이때 발판조립부품회사에서는 자사의 제품을 RCS 팀이 제대로 조립을 하는지, 일은 잘하고 있는지 현장을 관리 감독하기 위해 수퍼바이저를 보내는데, 이런 수퍼바이저들의 성격도 천차만별이었다.     


현장에 있는 듯 없는 듯 멀리 그늘에만 앉아서 세월아 네월아 시간만 보내고 있는 사람. 마치 자기 일처럼 현장의 일을 열심히 도와주는 사람. 물론,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문 경우다.     


그리고, 지금 송팀장이 겪는 수퍼바이저처럼 일을 적당히 도와주는 척하면서, 자신의 일당을 인부 한 대가리 일당으로 챙겨달라고 하는 사람.     


누가 일을 도와 달라고 한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을 제대로 하는 것도 아니면서, 일당은 일반 인부들보다 더 많은 숙련공의 일당으로 챙겨달라고 하는 썅놈의 자식!   

   

 이번 공사현장의 수퍼바이저는 차를 타고 집까지 2시간 이내에 출퇴근 할 수 있는 거리인데도, 굳이 집에 가기 힘들다며 송팀장에게 숙소를 잡아달라고 해서, 숙소를 잡아줬다. 거기다가 밤에는 술집에도 가고 싶다고 했다. 그것도 여성 도우미가 있는 비싼 술집으로!! 송팀장의 주머니가 줄줄 샜다. 그렇다고 수퍼바이저의 부탁을 거절해서 밉보일 수는 없었다. 조립하는 일을 주는 회사에서는 현장 감독관인 수퍼바이저의 평가를 전적으로 믿었기에, 수퍼바이저가 송팀장 팀이 너무 일을 엉망으로 해서 다른 RCS 팀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해버리면, 앞으로 일을 맡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섭씨는 이런 송팀장의 속내를 알면 그냥 조용히 있으면 될 것을, 본인이 가장 연장자랍시고, 맏형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챙겨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서 또 입을 열었다.


“어이. 송팀장. 그래도 그게 아니지! 다들 힘들게 아침 일찍부터 일하러 나왔는데, 그럼 뭐, 이대로 밥 한 그릇 얻어먹고 들어가면 끝나는 거야?! 누가 밥 한그릇 못 얻어먹어서 현장 나왔나?!”     


“하아.....씨... 자, 형님. 반대가리 하려면 오전 10시 넘어가야 하는 거 알지요?”     


 날씨가 정해진 것이 아니다 보니, 오전 10시가 넘어서 비가 와 일을 못하면 반대가리를 쳐주고, 오전 10시 이전에 비가 와서 일을 마치면 그날은 그냥 일당이 없게 되는 것이었다. 그것이 공사현장의 불문율이었다. 그리고, 그 불문율에는 누구 하나 억울할 것도 없었다. 만약 10시가 조금 넘어서 비가 내리면, 인부들은 12시까지 일을 하지 않고도 반대가리의 일당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지. 아는데, 그래도.....”     


“오늘 9시도 안 돼서 일 마쳤습니다!! 제가 언제 10시 딱 맞춰서 쳐주고, 안쳐주고 했습니까?! 엇비슷한 시간에만 마쳐도 다 반대가리는 쳐줬는데, 왜 계속 이럽니까?!”     


송팀장의 언성이 높아지자, 정섭씨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아니....그래도 혹시나 불만이.......”     


“불만이요? 불만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럼 여기 친구들 불만이 뭔지 진짜 한번 들어보실래요?”    

 

“아이. 형! 하지 마세요.”   

  

 다른 인부들이 송팀장을 말렸다. 정섭씨는 송팀장의 말과 다른 인부들의 반응에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다고 느꼈다. 갑자기 정섭씨의 기분이 확 상했다.    

 

“뭔데?”     


“하아....진짜.”     


송팀장이 화를 삭히는 듯한 표정을 짓자 정섭씨가 탁자를 쾅 내리쳤다.     


“뭐냐고 씨팔!! 말해보라고!!”     


“예! 말해드릴게요! 다들 형님하고 일하기 너무 힘들답니다!!”     


송팀장의 말에 정섭씨는 뒷통수를 세게 두들겨 맞은 듯 멍해졌다.     


“뭐...뭐어?!!”     


“맨날 나이 많다고, 남들 토루판 2장, 3장 들어서 나를 때도 혼자서 1장 들고 느릿느릿 나르고, 발판이나 파이프 나를 때도 마찬가지고!! 술 많이 마시고 온 다음 날에는 죽겠다 죽겠다 하면서 혼자 구석에서 남들 일하는 거 보고만 있고! 무슨 나이 먹은 게 대숩니까?! 일을 하러 나왔으면, 일을 해야지요! 그렇게 설렁설렁 일하면, 남은 일들은 누가 합니까? 다 다른 사람들이 형님 몫까지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토루판 - 현장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길다란 나무판을 일컫는 말


정섭씨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리고요! 오늘 일도 마찬가집니다! 빗방울 좀 떨어지니까 뭐라고 했습니까? 뭐? 하이바에 빗방울이 맺혔다가 또르르 굴러서 떨어지면 그땐 일 스톱 해야 한다고요? 예?! 아니, 무슨 그만한 비에 일을 멈춥니까? 비는 조금만 내려도 하이바에서 물이 떨어지지, 그럼 내린 비가 하이바에 딱 달라붙어 있습니까? 껌딱지처럼?”  


*하이바 - 공사현장에서 머리에 쓰는 안전모

   

“아니, 그럼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일을 해야 하냐?!”  

   

정섭씨가 달아오른 얼굴로 언성을 높였다.     


“제가 지금 내리는 비 말하는 겁니까?! 아까 말이에요, 아까! 아까는 얼마 안 내렸잖아요?! 휴우.....”     


송팀장은 한숨을 길게 내쉬고, 물 한 모금을 마시고 계속 말을 이었다.     


“제가 10시까지 일을 안 했다고 딱 끊어서 반대가리 못 주겠다 이러는 거 봤습니까?! 비가 조금 내리지만, 좀 더 일하고, 엇비슷한 시간이라도 일을 하면 저도 어떻게든 챙겨드리려고 하잖아요! 근데, 형님은 무슨 비를 기다리는 사람도 아니고, 몇 방울 떨어지자마자 가자! 가자! 연장 챙겨라! 사람들 선동하는 것도 아니고!”     


“임팩트하고! 타카하고! 이런 것들 다 비 맞으면 버리니까! 못쓰니까 그런 거 아니야! 이 자식 이거 웃기는 놈이네! 지 연장들 걱정해주니까...”     


*임팩트, 타카 - 현장에서 사용하는 공사장비들


RCS 팀의 모든 연장은 송팀장의 돈으로 마련한 연장들이었고, 송팀장의 소유였다.    

 

“형님! 제 연장들이니까, 제가 제일 걱정이 많이 되지 않겠습니까? 못쓰게 되면 또 비싼 연장을 고치던가, 돈 주고 사야 하는데? 그런 제가 왜 이런 말을 하겠습니까? 적정선이라는게 있잖아요! 적정선! 어느 정도는 일을 해야 저도 조금이라도 일당을 쳐주지요!”    

 

“그만들 하세요! 식당에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인부들 중 한 명이 둘을 말리며 말했다. 씩씩거리던 송팀장이 주위를 살펴보니, 대구탕 매장에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밥을 먹으며 그들을 힐긋힐긋 쳐다봤다.    

  

“에이 씨... 얼른 먹고 가자!”     


 송팀장은 쪽도 팔리고, 화도 났다. 비가 와서 일은 일대로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른 아침부터 나온 인부들 밥이라도 먹여서 집으로 보내려 일부러 식당에 밥까지 먹으러 왔는데, 안 오는 것만 못하게 되었다. 그냥 다들 바로 집으로 보내버릴걸! 젠장! 돈은 돈대로 쓰고, 욕먹고! 저 인간하고 엮이면 하여튼 재수가 없다! 송팀장이 정섭씨를 노려봤다. 정섭씨는 송팀장의 마음은 아랑곳없이 잔을 들어 벌컥벌컥 마셨다. 저 새끼. 술에 환장한 새끼. 잔까지 다 처마시겠네. 저러니 마누라도 도망가지!     


 정섭씨는 이혼하고 혼자였다. 아들은 다 컸는데, 연락도 잘 하지 않았다. 


 정섭씨는 젊은 시절부터 공사현장에서 일을 배웠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래서 정섭씨에게는 그 당시, 처음 일을 배울 때 공사장의 그 모습들이 세상의 사회생활이었다.     


 함바집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막걸리도 한 사발 할 수 있는 곳. 그날의 일을 마치면 다 같이 실비집에 모여 소주 한 잔을 하며 고된 노동으로 지친 하루의 피곤을 덜어버릴 수 있는 곳. 일하는 중에 비라도 쏟아지면, 낮술을 달리는 곳. 정섭씨에게 직장은 바로 그런 곳이었다.    


함바집 - 공사현장의 식당

 

 그런데, 요즘 세상은 변해도 너무 변했다. 이젠 함바집에서 술을 마신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고, 아예 술을 팔지도 않았다. 게다가 요즘 젊은 친구들은 뭐가 그리 급한지 일을 마치면 다들 곧장 집으로 가기 바쁘다. 다음날 저들끼리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리 중요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집에서 배달음식 시켜놓고, 영화나 드라마를 보거나, 게임을 하는 게 전부였다.   

  

'어린놈의 쉐키들! 이렇게 사회성이 없어서야.... 쯧쯧....'     


 정섭씨는 요즘 어린 것들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송팀장도 마찬가지로 어린 것들에 포함되었다. 어른을 공경할 줄 모르는 어린 것들. RCS 업무를 처음 송팀장에게 가르쳐 준 사람이 정섭씨였기에 정섭씨는 더욱 화가 났다.     


“밥 다 먹었으면 갑시다!”     


 인부들이 다들 우르르 일어섰다. 창가에 앉은 정섭씨는 비가 내리는 창밖을 보며 천천히 막걸리를 음미했다.     

 송팀장이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다들 음식점의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며 담배를 피우는데 정섭씨는 담배를 다 피울 때까지도 나오지 않았다.     


“정섭이형은? 아직 안 나왔어?”     


“예. 제가 한 번 가볼까요?”     


인부들 중 하나인 영준이 물었다.     


“하...씨.... 아니, 됐다. 내가 가볼게.”     


 송팀장은 신경질적으로 담배꽁초를 던져버리고, 다시 대구탕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현장에서 신는 작업화는 군화처럼 신고 벗기가 불편했는데, 이곳 대구탕 매장은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해서 송팀장은 더 짜증이 났다.     

송팀장이 신발을 벗고 들어가보니, 정섭씨는 홀로 유람이라도 온 듯 유유자적 느긋하게 창밖을 보며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 쏴아아아아     


비가 시원~하게 쏟아졌다.     


“안갑니까?”     


“먼저가.”     


“예?”     


“나랑 같이 일하기 싫다는 놈들하고 내가 뭐 한다고 같이 가?”     


“하..참. 애도 아니고.... 여기 산인데, 어떻게 가려구요?”     


“퍽이나 걱정해주는 척은.... 알아서 가니까 그냥 가!”     


“진짜 안 가요?”     


“안.가.”     


송팀장은 싸늘한 표정으로 정섭씨를 쳐다보다가 돌아섰다.     


“그럼 진짜 갑니다.”     


“아, 송팀장!”     


돌아서는 송팀장을 정섭씨가 불러세웠다.     


“왜요?”     


“저거. 저거 한번 먹어보고 싶다. 저거 하고 막걸리 한 통만 더 계산해주고 가.”     


정섭씨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조각벌집꿀이라고 쓰여 있는 스탠드배너가 있는데, 벌집꿀을 예쁘게 자른 사진이 맛깔나게 인쇄되어 있었다.     


 송팀장은 어이가 없었다. 거기다 막걸리까지... 하.... 너란 인간은 참 답이 없는 인간이다. 송팀장은 말을 계속 섞었다간 자신이 돌아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른 계산해주고 나왔다. 그리고는 인부들과 함께 차에 탔다.     


“정섭이형은요?”     


영준이 물었다.     


“알아서 온다고, 먼저 가란다. 신경 쓰지 말고 그냥 가.”     


다들 차에 올라탔고, 곧 RCS 팀은 영섭씨를 놔두고 모두 사라져버렸다. 정섭씨는 그 모습을 대구탕 가게 안에서 창밖으로 다 보고 있었다.    


“싸가지 없는 새끼들.... 어째 인생을 다들 저렇게 사냐....참...나... 사회생활이라고는 ㅈ도 모르는 새끼들....”     

“조각벌집꿀 나왔습니다.”

     

 대구탕 가게의 여자 사장이 네모난 벌집꿀을 통째로 서빙카트에 올려 왔다. 노랗고 찐득~한 벌집꿀을 푹 뜨더니, 양은 잔에 담아줬다. 잔에 담긴 조각벌집꿀이 번들번들했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이거 어떻게 먹는 겁니까?”     


정섭씨가 물었다.


“아, 그냥 드시는 분은 씹어서 드시기도 하시고, 막걸리를 부어서 드시는 분들은 막걸리를 부어서 벌집꿀막걸리를 만들어서도 드세요.”     


“그럼 저는 막걸리 부어서 마시면 될 것 같은데, 부어서 그냥 바로 마시면 됩니까?”     


“그냥 막걸리 부어서 놔두시면 천천히 녹아서 달콤한 꿀맛이 은은하게 나고, 막 저어서 드시면 빨리 녹아서 단 맛이 많이 날거에요. 취향에 따라 다르니, 좋아하시는 취향으로 드시면 됩니다.”     


“아.... 그래요..... 제 취향은 딱 사모님인데.. 키킥.”     


“아, 예. 재밌네요.”     


 정섭씨가 농담을 하면서 웃었는데, 여자 사장이 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하곤, 휙 돌아서 서빙카트를 밀면서 돌아갔다. 정섭씨는 괜히 무안해졌다. 에이 씨. 요즘 젊은 것들은 정말 재미가 없다! 없어!! 우리 땐 식당에서 아줌마들이 술도 한 잔 따라주고, 엉덩이도 두들기고 했는데....     


- 쪼르르     


 조각벌집꿀에 막걸리를 따랐다. 차오르는 막걸리가 조각벌집꿀을 다 집어삼킬 때까지 따랐다. 정섭씨는 가만히 놔두면 꿀이 녹지 않을 것 같았고, 젓가락으로 저으면 너무 빨리 녹을 것 같아서 그냥 잔 한쪽을 잡아들고 살살 흔들었다. 양은 막걸리잔에 뽀얀 막걸리가 찰랑찰랑 흔들리며 잔을 타고 넘실거렸다.    

  

 양은 잔 속에는 일 년에 한두 번 연락 할까 말까한 아들이 넘실거렸고, 여관방을 전전하며 갖은 고생을 다 하다가 결국 떠나버린 아내도 넘실거렸고, 공사판에 굴러먹는 막노동 일꾼이라도 곧 나라의 큰일을 할  대단한 인물로 취급하시던 돌아가신 어머니도 넘실거렸다.     


-또록     


막걸리 잔에 정섭씨의 눈물이 떨어졌다.     


- 쏴아아아아     


창밖으론 언제 그칠지 모를 비가 세차게 내렸다.                                                                           


05. 곤이   

  

AM 5:00     


홍사장이 알람소리를 듣고 일어나 시계를 보니 다섯 시.      


“으음....”     


홍사장이 낮게 신음했다. 속이 쓰렸다.     


 어젯밤에는 동창회 모임을 나갔다가 평소엔 잘 마시지 않는 술을 모처럼 제법 마시고, 늦은 시간 집으로 돌아와 곯아떨어졌다.    

 

 평소에는 알람을 5시에 맞춰 놓아도 4시 50분쯤 저절로 눈이 떠졌는데, 오늘은 알람이 한참 울리고 나서야 눈을 떴다. 으~~ 어지간히도 마신 모양이로구나.  

   

 홍사장은 주방으로 가서 물을 한 컵 벌컥벌컥 마셨다. 차가운 물이 목을 타고 흘러내려 가 뱃속에서 싸악 퍼지는 느낌이 그대로 전해졌다. 

    

“하아..”   

  

갈증이 좀 가셨다. 

     

“으윽.”    

 

 차가운 물에 갈증은 가셨지만, 속은 아렸다. 이럴 땐 뜨끈~한 국물이 최고다. 그래야 술로 차가워진 속을 다스릴 수 있다.  

   

 술 마신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아내가 끓여주던 북어 해장국이 생각났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맛을 두 번 다시 볼 수는 없다. 6년 전 아내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아침 생각이 별로 없었지만, 빈 속으로 집을 나선 적이 없었기에, 홍사장은 냉장고에 있는 반찬들로 대충 아침을 때웠다.     


‘늦었다. 가자.’     


 홍사장은 급하게 씻고 출근길에 나섰다. 누가 일찍 출근하라고 강요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홍사장은 늘 남들보다 일찍 출근했다.     


 아침 업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두 시간. 그 두 시간을 홍사장은 매일 벌고 있다고 생각했다. 매일 두 시간이면 일주일에 열네 시간. 한 달이면 육십 시간, 일 년이면 칠백삼십 시간, 십 년이면 칠천삼백 시간을 남들보다 더 버는 셈이었다.     


 게다가 홍사장은 같은 두 시간이라도 아침의 두 시간은 하루 중 다른 때의 두 시간과는 질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아침에는 차 한잔을 마시면서 상쾌하고, 맑은 정신으로 집중해서 많은 일을 처리할 수 있었지만, 점심시간이 지나고 나른한 오후가 되면 아침보다는 정신이 흐려지고, 집중이 잘 안 되는 버려지는 시간들이 많았다. 저녁이나 늦은 밤에는 일을 하려면 잡생각들이 많이 들어 일에 보내야 할 시간을 엉뚱한 곳에 보내는 경우도 많았다.     


 아침에 온전한 나만의 시간. 그것은 신이 주신 축복이었다. 그런데, 이 축복의 시간이 쓰리고, 아픈 속 때문에 망가지고 있었다. 젠장! 어제 마지막 맥주는 마시는 게 아니었어!!     


 홍 사장은 술을 즐겨 마시진 않지만, 마실 땐 늘 마지막에 맥주를 한 잔 더 마셔서 탈이 나곤 했었다. 취기가 제법 올라와 소주를 마시기엔 버거울 때, 가볍게 맥주 한 잔. 하지만, 그 한잔이 가벼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게 맥주가 생각이 날 지경까지 갔다면 이미 제법 마셨을 때였고, 마지막 맥주를 마시면서도 내일 이것 때문에 더 힘들겠지? 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항상 끝에는 아쉬운 마음에 맥주를 마셔버렸다.     


 그 결과 오늘도 힘든 아침이다. 오전 업무를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10시에 차를 몰았다. 지난번 낙지한마리 대구탕을 먹을 때 있었던 일 때문에 앞으로 두 번 다시 가지 않을 작정이었지만, 지금처럼 속이 아플 땐 맑은 대구탕만 한 것이 없었다.     


차가운 술에 한기가 도는 위장에는 뜨끈~한 국물이 들어가야만 속이 풀렸다. 그런데, 맵고, 자극적인 국물은 속을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맑은 국물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생명수.     


 이렇게 위가 쓰리고 아플 때, 대구탕은 처방전을 받아 약국에서 받는 약보다 더욱 효과가 빠르고 좋은 생명수 같은 음식이었다.     


 가게 앞에 도착하자 10시 15분쯤 되었다. 밖에 간판은 꺼져있었지만, 매장 안에는 불이 켜있는 게 보여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이 드르륵 열리는 소리가 나자, 주방쪽에서 소리가 났다.     


“아직 영업시간 멀었습니......”     


큰 목소리와 함께 나타난 사람은 남자 사장이었다.     


“아, 그래요?”     


“어? 안녕하세요? 오늘은 이른 시간에 오셨네요?”   

  

“그럼 지금 식사 안되는 겁니까?”     


남자 사장은 홍사장을 알아서 그런지 조금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10시 30분부터 식사하실 수 있는데,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한 십 분쯤 기다리면 되는 거네요?”      


“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지금 육수도 거의 다 끓었고, 밥도 다 되어 가거든요.”     


“알겠습니다.”     


 십여 분. 아침의 십여 분이란 귀한 시간이 아까운 시간이긴 했지만, 속이 쓰린 지금 홍사장에겐 맑고 시원한 대구탕 한 그릇이 절실했다. 자리에 앉아서 대구탕을 기다리며 잠시 스마트폰을 보다가, 한쪽에 놓인 메뉴판을 봤다.     


대구탕

낙지한마리대구탕

생대구탕(계절메뉴)

곤추가

.

.

.     

곤 추가? 홍사장의 눈에 곤추가라는 글이 들어왔다. 꼬불꼬불 맛있는 곤? 홍사장은 가끔 가는 동태탕 가게에서는 곤을 먹어 봤지만, 여기 대구탕 매장에서는 곤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주문할까 말까 망설이던 홍사장이 불렀다.     


“저기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주방에서는 밥 짓는 소리와 식기세척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주방이 분주해서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홍사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 가까이 다가가 조금 더 큰 소리로 불렀다.    

 

“저기요!!”     


“아, 네!”     

 

남자 사장이 주방에서 뛰어나오며 대답했다. 홍사장이 살펴보니 여자 사장은 아직 출근하지 않았는지 보이지 않았고, 남자 사장만 있는 것 같았다.


“저기, 곤 추가할 수 있습니까?”     


“네. 가능합니다.”     


“그럼 하나 추가 좀 해주세요. 그 꼬불꼬불한 거 맞지요?”     


“네. 맞습니다.”     


홍사장은 대구곤을 하나 추가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 탁.탁.탁.

- 치이익.     

 

주방에서는 도마에 칼질하는 소리, 밥솥에서 수증기가 뿜어 나오는 소리, 가스 불 켜는 소리가 들리고, 팬 위에 무언가를 굽는 소리도 들렸다. 그 다양한 소리가 어릴적 이른 아침 어머니가 아침밥을 준비하시는 주방을 떠올리게 해 무척이나 정겹게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방에서 퍼져나온 음식 냄새가 홀에도 가득 퍼졌다.     


홍사장의 입에 침이 살짝 고였다.      

 

10시 30분이 조금 지나서 남자 사장이 서빙카트를 밀고 왔다. 부추전, 두부구이, 깍두기, 가지, 곱창김. 그리고 평소엔 별말 없이 함께 올려두던 오이양파절임을 들다가 말고 물어봤다.     


“이건 안 드시죠?”     


“예? 아, 예.”     


 홍사장은 오이를 싫어했기에 나오는 반찬들 중에서 그것만 빼고 먹었는데, 남자 사장이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남자 사장은 오이양파절임을 다시 서빙카트에 올려놓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대구탕과 흑미가 들어가 보랏빛을 띤 갓 지은 밥을 테이블에 올려두고 갔다. 갓 지은 밥에서 나는 구수한 냄새가 홍사장의 기분을 좋게 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대구탕을 보니, 뽀얀 곤이 보였다. 평소 홍사장이 봤던 곤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훨씬 더 큼직하고, 하얀색의 곤.    

  

“사장님.”     


“네?”     


“혹시 이게 곤이 맞나요?”     


“아, 네. 혹시 알을 말씀하셨던 건가요?”     


“아니, 아니요. 제가 먹던 곤은 좀 더 작고, 색깔도 좀 달랐던 것 같아서.... 이렇게 크고 하얀 곤은 또 처음보네요.”     


“아, 아마 드셨던 곤은 명태곤이었을 거에요. 명태곤은 대구곤보다 작고 색깔도 조금 거무튀튀한 색을 띠거든요. 저희는 대구탕 매장이라 대구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드셔보시면 훨씬 고소하고 부드러운 맛이 날 거에요. 그리고 정확히 말씀드리면 원래 곤이라는 건 알을 의미하는 거랍니다. 지금 드시는 건 이리라고 하는 게 정확한데, 이리를 곤으로 알고 계시는 분들이 많아서 그냥 곤이라고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리? 곤? 뭐가 이리 복잡해?’     


홍사장은 남자 사장이 하는 말이 복잡하게 들려서 괜히 물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네.”     


홍사장은 알아듣기 힘든 대화를 끝내려 얼른 대답하고 뜨거운 국물 한 모금을 입에 후룩 머금고 속으로 넘겼다.     


“으~아~”     


 속을 쩌릿쩌릿 저리며 내려가는 뜨거운 대구탕. 절로 탄성이 나왔다. 홍사장은 얼른 한 숟갈을 더 떠서 속으로 넘겼다. 뜨거운 국물은 뒤집힌 속을 비단으로 뒤덮듯 부드럽게 훑어주며 흘러갔고, 단 두 숟갈 만에 홍사장의 속은 편안~해졌다. 이거 뭐 위장약보다 효과가 더 빠르구만!!     


 홍사장이 한겨울 추위에 떨다가 목욕탕 온탕에 몸을 담글 때 터져 나올 법한 탄성을 연신 내지르며 맛있게 국물을 삼키는데, 남자 사장이 다가오더니 테이블 위에 무언가를 탁 올려놓았다.     


‘와사비?’     


“곤 찍어드실 때 좋습니다.”     


“아, 그래요?”     


 홍사장은 남자 사장이 주고 간 와사비를 간장에 풀었다. 그리곤 우윳빛이 나는 뽀얀 곤을 젓가락으로 살짝 집어 와사비를 푼 간장에 폭 찍어 입에 넣어 씹었다. 투둑투둑 무언가 뜯어지는 것 같은 식감과 함께 입안을 가득 채우는 꼬소~한 맛. 진한 우유 한 모금을 머금은 듯한 고소한 맛과 오돌토돌한 식감이 와사비 간장과 함께 환상의 조화를 이루었다.     


‘오옷!!’     


 홍사장은 차마 어린아이처럼 소리를 지르며 좋아할 순 없었지만, 근래에 맛본 음식 중에서 최고로 맛있는 대구곤에 푹 빠져버리고 말았다. 이야~ 대박이다! 이 맛!! 홍사장은 곤을 와사비장에 착착 찍어서 부지런히 입으로 가져갔다.    

 

“음흠흠.”     


음식을 먹는 홍사장의 입에서 마치 웃음소리가 흘러나오듯, 즐겁게 대구탕과 곤을 음미했다.     


드르륵.     


10시 45분. 아직 점심을 먹기에 조금은 이른 시간이었는데, 젊은 남자 두 명이 입구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싸장뉨. 치큼 식사?”     


둘 중에 한 사람이 남자 사장을 보고, 손으로 떠먹는 시늉을 하면서 물었다.     


“아, 안녕하세요? 어제도 오시고, 오늘 또 오셨네요? 네. 됩니다. 저기에 앉으세요.”     


 젊은 남자 두 명은 외국인들처럼 보였는데, 한국말이 조금 어눌했다. 남자 사장의 반응을 보니 서로 아는 모양이었다.     


홍사장이 젊은 남자 둘을 물끄러미 쳐다보자 남자 사장이 홍사장에게 살짝 말했다.     


“요기 밑에 은자대학교에 다니는 외국인 학생들이에요.”     


“아, 예.”     


홍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자대학교. 처음 의과대학을 시작으로 발전한 대학교였는데, 지금은 지역에서 가장 큰 대학교로 성장했고, 과도 다양해서 외국인 학생들도 공부하러 많이 왔다.      


“싸장뉨. 태쿠탕. 태쿠탕.”     


남자 사장이 물을 가져다주니, 외국인이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이며 말했다.     


“대구탕 두 개 드릴까요?”     


“예. 예.”     


“네~ 대구탕 두 개요~”     


남자 사장이 돌아서 가려는데, 외국인 남자가 다시 불렀다.     


“아, 싸장뉨! 싸장뉨!”     


“네?”     


“쩌기, 그꺼요, 그꺼.... 어...”     


 외국인 남자가 손을 자신의 배 위에서 뱅글뱅글 돌리며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잘 생각이 나질 않는지 계속 어, 저기, 음, 을 반복했다.     


 홍사장은 곁눈으로 그 모습을 보면서 계속 대구탕을 먹었다. 국물을 한 모금 마시고, 큼직~한 우윳빛 대구곤을 젓가락으로 집어 탕에서 꺼냈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뽀얀 대구곤은 너무나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신세계의 맛을 본 홍사장이 대구곤을 와사비 간장에 폭 찍어 입에 넣었다. 투둑투둑 뜯어지는 소리가 또 들렸고, 입안 가득 진한 우유의 고소한 맛처럼 확 퍼졌다. 대구탕 가게에서 요즘 계속 언짢은 일들만 생겼는데, 모처럼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홍사장이 흥겨운 마음으로 대구곤을 뽀득뽀득 씹으며 즐거워하는데, 남자 사장이 갑갑해 하는 외국인 손님에게 물었다.   

  

“뭐 넣어 먹는 거요?”     


“예. 예. 그 있잖아요. 태쿠탕에 그....”     


외국인 남자가 계속 손으로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곤이요?”     


남자 사장이 물었다.     


“예? 콘... 그 꼬불꼬불 한 거...아, 저커! 저커요!”     


홍 사장이 후후 불어서 곤을 먹는데, 외국인 남자가 홍사장이 먹는 곤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 곤 맞습니다. 넣어 드릴까요?”     


“콘....마차요?”     


외국인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곤이 맞는지 몰라서 한 번 더 확인했다.     


“네.”     


“아, 예. 크럼 두 개.”     


외국인 남자는 주문을 하면서도 뭔가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짓다가, 불현듯 뭔가 떠올랐다는 듯 손뼉을 한 번 짝!! 치더니 외쳤다!     


“아, 싸장뉨! 정소! 정소! 콘이가 정소 마차요?”     


“푸웁!!”     


외굮인의 외침에 옆에서 곤을 맛있게 먹고 있던 홍사장의 목에 곤이 걸려버렸다.      


정소. 대구의 정소. 맞다. 그것이 대구의 정소라는 것은 홍사장도 알고는 있었다. 명태의 정소는 명태곤. 대구의 정소는 대구곤.     


 그렇게 알면서 먹고 있었지만, 갑자기 옆에서 외국인 남자가 그 사실을 다시 상기시켜주니 이상하게 고소한 대구곤에서 비린 맛이 확 풍기는 듯한 착각이 들면서 입맛이 뚝 떨어졌다.     


“아, 네. 맞습니다. 그게 곤이에요. 말씀하신 정소를 이렇게 부르긴 하는데, 원래는 알을 곤이라고......”     


 남자 사장은 불필요할 만큼 장황하게, 조금 전 홍사장에게 알과 곤의 차이에 대해서 했던 설명까지 섞어서 외국인들에게 이야기했다.     


 오늘은  기분 상하는 일 없이 밥을 잘 먹고 가나 싶었던 홍사장은 또 한 번 기분이 확 상해버리고 말았다.     

홍사장은 속을 풀기 위해 왔다가,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아 절반쯤 먹은 대구탕과 곤을 그대로 놔두고, 일어섰다.     


카운터로 가자 남자 사장이 말했다.     


“벌써 다 드셨어요? 만 사천 원 나왔습니다.”     


대구탕은 만천 원인데, 곤이 삼천 원이라서 만사천 원이 나온 것이었다. 홍사장은 제대로 먹지 못한 음식값을 모두 지급해야 한다는 사실이 기분 나빴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근데, 그냥 가자니 또 너무 억울해서 카드와 영수증을 받으며 한마디 했다.     


이제 진짜 여기 못 오겠네요!”     


“네?”     


남자 사장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홍사장은 더 말하지 않고 쌩 나가버렸다. 기분은 나빴지만, 왜 기분이 나쁜지 설명하기에는 참 거시기했기 때문에!  남자 사장은 멍하니 입구에 서서 홍사장의 뒷모습을 두 눈을 끔벅이며 쳐다만 볼 뿐이었다.                                                                                                                   

06. 대구튀김    

 

 지연씨는 오늘도 멍한 표정으로 늦은 아침을 맞이했다. 남편은 이미 출근하고 없었고, 아이들도 학교에 가고 없었다.  

   

 남편과 아이들이 아침밥을 먹고 갔는지 안 먹고 갔는지 알지도 못했고,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지연씨는 거실 소파에 털썩 앉아 깊게 몸을 파묻으며 등을 기댔다. 생기 없는 눈빛으로 그렇게 가만히 앉아서 켜지지도 않은 TV의 검은 화면을 응시했다.     


- 딴따따단단따따단     


스마트폰에서 벨이 울렸다.    

 

 지연씨가 스마트폰을 들어서 액정을 보니 친구 선희였다. 지연씨는 전화를 받을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이것저것 꼬치꼬치 따져 물으며 잔소리를 할 친구 얼굴을 생각하니 선뜻 받아지지 않았다. 그렇게 망설이는 사이 스마트폰 벨이 멈췄다.  

   

 지연씨가 벨이 꺼진 스마트폰을 들어 화면을 터치하는데, 터치하는 순간 동시에 선희라는 글자가 떴다. 선희가 연달아 또 전화를 걸었는데, 걸자마자 터치를 해버린 것이었다.    

 

“여보세요?!”      


스마트폰에서 친구 선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순간 화들짝 놀란 지연씨는 그냥 얼떨결에 전화가 받아진 것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끊어버릴까 생각도 순간 했는데,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진 못했다.


“여보세요?!! 야!! 지연아!!”     


“.....어. 선희니?”     


“야 이년아! 죽을래? 왜 전화를 씹고 지랄이야?!”     


 역시 선희. 말투가 장터 국밥집 욕쟁이 할머니처럼 걸걸했다. 그렇다고 악의가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지연씨는 잘 알았기에 선희의 말에 피식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씹긴 뭘 씹어? 받으려는데 끊어져서 너한테 전화 걸려는데, 너한테 다시 전화가 온 거야.”     


“네가? 나한테? 전화를? 하이고... 퍽이나....”     


지연씨의 절친 선희씨는 현재 지연씨의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오늘 아침엔 지훈씨 출근하는 거 봤니?”     


“...”     


“아이들 학교 가는 건 봤고?”     


“...”     


“내 그럴 줄 알았다. 일단 만나.”     


“뭘 또 만나? 그냥 전화로 얘기해.”     


“야! 그냥 만나자면 만나! 안 나오면 내가 너네 집으로 쳐들어 간다!”     


지연씨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전화를 안 받았다면.... 아니다. 친구 선희는 만약 지연씨가 전화를 계속 받지 않았다면 119에 신고를 했거나, 당장에라도 집으로 쳐들어올 친구였다.

     

선택지는 딱 두 가지. 밖에서 만나거나, 집에서 만나거나. 안 만날 수 있는 옵션은 선택지에 없었다.     


“하.... 알았어. 몇 시?”                    




대구탕 매장은 오늘따라 아주 바빴다.     


“정말 죄송한데, 자리가 없어서 기다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얼마나요?”     


“한...20분에서 30분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예? 30분이요? 야, 그냥 가자.”     


“아니야. 아니. 여기 대구튀김 진짜 맛있다니까? 알겠어요. 기다릴게요.”     


 지연씨는 안 그래도 나오기 싫은 걸 억지로 나왔는데, 30분이나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짜증이 확 올라왔다. 친구 선희가 오자고 해서 왔지만, 기껏 가자고 한 곳이 대구탕 가게라는 사실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매장의 허름하고 낡은 외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기다리기까지 해야 한다고? 하,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날씨는 또 왜 이리 쨍쨍하고 맑은 건지...     


 매장 입구에는 양옆으로 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놓인 의자도 매장의 외관처럼 낡아 색이 바래고 헤졌다. 선희씨는 별생각 없이 칠이 벗겨진 나무 의자에 털썩 앉았는데, 지연씨는 앉지 않고, 선희씨 옆에 서 있었다.     


“앉아.”     


“아니 좀 서 있을게. 어차피 매장 들어가면 계속 앉아 있을 건데...”     


지연씨가 말은 이렇게 했지만, 의자가 칠이 벗겨지고 낡아 보여서 앉기 싫다고 했다간 털털한 성격의 친구가 쌍욕을 퍼부을 거라는 걸 알았기에 대충 둘러대는 거였다.   

  

“그런데, 기다리면서까지 먹을 필요가 있니? 이 주변에 다 식당인데.”     


“다 식당이지. 그런데 너 아무 식당이나 갔다가 아무 음식이나 나와서 아무렇게나 대충 먹으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어떻게 되는데?”     


“우울증 걸려! 너처럼!”     


“참, 나. 별소릴 다 듣는다.”     


“야, 하루에 딱 세 번. 아니, 요즘엔 거의 아침을 거르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하루에 딱 두 번. 내 입을 행복하게 만드는 시간인데, 그걸 대충 때워서 되겠냐? 그리고, 그 음식들이 내 몸에 들어가서 나의 일부가 되는 건데 대충 아무 음식이나 먹어서 되겠냐고!!”   

  

지연씨는 친구의 말에 반박해봤자 괜히 입만 아플 거라는 걸 알았다.      


괴변. 친구 선희는 늘 엉뚱한 말을 늘어놓고, 그것이 자기가 아닌 다른 보통의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인 양 떠들어 대는 것이 특기였다. 

    

“너 치킨 좋아하지?”     


“치킨 싫어하는 사람도 있니?”     


“그럼 됐어! 너 무조건 이거 좋아한다!”     


“뭘?”     


“대구튀김!”     


기다린 지 20분이 조금 지나갈 때쯤 입구에서 여자 사장이 지연씨와 선희씨에게 들어오라고 손짓으로 불렀다. 둘이 매장에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지연씨는 대구탕 가게를 휘 둘러봤다. 매장이 그리 크진 않았지만, 밖의 허름한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내부는 환하고 깔끔했다. 테이블은 홀에 5개, 방에 3개. 총 여덟 개가 있었는데, 한 자리가 차지하는 공간이 무척 넓었다.      


‘테이블 배치만 잘하면 열 자리는 더 나오겠네. 이러니 자리가 부족하지.’     


 지연씨는 대구탕 매장의 테이블과 그것들이 차지하는 공간이 상당히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 선희가 메뉴판을 살펴보고 있어서, 지연씨도 고개를 삐죽 내밀어 메뉴판을 같이 살폈다.  

    

대구탕, 낙지한마리대구탕, 대구뽈찜, 낙지찜, 대구튀김. 여기 있다! 대구튀김. 사이즈는 맛보기, 소, 중, 대.     

“둘이서 먹으니까 맛보기로 하자. 그리고..... 날도 더우니까 대구탕은 보양식 낙지가 들어간 걸루~”     


답.정.너. 선희씨의 스타일이었다.     


“오케이?”     


선희씨가 묻자 지연씨가 피식 웃었다.     


“뭐, 다른 선택이 있겠냐?”     


 주문하고 기다리자, 음식들이 나왔다. 부추전, 두부구이, 가지볶음 등 밑반찬이 나오자 지연씨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선희씨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어때? 잘 나오지?”     


“..어...그러네?”     


“그러니까 사람이나, 이런 음식점이나 외관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니까? 원래 속 깊고, 진국인 사람들이 꾸밈없이 다니고, 맛집들이 외관에 신경을 안 쓰는 법이란 말씀. 요즘에 화려하고 말끔한 곳들이 얼마나 많냐? 이 주위에도 다 카페고, 식당이고 새 건물들이잖아? 요샌 이렇게 오래된 음식점들이 더 귀하다니까?”     


“아, 네~ 네.”     


선희씨의 대구탕 가게 예찬이 이어지고 있는데, 대구튀김이 먼저 나왔다.     


“맛보기 튀김 나왔습니다~”     


하얀 기름종이가 깔린 작은 쟁반에 대구튀김 몇 조각이 올라가 있었고, 그 옆에 약간의 감자튀김과 레몬 한 조각이 예쁘게 놓여 있었다. 위에는 파슬리가루를 뿌려놓아 정갈하고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괜찮지?”     


“아직 먹어보지도 않았는데?”  

   

“얼른 먹어봐.”     


지연씨가 대구튀김 한 조각을 젓가락으로 집어 들었다.     


“잠깐, 잠깐.”     

 선희씨가 레몬조각을 손으로 집어 들어서 지연씨의 대구튀김 앞으로 가져가더니, 레몬의 양 끝을 살짝 눌렀다. 그러자 마치 미스트를 뿌리는 것처럼 레몬에서 즙이 분사되어 지연씨가 젓가락으로 쥐고 있는 대구튀김을 휘감았다. 상큼한 레몬향이 코끝에 전해졌다. 

    

“이렇게 먹으면 더 맛있어.”   

  

 지연씨는 대구튀김을 입에 넣기 전 잠시 쳐다봤다. 눈으로 보기에도 노릇노릇 바삭하게 잘 튀겨졌다. 튀김옷이 보통의 밋밋한 튀김옷과는 다르게 포슬포슬 부풀어 올라 바삭하게 튀겨진 모습이 신기했다. 

  

지연씨는 대구튀김을 입에 넣고 씹었다.     


-바.사.삭.     


소리와 함께 꼬소~한 맛, 쫄~깃한 식감과, 은은한 아로마 향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오~~~~”     


지연씨는 저도 모르게 엄지를 척 올리며 감탄했다.     


“맛있지?”     


“이야~ 뭐야? 진짜네? 치킨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맛이 나는 거지? 아니, 이거 정말 치킨보다 더 낫다!”     


“내가 그냥 오자고 했겠냐?”


지연씨가 대구튀김을 한 입 더 베어 물며 입을 우물거리면서 말했다.     


“어쩜, 어쩜! 생선에서 이런 맛이 나지?! 진짜 생선 같지도 않아! 비린 맛이 일도 없고.”     


“어때? 맛난 대구튀김도 있겠다. 시원~한 맥주 한 잔?”     


“뭐어? 너 제정신이니? 대낮부터 맥주를? 어? 그건 정말.... 너무너무 좋~치!!”     


둘은 까르르 웃으며 넘어갔다.   

  

 대구탕 매장에 있는 사람들이 그녀들을 쳐다봤다. 특히 저쪽 구석에서 혼자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은 그녀들을 벌레 보듯 못마땅한 표정으로 쳐다봤는데, 지연씨와 선희씨는 주위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맥주를 주문했다.     


- 치이익. 

- 퐁.     


맥주병을 시원하게 따고 차가운 유리컵에 맥주를 꿀렁꿀렁 따랐다.     


지연씨가 맥주잔을 기울여 거품 없이 받으려는데 선희씨가 지연씨의 맥주잔을 바로 세웠다.     


“야! 너 요즘엔 맥주 거품 생기도록 받는 거 모르냐?”     


“뭐? 왜?”     


“그래야 더 맛있대.”     


“거품 많은 게 뭐가 맛있어?”     


“그냥 유행이라니까 그렇게 해 이년아. 우리가 언제는 입기 편해서 티셔츠 앞쪽은 바지에 쑥 찔러넣고, 뒤쪽은 빼고 다녔냐? 걍 유행이야 유행!”     


선희씨는 요즘 유행이라며 유리컵의 거의 절반이 거품이 되도록 맥주를 따랐다.     


“참 별스런 유행도 다 있다.”     


“야, 야, 됐어. 어쨌건 자 맛있게 짠~~”     


선희씨와 지연씨는 맥주잔을 살짝 부딪치고 시원하게 맥주를 삼켰다.     


“어우~~~ 좋다!!”     


“크~~ 시원~하다!”     


차가운 맥주가 목을 톡 쏘며 넘어가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맥주 거품이 묻은 입에서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자, 지금 입에 넣어야 해.”     


선희씨가 대구튀김에 레몬즙을 살짝 뿌리더니 지연씨 입에 밀어 넣었다. 지연씨는 방금 맥주가 넘어간 차가운 입으로 따듯한 대구튀김을 받았다.     


바사삭 소리와 함께 대구튀김의 고소하고 쫄깃한 맛이 입을 꽉 채우자 세상에 천국이 여기인가 싶었다.     


“넘 행복해.”     


입을 우물거리며 하는 지연씨의 말에 선희씨가 멈칫했다. 그리곤 맥주잔을 들어 남은 맥주를 쭉 다 비우곤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정말 오랜만이네.” 

    

“뭐가?”     


“네 입에서 행복하단 말이 나온 거.”
 

“별소릴 다 한다.”     


“방금 네가 했던 말처럼 그냥 일상의 이런 소소한 일들이 모두 행복 아니겠니?”     


“누가 뭐래?”     


“...”     


 지연씨도 남은 맥주를 쭉 들이켰다. 선희씨는 병에 남은 맥주를 지연씨 잔에 마저 붓고 맥주 한 병을 더 시켰다.     


“너 이렇게 많이 마셔도 돼? 다시 회사에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야?”     


“참. 일찍도 물어본다. 내가 회사에 가야 되면 너랑 이렇게 술을 마시겠냐? 오늘 연차 냈어. 너랑 낮부터 한잔하려고. 키킥.”     


 선희씨는 일부러 연차를 내고 가능한 많은 시간을 친구 지연씨랑 보내려고 했다. 요즘 들어 부쩍 지연씨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울증.     


지연씨가 앓고 있는 병이다.      


 어느 날 지연씨는 갑자기 너무 기억력이 감퇴한 것 같아 병원을 찾았다가 엉뚱하게도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기억력이 저하되는 것과 우울증이 무슨 상관이 있다고? 지연씨는 의사의 진단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다른 병원 몇 군데를 더 가봤지만, 모두 똑같이 우울증을 진단했다.     


 내가? 우울증? 지연씨는 처음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었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도대체 내가 왜?     


 평범한 가정. 성실히 직장을 다니는 남편과 큰 말썽 없이 잘 자라주는 두 아이. 일 년에 두 번 아이들 방학 때면 해외여행을 가고, 주말에는 캠핑을 가거나, 맛집 탐방을 다녔다. 지극히 평범 아니, 어떻게 보면 남들보다 조금은 더 여유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즐기며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우울증이라니?!! 

    

 그런데, 얼마 전 이 증상에 대해서 남편에게 말했을 때, 남편의 반응이 지연씨를 더욱 놀라게 했다. 왜냐하면, 지연씨의 남편 지훈씨가 아내의 우울증 진단을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수긍했기 때문이었다.     


 믿을 수 없다며 거부를 하는 것까진 아니라도, 최소한 몇 번의 놀라는 모습과 증세를 부정하는 표현을 몇 마디는 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쉽게 수긍을 해버리다니!! 이미 남편은 짐작하고 있었단 말인가? 도대체 나의 어떤 행동이?     

 

 단순히 기억력 감퇴라고 생각하다가,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고 나니, 더 우울해졌다.   

  

“야! 니가 언제부터 그렇게 됐는지 아니?”     


또 시작이다. 선희의 똑같은 레퍼토리.     


“그럼. 너한테 그렇게 지긋지긋하게 들었는데 모르겠니?”     


“그래! 그럼 잘 알겠네! 내가 말했지? 사람이 바빠야 잡생각이 안 든다고! 네가 한 달 살기인가 뭔가 그걸 하면서부터 그렇게 된 거라니까?”     


 지연씨는 아이들을 데리고 말레이시아에서 한 달 살기, 필리핀에서 한 달 살기, 강원도에서 한 달 살기,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 이렇게 총 2년에 걸쳐서 아이들 방학 때마다 네 번의 한달 살기를 해봤다.     


 “지연아! 정말 너어~~무 좋겠다!”      


 주위의 많은 사람이 아이들과 함께 한 달 살기를 하러 떠나는 지연씨를 부러워했다. 처음엔 지연씨도 너무 좋았다. 남들은 어쩌다 해외여행 며칠 다녀오는 것만으로도 좋아했는데, 한 달이나 살기 위해서 떠나다니!!     


“자기야 너무 좋긴 한데, 그렇게 해도 정말 괜찮아?”     


 지연씨는 본인이 남편에게 그렇게 조르고 졸라놓고서, 막상 남편이 준비를 다 해놓고 나니 그래도 되냐고 이제 와 묻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뭐 여유도 안 되는데 보낼까 봐?”     


남편은 중소기업에 다니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직장인의 연봉으로 보낼 수 있는 거였나? 지연씨는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돈 관리는 모두 남편이 하고 있었기에, 그동안 잘 모아뒀나보다 생각했다.    

 

 그렇게 떠난 이국에서의 생활은 정말 즐겁고, 흥미로웠다. 여기저기 구경도 다니고, 외국인 선생님에게 영어도 배우고, 밤에는 인터넷에서 검색한 맛집들을 돌아다니며 맛있는 음식과 시원한 맥주도 즐겼다.   

  

 그렇게 일주일이 훌쩍 지나갔다. 일주일. 그런데 그 일주일이 지나면서부터 지연씨에게 다가오는 이국의 느낌이 조금은 다르게 느껴졌다. 열심히 일을 하다가 짬을 내어 잠시 여행을 왔을 때처럼,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아이들과 자신이 어딘가에 뚝 떨어져 있는 기분. 그렇다고 기분이 나쁘다고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아무도 자신을 아는 사람이 없는 곳. 그만큼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였기에 자유롭다고 느꼈다. 그런데 이상하게 즐겁고 유쾌하지도 않았다. 마치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이 원래부터 누리던 일상적인 것처럼.  

   

 지연씨는 일주일이 지나자 저녁에만 마시던 맥주를 점심을 먹으면서도 마셨다. 시원~한 맥주. 뜨거운 열대의 나라에서 얼음을 넣어 마시는 맥주는 밥과 따로 먹는 술이 아니라, 밥과 함께 먹는 여러 밥반찬 종류 중 하나같이 느껴졌다.   

  

 처음엔 가볍게 한 잔으로 시작한 맥주가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더 늘어갔다. 그렇게 취하는 시간도 함께 늘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가 깼다. 집에 전등불은 모두 꺼져있고, 아이들은 거실에서 잠이 들어 있는 것을 보며 몽롱한 상태에서 서서히 정신이 들던 그 시간. 시계를 보니 저녁 8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갑자기 무서워졌다. 도대체 내가 여기에 왜 와있는 거지? 지연씨가 동경했던 한 달 살기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 늘 즐겁고 유쾌한 그런 한 달 살기를 꿈꾸었는데,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직 보름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못하겠다고 돌아가겠다는 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TV와 유튜브에 나오는 한 달 살기를 보면서 남편에게 얼마나 많은 말을 쏟아냈던가! 그래서 남편은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는가!!     


 어쩔 수 없었다. 한 달. 한 달은 무조건 버텨내야 했다. 다음날부터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이틀 동안은 그 다짐을 잘 지켰다. 하지만, 사흘째로 접어드는 날. 시원한 맥주가 너무나 간절해 결국 마셔버리고 말았고, 그게 마중물이 되어 그렇게 계속 한 달 살기가 끝날 때까지 술을 마시게 되었다.     


 여유롭고, 즐거운 마음으로 출발했던 첫날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지치고 피폐해진 몸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지연씨는 이제 두 번 다시 한 달 살기와 같은 멍청한 계획은 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그리고 맥주도 끊겠다고!     


“야!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니?”     


선희의 말에 지연씨는 첫 한 달 살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아니. 아무것도.”     


“내 말 알아들었어?”     


선희씨는 지연씨가 옛날을 생각하는 동안 계속 뭐라 떠들었었다.     


“으..응.”     


“이년 이거!.....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니까? 됐다, 됐어. 술이나 마셔 이년아!”     


선희씨와 지연씨는 다시 잔을 부딪쳤다.      


 지연씨는 처음 한 달 살기를 끝내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다시는 맥주를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손에 든 맥주잔을 잠시 바라봤다가 쭉 들이켜 다 잔에 담긴 맥주를 다 비워버렸다.           


07. 대구목살     

 

 홍사장은 오늘따라 기분이 상쾌했다. 어제저녁 6시 이후부터 아침 6시까지 12시간 동안 음식을 먹지 않는 간헐적 단식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보통은 16시간 속을 비우고, 8시간 동안에는 마음껏 먹는 16:8을 많이들 한다고 하는데, 시작단계부터 16시간이나 공복으로 있는 것은 힘들 것 같아 12시간 공복을 먼저 시작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어제 처음으로 12시간을 공복으로 있어 봤는데, 잠을 잘 때 조금 배가 고프긴 했지만, 자고 일어났을 때 너무나 상쾌했다. 진즉 할걸.   

  

 홍사장은 조금 더 일찍 간헐적 단식을 시작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 약간의 후회를 했으나, 늦게 시작한 만큼 더욱 열심히 해보겠다고 의지를 불태웠다. 늙더라도 건강하게 늙어보자!!  

   

 상쾌하게 시작한 아침. 직원들과 잠시 아침 미팅을 했다. 회의가 마무리될 때쯤. 홍사장이 언제나 그러하듯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스티브잡스의 말을 인용해 끝인사를 했다.  

   

“우리의 이 사업이라는 것은 비틀즈 같은 것입니다! 그들 개개인이 다른 사람과 조화를 이뤄 시너지를 끌어낸 것처럼, 위대한 일은 언제나 다른 사람과 협력해야만 이뤄낼 수 있습니다! 협력! 업무를 협력하세요! 그래서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세요!!”   

  

홍사장은 모처럼 상쾌한 기분으로 회의를 마치고 나왔다.      


 오전 10시. 딱 기분 좋을 시간이다. 홍사장은 오늘 잠시 병원에 들러야 했다. 지난번 건강 검진을 했는데, 이상이 있다며 정밀검사를 해보자고 해서 정밀검사를 했었고, 오늘 그 결과를 들으러 가는 날이었다. 홍사장은 큰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나이가 들면서 건강 검진을 할 때마다 어딘가에는 이상이 있었고, 그때마다 정밀검사나, 재검사를 받아봐야 했다.   

  

사람 건강을 빌미로 돈이나 뜯어내는 추잡한 새끼들!’    

 

 홍사장이 생각하는 의사들에 대한 이미지였다. 조금만 뭐 하면 이 검사해봐야 한다, 저 검사해봐야 한다. 하면서 검사비용을 엄청나게 뜯어갔다.     


 처음엔 검사 후 큰 이상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이런 일들이 반복되자 의사들이 사람에게 잔뜩 겁을 주고, 별 이상이 없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만들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게 많은 돈을 쓰게 만들어 놓고,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하다니!! 그냥 검사를 안 했어도 아무런 이상이 없는 몸이었는데!!     

 

그래서 이번에도 정밀검사 어쩌고저쩌고할 때 그냥 침을 확 뱉어버리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의사와 싸워서 좋을 것도 없으니까.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내 마음 편하자고 그냥 의사가 하자는 대로 해줬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하나쯤 암세포 같은 게 나타날 테고, 그걸 조기에 발견하고 치료도 하면서 이런 지랄 맞은 검사에 대한 위안으로 삼아볼 생각이었다.     


“사장님!”     


정부장이 홍사장을 호들갑스럽게 부르며 달려왔다.     


“왜?”     


홍사장은 정부장의 요란스러움이 못마땅한 듯 인상을 찌푸리며 퉁명스레 대답했다.     


“저기......”     


급히 달려와 놓고 막상 말을 망설이자 안 그래도 미운털이 박힌 정부장이 더 미워 보였다.     


“아, 말을 해!!”     


홍사장의 호통에 정부장이 깜짝 놀라 어깨를 들썩였다.     


“저.. 일이 좀 생겼습니다...”     


“무슨 일?”     


“이번에 우성에 납품한 물건이.....”     


“그게 뭐? 아, 숨넘어가겠네!! 빨리 말 못해?!”     


“원가 계산이 잘못돼서.....”     


“뭐어?!! 그래서!”     


 숨이 넘어갈 듯한 홍사장이 고구마 백 개보다 더 갑갑한 정부장에게 호통을 쳐가며 들은 이야기로는 환율변동에 따른 원자잿값 상승을 고려하지 못하고, 잘못 단가표를 넘겼는데, 우성에서 평소 주문량의 3배에 달하는 발주가 들어왔고, 홍사장 회사에서는 그 사실도 모르고 1차로 납품을 했다가 이번에 인지를 하게 된 것이었다.     


 보통 관례상으로는 타 회사와 가격 차이가 크게 나면 다시 한번 가격 확인을 해보고, 잘못을 정정하고 거래를 해야 하는데, 우성에서는 웬 횡재냐 싶어 얼른 잘못된 단가표를 낚아채고, 거기에 평소보다도 훨씬 더 많은 물량을 주문하고 계약해버린 것이었다.     


“개새끼들!!”     


홍사장은 화가 치밀어 얼굴이 시뻘게졌다.     


이대로 2차, 3차 물량이 들어가면 들어갈 때마다 회사는 손해를 봐야 하는 처지였다.   

   

“물량 입고 못 해준다고 해!”     


“저기.... 그렇게 말해봤는데, 우성에서도 이 가격으로 이미 다른 회사와 계약을 다 했다고, 만약 납품이 안 돼서 다른 거래처와 계약 틀어지면 손해배상을 해야 할 거라고........”     


“휴우우우.........”     


홍사장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호사다마? 어쩐지 아침부터 기분이 좋다고 했다. 그런데, 좋았던 기분에 비해 나쁜 일이 너무 큰 건이 터져버렸다.     


“이 계약 건. 누구야?”     


“예?”     


“담당자가 누구냐고!”     


“......”     


 정부장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홍사장은 정부장이 아무런 말도 못 하는 이유를 잘 알았다. 정부장 담당이었기 때문이었다.     


“에라이!!”     


홍사장이 정부장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흐업!!”     


정부장이 정강이를 부여잡고 깡충깡충 뛰었다.     


“너 지금 몇 년 차야?! 어?! 어떻게 이십 년을 넘게 일하면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해!!”     


“죄송합니다.”     


“알긴 아냐?!!”     


“.......”     


“그래! 모두 납품하면 우리는 얼마나 손해를 보는 건데?!”     


“..... 대략.. 1억 8천정도....”     


“하아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요즘 은행이자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는데, 원자잿값도 가파르게 올라서 회사 이익률도 팍팍 떨어지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손실이 1억8천...... 이 손실은 다른 비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비용이었다. 여기에 회사 인력들의 인건비와 필요경비 등등을 모두 포함하면 2억은 훨씬 넘어서는 금액.....     

 홍사장은 정신이 아득~해지며 어지러워 비틀거렸다. 정부장이 어쩔 줄 몰라 당황하며 비틀거리는 홍사장을 부축했다.     


“사, 사장님!!”     


“놔! 이 새끼야!!!”     


홍사장이 정부장의 손을 뿌리쳤다.      


“너, 너 이 새끼!! 이 새끼!!”     


 홍사장이 정부장에게 삿대질하며 호통쳤다. 정부장은 고개를 숙이고서 눈에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홍사장은 삿대질을 하다가 홱 돌아서 자신의 차로 걸어가 차에 올라타 문을 쾅! 닫았다.     


“사장님!! 사장니임~~!!”     


 정부장은 울먹이며 홍사장을 불렀지만,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홍사장은 차를 몰고 회사를 휙 떠나버렸다. 저 새끼 저거 내 이번에는 반드시 잘라버린다!! 아~ 저 새끼 때문에 진짜 암 걸리겠네!!                




“암입니다.”  

   

“예에?!!!”     


 정부장에게 화가 머리끝까지 난 홍사장은 얼른 병원에서 결과를 듣고 빨리 회사로 돌아가 이 일과 관련된 인간들에게 한바탕 소리를 지르고, 정부장은 정말로 쳐내버릴 생각이었다. 회사 초창기부터 동고동락한 직원? 이젠 정말 필요 없다!! 더는 함께 있다가 화병이 나서 암에 걸릴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병원에 왔더니 진짜 암이라고 한다!     


 이번에도 정밀검사 결과는 별문제 없겠지. 약 처방이나 받고, 운동 꾸준히 하고, 기름진 음식 피하고, 술, 담배 하지 말라는 이야기나 하겠지. 라고 생각했던 홍사장에게 깜짝 놀랄 소리였다. 암? 정말 암이라고? 아..... 암. 암이라는 말에 홍사장은 심장이 덜컹 하고 놀라면서도 한편으론 아, 드디어 여태껏 검진을 받아왔던 보람을 느낄 수 있게 되었구나! 그래! 이러려고 지금껏 한마디 하려는 걸 참았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뭐 수술받으면 되는 겁니까?”     


 홍사장은 지금까지 매년 건강 검진을 꼬박꼬박 잘 받아왔으니. 암이라고 해도 초기일 것이고, 얼마든지 치료가 가능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의사는 말을 잇지 못하고 망설였다. 홍사장이 의아한 표정으로 의사를 쳐다봤다. 의사가 잠시 눈을 감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며 안타까운 눈빛을 하고 말했다.     


“죄송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암세포가 간과 폐, 그리고 식도까지 모두 전이가 다 되었습니다.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를 정도로요.” 

    

“에....예에?”     


 홍사장은 의사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매년 검사를 했는데, 1년 만에 손도 쓸 수 없는 말기 암환자라니!!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그럼.....”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합니다만, 지금 당장 돌아가신다고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입니다. 아마 석 달 정도.... 길어야 6개월입니다.”     


- 꾸우우웅!!     


홍사장은 누가 해머로 머리를 내려친 것처럼 머리가 멍해졌다.    

 

“어..... 선생님.. 혹시 농담을......?”     


“죄송합니다만, 이런 걸로 농담을 할 정도로 생각이 없진 않습니다.”     


“그럼 혹시 다른 사람과 제 검사 결과가 바뀐 것은........”     


“생명이 걸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수십 번도 더 확인했습니다. 홍유인씨의 검사 결과가 맞습니다.”   

  

홍.유.인.     


본인의 이름이 맞았다. 그래. 이런 거로 실수할 리가 없지.     


근데....그나저나 이 새끼들이...진짜...     


“하.....하하......하하하하.......”     


홍사장은 헛웃음이 나왔다.     


“크하하하하하!!!”     


의사는 홍사장이 어떤 심정일지 잘 알았기에 물끄러미 쳐다만 봤다. 이마에 손을 올리고 한참동안 크게 웃던 홍사장은 갑자기 성난 황소처럼 의사에게 달려들 듯 상체를 들이밀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야이 ㄱ새끼야!! 내가 그럼 뭣 한다고 매년 비싼 돈 들여가며 검진을 받았냐!! ㅆㅂ! 미리미리 조기에 발견하려고 한거 아니야?!! 어?!! 그런데, 검사할 때마다 정밀검사를 해봐야 한다 어쩐다 하면서 비용은 ㅈㄴ게 청구해놓고!! 그렇게 비싼 돈 들여서 검사해도 아무런 이상 없다고 하더니!! 그런데 이제 뭐? 이미 많이 진행돼서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야이 ㄱ새끼야!! 그게 지금 할 소리야?!!”    

 

 홍사장이 소란스럽게 소리를 지르자 밖에서 간호사가 뛰어 들어왔다. 의사는 간호사에게 괜찮다는 손짓을 보냈다. 열린 문밖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진료실을 쳐다봤다.    

 

“순 엉터리네!! 엉터리!! 그럼! 오늘 이렇게 될 때까지 너희들은 뭘하고 있었냐?! 어!! 지난 검진 때 이미 이상이 있었는데, 너희들이 검진비만 뜯어가고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거 아니야?!!”   

  

“..... 홍유인씨. 물론 지금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든 건 압니다. 하지만, 가끔 이렇게 급성으로 암이 발생하고 번지기도 하기 때문에........”     


“닥쳐!! 이 ㄱ새끼야!! 내가 당장 변호사 고용해서 너희 새끼들 전부 다 고소해 버릴거야!! 이 썅노무새끼들!! 돈만 받아 처먹고!! 제대로 검진은 하지도 않고!! 이제 와서 죽을 때 다됐단 소리나 지껄이고!! 그런 의사면 ㅆ발! 나도 하겠다!!”   

  

“환자분! 의사 선생님께 말씀이 너무 심하시네요!!”     


곁에 있던 간호사가 거들자 홍사장은 더 화가 났다. 이미 이성을 잃은 홍사장은 간호사를 향해 막말을 쏟아냈다.     


“지랄!! 환자? 내가 왜 환자야?!! 어?!! 조금 전까지 멀쩡했는데!! 이제 암 환자라고 진단 내리고 나니까 환자냐?!! 같이 근무한다고 편들기는!! 썅!! 간호사들 너네도 참~ 불쌍하다. 의사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것들이니.... 그래서 지금 편드는 거지? 어? 편 안 들었다가는 직장에서 미움이라도 받을까 봐. 그렇지?”     


“그거 인격모독으로 처벌받을 수도 있습니다! 말조심하세요!”    

 

“하하하!! 인격모독? 처벌? 그거 재판할 때까지 얼마나 걸리는데? 어? 나 석 달 안에 죽을 거라며! ㅆ발!! 근데 뭐! 내가 뭐가 무서워서!!”     


잠시 정적이 흘렀다. 맞다. 홍사장은 곧 죽을 사람.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곧 죽을 거라고 방심하지 마라! 이 의사 새끼야! 내가 죽을 때 죽더라도, 너네 병원에서 검진한 기록 싹 다 들여다보고 처벌받을 인간들 전부 다 처벌받을 수 있도록 해놓고 죽을 테니까! 각오해!!”   

  

홍사장이 소리를 빽 지르고 진료실을 나서는데, 뒤에서 간호사가 홍사장을 따라 뛰어나오며 소리쳤다.    

 

“환자분!! 원무과 수납을.....”     


“확!! 그냥!! 개소리 지껄이지마!!”   

  

홍사장을 계속 쫓아가려는 간호사를 다른 간호사가 쫓아와 말리며 뒤돌아섰다.    

 

 홍사장은 차에 올라탔다. 정신이 멍했다. 살아오면서 이렇게 당황스러운 순간을 겪어본 적은 없었다. 속으로 화를 많이 품고는 살았지만, 그것을 끄집어내어 누군가에게 이렇게 쌍욕과 막말을 해본 적도 없었다. 아, 정부장에게만은 예외로 하고 다른 사람에겐 없었다. 

    

도대체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오늘 아침엔 그 어느 때보다 상쾌하게 일어나 하루를 시작했고, 아침 미팅도 잘 끝냈다. 정말 오랜만에 기분도 좋았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정부장이 원가 계산을 잘못해 회사에 큰 손실이 생겼다며 기분을 망쳐놓더니, 병원에서는 곧 죽을 거란다!     


 홍사장의 전화벨이 울렸다. 정부장이었다. 홍사장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정부장으로부터는 아까부터 계속 전화가 왔는데, 아까는 정부장에게 화가 나서 받지 않았고, 지금은 그냥 받고 싶지가 않아서 받지 않았다. 정부장의 전화뿐만이 아니라 누구의 전화도 지금은 받고 싶지가 않았다.  

   

“뭐? 죽어? 내가? 이 홍유인이!! 지랄 하지마!!”     


홍사장이 운전대를 내리치면서 소리를 질렀다.     


- 꽈과광!!     

- 쏴아아아아!!     


천둥번개가 요란하게 치더니 곧 비가 세차게 쏟아졌다.  

   

“ㅆ바 새끼들!! 내가 저 새끼들 절대 가만 안 둬! 사람 목숨이 장난이야? 지랄 맞을 것들! 지난번에 발견했으면 이럴 일도 없었잖아!! 개 새끼들!!”     


또 한 번의 벨이 울렸다. 이번에도 정부장이었지만, 홍사장은 전화를 받지 않고, 차를 급히 몰아 병원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08. 낙지찜     


 주경씨는 안절부절못하였다. 얼마 안 있으면 아들의 기말고사 시험인데, 남편이 하필이면 코로나에 걸려 버린 것이었다.     


“요즘엔 격리가 권고사항이래.”     


남편은 주경씨에게 전화를 걸어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뭐야? 며칠만 지나면 승원이 기말고산데!”     


“내가 잠시 며칠 동안 다른 곳에 있을까?”     


주경씨는 남편이 갑자기 미워졌지만,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됐고. 대신 집에 오는 과외선생님들에게는 비밀로 해.”     


“뭐? 아니, 그걸 어떻게 비밀로 해? 그러다 만약 선생님들도 코로나에 걸리기라도 하면 어떡할 건데?”     


“뭘 잘했다고 큰소리야?!”     


“...”     


 코로나가 남편의 의지로 걸린 것은 아니란 건 알았지만, 주경씨는 곧 아들 승원이의 기말고사가 코앞이었기에 화가 치밀었다.      


오늘은 화요일. 승원이의 기말고사는 목, 금이었다. 며칠만 지나면 되는데.     


“승원이 기말고사 예상문제 과외 선생님들이 봐주고 계신 거 몰라? 당장 이번 주가 시험이라 일주일에 두 번 오시는 거, 이번 주에는 월,화,수 3일 동안 와달라고 부탁드려놨는데, 당신이 코로나 걸렸으니까 승원이 기말고사 망치라는 거야 뭐야?!”   

  

“아니, 그래도.....”     


남편이 풀죽은 목소리로 말하자 주경씨가 확실히 못을 박았다.     


“됐고!! 집으로 오면 방에 들어가서 꼼짝도 하지 마!!”     


“뭐? 그럼 화장실은?”


주경씨 집은 오래된 아파트라 안방에 화장실이 따로 되어 있지 않았다.      


“물을 마시지 마!”     


“뭐?”     


“선생님들 오시기 전에 화장실 갔다가 딱 3시간 30분만 참으면 되잖아!!”     


주경씨의 아들 승원이는 수학과 영어 두 과목을 과외 했는데, 영어 한 시간 삼십 분, 수학 한 시간 삼십 분. 그리고 영어와 수학시간 사이에 30분 정도의 간격이 있었다. 그래서 총 3시간 30분의 시간.     


“...알았어...”     


남편은 병원에서 집으로 오자마자 방으로 들어갔다. 주경씨는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톡으로 물었다. 남편도 톡으로 답장을 했다.     


- 정비소는?


- 격리가 의무는 아닌데, 보통 확진자들은 5일 정도 쉬어서, 나도 그렇게 쉴까 생각해.


- 그럼 이번 달 시간 외 수당은 다 채울 수 있고?


- 그건 조금 어려울 것 같아.


- 그럼 내일까지만 쉬고 출근해.


- 뭐?


- 이틀 정도 쉬면 괜찮아질 거잖아? 당신이 주인의식이 없어서 그런 거야. 그게 당신 정비소라고 생각해봐. 남들 쉬는 5일만큼, 남들도 그렇게 쉬니까 나도 쉬겠다는 말이 나오는지.


- 여보.... 나 환자야....


- 톡에 ‘......’ 이런 거 보내지마! 그럼 무슨 애처로워 보이기라도 하니? 너만 일하는 거 아니야. 나도 식당에서 죽어라고 일한다고! 어쨌든 지금 화장실 잠깐 다녀오고, 승원이 수업 끝날 때까지는 방에서 절대 나오지 마! 그리고 기침 소리도 들리던데, 될 수 있으면 선생님들이 의심하지 않게 기침 소리도 내지 말고.   

  

주경씨가 톡을 보내자 안방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끼익 나더니, 남편이 밖으로 나왔다. 남편은 마스크를 끼고 나왔는데, 거실에 앉아서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 주경씨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뭐해? 얼른 싸고 들어가!!”     


남편은 한숨을 푹 쉬더니 화장실에 가서 볼일을 보고 다시 안방으로 들어갔다.  곧 과외 선생님이 오셨고, 평소와 다름없이 수업했다. 영어와 수학 과외가 다 끝나는 동안 다행히 남편이 집에 있다는 사실을 선생님들께 들키지 않았다.     


다음날, 다시 과외 수업시간이 되었다. 주경씨가 안방의 문을 살짝 열어보니 남편이 잠들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잠이 들기엔 이른 시간이었지만, 남편은 새벽에도 계속 일어났다, 잠들었다 하면서 화장실을 드나들었었다. 아무래도 하루 온종일 집에 있으니 시간의 개념이 조금 모호해져 있는 듯했다.    

 

 주경씨는 잠든 남편을 깨우지 않기로 했다. 나중에 방에서 인기척 소리가 나지 않도록 어제처럼 TV만 틀어놓고 나왔다. 혹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라도 TV 소리에 묻혀버릴 수 있게. 승원이의 과외 수업이 시작되었고, 먼저 시작한 영어 수업이 끝났다. 곧이어 수학 선생님이 오시고, 수업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주경씨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하니 남편이었다.     


“어. 왜?”     


“여보....나.. 지금 급해!”  

  

“뭐가?”     


“소변!”     


난감했다. 선생님이 계시는데, 남편이 코로나에 걸린 것도, 이 시간에 집에 있다는 것도 모두 비밀이었는데!     

주경씨는 과외선생님께 목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구석으로 갔다.     


“아, 그러니까 내가 선생님들 오시기 전에 화장실 다녀오라고 했잖아!!”     


“미안해... 잠깐 잠이 들었었는데....”     


“그래서. 이제 어떡할 건데? 정말 못 참겠어?”     


“수학수업 이제 막 시작하지 않았어?”     


“그렇지.”     


“지금 1분도 참기 어려울 것 같은데, 1시간 30분을 어떻게 참아?”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저기....미안한데, 페트병이라도 하나 방에 가져다 줘.”     


“뭐어? 이 인간이 진짜!”     


“그럼 어떡해? 나도 지금 마려워 죽겠는데! 그냥 나가서 화장실 갈까?”     


안된다! 그건 안되는 일이었다. 하는 수 없었다.     


“...기다려봐...”     


 전화를 끊고, 냉장고로 갔다. 일부러 빈 페트병을 모아놓지는 않았기 때문에 무언가 하나를 비워야만 했다. 주경씨는 냉장고를 열어 그중에서 가장 조금 남아 있는 음료수를 비우기로 했다. 토마토 주스 작은 페트병이 하나 있긴 했는데, 그건 너무 병이 작아서 남편의 소변이 넘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옆을 보니 식혜 1.5L 짜리 큰 페트병이 있었다. 절반 정도 남아 있어서 모두 컵에 나눠서 따랐다. 과외선생님도 드리고, 승원이도 한 잔 주고, 주경씨도 마시면 될 것 같았다.     


주경씨는 식혜를 모두 비우고 싱크대에서 물로 페트병을 깨끗이 헹궈 안방에 넣었다.     


잠시 후 남편으로부터 톡이 왔다.     


- 고마워. 날아갈 것 같아.     


주경씨는 상상만으로도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나중에 그거 깨끗이 씻어서 버려!     


 다행히 이번에도 무탈하게 과외 시간이 지나갔고, 다음 날부터 남편은 정비소에 출근했고, 승원이는 목요일과 금요일 시험을 치렀다.   

  

며칠이 지나고 승원이의 시험 결과가 나왔을 때, 주경씨는 다시 한번 좌절했다.    

 

남편과 그 난리를 떨어가며 과외선생님과 함께 시험준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시험성적이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주경씨는 지난번에도 마음은 편치 않았지만 첫 시험이었기 때문에, 그래도 괜찮아, 수고했어 라는 인사치레 말이라도 아들에게 건넬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표정 관리조차 할 수 없었고, 괜찮다는 형식적인 말도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주경씨는 실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아들을 한 번 쳐다보고는 씩씩거리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고, 아들 승원이도 죄를 지은 사람처럼 주눅이 들어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속이 상한 주경씨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이 엄청난 사태에 대해 말하고, 일찍 들어오라고 했다. 일을 마치자마자 집으로 돌아온 남편과 주경씨는 지난번처럼 둘이서 술판을 벌였다.  

   

“아니, 우리가 부자도 아니고, 이렇게 빠듯한 상황에서 과외까지 시켜주면 다른 애들보다 성적이라도 잘 받아와야 하는 거 아니야?! 남들은 학원만 보내줘도 알아서 척척 성적 잘 받아 오는데! 얘는 1:1 과외까지 시켜주는데 도대체 왜 성적이 이 모양 이 꼴이냐고!!”    

 

주경씨가 술이 불콰하게 올라서 소리쳤다.     


“여보. 좀 조용히 해. 승원이 듣겠다.”     


“아, 들으라고 해! 지도 양심이 있으면, 우리한테 미안해서라도 열심히 해야지! 안 그래? 당신이 누구 때문에 기름밥 먹고, 내가 누구 때문에 온갖 진상들 다 겪으면서 식당에서 일하는데!!”     


“아, 좀 조용히 해. 이제 겨우 한 학기 지났는데.....”     


“겨우? 겨우? 중학교 2학년 1,2학기 3학년 1,2학기 총 4학기 밖에 안 되는데, 한 학기 망쳤으면 다 망친 거지!!”     


“아, 그게 뭐 또 다 망친 거냐? 당신 기대만큼 성적이 안 나온 건지는 몰라도, 그렇게 못한 것도 아니던데...”     

“이것 봐. 이것 봐. 애비란 인간이 과외까지 시켜가면서 이 정도에 만족하는 이런 보잘것 없는 사람이니 자식도 그 모양 그 꼴이지.”     


“자기.. 표현이 좀 그렇다?”     


주경씨의 말에 남편은 기분이 살짝 나빴다.     


“그렇긴 뭘 그래?... 아, 그나저나 자기 이번 달 시간 외 수당은 다 채웠어?”     


“그래. 다 채웠다. 아파도 가라며?”     


남편의 목소리가 퉁명스럽자 주경씨도 언성을 높였다.     


“아, 내가 뭐 나 혼자 잘 살고, 잘 먹자고 그런 거니? 애 과외비 때문에 그런 거지! 내가 무슨 명품백을 하나 사달라고 했냐? 어? 이번에 수영이도 샤넬백 샀더라! 천만 원 넘어가는 걸로! 수영이는 집에서 가만~히 놀면서도 남편이 사주는 명품백 어깨에 척 걸치고 다니는데, 아이고 내 팔자야! 나는 맞벌이로 죽어라 일까지 하면서도 만날 돈에 쫓기면서 살고 있네. 잘난 남편 만나가지고! 어?!”     


불똥이 갑자기 남편에게 튀었다. 주경씨의 푸념에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렇게 술자리는 불편하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다음 날 주경씨는 속상한 마음에 또 친구 지애씨를 만났다. 장소는 전에도 만났던 대구탕 가게.      


“뭘로 드릴까요?”     


 주경씨는 고민됐다. 어제 마신 술을 해장하려고 하면 대구탕을 먹는 게 맞는데, 스트레스를 풀려면 매콤한 찜을 먹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주경씨가 고민하자 대구탕 가게 남자 사장이 웃으며 말했다.     


“찜을 주문하시면 서비스로 대구탕 육수도 드립니다.”     


“아, 그래요? 그럼 낙지찜 작은 거로 하나 주세요.”     


“네~”     


친구 지애씨는 만나기 전에 대충 전화로 상황을 들었던 터라 주경씨에게 말했다.     


“너 근데 왜 자꾸 권호씨 자존심을 긁어? 권호씨도 열심히 일하는 거 뻔히 알면서.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권호씨처럼 열심히 사는 사람 잘 없다?”     


주경씨의 남편 이름이 권호였다.     


“열심히 일만 하면 뭐 해? 늘 돈에 허덕이며 사는데. 잘 살아야지! 잘!”     


“야. 그럼 돈 많고 바람 피는 남편이 좋아?”     


“돈 많다고 다 바람피니?”     


“내 주변엔 대부분 그렇던데? 돈 있고, 능력 있으니까 다들 바람 피고. 여자도 뭐 한둘인 줄 아니? 여럿 돌아가면서 만나더라.”     


“니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네 주위에 그런 남자가 어디 있다고?”     


“남자한테 들었겠니? 그런 남자들이랑 바람난 여자들한테서 들은 거지.”     


“바람난 여자 누구?”     


“있어. 내 주위에 그것도 세 명이나.”     


“뭐? 주위에 아직 시집 안 간 사람들이 그렇게 많아?”     


“한 명은 아가씨. 두 명은 남편 있는 유부녀들.”     


“미쳤어! 미쳤어! 진짜?!”     


“그래.”     


“어머나 세상에... 말세다 말세....”     


“뭘. 새삼스럽게. 그런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근데, 그런 사람들은 다 어디서 만난다니?”     


“예전엔 산악회에서 자주 만났는데, 요즘은 골프모임에서 만난다더라.”     


“골프?”     


“그래. 이른 새벽에 치러 가야 할 때는 전날 하룻밤 숙소 잡아 놓고 치는 경우도 있고, 동남아 같은 해외에서 골프 치는 경우도 많으니까 바람 피기 딱 좋지.”     


“헐......”     


“그런 모임에 가면 회사 대표들, 병원 원장들, 대학 교수들, 변호사들 득실득실 거려. 그러니까 너도...... 골프 좀 배워서 그런 사람들 한 번 만나볼래?”     


“뭐? 미쳤니?”     


 주경씨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매장의 다른 사람들이 힐긋거리며 그녀들을 쳐다봤다. 지애씨가 피식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주경씨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너무 돈. 돈. 거리지 말라고. 돈이 많아서, 아니 돈이 많기 때문에 짐승처럼 사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볼 때 권호씨는 사람 괜찮지. 성실하지. 그럼 된 거야. 적어도 너는 짐승 같은 인간하고 사는 건 아니잖아?”     


 주경씨는 지애씨의 말을 들으면서 조금씩 위안이 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의 이 현실이 좀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낙지찜 나왔습니다.”     


 매콤~해 보이는 빨간 낙지찜을 보자 입에 침이 싹 고였다. 서비스로 나온 뜨끈~한 대구탕 육수를 한모금 마시자, 캬~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뜨거운 대구탕 국물을 몇 모금 더 마시며 우선 속을 달래고, 큼직한 낙지를 싹둑싹둑 먹기 좋게 잘랐다. 낙지찜에는 새우도 몇 마리 들어 있었다.      


“곱창김에 싸서 드시면 더 맛있습니다.”     


남자 사장이 테이블에 놓여있는 김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그래요? 감사합니다.”     


“네. 맛있게 드세요~”     


주경씨는 김 한 장을 손에 들고, 양념에 잘 버무려진 두툼한 찜용 콩나물을 김 위에 올렸다. 그리고 오동통한 낙지 다리를 콩나물 위에 올려서 김을 살짝 말아 입에 쏙 집어 넣었다.     

     

 김 특유의 바다향과 아삭한 콩나물의 식감 그리고 그와 동시에 느껴지는 낙지의 쫄깃하고 탱글한 식감. 그 모든 것들을 휘감는 매콤~하고 감칠맛이 넘치는 환상적인 양념의 맛.


“으흐음~~~!!”     


절로 탄성이 흘러나오는 맛!     


“너~~어~~무 맛있다!!”     


찜과 김의 조합이 이렇게 맛있을 줄이야!     


주경씨와 지애씨는 손을 멈추지 않고 부지런히 움직여 낙지찜을 김에 싸서 입에 넣었다. 정신없이 먹다 보니 김이 금세 바닥났다.     


“사장님~ 여기 김 좀 더 주세요.”     


“네~ 잠시만요~”     


여자 사장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대답을 하더니 김을 더 가져다 줬다.     


“맛은 어떠세요?”     


“너어~~무 맛있어요. 살~짝 매운 것만 빼고.”     


“매워? 난 괜찮은데?”      


“아, 그래요? 잠깐만요~”     


여자 사장은 주방으로 가더니 뭔가를 가지고 와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건 마요네즈구요, 이건 생와사비입니다. 찜이 매우면 김에 싸서 드실 때 마요네즈를 살짝 올려서 드시면 매운맛이 줄어들 거에요.”     


“우와. 진짜요?”     


“네. 그리고 이건 생와사비인데, 이것도 찜을 김에 싸 드실 때 찜 위에 살짝 올려서 드시면 알싸~한 맛이 정말 좋아요. 와사비의 매운맛을 좋아하는 분들은 엄청 좋아 하는데, 호불호가 있긴 하니까 한 번 드셔보시고, 괜찮으시면 드세요~”     


“네~ 감사합니다~~”     


주경씨와 지애씨는 각자 김으로 찜을 감싸서 매운맛을 즐기는 주경씨는 생와사비를, 매운맛을 덜 즐기는 지애씨는 마요네즈를 올려서 입에 앙 넣었다.     


“우와~~~”     


쿰척쿰척 씹으며 둘은 동시에 감탄을 했다.     


여자 사장이 말을 한 대로 마요네즈를 넣은 지애씨는 매운맛이 훨씬 덜 느껴졌고, 생와사비를 넣은 주경씨는 와사비 특유의 톡 쏘는 맛과 찜의 묘한 조화를 맛봤다.     


“진짜 신기하다!”     


“그치?”     


“마요네즈를 넣으니까 그냥 매운맛이 덜 나는게 아니라 꼬소~한 마요네즈 맛하고 찜이 묘하게 어울리는 게.... 진짜 끝내준다!!”      


 둘이서 찜을 맛있게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데, 저쪽에서 일행들과 함께 밥을 먹던 아저씨가  테이블을 치우고 있는 남자 사장에게 물었다.     


“저기, 사장님. 근데, 맨날 저 한국인의 밥상 방송만 틀어놓는 이유가 있습니까? 내가 올 때마다 한국인의 밥상 저게 틀어져 있대요.”     


“아~ 별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구요, 뉴스 같은 거 틀어놓으면 정치이야기 나오고, 그러면 꼭 TV 보면서 싸우는 분들이 있어가지고, 그냥 이걸로 틀어 놓았습니다. 식사하실 때 보기에도 좋을 것 같아서요.”     


“아, 그래요? 그럼 우리는 안 싸울 거니까 뉴스 좀 봅시다.”     


아저씨의 말에 일행들이 웃었다.     


“예. 그럼 뉴스 틀어 드릴께요. 대신 뉴스 보시다가 다투시면 한국인의 밥상 한 시간 더 시청하시고 가셔야 합니다.”     


아저씨 일행들은 박장대소했다. 남자 사장도 함께 웃으며 채널 24번. YTN 뉴스를 틀었다.     


여러 뉴스들이 나오다가 중학교 스쿨존에서 일어난 사건사고가 흘러나왔다.     


“다음은 중학교 스쿨존에서 일어난 사건사고입니다. 윤슬중학교 인근 공사현장에서 구조물이 아래로 굴러가 길을 가던 학생들을 덮쳐 3명이 사망하고 5명이 중경상을 입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구청에서는 공사 현장의........”     


“윤슬 중학교?? 어? 너네 승원이 다니는 학교?”     


주경씨는 갑자기 머리가 멍해졌다. 주경씨는 얼른 스마트폰을 꺼내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원이 꺼져있어,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통화연결 이후엔 요금이.......     


주경씨의 심장이 쿵쾅거리며 요동쳤다. 주경씨는 정신나간 사람처럼 스마트폰을 마구 두드렸다.      


“야! 진정해 주경아! 설마 승원이한테 무슨 일이야 있겠니?”     


하지만, 주경씨의 귀에 지애씨의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주경씨는 얼른 학교 행정실에 전화를 걸어 사고가 난 학생 중에 승원이의 이름이 있는지 확인을 했다.     


“2학년 4반 윤승원...승원.....어머 어떡해!! 저기 어머님!!... 행정실에 전화가 폭주해서...... 곧 전화를 드리려던 참이었는데.... 승원이 이름이 있네요! 얼른 병원으로 가보셔야 할 것 같아요!”     


학교 행정실 직원의 말에 주경씨는 정신이 까마득해지며 몸이 휘청거렸다.     


“주경아! 주경아!!.......”     


친구 지애씨가 자신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며 점점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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