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고나 Feb 15. 2024

대구탕집 2층 공방 2

시간을 달리는 신비로운 공방 이야기

09. 흰 살 생선     

 

홍사장은 병원에서 나오며 곧장 회사 자문 변호사인 황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그동안 건강검진을 한 내용과 오늘 있었던 일에 관해서 설명했다.   

  

“황변! 여기 병원하고 병원장 그리고 의사들 싹 다 고소하려고 하니까 서류 좀 준비해줘!”     


그런데, 그렇게 흥분한 홍사장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대답이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저는 기업관련 전문이라.... 그건 의료 전문 변호사와 상담을 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대체로 의료기관과의 소송에서는 거의 승산이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뭐?!”     


홍사장은 길길이 화를 냈지만, 황변호사는 차분하게 조목조목 홍사장의 말에 반박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며 거절했다. 마치 상대 쪽 병원 측의 변호사라도 된 것처럼.     


“아, 그래 알았다!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한다!! 알아서 해!!”     


홍사장은 신경질을 내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황변호사와 통화 후 더욱 화가 난 홍사장은 일주일 동안 여러 변호사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이놈의 사기꾼 의사들을 고소하려고 했다.     


 그런데, 대부분의 변호사들이 황변호사가 했던 말과 비슷한 말을 했다. 의사들과 진료문제로 다투는 건 별 승산이 없다고 했다. 사람의 몸 상태와 증세가 사람마다 모두 다 다르기 때문에 전문가인 의사의 선택과 결정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놈의 변호사 새끼들!! 하여간 사짜 돌림의 새끼들은 서로 감싸주기 바쁘다니깐! 지네들이 젤 잘난 줄 알지? 멍청이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만 평가를 받고, 평생 그 평가가 본인의 위치가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바보들! 스티브 잡스가 그랬다! 사람은 평생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학교를 졸업한 이후의 인생이 훨씬 더 긴데 왜 평가를 받지 않고 사냐고! 나는 너네들이 의사 됐다고 만족하고, 판검사, 변호사 됐다고 만족하면서 살아갈 때,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살면서 기업도 일구고, 직원들도 먹여살린다! 이것들아! 내가 너네들보다 훨씬 더 잘살고 있단 말이다! 이 멍청한 새끼들아!!    

 

 평생 평가를 받고 살아야 한다는 말은 스티브 잡스의 명언이 아니었지만, 홍사장은 대부분의 좋은 말은 다 스티브 잡스가 했다고 가져다 붙였고 스스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    

 

 자신이 검진 받은 병원과 의사를 고소하려고 변호사 사무실을 알아보고 다니다가 홍사장은 변호사 놈들도 똑같은 도둑놈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격분했다. 변호사 사무실에서는 30분도 채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는데 상담료 10만 원을 달라고 했다. 수임료는 일단 300만 원에 부가세 30만 원 별도. 그리고 성공보수 또한 별도였다. 처음엔 재수가 없어 더럽게 비싼 변호사 사무실에 찾아왔나보다 하고 생각했는데, 다른 변호사 사무실에도 가보니 모든 변호사가 똑같은 가격을 제시했다.   

  

이야~ 도둑놈들이 병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말 몇 마디 나누고 10만 원? 그리고 무조건 300부터? 이런 건 가격 담합이 아닌가? 그렇지 않고서는 어떻게 모든 변호사들이 똑같은 금액을 제시하는 거지? 변호사 협회니까, 대단한 협회에서는 대놓고 가격 담합을 해도 된다 이건가? 누군가 더 저렴한 가격으로 상담을 해주고, 수임료 할인을 해주면 변호사 협회에서 퇴출을 당하는 건가? 이러니까 우리나라 변호사들의 서비스 수준이 무슨 발전이 있냔 말이다! 이것들아!!      


 일주일 내내 홍사장은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며 화를 내고, 싸움을 했다. 태어나서 이렇게 치열하게 세상과 부딪치고, 할 말 다하며 살아보기는 또 처음이었다. 이전에는 살아가는 동안 가장 중요한 건 인간관계였고, 그 인간관계가 왜 중요하냐고 하면 살아가면서 언젠가 어딘가에서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젠 살아갈 날이 석 달 정도, 오래 살아도 여섯 달이었다. 그러니 더 이상 인간관계에 신경을 쓸 이유도, 필요도 없어졌다.      


 이렇게 좌충우돌하는 동안 회사일은 뒷전이었다. 당장 내가 죽게 생겼는데, 회사가 뭐 그리 중요한 일인가. 내가 죽으면 다 끝나는 것을. 그런데 정작 회사에서는 홍사장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모르고 있었기에, 지난번 거래처와의 일 때문에 회사에 손실이 너무 많이 나서 홍사장이 화병이 나서 회사도 돌보지 않고, 이상하게 변해버린 것 같다며 직원들끼리 수군거렸다. 정부장은 이 모든 일이 마치 자신의 잘못인 양 늘 풀이 죽어 있었다. 홍사장이 잠시 회사에 들렀다가 또 금방 회사를 나서려는데, 정부장이 홍사장을 찾아왔다. 

    

“사장님.”     


 정부장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홍사장을 불렀다. 홍사장은 그 웃음이 더 짜증스러웠다. 평소엔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짜증스러웠는데, 오늘은 어색하게 웃는 그 얼굴이 더 짜증스러웠다. 그러니까 그냥 정부장의 얼굴이 마냥 짜증스러웠고, 밉고, 화가 났다.     


“왜?!”     


언제나 그렇듯 홍사장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저기... 요즘 많이 바쁘신 것 같습니다. 회사에도 잠시만 들르시고.....”     


니가 지금 내가 어떤 상황인지 아냐? 홍사장은 지금 자신의 상태도 모르는 정부장이 한심하게 느껴져 멸시의 눈초리로 정부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 용건만 빨리 말해!”     


“아, 예. 죄송합니다. 이거......”     


 정부장이 품속에서 봉투를 꺼냈다. 봉투의 겉면에는 사.직.서. 라고 적혀 있었다. 홍사장은 그것을 보는 순간 이러면 내가 너를 잡을 줄 알았냐? 안 그래도 자르려고 했는데 잘됐다 이 자식아! 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함께한 정부장이었기에 이런 순간에 몇 번의 거절을 하는 것이 예의였고, 놀란 눈빛으로 아니 도대체 왜? 라고 놀란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얘기를 좀 해보자고 말을 하는 것이 인간적인 도리일 테였으나, 홍사장은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사직서를 탁 낚아채서 품속에 집어넣었다.     


“알았어. 더 할 말은 없는 거지?”     


 홍사장의 냉정한 표정과 말투에 정부장의 웃음 띤 얼굴이 점점 굳어갔고, 목소리는 떨렸다.     


“....네?....아...네.....”     


 홍사장은 휙 뒤를 돌아 회사를 나왔고, 홍사장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정부장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홍사장은 다시 병원을 찾았다. 살아 있는 동안 통증을 덜기 위한 진통제와 몇 가지 약들을 처방해 놓았으니, 병원에 와서 받아가시라고 간호사가 아닌 의사로부터 직접 전화가 왔기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욕을 잔뜩 먹었던 의사는 홍사장에게 전화를 끊기 전 말했다.

     

“보기 싫으시겠지만, 병원에 오셔서 저를 꼭 만나고 가세요. 아셨죠?”     


 썅놈의 쉬키가. 지가 무슨 해탈한 스님이라도 되는 줄 아나. 어디서 여유로운 척 지랄이야? 내가 고소한다고 하니까 쫄아서 그러나 본데. 어림도 없지. 너 같은 놈은 내가 반드시! 꼭 처넣고 만다 이 새끼야!     


 홍사장이 병원에 도착해서 진료실 앞으로 가니, 평소처럼 진료를 보기 위한 환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간호사는 지난번 난리를 부리고 간 홍사장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쳐다보고는 먼저 진료를 보고 있는 환자가 나오자 진료실에 들어가서 홍사장이 온 것을 의사에게 알렸다. 간호사는 다른 환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홍사장을 먼저 진료실로 들여보냈다.     


 홍사장은 진료실로 들어가면서 의사에게 인사도 없이 슬쩍 노려만 보고 고개를 돌렸다. 얼굴에는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홍사장과는 반대로 의사는 이전보다 더 여유로워 보였다. 어려운 말도 모두 전했겠다. 이젠 더 이상 말을 조심해서 꺼낼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앉으세요.”     


의사의 알에 홍사장은 의자에 앉았다. 여전히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있었다.  

   

“좀 알아보셨나요?”     


“뭘 말이오?”     


“저 가만히 안 둔다고 하셨잖아요? 잡아넣을 거라고.”     


“그럴 생각이오.”     


홍사장은 짧게 대답했다. 그런데 홍사장의 말투도 이전보단 날카로움이 조금은 무뎌져 있었다. 의사가 피식 웃었다.     


“뭐, 잡아넣기 위해 열심히 알아보시는 것도 좋은데, 우선 진통제하고 약은 잘 챙기세요.”     


“그러지. 그래야 당신과 당신을 비롯한 사기꾼 의사들을 제대로 잡아넣을 수 있을 테니까.”     


의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식단 말인데요.”     


“식단? 이제 곧 죽는데, 그게 뭔 소리요?”     


“....뭐, 그래요. 아무거나 드시고 싶은 거 드셔도 괜찮아요. 그래도 이왕이면 기운이 좀 나는 음식으로 드시는 게 좋잖아요? 식단을 권해드리는 게 의사인 저의 의무이기도 하고요.”     


“참 나.... 곧 죽을 사람한테 그게 무슨.....”     


홍사장이 그러거나 말거나 의사는 할 말을 했다.     


“붉은 육고기. 그러니까 소고기 돼지고기 같은 음식들이 영양가가 있긴 하지만, 너무 기름지기 때문에 가급적 피하시는 게 좋구요, 될 수 있으면 단백질 함량은 높고, 지방은 낮은 흰살생선 종류로 드시는 게 좋습니다. 술, 담배는 당연히 안좋구요. 그리고....”     


의사는 본인이 할 말만 계속했다. 홍사장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의사를 쳐다보고 있다가 의사 말이 다 끝나자 한마디 툭 던졌다.     


“끝났소?”     


“뭐, 제가 말씀드려야 할 것들은 다 말씀드렸습니다. 먼젓번엔 길길이 화를 내고 가셔서 제대로 전달을 못 드린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거든요.”     


“그럼, 이제 마음이 편하단 뜻이오?”     


“.....딱히 마음이 편한 건 아닙니다만, 저의 도리는 했다는 생각은 드네요.”     


“쳇. 제대로 진료도 하지 않아서 사람을 곧 죽게 만들어 놓고 도리라는 말을 입에 담다니, 그게 사람이 할 도리요?”     


“...후우....홍유인씨. 정말 안타까운 일이라 뭐라 드릴 말씀은 없지만, 제가 그동안 꾸준히 지켜봐 온 홍유인씨는 이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니고 어떤 사람이요?”     


“.....”     


의사는 입을 한일자로 꾹 다물었다가 입을 뗐다.     


“홍유인씨에게 남아 있는 시간을...... 의미 있게 사용하세요.”     


“쳇!”     


홍사장은 콧방귀를 뀌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제 끝난 거지요?”     


의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홍사장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홍사장은 의사의 손을 슬쩍 내려다보기만 할 뿐 그 손을 잡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웃기시네. 내가 변호사를 고용해서 고소하려고 한다니까 겁먹은 거겠지. 이렇게라도 하면 내 마음이 조금 누그러뜨려 질 줄 알고? 천만에! 흥!     


 홍사장은 오늘은 어느 변호사 사무실에 가볼까 혼자 차에 앉아서 고민했다. 도둑놈을 고소하기 위해 도둑놈을 고용해야 하다니!! 홍사장 눈에는 똑같은 도둑놈인 변호사들 중에서 조금은 덜 도둑놈 같은 놈을 고용해야 했기에, 고심했다.     


- 꼬르륵.     


 배꼽시계가 울렸다. 참 희한했다. 이제 곧 죽는다는 말을 듣고 처음 삼일 동안은 물 이외에 다른 음식을 먹지 않았는데도 허기진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었다. 곧 죽는구나! 오직 이 생각만이 머리를 가득 지배해서 몸의 다른 감각을 무디게 만들었다.     


 그런데 나흘째가 되자 배고픔이 느껴졌고, 평범했던 보통의 일상으로 돌아와 음식을 먹고, 깊은 잠에 빠지기도 했다.     


우스웠다. 이제 곧 죽을 몸인데도, 그 몸이 아직 삶을 갈망하고 있었으니. 그래. 먹자. 뭐라도.     

아무거나 먹자고 생각한 그 순간 불쑥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 소고기 돼지고기 같은 음식들이 영양가가 있긴 하지만, 너무 기름지기 때문에 가급적 피하시는 게 좋구요, 될 수 있으면 단백질 함량은 높고, 지방은 낮은 흰살생선 종류로 드시는 게 좋습니다.     


쳇. 이게 뭐야. 곧 죽을 마당에...     


 홍사장은 썩 내키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의사의 말이 머리를 맴돌았다. 어떤 음식을 먹든 홍사장에게 큰 의미는 없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걸리는 정해진 시간이라는 측면에서는. 하지만,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있어서는 분명 먹는 음식에 따라 차이가 있을 것이었다.  

 

참나! 참나! 한숨과 한탄을 연신 하면서 홍사장은 자신도 모르게 대구탕 가게 앞에 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는 오지 않겠다고 해놓고 또 와버렸다. 흰 살 생선을 먹을 수 있는 가게는 이곳 말고 다른 곳은 생각나지 않았다.      


 잠시 차를 세워놓고 멍하니 대구탕 가게를 쳐다봤다. 아마 처음인 것 같았다. 이렇게 밖에서 대구탕 가게를 아무런 생각 없이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는 얼른 먹고 돌아가서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만 했기에, 이렇게 가만히 앉아 낡고 허름한 대구탕 가게를 보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시간이 생겼다. 인생에 남아 있다고 생각했던 시간이 왕창 줄어버리자, 그동안 급히 지나쳤던 것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바라볼 시간이 생겼다. 시간이 줄어들자, 시간이 생기다니... 뭔가 이상했다.     

 

그동안은 단지 외관이 허름한 곳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앉아 가만히 살펴보니 가게 입구에 다양한 종류의 꽃 화분이 놓여 있었다.     


 젊은 부부가 낡은 가게 앞을 꾸민답시고 화분을 놔두고 물을 뿌려가며 가꿨을 생각을 하니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예전, 아내와 함께 삭막한 공장을 조금이나마 화사하게 꾸며보겠다고, 창고 앞에 작은 화단을 만들어 꾸미던 일이 떠올랐다. 지금 대구탕 가게 앞의 화분처럼 별로 눈에 띄지도 않았고, 남들은 크게 관심도 두지 않았던 작은 화단.     

 

 홍사장은 차에서 내려, 가게 입구로 천천히 걸어갔다. 매장 1층을 잠시 보다, 그 위의 2층을 올려다 봤다. 그곳에도 오래된 나무와, 빛바랜 페인트, 색이 벗겨진 문틀이 보였다. 2층도 1층과 다름없이 낡아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하늘이 보였다. 푸른 하늘. 낡은 건물과 대조되어 그런지 하늘은 무척 깨끗해 보였다. 맑구나...눈이 시리도록... 5월의 푸른 하늘. 인생의 마지막 5월이 올해가 될 줄이야.    

 

 홍사장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푸른 하늘을 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아주 익숙한 향이 풍겨왔다. 뭐지? 퍼뜩 떠오르진 않았지만, 어딘가 아련한 추억의 향이다. 하늘을 보던 고개를 천천히 내렸다. 그러자 매장 입구에 놓인 여러 종류의 화분 중에 홀로 기다랗게 솟아오른 보라색 꽃이 보였다. 마치 장신구에 술을 단 듯 노란 솜뭉치가 몽글몽글한 보랏빛 꽃.      


 홍사장은 그 꽃이 어떤 꽃인지 아주 잘 알았다. 아내가 가장 좋아한 꽃. 홀로 삐죽이 솟아올라 어색하고 수줍음 많은 키다리 꽃처럼 보이지만, 뿜어내는 향만큼은 다른 어떤 꽃들의 향보다 더욱 진하고, 향기로운 꽃.     


아이리스.     


 아내는 아이리스 꽃과 향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5월. 꽃의 여왕이라 불리는 장미가 제철이었음에도, 아내는 무더기로 화려하게 피어 있는 붉은 장미꽃보다는 홀로 의연히 피어 있는 아이리스를 더 좋아했다.   

 

 5월의 아이리스를 그 무엇보다 좋아했던 아내. 신기하게도 홍사장은 5월에 아내를 만났고, 또 5월에 아내는 세상을 떠났다.     


 홍사장은 한동안 아내를 생각하며 곱게 피어 있는 아이리스를 바라보았다. 아내가 떠난 지 어느덧 6년의 세월이 흘렀다.     


 신기했다. 아내가 떠나고 난 후, 그동안 먼 곳에 있다고 느껴졌던 아내였는데, 시한부 판정을 받자 이젠 조금 가까운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홍사장은 한참 동안 그렇게 대구탕 가게 입구 앞에 서 있다가 밥을 다 먹은 손님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모습을 보고선 감상을 멈추고 매장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오세요~”     


 대구탕 가게 남자 사장의 목소리는 한결같았다. 평소에는 그 목소리가 무척이나 귀에 거슬렸는데, 오늘따라 한결같은 그의 목소리가 홍사장의 귀에 조금은 정겹게 들려왔다. 변하지 않는다는 것. 익숙한 것. 정겨운 것.     

홍사장이 자리에 앉자 남자 사장이 다가와 물었다.     


“대구탕 드릴까요?”     


 지난번에 다시 오지 않겠다고 인상을 쓰며 말하고 갔기에, 기분이 나쁠 법도 할 텐데, 남자 사장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예.”     


 홍사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오늘은 남자 사장의 얼굴을 보며 대답을 했다는 것과 말투가 조금 달라졌다는 것.     


“그런데 말이요.”     


대구탕 가게 남자 사장이 돌아서려는데, 홍사장이 말을 건넸다.      


“네?”     


“저기 입구에 꽃들.”   

  

“아, 보셨어요? 잘 키워야 하는데, 제가 게을러서 시들어가는 것도 몇 개 있고..... 부끄럽네요.”     


 남자 사장의 말처럼 꽃이 만개하고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는 화분도 있었지만, 몇몇 화분은 시들어 있기도 했다.     


“그... 아이리스 말이요. 언제부터 있었던 거요?”     


“아~ 아이리스요? 향이 참 좋죠? 그거 계속 있었던 건데요?”  

   

“그동안 내가 여기 오고 가는 동안 계속 있었단 말이요?”   

  

“네.”     


 새삼스러웠다. 그동안 계속 그 자리에 있었던 꽃을 오늘에서야 보게 되었다는 사실이. 당황스러운 표정의 홍사장과는 다르게, 남자 사장은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는 미소를 살짝 지어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맑은 대구탕이 나왔다.     


- 후루룩   

  

 홍사장은 대구탕을 한 숟갈 떠서 후 불고는 조심스레 국물을 삼켰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는 대구살을 젓가락으로 한가득 집어 간장에 살짝 찍어서 입에 넣었다. 쫄깃한 대구살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입이 꽉 차는 식감. 흰살생선 중에 비린 맛이 거의 없고, 이렇게 먹을 수 있는 살밥이 많은 생선은 대구밖에 없을 것이라 홍사장은 생각했다.     


 아이리스의 향 때문일까? 홍사장은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오직 음식을 먹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오늘도 홍사장의 뒷자리에서 누군가는 코를 풀었고, 옆자리의 누군가는 기침을 하다가 입에서 음식물이 튀어 나갔지만, 홍사장의 눈과 귀에는 그런 것들은 보이지 않았고, 들리지도 않았다.    

 

5월 따스한 봄바람이 아이리스 향기로 온통 물든 날. 홍사장은 모처럼 온전한 한 끼 식사를 맛있게 먹었다.


10. 형, 그냥 쉬세요.     


 정섭씨는 방에서 창밖으로 내리는 비를 보면서 담배를 뻐끔 피웠다.     


“ㅆ바. ㅈ나게 내리네.”     


 5월. 봄이라고는 하지만 날씨는 이미 여름 못지않게 더웠고, 가끔 내리는 비도 열대지역의 스콜처럼 세차게 퍼부었다. 뉴스에서는 지구 온난화로 인해 올해는 역대급 폭우가 쏟아질 거라고 했다. 아직 본격적으로 장마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퍼붓는 걸 보면 아마 뉴스의 그 말은 현실이 될 것이라고 짐작되었다.    

 

 정섭씨는 담배를 한 개비 다 피우고 끄자마자 다시 또 한 개비를 물고 불을 당겼다. 요즘엔 모든 건물에서 금연이라고 하지만, 정섭씨가 머물고 있는 오래된 여관인 이곳에서는 모두가 방에서 대놓고 담배를 피웠다. 옆방에서도, 아랫방에서도 모두가 창문을 열어놓고 담배를 피우고 있어 여관건물 전체에서 불이라도 난 것처럼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날. 공사 현장은 쉬었고, 이곳 여관에 머물고 있는 대부분 장기투숙객들을 비롯한 정섭 씨의 오늘 수입은 0원 이었다.     


 창밖 아래 골목길엔 외국인 노동자 셋이서 각자 컵라면에 물을 받아선, 검은 봉지를 들고 시시덕거리며 여관 건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정섭씨는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ㅆ발. 내가 저 외국인 노동자 새끼들보다도 못하네...”     


 며칠 동안 일을 하지 못한 정섭씨의 지갑은 텅텅 비어 있었다. 비가 자주 내려서 일이 없기도 했고, 가끔 일이 생기더라도 일을 하기가 귀찮거나, 전날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도저히 일하러 갈 수가 없는 날들도 있었다.     

 그래도 생활비가 똑 떨어지기 전에는 며칠이라도 일을 해서 수중에 얼마의 돈이라도 챙겨놓고는 했는데, 이렇게 일주일 내내 비가 내릴 거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리고 이렇게 계속 비가 내릴 거라고 예상 못하는 경우는 매년 장마철마다 반복되고 있었다.  

   

 속이 쓰렸다. 어제도 없는 돈을 탈탈 털어 소주 4병을 깠기 때문에 뜨끈~한 국물 한 그릇이 절실했다.     

 정섭씨는 담배를 비벼끄고 스마트폰을 잡았다. 이럴 때 전화할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 밖에 없었다.

통화연결음이 울리고, 저쪽에서 전화를 받았다.     


“어, 송팀장.”     


“왜요?”     


송팀장의 건조한 음성이 들려왔다.     


“요즘 현장 많이 바쁘지?”     


“참나. 그게 뭔 말씀이세요? 며칠동안 비가 이렇게 퍼붓는데. 다들 일이 없어서 죽을 맛이지.”     


정섭씨는 순간 자신이 아무런 생각 없이 말을 내뱉었다는 생각에 머쓱해졌다.     


“그러니까.... 그래. 내가 일을 도와주러 나가고 싶어도 이렇게 비가 쏟아지니까 갈 수가 없네. 갈 수가 없어.”     

“아, 됐어요. 왜요? 또 돈 필요해요?”     


 송팀장은 이런 경우를 수도 없이 많이 겪어봤기 때문에 정섭씨가 왜 전화를 걸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뻔히 알면서도 꼬박꼬박 정섭씨의 전화를 피하지 않고 받아주는 송팀장이 정섭씨는 고마웠다.     


“아니,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비가 오랫동안 올 줄 몰랐지. 아니면 이렇게 돈이 뚝 떨어질 일도 없었을 건데. 송팀장... 나 이십 만원만 가불해 줘. 비 그치면 일 나갈게.” 

    

“아, 됐어요. 내가 지금 돈이 어디 있어요? 비가 와서 일도 못하고 있는데.”      


“그러지 말고~ 아니, 송팀장. 나도 밥은 먹어야 할 거 아니야? 지금 뭐 하나 먹을 것도 없어. 먹어야 일을 하지. 차비도 없고. 차비는 있어야 일을 나갈 수 있을 거 아니야?”    

 

“...”     


 송팀장은 말이 없었다. 정섭씨는 송팀장이 고민중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평소에도 이렇게 고민하다가 그럼 십만 원이라도 보내드릴게요. 나 진짜 돈 없어요. 이렇게 말을 했다. 딱 절반으로 잘라서. 십만 원을 부탁하면 오만 원을. 이십만 원을 부탁하면 십만 원을. 송팀장아! 내가 너 머리 위에 있어 임마. 어차피 네놈이 절반만 보내줄 거라 생각해서 이십만 원이라고 말했다. 알겠냐? 크큭큭.     

송팀장은 스스로 흡족해하며 미소지었다.     


“형.”     


“어, 그래. 송팀장.”     


“그냥 쉬세요.”     


...뭐....뭣?! 정섭씨는 예상치 못한 송팀장의 대답에 깜짝 놀랐다.     


“뭐, 뭐라고?!”     


“그냥 쉬시라고요. 앞으론 안 나오셔도 됩니다.”     


“뭐? 아니, 왜?!!”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애들이 형하고 같이 일하기 싫어한다고.”     


“......”     


정섭씨는 분노에 가득 차서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뭐라고? 진짜 오지 마라고? 송팀장이 나한테?! 순간 화가 확 뻗쳐올랐다.     


“야!! 송팀장 이 새끼야!! 애새끼들이 아무리 칭얼거려도 그렇지!! 니가 누구한테 RCS 배웠는데!!”     


“말씀 잘하셨습니다! 그래도 여태껏 배운 정이 있어서 참았지, 아니면 벌써 형하고 관계 정리했어요! 그리고, 가르쳐 줬다고요? 그게 제대로 가르쳐 준 겁니까? 타워크레인에 발판을 통째로 걸어놓고 30층 높이에서 대롱대롱 매달려서 언제 추락해서 죽을지도 모르는데, 낄낄거리고 좋다고 웃고 장난치고! 사람 놀리기나 하고!”     

“그래 이 새끼야! 그때를 생각해보라고! 니가 내 바짓가랑이 붙들고 벌벌 떨었던 거 생각 안 나냐?! 그랬던 새끼가 이제 팀장이라고 보이는 게 없냐?! 어?!”     


“그러니까 그게 사람 놀려먹기나 하는 거지 가르쳐 준거냐고요! 그렇게 가르쳐주는 것 같지도 않게 같이 일한 날이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술 마시고 출근 못 한다고 일을 째버리고!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타워크레인에 혼자 둥둥 매달려가지고, 내가 진짜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 줄 압니까? 형 좋아하는 그 술 때문에!!”     


“...”     


 정섭씨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송팀장의 말처럼 송팀장이 일을 배우기 시작한 지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정섭씨는 아직 일을 잘 모르는 송팀장이 위험할 수도 있고, 현장이라는 특성상 자칫 잘못했다간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출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이가 뭐 대숩니까? 애들하고 일할 때, 무거운 거 들기 힘들면 가벼운 거라도 들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시늉이라도 하면 애들이 나이 든 사람이 무거운 거 안 든다고 뭐라고 합니까? 다 이해한다고요. 열심히 하려는데 체력이 달려서 못하는 건지, 그냥 시간만 때우려는지. 그걸 일하는 애들이 모를 것 같습니까? 비가 조금만 내리면 연장 정리하라고, 오늘 일 못한다고 사람들 선동해서 분위기 어수선하게 만들고. 저도 형하고 더 이상은 일 못합니다! 돈 필요하면 딴 데 알아보세요!”     


송팀장은 화를 내고서 전화를 끊어버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송팀장이 자신의 손안에 있다고 생각하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던 정섭씨는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멍했다.     


“하아......와......이씨......”     


 정섭씨는 또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고, 불을 당겼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이런 경우는. 지난번 송팀장과 다투긴 했지만, 그전에도 다툼은 가끔 있었었기에 이렇게 자신을 내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다투고 나서도 전화를 걸어 앓는 소리를 하면, 싫은 소리 몇 마디 하다가 결국은 자신이 부탁하는 액수의 딱 절반만큼의 돈을 가불해주던 송팀장이었다.      


“이 새끼가 뭘 잘못 처먹었나........”     


정섭씨는 한참 동안 담배를 피면서 송팀장 욕을 퍼부었다.      


-쏴아아아아     

 

비는 멈출 줄 모르고 계속 쏟아졌다. 정섭씨는 화가 잔뜩 난 상태에서도, 배가 무지하게 고팠다. 송팀장을 제외하고 나니, 어디로 전화를 해야 할지 막막했다. 친구들? 술 마시면 진상이 되는 정섭씨를 친구들은 이미 오래전 손절했다. 전 아내? 이혼한 아내가 잠시 떠올랐지만, 이미 이혼한 마당에 밥 먹을 돈이 없어 전화를 걸어 구걸한다는 건 너무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아들? 아들은 이제 군대까지 다녀왔지만, 일 년에 한두 번 전화를 할까 말까 한 사이였다.      


 니가 커서 군대 다녀와 봐라. 아빠가 왜 이렇게 사는지 다 이해할 거다. 라고 아들에게 어릴 때 수없이 말했다. 그리고 아들이 커서 군대도 다녀오고, 어른이 되면 당연히 자신을 이해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아들은 군대를 다녀온 지금까지도 정섭씨가 지난날 왜 그렇게 살았는지, 그리고 지금까지도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이해를 하지도, 하고 싶지도 않은 듯했다.     


“싸가지 없는 새끼......”     


 정섭씨는 아들을 생각하자 갑자기 열이 뻗쳤다. 아들 새끼도 이렇게 나를 무시하는데, 누가 나를 대우하겠냐?!! 정섭씨는 괜히 화를 아들에게 돌렸다. 신경질적으로 스마트폰을 들어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여러 번 갔지만, 아들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평소의 정섭씨 같았으면, 한 번 전화를 걸어 아들이 받지 않으면 다시 전화를 걸지 않았다. 별로 안 받고 싶은가보다. 누군 통화 하고 싶어서 한 줄 아나? 하면서. 하지만, 오늘은 평소와 달랐다. 기분도 달랐고, 주머니 사정도 달랐다. 이놈 봐라? 하면서.     

다시 전화를 걸자 몇 번 울리다가 아들이 전화를 돌려버렸다.     


“이런 썅놈이!!”     


 정섭씨는 화가 나서 몇 번이나 더 전화를 걸었지만, 아들은 단 한 차례도 전화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전화기를 아예 꺼놓아 버렸다. 정섭씨의 아들은 정섭씨가 낮부터 또 술에 취했나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비가 오는 날 늘 그랬던 것처럼.     


 정섭씨는 오전 내내 울화통을 터뜨리며 애꿎은 담배만 뻑뻑 피워대면서 시간을 보냈다. 비는 그칠 줄 모르고 내렸고, 배는 고프고, 속이 쓰렸다. 아침에 피운 담배와 물 몇 잔. 그것이 정섭씨 속으로 들어간 전부였다. 허기를 다스리기 위해 다시 잠이나 좀 더 자볼까 하고 누워봤지만, 정신은 더욱 또렷해졌다.     


“와이씨!! 진짜!!”     


 정섭씨는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이 이렇게 없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동안 자신을 스쳐 갔던 모든 사람이 이렇게 무심할 수 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오전이 그렇게 흘러가고 점심시간이 되자 여관방 곳곳에서 음식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된장찌개, 생선구이, 고기굽는 냄새까지... 냄새만 맡아도 보글보글 끓고, 지글지글 굽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나타났다. 정섭씨의 입에 침이 싹 고였다. 참다못한 정섭씨가 바닥에 누워 있던 몸을 일으키자, 온몸에 모래가 묻어있다가 스르륵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살짝 어지러움을 느꼈다.     


 정섭씨는 다시 스마트폰을 잡았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 전화를 걸 수 있는 곳은 딱 한 곳밖에 없었다. 송팀장.     


 정섭씨는 다시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도 송팀장은 전화를 받아주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언제나 정섭씨는 자신이 마지못해 일을 해주러 가는 것처럼 생색을 내곤 했었는데, 이번엔 송팀장에게 구걸을 하다시피 했다는 것.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서 더 이상 불만이 나오지 않도록 무거운 짐도 같이 나르면서 열심히 일하겠다고 송팀장에게 다짐을 했다는 것. 평소 자신이 말한 금액의 절반을 보내주던 송팀장이 이번엔 절반의 절반만 보내준다고 말한 것이었다.     


“오...오만 원?! 송팀장. 그래도 내가 밥은 먹어야 하지 않겠어? 이건 차비 밖에 안 되겠는데?”     


정섭씨가 볼멘소리를 했다.     


“형. 그럼 그냥 함바집에 가서 드세요. 우리 요 앞전에 공사했던 곳. 형 집에서 가깝잖아요. 그냥 거기 가서 드시고 하나 달아놓으세요. 내가 계산할 테니까. 거긴 오늘 비 와도 해요.”     


“야! 그냥 돈을 좀 더 보내주면 안 되냐?!”     


“아, 나도 지금 돈이 없다니까 그러네!! 그러고 형은 돈 있으면 오늘처럼 비가 와서 쉬는 날엔 또 술 퍼마시고, 내일 아침에 몸이 안 좋아서 출근 못 한다고 그러겠죠!! 돈도 다 써버리고.”     


정확했다.     


정섭씨는 그동안 딱 그렇게 살았으니. 5만원을 보내준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했다. 다시 일을 나오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했다. 정섭씨는 얼른 은행 ATM기계로 가서 5만원을 찾았다. 평소에는 편의점 ATM 기계로 돈을 찾았는데, 편의점에서는 수수료가 천원이 넘기 때문에 5만 원을 다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정섭씨는 편의점보다는 조금 멀지만, 은행까지 걸어가서 5만 원을 찾아 지갑에 넣었다.      


텅 빈 지갑에 5만 원짜리가 들어가자 초라했던 마음도 다시 든든하게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돈. 쳇. 그까짓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정섭씨는 돈을 지갑에 채우자, 마음에도 여유가 차는 것을 느끼며 홀로 생각했다. 돈. 그까짓게 뭐라고....     

 

하지만 돌이켜보면 돈은 단지 그까짓게 아니었다. 돈이 집 나가면 사랑도 따라 집 나간다는 공사장 선배의 명언처럼 지독한 돈! 돈! 돈! 때문에 이혼을 했고, 돈이 없어 아들이 자신의 전화도 받지 않고 무시하고 있으며, 돈 때문에 오늘도 송팀장에게 구걸을 해야만 했다.     


그.까.짓. 돈 때문에!     

 

젊은 시절 그토록 호기롭게 외쳤던 그까짓 돈! 정섭씨는 자신이 무시했던 그까짓 돈에게 지금 무시당하며 살고 있었다.     

 

정섭씨는 우산을 쓰지 않고 비를 맞으며 터벅터벅 걸어서 함바집으로 갔다. 이 근처 현장의 공사가 거의 다 끝나가고 있었는데, 아직 완전히 다 끝난 것은 아니어서 아직도 함바집에서 송팀장의 팀원들이 밥을 먹고 있었다.     


정섭씨는 외상 장부를 뒤적였다.      


R.C.S     


찾았다. 송팀장과 정섭씨의 팀. RCS라고 겉면에 적힌 식당 외상 장부.     


 정섭씨는 외상 장부에 1명이라 쓰고, 그 옆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서 다시 장부를 툭 던져 놓았다.     

 비가 오는 날에는 인부들이 현장에 거의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뷔페식으로 되어 있는 함바집의 음식도 조촐하게 차려져 있었다.     


 정섭씨는 동그란 플라스틱 접시 하나를 들어 밥과 반찬을 그 위에 올려 담았다. 국그릇에는 따로 국을 한 그릇 담아 식탁에 앉았다. 오늘은 시래기 된장국이다. 평소보다는 간소하게 차려진 음식이었지만, 허기가 질대로 진 정섭씨에게는 이것만으로도 너무나 달고 맛있는 음식이었다.    

 

 정섭씨는 뜨거운 시래기 된장국을 몇 번이나 더 떠와서 마셨다. 뜨거운데도 시원했다. 그 속에 있는 시래기를 잘근잘근 씹으면서 속으로 송팀장과 이혼한 아내와 전화를 받지 않는 아들과 자신을 이렇게 만든 세상을 씹었다.     


 동그란 접시를 가득 채워 두 번이나 비우고, 국을 네 그릇이나 비운 다음에서야 정섭씨는 수저를 놓았다.     


 밥을 다 먹고 이쑤시개로 이를 쑤시며 함바집 밖으로 나왔다. 비를 맞지 않는 처마 아래에 의자가 죽 놓여 있었고, 오늘 현장에 출근한 몇 안 되는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정섭씨도 이를 쑤시며 의자에 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 투둑투둑     


 비는 아까보다는 조금 약해졌지만, 여전히 흩뿌리며 날리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공사 현장. 정섭씨는 비가 오는 공사 현장을 볼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정섭씨의 평생 일터 공사 현장. 땀 흘리며 일을 하고, 돈을 벌어가는 곳.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이면 돈을 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비가 내려도 기분이 좋았다. 비가 오면 공사 현장에서 일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돈을 벌 수는 없었지만, 모든 사람이 다 함께 돈을 벌지 못하는 날이었다.     


 그러니까 혼자서 돈을 벌지 못하는 날이 아니라는 의미였고,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이면 다같이 현장 근처의 함바집에서 막걸리를 실컷 마시는 날이라는 뜻이었다.


 일을 하는 날에는 돈을 벌어서 좋았지만, 몸이 힘들어서 싫었고, 비가 내려 일을 하지 못하는 날에는 돈을 못 벌어서 아쉬웠지만, 다 함께 술을 퍼마시며 어울릴 수 있어서 좋았다.  

   

 어쩌다 혼자서 술을 많이 마시고 늦잠을 잤는데, 나를 뺀 모두가 일을 하고 있는 맑은 날에는, 출근을 하지 못해 집에서 놀면서도 기분이 참 더러웠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일을 하고, 돈을 번다는 생각에. 나 혼자 뒤처지고 버려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록 요즘엔 사람들이 정이 없어서, 비가 오면 다들 집으로 냉큼 사라져버리고 말았지만, 어쨌든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은 담배를 피우면서 공사현장을 보며 멍때리기에 참 좋은 날이다.     


 비에 젖은 시멘트는 새까맸다. 평소 같으면 망치질 소리와 중장비 돌아가는 기계음이 가득한 현장이지만 오늘은 빗소리만 가득했다.      


 정섭씨는 담배를 한 모금 길에 빨아들여서 후우 내뿜었다. 하얀 담배연기가 내리는 비를 스치며 흩어졌다.     

 현장은 참 공평했다. 한때 잘 나가던 사람이나, 별 볼일 없이 사는 사람이나 똑같이 땀 흘리며 일했다. 현장에서 만난 대부분 사람은 허풍이 심했기에 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다 믿을 필요는 없었지만, 정섭씨가 만난 사람들 중 절반의 사람만이라도 진실을 말한 것이라면 함께 일하는 사람들 중에서 한때 잘 나가던 사람들은 상당히 많았다.     


 그런 사람을 만날 때면 정섭씨는 약간의 위안이 되기도 했다. 한때 잘 나갔던 사람도, 자신과 함께 현장에서 똑같은 일을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때로는 그런 사람에게 자신이 지시를 내리고 있다는 것도.    

 

그렇게 현장에 굴러들어온 사람들의 사연은 내리는 빗방울보다 더 많았고, 더 다양했다.     


 대기업에 다니다가 괜찮은 사업 아이템이 있어서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다가 쫄딱 망한 사람. 안정적인 공기업에 다니다가, 반복되는 안정적인 일상이 무료해 아내 명의로 치킨장사를 시작했는데, 장사가 너무 잘 돼서 공기업을 그만두고 장사에 전념했다가 근처에 브랜드 치킨가게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 결국 장사가 망해버린 사람.  주식투자를 했다가 망한 사람, 코인에 손을 댔다가 지인의 전세 보증금까지 다 날려 먹고 자살시도를 했다가 실패하고 온 사람. 보이스 피싱을 당해서 집과 가게를 날려 먹은 사람. 의료기기 판매 영업사원으로 잘 나가던 사람인데, 쉐도우로 수술 집도를 하다가 걸려서 감옥살이를 하다가 나온 사람. 작게 시작했던 사업이 점점 더 커지고, 번창했는데, 종업원과 바람이 나서 이혼소송을 당하고 재산분할 후 사업유지가 어려워져서 망한 사람 등등. 사연들이 너무나 다양했다.     


 사업이 잘된(?) 사람들의 경우-물론 검증하지 못했지만. 대부분 여자 문제가 있었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사업이 잘되면 여자가 붙는다고 했다. 


'지랄하고 있네. 여자가 무슨 자석이냐? 가만히 있는데 붙게? 돈 좀 있고, 시간 있으니까 발정 난 수캐처럼 껄떡대고 여기저기 쑤시며 돌아다닌 거지.'     


잘살아본 적이 없는 정섭씨는 이런 류의 인간들이 참 갑갑했다. 아니, 돈 많이 벌겠다, 잘 살겠다. 뭐가 아쉬워서 그 지랄을 하다가 가정이 엉망이 되느냔 말이다. 그냥 가족들과 여행이나 다니고, 잘 먹고, 잘 살면 되지. 나는 잘 먹고, 잘 살 돈이 없어서 아내가 떠나버렸지만.  갑갑한 인간들. 돈 귀한 줄 모르고, 돈 좀 있다고 뻘짓거리 한 너네들은 걍 이렇게 공사판에서 고생하며 살아도 싸다 싸.     


 정섭씨는 타닥타닥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담배를 피우면서, 지난날 마치 무용담을 이야기 하듯 말하던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 둘 떠올렸다가 담배연기와 함께 날려버렸다. 병신들. 그냥 그대로만 살았으면 이런 데 오지는 않았을 건데.     


정섭씨는 자신이 평생 일을 한 공사현장이면서, 그들이 이곳에 오지 않았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며, 그들을 병신 취급하고 있었다.     


 언젠가 이혼을 하고 나서 처음으로 비가 내리는 날 공사 현장을 찾았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여름이었는데, 곧 태풍이 올 거라고 현장에 바람에 날릴 만한 물건들을 다 치우고, 철사로 엮을 건 엮어서 고정해야 한다고 했다. 잠시 현장에 들리는 거라서 당연히 일당은 없었다.    

  

“제가 갈께요.”     


처음이었다. 평소 같으면 자신이 먼저 나서지도 않을뿐더러, 누군가 부탁을 했더라도 투덜투덜거리며 하기 싫어했을 터인데, 그날은 이상하게 그냥 현장에 나가보고 싶었다.     


“정섭이 니가?”     


“예. 제가 가면 안 돼요?”     


“아니 뭐..... 그런건 아닌데..... 알았어. 그럼 부탁 좀 하자. 현장 단도리 좀 잘하고 와라. 바람에 날아가는 거 없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정섭씨는 홀로 현장에 갔다. 그 크고 넓은 현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크레인 기사도 없었고, 시멘트를 타설하는 사람도 없었고, 철근 작업을 하는 사람도 없었고, 현장 감독도 없었다.  

   

정섭씨는 지난번 작업이 끝나고 나서 미처 정리하지 못한 것들을 홀로 주섬주섬 정리를 했다. 비가 내렸지만, 급히 서둘러야 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태풍은 오늘이 아니라 내일 몰아칠 것이다. 현장은 혼자서 정리를 하고 가면 되는 일이었고, 얼마 전 이혼을 하고 이제는 혼자였기에, 여관에는 아무도 기다리는 사람도 없었다.     

 정리는 천천히 느긋하게 하더라도 두 시간 이내에는 다 끝날 일들이었다. 느릿느릿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시간은 금세 흘렀고, 정리가 다 끝났는데도 정섭씨는 뭔가 아쉬운 듯 현장을 떠나지 않고 발판을 만들 때 사용하는 토루판 한쪽에 걸터 앉았다.    


담배를 꺼내 물었다. 중심의 온도가 700도에서 800도에 이르는 담뱃불은 이 정도 내리는 비에는 쉽게 꺼지지 않았다.     

     

 뭐가 잘못된 걸까? 아내는 조정 기간에 이혼조정 담당 판사 앞에서 남편이 술을 너무 좋아해서 도저히 살 수가 없다고 했다.  

   

 이 여편네가! 술 때문에 이혼을 해야 한다면, 우리 아버지 때 사람들은 전부 다 이혼해야겠네? 

    

 게다가, 우리 아버지는 툭 하면 어머니를 줘 패기까지도 했는데, 어머니는 평생 아버지를 하늘처럼 받들고 살았는데?!! 

    

 내가 때리기를 했냐??!! 처맞지 않고 사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줄 알아야지! 술 좀 마시는 게 그게 뭐 그리 큰 흠이 된다고!! 그래! 술 때문에 이혼을 하고 싶다면 나도 미련 없다! 그 정도도 이해 못 하는 여자가 무슨 아내냐! 가라! 가! 망할 년!!   

  

 정섭씨는 씩씩 거리면서 담배를 피우며 아내를 욕했다. 이혼? 까짓거 별거 없다! 아내를 만나기 전에도 몇 번의 연애를 해봤고, 이별도 해봤다! 헤어지면 마음이 아프겠지만, 잠깐일 뿐이다!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금세 잊을 것이 뻔했다!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다. 그럴 것이다.   

  

 정섭씨는 스스로 계속 괜찮을 거라고 다짐했다. 정말 괜찮을 거라고. 아내 욕을 하면서 괜찮을 거라고 무수히도 다짐을 하는데, 빗물에 섞여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정섭씨는 당황스러웠다. 겨우 이혼을 했다고 눈물을 흘리는 스스로가. 당황스러운 눈물은 쉼 없이 계속 흘렀다.     


 한참 동안 아무도 없는 공사 현장에서 홀로 흐느껴 울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 그렇게 울어본 적은 처음이었다. 아내와 헤어졌다고 울었다는 사실을 남들이 알면 무척이나 쪽팔리는 일이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울어야만 했다. 그제야 정섭씨는 단순히 연애를 하고 헤어지는 것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루고 나서 이혼을 하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실컷 울었다. 눈물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만큼. 다른 어느 곳보다 지금 이곳 정섭씨의 평생직장인 비가 내리는 공사 현장이 눈물을 흘리기에는 가장 적합한 장소였다.   

 

 눈물을 다 쏟아내고 나자 속이 후련했다. 갑갑하게 속을 막고 있던 무언가를 다 밭아낸 것 같은 기분?   

  

 문득 정섭씨는 공사현장에서 울어본 사람이 자신뿐만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수많은 사연을 품고 현장에 발을 들인 사람들 중에서 눈물을 쏟은 사람이 나 하나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담배를 한 대 더 피고,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공사장 한쪽에 쌓인 모래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정섭씨는 오래전 어릴 때 봤던 모래요정 바람돌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루에 한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모래요정 바람돌이.  

  

 비 내리는 함바집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정섭씨는 이혼을 하고 홀로 텅 빈 현장에서 눈물을 흘리던 그때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모래요정 바람돌이? 마누라한테 이혼 당하고 실컷 울다가 갑자기 그게 왜 떠올랐지?’   

  

 정섭씨는 지금 생각해도 신기했다. 어릴 때 봤던 만화가 하필이면 그 순간에 갑자기 떠올랐다는 것이. 어릴 때 본 이후로, 그동안 자라면서 한 번도 떠올리지 않았던 모래요정 바람돌이가 도대체 왜? 

    

 정섭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담배를 빗물에 던졌다. 치이익 소리를 내며 담뱃불은 금세 꺼졌다.     


 모래요정 바람돌이는 물에 젖는 걸 싫어해서 비를 엄청 싫어 했다. 그러니 비가 내리는 날 떠올랐다는 것은 더 이상했다. 정섭씨는 자리에서 일어나 터벅터벅 비를 맞으며 걸었다. 모래요정 바람돌이의 소원은 해가 지면 모두 물거품처럼 사라진다는 내용을 상기하며 빠른 걸음으로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11. 인비절     


 한 달 살기를 말레이시아에서 처음 해보고 돌아온 지연씨는 돌아오면서 다음부터는 절대 한 달 살기를 떠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몇 개월의 시간이 흐르자 그때 했던 다짐이 조금은 무뎌졌다.     


 게다가, 주위의 많은 사람이 이번엔 어느 나라로 가는지 궁금해 했다. 사람들은 지연씨에게 어느 나라로 가는 게 좋을지 추천을 해주기도 했고, 마치 자기들이 떠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흥분해 들뜨기도 했다.  

   

 지연씨는 남편에게 말레이시아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남편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스스로도 조금 무뎌지기도 했고, 남편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도 했고, 주위 사람들의 기대도 있었기에 지연씨는 이번에도 또 아이들과 함께 한 달 살기를 하러 떠나기로 했다.     


“필리핀.”     


“뭐?! 필리핀? 야! 완전 부럽다!!”     


 주위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부럽다. 좋겠다. 남편의 능력과 재력에 대한 칭찬까지. 저번엔 누군가 물어봤다.     

“그런데, 지연아.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저기.. 남편 연봉이 얼마나 되는 거니? 너 얼마 전에 산 샤넬백도 그렇고, 아이들하고 한 달 살기 하러 외국에 가는 것도 그렇고, 차도 외제차 타고 다니고... 그 정도면 일반 직장인들 일 년 연봉으로도 안 될 건데, 너희 신랑은 웬만한 중소기업 사장보다 더 버는 거 아니야? 연봉이 몇억은 되겠는데??”     


 남편의 수입은 연봉 1억이 채 되지가 않았다. 4대 보험과 근로소득세, 지방세 등을 제외한 한 달 실 수령액은 6백만 원이 안 되는 금액.     


 남편의 월급으로는 가족들 보험료를 내고, 아이들 학원비와 아파트 관리비 등 생활비로 사용하고 나면 남는 돈은 전혀 없었다. 남편은 보험을 적금처럼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보험을 많이 넣고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저축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지연씨도 혼자 생각해봤었다. 샤넬백이 1,400만원, 한 달 살기 위한 해외 거주비용과 현지 영어 선생님 비용, 비행기 티켓 등을 모두 합하면 대략 1.000만원 정도. 이것만 해도 한 달에 여윳돈을 전혀 모으지 못하고 있는 남편이 어디서 돈이 났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거기다 일 년에 2번의 해외여행까지.   

  

 지연씨가 남편에게 물어보면, 남편은 모아놓은 돈이 조금 있었다고만 말을 했다. 혹시 나 몰래 어디 돈 들어오는 곳이 있는 건 아닌가? 하고 궁금할 때도 있었는데, 아무렴 어떠랴. 명품 백을 걸치고, 외제차를 몰고 다니며, 아무런 돈 걱정 없이 잘살고 있는데!     


 그렇게 떠난 필리핀에서의 생활은 말레이시아 때와 비슷했다. 기후도 비슷했고, 분위기도 비슷했고, 맥주를 즐기기에 딱 좋은 것도 비슷했다.     


 특히 필리핀 사람들은 자국의 맥주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산미구엘. 귀여운 병에 들어있는 이 맥주를 유리잔에 부어 얼음을 넣어서 마셨는데, 그들의 맥주에 대한 자부심에 장단이라도 맞추듯 지연씨는 금세 필리핀의 맥주에 푹 빠져버리고 말았다.     


 지난번 말레이시아 때와 비슷한 일상이 늘 반복되었고, 아이들과 함께 한 달 살기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한 달을 살고 돌아온 지연씨의 상태는 더욱 심각해져 있었다.    

 

 낮에도 마시고, 저녁에도 마시고, 한 달 내내 술을 마시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한 달 살기를 하러 온 다른 한국 사람들과도 어울렸다.  

   

 그런데, 그렇게 풍요롭고, 여유로운 생활을 하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은 점점 더 불안해지고, 당장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은 공포가 시시때때로 엄습해왔다. 주로 새벽에 술이 깰 때쯤 그런 공포가 밀려왔기에, 새벽에 눈을 뜨면 냉장고를 열어 다시 맥주를 마셨다. 그렇게 맥주를 몇 모금 마시고 나면 조금은 마음이 가라앉았고, 차츰 안정되었다.     


 지연씨는 필리핀에 다녀오고 나서 자신의 이런 상태에 대해 다시 한번 심각하게 남편에게 말했다. 하지만 남편은 이번에도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한 달 살기를 하고 온 사람이 다시 대한민국의 현실에 적응하기 위한 짧은 기간동안의 부작용 정도로만 치부했다.     


 한국에으로 돌아와서는 필리핀이나 말레이시아에서처럼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지연씨가 술을 마시는 횟수와 시간이 예전보다 늘어나긴 했다.     


 지연씨의 남편 지훈씨에게는 홀로 지내시는 어머니가 계셨다. 새벽시장에서 야채를 판매하는 일을 하셨는데, 작은집에서 홀로 단출하게 지내셨다. 그런데, 지연씨와 아이들이 필리핀에서 한 달 살기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주위 분들의 도움으로 다행히 골든타임 이내에 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당분간은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남편도 지연씨와 아이들이 머무는 필리핀에 잠시 들리려고 했었지만, 어머니가 입원하셔서, 갈 수가 없었다.     


“실비 보험 하나 안 넣고 뭐 했어??!!”     


 한국으로 돌아온 직후, 지연씨가 남편으로부터 어머니가 들어놓은 보험이 하나도 없다는 말을 듣자마자 뱉은 말이다. 시어머니가 입원한 병원 로비에서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지연씨는 가족 생활비의 많은 부분이 지금 병원에 입원하신 시어머니의 주머니에서 나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지연씨 가족의 생활이 달라진 것은 없었다. 시어머니로부터 돈이 들어오지 않더라도, 지금까지 해오던 생활은 유지해야 했으니까. 남들 보는 눈이 있으니까.  

   

 지연씨는 생활을 유지하는 돈을 남편이 어디에서 구해오는지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자신의 정신건강 하나 건사하기에도 벅찬데, 돈 문제까지 신경 쓰고 싶지는 않았다. 남편이 평소보다 기운이 많이 꺾여 지쳐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자신에게 돈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다행이었다.   

  

 가끔은 남편의 축 처진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어차피 돈을 벌어오는 것이 가장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가족들 하나 건사하지 못하면? 그건 가장이 아니다! 그럼 결혼을 안 했어야지!    

 

 시어머니는 종합병원에서 보름 정도 입원하며 치료를 받고 나서 요양병원으로 옮겼다. 집에 혼자 계시다가 혹시 또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이 되어 남편이 요양병원으로 모시고 가서 입원을 시켰다. 요양병원에서는 개인별로 간병인 한 명을 두기엔 너무 비용부담이 되기 때문에 네 명, 여섯 명, 열 명 단위로 간병인을 한 명을 둘 수 있는 병실이 있었는데, 지연씨의 시어머니는 가장 저렴한 열 명이 머무는 병실에 입원했다.     


 간병인이 있다고 지연씨가 요양병원에 전혀 가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가끔은 시어머니가 좋아하실만한 음식을 사서 요양병원에 들르기도 했다. 비록 오래 머무르진 않았지만.      


 아이들은 요양병원에 데려가지 않았다. 평일에는 아이들이 학교에 가야 했고, 학원도 다녀와야 해서 시간이 없었고, 주말에는 아이들과 함께 나들이하러 다녀와야 했기 때문이었다. 귀한 주말 시간을 병원에 가느라 허비할 순 없었다.    

 

 지연씨 부부에게는 딸이 둘 있었는데, 둘 다 초등학생이었다. 요즘엔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치아 관리를 했기 때문에, 딸들이 어릴 때, 지역에서 가장 비싸기로 소문이 났지만, 가장 치아 관리를 잘한다고 소문난 치과에 등록했다.      


“아픈 데도 없는데 왜 등록을 해?”     


처음 아이들을 치과에 등록하고, 남편이 물었을 때, 지연씨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요즘에 누가 아파야 치과에 가니?!! 그 전부터 예방하고 관리를 꾸준히 받아야 치아가 상하지도 않고, 제대로 자라지!!”   


“...”     


 지연씨의 몇 마디 호통에, 남편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하긴, 다른 것도 아니고, 아이들 치아를 관리하겠다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치과를 다니며 예방치료를 한다고 했지만, 아이들 이에는 충치가 생겼고, 그래서 충치 치료를 해야만 했다.     


“이게 무슨 예방치료야? 이상 없는데도 계속 치과에 오며 가며 치과에 돈만 계속 내고, 그렇게 해도 충치는 또 생기고. 아이들 충치가 생긴다고 그냥 치료해주는 것도 아니고, 돈은 돈대로 다 받으면서 자기네들 치과에서 계속 치료하게 만드는 속셈이구만.”     


남편의 말에 지연씨가 이번에도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의사 선생님 말씀이, 아이들이 칫솔질을 제대로 안 해서 그렇다고 하잖아! 칫솔질을!! 그래서 오늘 의사 선생님한테 야단맞고 왔는데, 그게 할 소리니?!”     


“아니, 당신이 왜 야단맞고 오는 데?”     


“아이들이 칫솔질을 잘못한 잘못! 그게 아이들 잘못이기도 하고, 부모인 우리들 잘못이기도 하니까!”     


“뭐?! 그럼 도대체 예방치료를 하는 치과는? 거기 잘못은 뭔데?!”     


“없지! 치과가 무슨 잘못이 있어? 다 우리 잘못이지!! 그러니까 당신 앞으론 애들 칫솔질할 때 옆에서 제대로 봐줘! 대충대충 하지 말고!!”     


남편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어릴 때부터 예방(?)치료라는 프로그램을 끊어, 예방치료임에도 불구하고 시시때때로 생긴 충치를 치료하면서 지금은 큰 애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다.     


 일요일 아이들과 함께 근처 유원지에 다녀오는 길에 지연씨가 남편에게 말했다.      


“이번에 연희 예방치료 하러 치과에 다녀 왔잖아.”     


연희는 첫째 딸이었다.     


“응.”     


남편은 운전을 하면서 대답했다.

     

“그런데, 연희 덧니가 양쪽으로 튀어나와서, 그거 교정해야 한데.”   

  

남편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 지연씨는 기분이 확 나빠졌다.     


“아니, 지금 뭐야? 당신 지금 왜 한숨 쉬는 건데? 내가 뭐 기분 나쁜 말 했어?!”     


남편의 얼굴에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예방치료라는 거 그거 좀 안 하면 안 돼? 무슨 예방치료를 한다는 핑계로 계속 이것저것 치료해야 한다고 하고, 그때마다 돈은 계속 들어가고 말이야. 충치는 충치대로 다 생겨서 그것대로 또 치료하는데 돈 들어가고. 아니 막말로 예방치료를 한다고 해놓고서 예방을 못 했으면 자기네들이 그냥 다 치료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얼마 전에도 뭐, 물어보지도 않고 스케일링합니다~ 하고 일방적으로 통보하길래 그냥 해주는 건가보다 했는데, 병원에서 나갈 때 스케일링비용 8만 원 달라고 해서 또 내고. 이게 무슨 예방치룐데? 그냥 자기네들 병원에 계속 오게 만들어서 돈 뜯어내는 것밖에 더 돼?”     


“참, 나. 당신은 그게 문제야. 쥐꼬리만 한 돈 아끼려다가 일 더 키우는 거! 당신은 아파도 병원에 잘 안 가다가 나중에 엄청나게 고생하고 나서 병원에 가잖아! 애들도 그럼 치과 가지 말고 병 더 키워서 큰 수술 할까? 충치가 생긴 건 애들이 칫솔질을 못 해서 그런 거라고 몇 번을 말해!! 애들 잘못이고, 우리가 잘못 봐준 잘못이라고!!”     


지연씨의 말에 운전을 하는 남편의 언성도 제법 커졌다.

     

“세상에 칫솔질을 잘하는 애들이 어디 있어?! 그걸 왜 아이들 핑계를 대는 건데? 우리가 잘 못 봐준 건 그래, 인정한다고 치자! 그럼 모든 부모가 애들 칫솔질하는 걸 잘 봐준다면 예방치료가 왜 필요한 건데? 그냥 유튜브에서 아이들 칫솔질하는 법 같은 걸 보면 되는 거지! 왜 비싼 돈 주고 가서 예방치료 프로그램을 끊어서 서비스를 받는 사람들한테, 본인들 잘못은 쏙 빼놓고, 아이들이 잘못해서 그렇다. 부모들이 잘못해서 그렇다는 핑계만 대는 건데?!”     


“아, 몰라! 그렇게 잘 따지시면 당신이 병원에 가서 따지시던가!! 왜 나한테 그래? 이번에 덧니 치료 만약 안 하고 나중에 커서 치료하려면 양악수술을 해야 할지도 모른데! 양악수술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지?”     


지연씨의 말에 남편은 입술을 꾹 깨물면서 물었다.     


“덧니 치료를 안 한다고 양악수술까지 해야 한다고? 그건 너무 억지 아니냐?!”     


“어릴 때는 교정으로 이를 뽑지 않고 치료할 수 있지만, 나중에 크면 생니를 뽑아야 하고, 더 심한 경우에는 양악수술까지 해야 한다고 하더라! 당신은 연희가 커서 잘못되면 죽을지도 모르는 양악수술가지 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냥 지금 교정해버리면 아무것도 아닌데?! 정말 그런 거야?!”     


 지연씨가 아주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남편은 인상을 확 구기며 뭔가를 말하려다가 차 뒷자석에 앉아 있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선 손으로 핸들을 탕 한번 치고는 입을 다물었다.    

 

 남편이 입을 꾹 다물고 운전하자, 지연씨도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다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돈이 들어가야 하는 일이었기에,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빨리 결정을 하고, 병원에 말을 해줘야 했다. 그리고 카드를 긁어야 했다.    


 “요즘 다들 교정 많이 하는 거 당신도 봤잖아. 교정 좀 하는 걸 가지고 뭘 그리 심각해?”     


지연씨의 남편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찬찬히 말했다.     


“후우...... 여보. 나도 연희 덧니가 신경 쓰이긴 하지만 지금 어머니도 병원에 입원해 계시고, 우리 형편에 그리 쉽게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닌데, 덧니가 건강을 해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보기 좀 싫은 거라면 지금은 참고, 나중에 커서 치료를 해도 되는 거잖아.”   

  

“나중에 양악을 해야 할 수도 있다니까? 양악수술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지?”     


“그러니까 여보. 우리 연희가 그렇게까지 운이 나쁠 수 있냐고. 덧니 때문에 양악을 해야 할 정도로.”     


“그건 모르지. 그렇게 드문 케이스 중에 하필이면 연희가 포함될 수도 있으니까.”     


“...”     


“당신 정말 왜 이래? 주위에 치아교정 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연희한테 그 정도도 못해 줘?”     

지연씨의 말에 남편은 손사래를 쳤다.     


“아, 됐다. 됐어..... 그래서.... 얼마나 들어간다는데?”     


 남편의 말에 지연씨가 씩 웃었다. 이렇게 가격을 물어본다는 것은 결국 해준다는 의미였다. 하긴, 남편은 가끔 지연씨와 툭탁거리면서도 결국엔 지연씨가 원하는 것은 모두 다 해줬었다.     


“보통은 메탈로 많이 한다는데, 당신 그거 봤지? 사람들 이에 막 철 구조물 같은 거 하고 다니는 거. 진짜 보기 싫은 거 있잖아. 밥 먹을 때 막 음식 찌꺼기 끼고 그러는 거.”     


“본적은 있지. 근데? 교정은 원래 그렇게 하는 거 아니야?”     


“아이 참. 이래서 정보가 중요하다는 거야. 그건 옛날 방식이지~ 메탈로 하는 거는 딱 고정을 시켜서 나중에 빼기 전까지는 계속 끼우고 다녀야 하잖아. 밥 먹을 때도 엄청 불편하고. 연희가 그런 걸 혐오스러운 걸 하고 다닌다고 생각해봐. 지금 초등학교 6학년이면 한창 예민할 나이인데, 학교 가서 친구들이 놀리고 그러면 어쩌려고.”     


“그럼 요즘엔 뭐 어떻게 하는데?”     


“요즘엔 인비절 이라고, 말 그대로 투명하게 만들어서 보이지 않는 투명 교정기를 사용해.”     


“....인....비..절?”     


“응. 그리고 틀니처럼 치아에 끼웠다가 뺐다가 할 수도 있거든. 틀니는 음식을 먹을 때 끼우지만, 이건 음식 먹을 땐 빼놓으면 돼. 그래서 음식 찌꺼기가 이에 낄 염려도 없고.”     


“그렇게 뺐다가 끼웠다가 하는데도 교정이 된다고?”     


“그래. 애들 가는 치과가 정보도 빠르고, 잘하는 곳이라서 가능한 거야. 다른 치과였어 봐. 어림도 없지.”     


지연씨는 평소 아이들이 가는 치과에 불만이 가득한 남편에게 자랑을 하며 말했다.     


“그래서?”     


남편의 말투는 여전히 퉁명스러웠다.     


“뭐가 그래서?”     


“그래서 얼마냐고.”     


“아, 그게 보통 교정비용이 메탈로 하는 경우에는 삼백 정도 드는.........”     


“뭐?! 삼백?!!”     


지연씨의 남편이 놀라며 소리를 빽 질렀다.      


“아니지. 내가 조금 전에 말했잖아. 그건 메탈로 하는 경우라고. 그걸로 하면 연희가 학교에서 놀림 받는다니까? 당신은 그랬으면 좋겠어??”     


“누가 그랬으면 좋겠대?”     


“그래. 당신도 연희가 놀림 받는 건 싫잖아. 메탈로 하는 건 보기에도 흉물스럽고.... 아까 말했던 인비절로 하면 육백 정돈데........”     


“뭐, 뭐어!! 육백?!!”     


“아니. 원래는 육백만 원이 넘는데, 우린 예방치료를 받고 있는 우수 고객들이니까 할인해서 오백구십만 원 정도면 된데.”     


“우와......하...참...”     


기막혀하는 남편의 반응에 지연씨 역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당신 정말 왜 이래? 외국에 한 달 살기 하는 것도 척척 보내주면서, 이런 명품 가방도 사주면서, 애 교정하는 게 얼마나 든다고?”     


지연씨가 남편이 사준 명품 가방을 흔들면서 따져 물었다.     


“아니... 그건 그래도 어머니가 멀쩡하실 때 말이고....”     


“뭐? 그럼 넌 너네 엄마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니? 참 못낫다! 못나..... 애도 아니고, 다 큰 어른이. 한 집안의 가장이 되가지고......어머니, 어머니....”     


남편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내 월급이 정해져 있는데.. 그 돈을 어떻게 내라고...”     


“한꺼번에 내기가 힘들면 카드 할부로 하면 되지 무슨 걱정이야?”     


 지연씨 남편은 카드 할부가 만능이고, 그렇게 결제한 카드 대금은 어떻게 납부가 되는지를 전혀 모르며, 관심도 없는 아내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가 입을 꾹 다물고 운전에 집중했다.                                                                                

12. 2층 공방으로 오실래요?     


 홍사장은 대구탕 가게에서 점심을 먹고 나서 가게 2층으로 올라갔다.    

 

“2층 공방으로 오실래요?”   

  

지난번 남자 사장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다. 그땐 무시, 아니 개무시를 했다.  

    

“저희 공방은 시간을 만들어 드리거든요.”   

 

 이런 말을 듣고 도저히 무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간을 만들어 드린다니? 도대체가 말이 되냔 말이다!! 안 그래도 일 때문에 바쁜 시간 쪼개서 혼자 밥을 먹는 사람에게 이런 시답잖은 농담이나 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 당시에는.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늘 바쁘고, 시간이 없었던 홍사장이 시한부 선고를 받고 나자 시간이 생겼다. 그렇다고 아주 많은 시간이 생긴 건 아니지만, 밥 한 그릇을 누구에게도, 어떤 일에도 쫓기지 않고 편안하게 먹을 수 있게 되었으며, 그동안 무심히 지나치던 가게 앞에 놓인 꽃에서도 향기를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여유까지도 생겼다. 그리고 헛소리로 치부해버리고 말았던 사람에게 속아줄 만큼의 약간의 여유까지도.    

 

 건물 한쪽으로 난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니 테라스가 나왔고, 그 뒤로 산이 우뚝 솟아 있었는데, 푸른 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라 숲을 이룬 경치가 상당히 보기 좋았다.     


2층 입구에는 나무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시간을 달리는 공방 

   

시간을 달린다? 뭔가 특이하면서도 약간은 비현실적인 그런 기분이 들었다.      


- 끼이이익.     


 소리가 나는 낡은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니 나무 바닥으로 된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곳곳에 작업할 때 사용할 것 같은 합판과 나무가 서 있었고, 이름 모를 기계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한쪽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고, 그곳에 화이트보드와 공구들이 널려 있었다.     

 

 홍사장이 공방을 천천히 둘러보고 있는데, 대구탕 가게 남자 사장이 공방으로 들어왔다.     


“먼지가 많죠?”     


 아닌 게 아니라, 나무분진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어서 움직일 때마다 먼지가 폴폴 날렸다.    

 

“집진기를 돌리면서 작업을 하는데도 목분진이 많이 나와서 어쩔 수가 없네요. 문 좀 열어놓을게요.”   

 

남자 사장은 공방 곳곳에 있는 창문들을 돌아다니며 하나씩 열었다.   

  

홍사장은 창문을 다 열 때까지 그것을 지켜보다가 물었다.     


“저기 사장니......아니, 여기서는 내가 뭐라고 불러야.....”     


 홍사장은 대구탕 가게 남자 사장을 부르려다가, 공방에서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상하다 싶었다.   

  

“아, 보통은 선생님이라고 하는데, 그냥 편하신 대로 부르세요.”     


“성이 어떻게....?”     


“하하. 그냥 선생이라고 부르셔도 되는데.... 허선생이라 불러주세요.”     


“그럼 그렇게 부르겠소. 허선생.”     


“예. 그렇게 하세요. 저기 앉으시면 됩니다.”     


허선생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여기서 내가 뭘 하면 되는 거요?”     


홍사장이 허선생에게 물었다.     


“공방이니까, 공방에서 할 수 있는 걸 하는 거죠.”     


“그게 뭐요?”     


“음..... 뭐, 보통은 원데이클래스로 나무 도마 만들기? 이런 것들을 많이들 하세요.”     


“뭐요?!”     


홍사장이 황당한 표정으로 허선생을 쳐다봤다.     


“아니, 시간을 만들어 준다고 하지 않았소?!”     


“그렇죠.”     


“그런데, 나무 도마를 만들라니! 그게 도대체 뭔 소리요?!”     


 홍사장의 말에 허선생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홍사장은 대구탕 가게에서도 저 남자 사장의 미소를 싫어했는데, 헛소리를 들으니 더 짜증 나고 더 싫었다.     


“혹시... 제가 드렸던 말씀. 그러니까.. 시간을 만들어 드린다는 말은 믿으세요?”     


“그걸 누가 믿는다는 거요? 그냥 뭔 말인가 싶어 와 본 거지.”     


“그럼 한 번 해봐요. 나무 도마 만드는 거.”     


“뭐요?!”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잖아요. 의자 만들기나, 테이블 만들기도 있긴 한데, 어차피 사장님께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아, 아니 아무튼 도마 만들기 해봐요.”     


 순간 홍사장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나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말을 하려던 것 같았는데? 내가 시한부 인생이라는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설마. 아니겠지? 어떻게 안다고. 마음 한구석에 뭔가 찜찜함이 남았지만, 물어보지는 않았다. 밑져야 본전. 홍사장은 그냥 허선생의 말대로 나무 도마 만들기를 해보기로 했다. 시간을 만들어 준다는 헛소리를 믿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궁금했다. 이 인간이 어떤 짓을 할지.     


“그런데...... 이 공방에는 수업을 듣는 사람이 있긴 있는 거요?”     


“그럼요. 있죠. 다만, 평일 낮에 이렇게 편하게 오실 수 있는 분은 거의 없다는 거죠. 사장님처럼 자유로운 분을 빼곤.”     


 자유롭다라... 그 말이 새삼스러웠다. 물론 회사를 운영하는 대표이기 때문에 누군가로부터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이 자유로운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회사에 있을 때는 말할 것도 없었고, 회사를 벗어나, 집에 있을 때도, 친구들을 만날 때도, 모임을 할 때도, 늘 머릿속에는 회사가 있었다. 몸은 자유로울 수 있을지 몰랐으나, 정신은 늘 회사의 일들 속에 파묻혀 있었던 홍사장은 그것이 과연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하고 잠시 생각했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지루한 이론 수업을 조금은 해야 하는데 괜찮을까요?”     


허선생이 화이트보드를 닦으면서 이야기했다.     


“예. 그럽시다.”     


홍사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2층도 낡았고, 1층도 낡았고, 이 건물은 모든 게 다 낡은 것 같았다. 그런데 희한하게 사람은 젊은 사람이다. 건물 상태로 본다면 사람도 많이 늙은 사람이어야 할 것 같은데. 그래서 처음 대구탕 가게를 갔을 때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오래된 건물과 어울리지 않는 젊은 남녀사장.     


“자가요? 아님 임차요?”     


홍사장은 사업을 하는 사람답게 자연스럽게 물었다.      


“어.....그게 궁금하세요?”     


“그냥 뭐... 사업하는 사람의 습관 같은 거라고 해둡시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됩니다. "

    

“.....자가입니다.”     


“음..... 아버지가 물려주셨나?”     


 홍사장은 허선생이 젊었기 때문에 당연히 부모로부터 물려받았을 거라 생각했고, 또 당연히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을 거라 생각했다. 낡은 건물에 젊은 사람.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


 그것이 홍사장이 생각하는 당연한 범주였다.     


화이트보드를 닦던 허선생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가 다시 움직였다.     


“아버지는 돌아가신지 꽤 되셨어요. 건물은....... 말씀드리자면 좀 길어서... 어쩌다 제 것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에 홍사장은 순간 미안해졌다.     


“아, 미안해요. 내가 괜한 걸 물어서.......”     


“괜찮아요. 안 미안해 하셔도. 어차피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 이미 죽음이 정해져 있잖아요?”     


“음...그렇긴 하지만....”     

 

홍사장은 낮게 신음했다. 태어나는 순간 죽음이 정해져 있다는 것. 그 말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홍사장의 심장에 비수처럼 박혔다. 평소 같으면 이런 이야기에서 얼른 벗어날 다른 주제를 찾았을 홍사장이었지만, 시한부 선고를 받은 홍사장에게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는 그 어떤 주제보다도 더 나누고 싶은 이야깃거리였다.     

“젊은 나이에, 아버지 장례 치르느라 고생하셨겠소.”     


아내가 먼저 떠난 홍사장은 자신이 죽고 나서 장례를 치러야 하는 자식들을 걱정하며 말했다.     


“고생은요. 당연한 도리...... 아니... 도리를 다 못하긴 했죠.”     


“.....?.....”     


 허선생은 여전히 화이트보드를 닦으며 말을 했고, 홍사장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선생을 쳐다봤다.  

   

“...도리...를 다 못했다는 건...... 장례식에 문제가 있었던 거요?.... 아, 이런 이야기를 계속 물어봐서 미안해요.”     


 허선생이 화이트보드를 다 닦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괜찮아요. 물어보셔도. 뭐, 장례식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단지 제가 상주인데, 눈물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죠.”    

 

허선생의 말에 홍사장은 깜짝 놀랐다.     


“아니!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고?! 세상에 자식이 어떻게....... 정말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조금도 슬프지 않았던 거요?”     


“슬펐죠. 그것도 아주 많이.”     


“그런데......”     


왜 장례식장에서 꼭 슬퍼해야만 하는 거죠? 슬프지 않은 장례식도 있을 텐데.... 그리고 슬픈 것과 눈물을 흘리는 게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 거죠? 눈물을 동반하지 않는 슬픔도 있을 텐데...”     


 홍사장은 순간 허선생이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사이코패스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없는 2층에 위치한 공방. 산속의 건물. 지금 이곳엔 단둘만 있을 뿐이었다. 홍사장은 본능적으로 주위를 빠르게 곁눈질로 살폈다. 망치, 톱, 대패, 끌. 날카로운 연장들과 이름 모를 기계들.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음산한 기운이 느껴졌다.   

 

화이트 보드를 다 닦은 허선생이 터벅터벅 연장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며 다시 한번 물었다.     


“저는 정말 모르겠거든요. 도대체 왜 장례식장은 꼭 슬퍼야만 하는 건지. 그리고 그 슬픔은 반드시 눈물을 흘려야만 하는 것인지. 사람의 감정이란 슬픔과 슬프지 않음이라는 것으로 딱 잘라 나뉘는 것은 아닐 텐데. 그사이에 무수히 많은 다른 감정들도 있는 건데 말이에요.”     


허선생이 망치를 잡아 들었다. 그리고 홍사장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홍사장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등에서 식은땀이 쫙 배어 나왔다.  

   

“저....저기... 허선생.”     


“잠시만요. 바닥에 못이 튀어 나와서.”    

 

탕! 탕! 탕!     


 허선생은 나무 바닥에서 못이 살짝 튀어 올라와 있는 걸 망치로 박아 넣었다. 홍사장은 극도로 긴장했던 마음을 살짝 풀었다.     


“....그야... 당연히 슬프면 눈물이 나는 거고, 기쁘면 웃음이 나는 거고.. 뭐, 그런 게 자연스러운 거 아니겠소?”     


“......”     


허선생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렇군요....근데, 전 잘 모르겠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슬프긴 했지만, 차라리 돌아가시는 게 아버지도 더 편하시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뭐요?!”     


“아버지는 많이 힘들어 하셨어요.”     


“...”     


“본인 스스로를. 본인이 그렇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힘들어하셨거든요.”    

 

“아니.. 도대체 아버지가 어떻게 사셨길래......”     


“뭐, 흔한 드라마 소재로 나오는 뻔한 이야기처럼 사셨죠. 술 좋아하고, 술 마시면 가족들 괴롭히고, 주변 사람들 못살게 굴고. 술 깨면 술 취해서 한 행동 때문에 힘들어하고. 그걸 잊기 위해 또 술을 마시고... 그렇게 늘 반복하며 사셨는데, 그렇게 살면서도 그렇게 사는 자신을 싫어 했어요. 마치... 담배 피우는 사람이 담배 연기는 싫어하듯이. 본인의 존재 자체를 싫어 하셨죠. 그래서 차라리 잘 된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장례식 때도. 어차피 하루하루 고통 속에 살아가며 남을 괴롭히고, 그것 때문에 남은 날들을 힘들어할 바엔, 훌훌 털고 떠나시는 것도 괜찮겠다고.”     


“.......”     


둘은 잠시 침묵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말이 너무 길었네요. 공방에 처음 오셨는데.”     


“아니, 아니오. 내가 먼저 말을 꺼낸 건데 뭘........” 

    

허선생이 화이트보드를 다 닦고, 보드마커를 들면서 말했다.     


“자, 그럼 이제 이런 이야기는 그만하구요~ 좀 지루하셔도 먼저 알려드려야 하니까 이론 수업을 우선 하겠습니다. 오늘 아무것도 준비 못 해 오셨죠?”     


“예....”     


허선생이 A4 용지 한 장과 연필 한 자루를 들고 와 홍사장에게 건넸다.      


“오늘은 우선 이걸 사용하시고, 다음 시간부터는 노트 하나 챙겨 오세요~”     


다.음.시.간. 홍사장은 이 말이 지닌 의미가 이렇게 크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나에게 다음 시간을 기약할 수 있을까?     


“가구에 사용되는 나무의 종류에는 MDF, 파티클보드, 합판, 집성목과 제재목이 있는데요~ 여기 이거.”     


허선생이 화이트보드에 쓴 집성목을 톡톡 치면서 말했다.     


“이, 집성목과 제재목을 사용한 가구를 일반적으로 원목 가구라고 부릅니다. 집성목이란...”     


허선생의 설명이 계속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강의는 한 시간 정도 진행되었다.     


“다음 시간에는 실습을 해 보시죠.”     


“다음 시간?”     


“예. 오늘은 이론만 들으셨으니 아마 많이 지루하셨을 거예요.”     


홍사장이 피식 웃었다.     


“전혀 지루하지는 않았소. 재밌게 잘 이야기를 해줘서. 그런데... 시간을 만들어 준다더니.. 무슨 시간을 만들어 주는 거요?”     


아, 정확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보지 못했던 시간을 볼 수 있게 만들어 드리는 거죠. 내가 볼 수 없었던 타인의 시간을 만들어 보여드린다고나 할까요?”     


홍사장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니까 그게 도대체....... 뭘 볼 수 있게 해준다는 건지....”     


“이제 하루 배우셨는데, 벌써 보실 수는 없죠. 시간을 보시려면 제법 공을 들이셔야 해요.”     


“그렇소?..... 나는 시간이 별로 없는데......”     


홍사장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아는지 모르는지 허선생이 말했다.     


“걱정마세요. 아직 시간은.... 충분해요.”     

 

홍사장은 허선생이 자신의 상태를 전혀 몰라서 그런다고 여겨 허허 웃으며 공방을 나섰다. 어차피 시간을 만들어 준다는 말도 믿지 않았다. 허선생도 1층 대구탕가게로 내려가야 한다며 함께 나섰다.      


“그런데 말이오......”     


 2층 공방 밖 시간을 달리는 공방이라고 쓰인 나무 현판 앞에서 홍사장이 멈춰 서며 말을 꺼냈다.     


“또 이야기를 꺼내기가 좀 미안하긴 한데......”     


“괜찮아요. 뭐든 말씀하세요.”     


“그.....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말이오.”     


“네.”     


“정말.... 정말 눈물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은 거요?”     


“제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고 말씀을 드린 적은 없는 것 같은데요? 장례식장에서 울지 않았다고만 한 거죠.”     

“아, 그럼......”     


“장례식 동안에는 눈물이 나오지가 않았어요. 슬프긴 했지만 아까 말씀드린 이유들로 또 한편으론 아버지가 잘 떠나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서 눈물까지 나오진 않았어요. 그런데 말이에요....”     


허선생이 눈을 게슴츠레 뜨며 나무가 울창한 숲을 보면서 말했다.  

   

“도대체 누가 정한 걸까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3일. 조부모가 돌아가시면 1일. 이렇게만 슬퍼하면 된다고.”     

“그게 무슨 말이오?”    

 

“회사도 그렇고, 아이들 학교도 그렇고,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3일, 조부모가 돌아가시면 1일 이렇게 빠져도 되잖아요.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일주일이 더 넘어서야 눈물이 나던데......”    

 

홍사장은 허선생이 눈물을 흘렸단 말에 그래도 싸이코패쓰는 아닌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사회니까.....그렇게 해야 사회가 돌아가니까 그런 거 아니겠소?”     


“....그런가요? 정말 그런 거라면 그것도 슬픈 일이네요. 개인의 감정도 사회가 잘 돌아가기 위해 조절해야 하는 세상이라는 게.”     


홍사장도, 허선생도 쓴 웃음을 지었다.      


“그럼, 조심히 가세요~ 저기 손님이 들어오셔서.”     


허사장은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다가 주차장에 손님 차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선 얼른 뛰어갔다.                                                  

13. 시간을 달리는 공방     


 주경씨는 아들 학교 행정실에서 아들이 사고 명단에 포함 되어있다는 말을 듣고는 영혼이 반은 나가버렸다. 사고가 난 아이들이 입원한 병원으로 가면서 아들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지만, 아들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주경씨는 안절부절 거의 실성한 사람처럼 보였고, 그 옆에서 지애씨가 주경씨를 안심시키며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우리 승원이!! 승원이 어디 있어요!!”      


 주경씨는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병원에는 방송국에서 나온 기자들로 가득 차 있었고, 주경씨가 소리를 지르는 장면을 방송국 카메라들이 놓치지 않고 촬영을 했다.     


“승원이 보호자분이세요?”     


간호사가 주경씨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네! 우리 승원이 어디 있어요?!!”     


“잠시만요 어머님. 진정하시구요. 지금.....”     


“뭘 진정해요!! 승원이 어디 있냐구요!!”    

 

“후우....”     


 간호사는 어려운 말을 꺼내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간호사의 모습에 주경씨는 숨이 넘어갈 둣했다.    

 

“왜....왜요!! 혹시....혹시 승원이가.....죽..었...”     


“아니, 아니에요. 어머님. 그건 아닌데....”   

  

“그럼요?!!”     


“지금..... 중환자실에 있어요.”     


간호사의 말에 주경씨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주경아!!”     


주경씨는 바닥을 치며 오열했고, 지애씨는 주경씨를 위로하며 다독였다.     


 두 사람은 중환자실 앞으로 갔는데, 중환자실 안으로는 당장 들어갈 수 없었다.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30분 이내로 면회 시간이 정해져 있었기에, 그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락을 받은 주경씨의 남편 권호씨도 달려왔다. 주경씨와 권호씨는 부둥켜 안고 한참을 울었다.  

   

“밥은 먹어야지.”     


 학교 앞에서 사고가 일어난 지 벌써 5일이 흘렀다. 하지만, 승원이는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주경씨는 하루하루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밥? 넘어갈 리가 없었다. 식당일도 그만뒀다. 미쳐버릴 것 같은 마음에 숨이 턱턱 막히는데, 도저히 밥이 넘어가지 않았고, 일에 집중할 수도 없었다. 주경씨는 하루종일 중환자실 앞에서 깨어나지 않는 아들을 기다렸다가, 오전, 오후 잠시 중환자실에 들어갈 수 있을 때 들어갔다가 나와서 다시 밖에 앉아 있었다.     


 이런 주경씨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지애씨는 친구가 걱정이 되어 매일 죽을 사들고 주경씨를 찾았지만, 주경씨는 죽을 입에 대지도 않았다. 주경씨는 매일 몇 모금의 물만 마실뿐, 다른 건 아무것도 먹지를 않았다.  

   

“주경아! 네가 기운을 차려야 승원이도 얼른 정신을 차리지!!”     


 지애씨는 수십, 수백 번을 주경씨에게 말을 했지만, 그런 지애씨의 노력이 무색하게 주경씨는 메말라 갔다.     

 함께 사고를 당해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던 학생 두 명은 각각 이틀과 사흘 만에 사망했다. 학생들의 부모는 혼절하고, 바닥에 쓰러져 통곡했는데, 주경씨는 그 부모들과 함께 통곡을 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그다음은 혹시 승원이가 아닐까 하는 두려움과 이번이 승원이가 아니라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함께 들었다.   

  

 안도감이 들 때마다 아이들이 죽은 부모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승원이에게 아직 희망이 남아 있다는 것이 너무나 다행이었다.   

  

 오전에 잠깐 아들을 보고 나와서 중환자실 의자에 앉아 있는 주경씨를 오늘도 친구 지애씨가 찾아왔다. 그런데, 오늘은 평소와는 다르게 손에 죽이 들려있지 않았다.

     

“야! 너 따라와!”     


지애씨가 주경씨의 팔목을 잡아 끌었다.     


“아, 왜? 왜 이러는데?”     


“너 진짜 이러다간 니가 죽어! 승원이 일어나는 거 안 볼 거니?! 언제가 될지 모르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건데!!”     


“...”     


주경씨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물을 또르르 흘렸다.  

   

“주경아. 제발! 제발 잠깐만이라도 나하고 나갔다가 오자. 너 저녁 면회 때까지 7시간이 넘게 남았어!! 잠깐만 나갔다가 와! 나하고.”     


 주경씨는 끌려가다시피 지애씨의 차에 탔다. 5일 동안 옷을 두 번만 갈아입은 주경씨에게선 퀴퀴한 냄새가 났다. 지애씨가 차창을 열면서 한숨을 쉬었다.     


“주경아. 승원이가 일어나서 지금 네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하겠니?”    

 

“.....뭐라고 하긴..... 엄마... 라고 하겠지...흐흑........”     


주경씨는 순간 승원이가 엄마라고 부르는 모습을 상상하며 또 울음을 터뜨렸다.    

 

“하이고, 웃기시네. 승원이가 지금 네 모습 잘도 알아보겠다. 엄마는 무슨.... 저기요. 아줌마. 우리 엄마 혹시 어디 갔어요? 하겠지.”     


지애씨가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농담을 하자, 주경씨는 울다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만큼 지금 니 모습 엉망이야. 일단 집에서 좀 씻어. 씻고, 옷도 갈아입고, 우리 뭐라도 좀 먹으러 가자.” 

    

“...주경아 근데, 나 진짜....”     


“알아! 물론. 너처럼 정말 진짜로 네 마음을 이해할 수는 없겠지. 모두 다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도 말도 안 되고. 우리 애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건 아니니까. 그런데, 제발 내 말 좀 따라줘. 지금 너는 내 말을 들어야 할 때야. 너희 승원이를 위해서라도. 알겠지?”     


 고마웠다. 가슴이 아리도록. 아들이 생사의 기로에 서 있기에 가슴은 이미 아리고 쓰렸지만, 친구의 고마움에 더 아릴 가슴도 남았던지, 한쪽이 꾹 눌리듯 아려왔다. 주경씨는 친구의 고마움에 또 울었다.     


 주경씨는 집으로 와 오랜만에 따뜻한 물에 샤워했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고, 친구의 차에 올라 달렸다. 정해진 목적지는 없었다. 그냥 그렇게 차를 타고 달리면서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때론 눈물을 흘렸고, 때론 웃기도 했다. 지애씨는 주경씨가 잠시나마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아무런 의미 없는 우스갯소리를 막 던졌다.    

 

“너 그때, 대학교 때, 미팅 나갔을 때 있잖아. 원래 안 나가려고 하다가, 다른 과에 해병대 출신 예비역 선배 마음에 들어서, 그 선배가 미팅 나간다니까 너도 쫓아서 나간다고 했었잖아.”     


“어머 얘는? 그 얘기를 또 왜 해? 사람 부끄럽게.”     


주경씨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니, 넌 그 선배 좋다고 미팅에 나갔는데, 선배는 시큰둥~해가지고. 니가 계속 그 선배한테만 말을 거니까 나중에는 선배가 막 짜증 난 표정 지었잖아. 그런데도 니가 계속 말 걸다가 완전 결정타 맞아버리고. 큭큭.”     

“진짜... 아직도 그 생각만 하면 빡친다 빡쳐.”     


“그러게. 니가 선배한테 잘 보이려고, 저도 해병대 병영체험 하루 다녀 왔거든요. 그래서 선배 해병대 생활이 어땠는지 저도 잘 알아요. 그랬더니, 선배가 완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너 쳐다보면서.....크큭. 아~ 진짜 생각만 해도 웃긴다. 뭐라 했는지 기억나?”     


지애씨가 주경씨의 목소리와 행동을 흉내 내며 말하고는 물었다.  

   

“알지! 그럼. 그걸 내가 어떻게 평생 잊을 수가 있겠니?..... 그 선배가 진짜 똥씹은 표정을 지으면서 그랬지. 야이씨! 해병대 병영체험 하루 했다고 해병대 생활을 다 안다고? 참, 나. 야! 그럼 나도 똥 싸보니 출산의 고통을 알겠다!!”     


주경씨의 말에 둘은 깔깔거리며 박장대소했다.    

 

“아~ 눈물난다 진짜. 크큭!.... 그래. 그래서 미팅에 나왔던 다른 사람들은 다들 웃고 넘어가는데, 넌 얼굴 빨개져서 자리에서 뛰쳐나갔잖아.”     


“진짜 나에겐 천운이었지. 그런 인간 안 만난 게. 만약에 그런 인간이랑 결혼했다면, 맨날 말끝마다 사람 무시하고, 잔소리나 들으며 살았을걸?”     


“백퍼 공감! 그래서 권호씨 같은 멋진 남편도 만나고 승워..”     


승원이를 입에 담으려다가 지애씨는 얼른 말을 돌렸다.  

   

“야. 밥 먹으러 가자. 얼른.”   

  

 지애씨가 주차한 곳은 대구탕 가게 앞이었다. 차를 타고 달리다 보니 자연스레 외곽지역으로 나오게 되었고, 그곳에 있는 음식점 중에서도 주경씨와 자주 찾은 음식점은 대구탕 가게였다. 맑은 탕으로 나오는 대구탕은 며칠 동안 음식을 전혀 먹지 않은 주경씨의 속을 다스리기엔 딱일 것 같았다.     


“또 여기네?”     


“응. 혹시 다른 음식 먹고 싶은 거 있어? 얼마든지 말만 해. 데려가 줄게.”     


“아니. 괜찮아. 여기 음식 맛있잖아.”     


둘은 주차를 하고, 대구탕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남자 사장의 큰 목소리. 주경씨와 지애씨의 얼굴을 남자 사장이 알아봤다.     


“아, 안녕하세요?”     


 어서오세요에서 안녕하세요로 바뀐 인사. 어서오세요와 안녕하세요의 차이. 이 두 가지 인사의 차이는 받아들이는 손님의 입장에서도 무척 다르게 다가왔다.    

 

어서오세요는 단순히 손님 누구에게나 건네는 ‘복붙한 톡’과 같은 인사의 느낌이라면, 안녕하세요는 하나하나 정성스레 쓴 ‘나만을 위한 문자’처럼 이 사람이 나를 인지하고, 기억하고 있다는 느낌. 그래서 내가 대접받고 있다는 그런 기분이 느껴지는 인사였다. 그래서 묘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안녕하세요? 저희 대구탕 2개 주세요.”     


“네~ 대구탕 2개요~”     


남자 사장은 테이블에 시원한 물을 가져다주고, 대구탕을 끓이기 위해 주방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대구탕이 밑반찬과 함께 나왔다. 주경씨는 오랜만에 아들 생각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떠들었던 탓인지 허기가 지는 것이 느껴졌다. 신기했다. 아들이 깨어날 때까지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을 것만 같았는데, 이렇게 배가 고프다는 것이 느껴진다는 게 신기했다.     


 주경씨는 5일 동안 굶은 위장에 처음으로 물이 아닌 다른 음식을 넘겼다. 뜨겁고, 짭쪼롬하고, 달고, 매콤하고, 감칠맛이 나는 국물. 그동안 굶주려있던 세포 하나하나가 올올이 깨어나 음식의 맛을 느끼고,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것을 느꼈다.     


 짭짤하고 구수한 맛의 뜨거운 국물이 혀끝을 적시고, 식도를 따라 서서히 내려가는 그 느낌. 목을 타고 넘어간 따스한 열기는 명치를 지나 뱃속에서 서서히 사라졌다. 그렇게 한 모금, 또 한 모금을 조금씩 조금씩 넘겼다.     


 그런 주경씨를 보며 지애씨는 미소를 지었다. 속에 부담을 주지 않는 맑은 대구탕이었지만, 5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주경씨였기에 얼마 먹지는 못하고, 국물만 절반 정도를 비웠다. 오랜만에 뜨거운 음식이 몸속으로 들어가자 몸에서 열이 확 일었다.     

 

“고마워 지애야.”     


“얘는, 별소릴 다한다.”     


“그런데, 승원이..... 정말 일어나겠지? 다시 볼 수 있겠지?”  

   

“얘가, 얘가 또!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네 건강이나 잘 챙겨. 승원이는 꼭 다시 일어날 테니까!” 

    

“승원이도....배가 고프겠지?”     


 주경씨는 승원이도 자신과 똑같이 5일을 굶었다는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아 휴지로 눈물을 닦았다.

     

“일부러 밥 챙겨 먹였더니, 또 눈물이야? 밥을 먹었으니.... 이제 또 기운 차려서 제대로 눈물 흘려볼 작정이야?!”     


“....그게 아니라.....승원이가....흑....흐흑.....”     


“아니 얘가 진짜. 밥 먹는 식당에서 왜 이래? 쪼옴!! 누가 보면 내가 너한테 빚 받으러 온 사채업자라도 되는 줄 알겠다!”     


 주경씨는 한번 떠오른 아들 생각에 눈물을 계속 흘렸고, 지애씨는 주경씨를 어르고 달래며 이야기를 계속하다가 식당에서 너무 민폐라는 생각이 들어 그냥 나가자고 했다.    

 

“지애 넌 아직 밥 다 안 먹었잖아?”    

 

“그러는 너는? 국물만 절반 먹고 전부 다 남겼구만.”     


“....뭐...나야.. 지금 며칠 동안 아무것도 안 먹어서 속이 좀 불편할까 봐 조심하는 거고.... 너는 먹으면 되지. 나 신경 쓰지 말고.”     


“됐어. 그렇게 앞에 떡하니 앉아서 울고 있는데, 내가 무슨 밥이 넘어가겠냐?”  

   

“그래도.....”     


“괜찮아. 나도 거의 다 먹었어.”     


 두 사람은 먹던 음식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애씨는 카운터로 가서 계산을 하려고 남자 사장에게 카드를 건넸다.     


 남자 사장은 계산을 하면서 물었다.   

   

“저희 커피 드셔보셨어요?”     


“커피요? 무슨......”     


“거기 뒤에요.”   

  

지애씨가 돌아보자 커피 자판기가 한 대 놓여있었다.    

  

“저희가 대구탕도 맛있지만, 자판기 커피 맛집이거든요.”     


남자 사장의 실없는 농담에 지애씨가 피식 웃었다.   

  

“아, 네.....”     


“여기 2층이 전망이 좋아요. 다른 곳에 가시기 좀 그러시면......”  

   

남자 사장이 입구쪽에 서 있는 주경씨를 힐긋 쳐다보면서 말했다. 남자 사장의 말처럼 주경씨는 울음 때문에 눈이 퉁퉁 부어 있어서, 어디 다른 곳에 들어가기도 좀 민망했다. 또 이야기를 하다가 울음을 터뜨릴지도 몰랐고. 지애씨도 잠시나마 편안하게 커피 한 잔 마시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 그래요? 그럼... 2층에 올라가도 되나요?”     


“음..... 원래는 안 되는데, 오늘은 된다고 해드릴게요. 2층 테라스에서 커피 한 잔 편안히 마시고 가세요.”   

  

“감사합니다.”    

 

 지애씨는 평소 자판기 커피를 잘 마시지 않았는데, 오늘은 자판기 커피 두 잔을 뽑아서 주경씨와 함께 대구탕 가게 밖으로 나왔다. 2층으로 이어진 철제 계단을 따라 올라가자 울창한 숲이 나타났다.  

   

“우와~”    

 

 주경씨와 지애씨는 동시에 감탄했다. 2층 테라스 바닥에 동그랗게 구멍을 낸 곳에는 은행나무가 1층에서부터 솟아 올라 2층을 훌쩍 넘어 올라와 있었고, 테라스 주위로는 복숭아 나무, 오디나무, 돌복숭나무, 포도나무 등 여러 과실수 나무들과 벚나무도 심겨 있었다.  

   

 그리고 한쪽에는 나무로 만든 테이블과 의자가 있었는데, 나무 테이블에는 파라솔을 꽂을 수 있는 구멍이 나 있어, 예쁜 파라솔을 끼워 놓은 테이블은 마치 비밀의 정원 속에 놓인 주경씨와 지애씨만을 위한 자리 같았다.     

“이게 뭐야! 장난 아닌데?!”     


 허름한 낡은 대구탕 가게의 2층에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전망과 테라스의 모습에 둘은 한참 동안 감탄하며 둘러봤다.    

 

“앞에서 볼 때는 2층도 엄청 낡아 보이던데, 뒤로 돌아오니까 또 이런 반전이 있었네?”   

  

“그러게. 나도 깜짝놀랐다 야.”    

 

 둘은 자판기 커피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나무 의자에 앉았다. 지애씨는 자판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대구탕 가게 남자 사장의 말처럼 자판기커피 맛집이라 부를만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달달한 커피를 마시며 탁 트인 울창한 숲이 보이는 테라스에 앉아 있으니 나른하면서도 좋은 기분이 들었다.   

  

“흑....흐흑.....”   

  

 싱글벙글 하던 주경씨가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주경씨의 상황을 아는 지애씨는 안타까운 눈으로 주경씨를 쳐다봤다. 다행히 이곳엔 주경씨와 지애씨 이외엔 아무도 없었다. 주경씨가 편히 울 수 있도록 지애씨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자판기 커피만 홀짝였다.

      

 지애씨와 주경씨는 오랫동안 그곳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경씨는 때론 웃으며, 때론 울며 많은 이야기를 했다.  

    

“고마워 지애야.” 

    

“또, 또! 우리 사이에 뭐가? 당연한 거지.”     


“그래도.... 정말 고마워. 이제 가자. 나 승원이한테 가봐야 할 것 같아.”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시간이 어찌나 빨리 흐르는지, 벌써 승원이 면회 시간이 다 되어갔다. 지애씨와 주경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들은 2층에서 내려가려다가 나무로 된 현판을 보았다.  

   

“시간을....달리는 공방?”                                                                                                                                                                                         

14. 수십 번의 1년.    

 

1,498,931원.     


이번달 정섭씨의 카드값이었다.      


“아이ㅆㅂ. 쓴 것도 별로 없는데, 맨날 백만 원 넘게 나오네 씨.”     


 정섭씨는 카드값 문자를 받고 벌써부터 기분이 다운됐다. 옆에서 같이 담배를 태우고 있던 영준이 정섭씨의 말을 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팀장님이 그냥 체크카드만 쓰시라고 했잖아요.”  

   

“야. 처음 만들 때 15만 원 준다고 하는데. 그거 공돈인데 받아야지!”  

   

 정섭씨는 지난번 마트에 갔다가 카드판촉 아주머니가 카드를 만들면 15만 원을 준다고 해서 만들었었다.      

 정섭씨는 4대보험이 들어가지 않아도 만들어지냐고 물었는데, 아주머니가 조회를 해보고는 한도가 많이 되지는 않지만 만들어는 진다고 했다. 다만 재직증명서 등 몇 가지 서류들이 필요하다고 했다. 정섭씨는 송팀장에게 부탁을 했다. 송팀장은 번거롭기도 하고, 정섭씨에게도 좋을 것이 없을 것 같아 그냥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정섭씨가 바락바락 우겨서 결국 재직증명서를 발급해줬다. 정섭씨는 몇 가지 서류를 더 챙겨서 카드발급하는 아주머니에게 건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드를 발급받았다. 그리고 아주머니가 약속한 15만 원도. 횡재한 기분이었다. 카드를 만들기만 했는데도 돈을 받다니!!    

  

 카드를 만든 다음 날 송팀장에게 자랑하며 말하자, 송팀장이 그거 다 미끼라며 그냥 체크카드만 쓰라고 말했다.  

   

형. 지금 내 주머니에 없는 돈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게 그 카드라는 거에요. 포인트 모으고 할인받고 잘 사용하는 사람들한테는 좋을지 몰라도, 형처럼 별생각 없이 쓰는 사람한테는 완전 마약 같은 거예요!”  

   

“마! 말을 해도 이씨! 내가 뭘 생각 없이 써!”     


“맞잖아요. 형 빼곤 다 아는데?”     


송팀장의 말에 RCS 팀원들이 킥킥 거리며 웃었다.     


“이것들이! 이씨~~!! 야! 너네 딱 봐라! 내가 카드 만든 거 절대로 안 쓴다! 돈만 받고 안 쓸 거라고! 두고 봐!”     

 얼마 후 여관으로 배송 온 카드를 받고, 처음 며칠간은 안 쓰고 잘 버텼다. 하지만, 비가 내리고, 며칠 일을 못 나가게 되자, 평소 모아둔 것도 없던 정섭씨는 주머니에 당장 사용할 수 있는 남의 돈을 참지 못하고 써버렸다. 그렇게 지금까지 남의 돈을 먼저 쓰고, 채워 넣고, 먼저 쓰고, 채워 넣는 반복된 카드 생활을 해왔다. 그렇게 하면서도 모자란 돈은 송팀장에게 가불해서 생활했다.  

   

“그나마 한도가 얼마 안 돼서 얼마나 다행이에요.”     


“야. 씨 지금 놀리냐?” 

    

“카드값 메울 순 있어요?”  

   

“모르지. 그래도 여태껏 5일은 안 넘기고 다 냈다.” 

    

 영업일 기준 5일이 넘을 때까지 입금이 되지 않으면 연체정보가 타 금융업체에 공유되는데, 그렇게 되면 신용도가 내려가기 때문에 많은 불이익이 따랐다. 그럴경우 어쩌면 지금 겨우 한도를 유지하고 있는 150만 원에서도 더 내려갈지 몰랐다. 개인회생을 한 번 겪어본 정섭씨는 최대한 5영업일 이내에 카드값을 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영준이 입을 씰룩하고는 피우던 담배를 껐다.    

 

“저 먼저 갑니다.” 

    

영준이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섰다. 그리곤 쇠파이프를 어깨에 짊어지고 옮기기 시작했다.      


“한대만 더 피고, 같이 하자!”     


“괜찮아요. 천천히 오세요.”     


“씨..... 저래 놓고 자기들 일하는데 혼자 담배 피고 있다고 뒤에서 뭐라고 할 거면서.”   

  

정섭씨는 얼른 피우던 담배를 비벼끄고,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파이프를 나르러 갔다. 

    

- 탱그랑!!     


“와씨! 개뜨겁다!!”     


 현장에 일용직으로 온 대학생 아르바이트생 하나가 파이프를 들어서 어깨에 들쳐메려다가 목 주위 맨살 위에 쇠파이프가 닿자, 깜짝 놀라 파이프를 던지며 외쳤다. 

    

 발판을 만들 때 사용하는 쇠파이프. 5월의 햇살은 한여름의 햇살 못지않게 뜨거워 쇠파이프를 달궈놓았다. 장갑을 낀 손으로 파이프를 잡을 때는 몰랐다가 맨살인 목에 닿자 깜짝 놀란 것이다.  

   

“야이씨!! 학생아! 현장에서는 뭐든 절대 함부로 던지면 안 된다! 그러다가 주위 사람들 다쳐!”     


정섭씨가 어깨에 파이프를 짊어지고 땀을 뻘뻘 흘리며, 쇠파이프를 던진 학생 곁을 지나며 혼냈다.    

 

“예.”     


 학생은 정섭씨 눈치를 살피며 파이프를 다시 집어 어깨 위에 살이 닿지 않도록 조심해서 올려서 들고 갔다.     

 정섭씨가 그 모습을 보며 자신이 처음 공사현장에 왔던 때를 떠올렸다. 고등학생 때 처음으로 새벽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던 날.    

  

 그때 처음 인력소라는 곳을 가봤다. 요즘은 거의 볼 수 없지만, 당시엔 인력사무소 안에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작업화에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 누가 보더라도 딱 공사현장에서 일할 것처럼 복장을 한 사람들. 다 타들어 가, 금방이라도 손이 데일 것 같이 짧아진 담배를 검지와 중지 사이에 낀 인력사무소 소장은 새벽부터 바쁘게 현장에 전화를 돌렸다.    

 

 자욱한 담배 연기. 그리고 거기에 섞인 믹스커피 냄새와 작업복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가벼운 인사만 나누고 말없이 담배만 피우는 사람들. 정섭씨는 처음 간 인력사무소에서 묘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전투에 임하기 전 의식을 치르는 전사들 같은 느낌??   

  

 멋있었다. 그런 모습들이. 그렇게 시작한 공사현장의 일은 정섭씨에게 딱 맞았다. 이른 아침을 열고, 땀 흘려 열심히 일하고, 일을 마친 뒤 마시는 한 잔의 술. 다른 사람들은 노가다판이라 무시하듯 부르는 이 판이 정섭씨는 무척 좋았다. 그렇게 10년, 20년 세월이 흘렀다.      


만약에 내가 저 나이로 돌아간다면....   

  

 정섭씨는 오늘 일을 하러 온 20대의 대학생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면 이번에도 똑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당시 세상 물정 모르던 자신의 눈에 비쳤던 전사들의 모습. 그 모습이 지금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결코 멋있는 전사처럼 보이지는 않을 것 같았다. 오히려 지독히도 치열한 전투에서 가까스로 도망친 패배자들의 모습에 가깝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씁쓸했다. 어린 나이.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전장 중에서, 하필이면 결국 패배자로 전락할 곳을 택했다는 것이.     


정섭씨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차피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는 것이었다.     

 

 오전에 발판 2개를 조립했다. 그리 나쁘지 않은 성과다. 11시 40분에 오전 일과를 마쳤다. 공사장 근처 함바집에서 밥을 먹고, 다시 현장으로 돌아왔다. 1시까지는 아직 30분 정도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때까지는 자유로운 시간인데, 대부분의 현장 사람들은 그 시간에 잠을 잤다. 아무래도 이른 아침에 나오다 보니, 점심을 먹고 나면 몸이 노곤해져서 잠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대부분 햇빛이 나지 않는 그늘진 곳을 찾아서 잠을 자는데, 개중에 어떤 사람들은 정말 신기하게도 땡볕 아래에서 팔로 눈만 턱 가리고 잠을 자는 사람도 있었다.   

  

 정섭씨도 평소 같으면 그늘진 곳을 찾아 스티로폼 한 장을 깔고 그 위에서 잠을 청했을 텐데, 요즘 들어 이상하게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그날. 비가 세차게 쏟아지던 날. 이혼 후 홀로 공사현장에서 왜 모래요정 바람돌이가 생각났던 걸까? 하고 궁금해 한 날 이후부터.  

   

 공사현장의 점심시간. 이 시간에도 쉬지 않고, 일하는 사람들이 간간이 있었지만, 대체로 조용했다. 대부분의 현장 인부들이 잠을 자는 시간이기에. 몇몇 잠을 자지 않는 사람들은 대부분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정섭씨는 한쪽 벽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 깡. 깡.     


 점심시간의 고요한 공사현장. 어딘가에서 누군가 망치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숙련된 노동자의 손놀림인지 소리가 일정하고 안정적이었다.  

   

 저쪽에선 아까 쇠파이프를 던졌던, 오늘 일하러 온 아르바이트 학생이 누워서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런 먼지자욱하고, 지저분한 공사현장에서 눈을 붙이기엔 아직 익숙하지 않을 것이었다. 정섭씨는 담배 한 대를 다 피우고 물을 한 모금 마시곤 학생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잠이 안 와?”     


“아, 네.”     


학생은 누운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일은 할 만하고?”     


“네. 뭐, 그럭저럭 할만은 한데....” 

    

“그런데?”     


“다른 현장보다 좀 힘들긴 하네요.”     


 정섭씨처럼 송팀장의 RCS 팀에 속한 사람들은 팀을 따라 움직였지만, 인력사무소에서 오는 인력들은 딱히 정해진 곳 없이 사무소에서 가라고 한 곳으로 여기저기 움직였다. RCS의 일이 다른 일보다 강도가 있기는 했기 때문에, 인력사무소에서 정해진 똑같은 일당을 받는 아르바이트생의 입장에서는 조금 더 편한 곳으로 빠지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내일은 여기 안 오려고?”     


“....뭐 제 마음대로 되나요? 사무소 소장님이 가라고 하시면 와야죠.”   

  

“공사장 일은 언제까지 하려고?”   

  

“모르겠어요. 학기 중에는 주말에 하고, 방학 땐 평일에도 하면서..... 졸업할 때까지 하면 되지 않을까요? 아저씨는요?”     


“야이씨! 아저씨라니! 그냥 형이라고 불러 인마!”     


정섭씨의 말에 학생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나이차이가....”     


“괜찮아! 같이 일하면 다 형, 동생이지. 아저씨가 뭐냐? 그렇게 말하면 내가 늙은이 같잖아!!”     


“.....네....”     


“술은 좀 마시냐?”     


정섭씨가 손을 입으로 가져가 잔을 꺾는 포즈를 취하며 물었다.    

 

“아뇨. 잘 못 마셔요.”     


“다행이다. 그럼 돈은 좀 모을 수 있겠다. 담배는 얼마나?”     


“하루에 반 갑 정도?”     


“양호하네.”  

   

“근데......여기 오니까 오전에 벌써 반 갑을 피웠어요.”   

  

“그렇지. 현장이니까. 여기는 쉴 때마다 담배를 피워야 되거든.”     


“마치....의무적인 것 같네요?”     


“쉬는데 혼자 안 피우고 있으면 뻘쭘하잖아! 뻘쭘할 바에야 피우는 게 낫지.”  

   

“....아....그렇구나....”     


“그리고.....”     


“....”     


“혼자 담배 안 피우고 있으면 잡일은 내가 다 해야 해. 알잖아? 군대 다녀왔지?”   

  

“네.”     


“그래. 군대에서도 동기들 다 담배 피우고 있는데, 혼자 안 피면 안 피는 놈한테 일 다 시키잖아. 그러니까 차라리 담배를 피우는 게 낫지.”     


“....다양하게 피울 이유들이 있네요.”  

   

“한 대 필래?”    

 

정섭씨가 담배를 꺼내며 물었다.   

  

“제 것 필게요.”    

 

 학생이 작업복 윗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며 말했다. 작업복의 윗주머니.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주머니였다. 바지에 넣으면 담배를 비롯한 주머니속 물건들이 모두 땀에 다 젖어버렸기에, 인부들은 휴대폰이나 담배를 모두 작업복의 윗주머니에 넣어 뒀다.     


 학생은 자연스럽게 정섭씨 앞에서 담배를 물고 피웠다. 아침에 왔을 때만 해도,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정섭씨 앞에서 담배를 피우길 망설이던 학생이 반나절이 지난 지금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함께 담배를 피웠다. 함께 고된 노동을 하는 공사현장은 담배에 나이와 격식을 차리지 않는 그런 평등한 곳이었다.     

 

“그래서 졸업하면 뭐할 건데?”     


정섭씨의 물음에 학생이 담배 연기를 훅 내뿜었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솔직히.... 딱히 목표는 없고, 그냥 돈이나 많이 벌고 싶어요.”


 딱히 목표는 없고, 돈이나 많이 벌고 싶다...... 그게 목표 아닌가? 


부자. 돈 많은 사람. 


한때는 정섭씨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돈을 많이 벌어야지! 많이 벌어서 떵떵거리고 살아야지! 공사현장에서 뭘 어떻게 해서 많이 벌어서 떵떵거리고 살지는 본인 스스로도 몰랐지만, 어쨌든 많이 벌어야겠다는 마음은 먹고 살았었다. 그리고 그게 꿈이고, 목표라고 생각했다. 


 돈을 많이 버는 것. 그렇게 한 해, 한 해 흘러갔다. 매년 한 해가 넘어갈 때마다 올해는 많이 못 벌었지만, 새해에는 돈복이 터질거다!! 라고 막연한 응원을 스스로 해가면서.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돈복이 터지는 새해는 없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몸은 점점 늙어가서 입술이 터지고, 코피가 터지고, 불어나는 살에 옷이 터질 뿐.     


 이제 와 정섭씨는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던 것이 아니라, 똑같은 일 년을 수없이 반복해 제자리를 돌고 돌았을 뿐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고, 막연히 잘될 거라는 생각만 하고, 술만 마시며 파이팅을 외치던 똑같은 일 년을.     


“그런데요. 아침에 일어나기 안 힘드세요? 저는 이런 일한 지 얼마 안 돼서 어떻게 나오긴 했는데,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나오려면 엄청 피곤할 것 같은데......”     


학생의 말에 정섭씨가 피식 웃었다.     


“이봐 학생. 어차피 인생은 존나 자기 싫은 밤과 더 자고 싶은 아침의 연속 아니겠냐? 남들이 유튜브, 넷플 이런 거 보면서 존나게 자기 싫어하는 밤에 조금 더 일찍 자면 되는 건데 뭐. 그럼 아침에 절로 눈이 떠져.”     


술만 마시면 다음날 일어나기 힘들어 일을 째기가 일쑤인 정섭씨가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아...”     


정섭씨의 말에 학생은 뭔가 알것같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담배를 피웠다.     


“갑시다!”     


 누군가 외쳤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벌써 점심시간이 끝나버렸다. 정섭씨와 학생은 담배를 끄고 현장으로 향했다.     


5월의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사람들은 땀을 흘리며, 망치질을 하고, 쇠파이프를 옮기고, 발판을 나르고, 피스를 조였다.     


 정섭씨는 일을 하면서, 학생의 모습이 계속 눈에 들어왔다. 마치 예전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다행히 학생은 술을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정말 다행이었다. 만약 자신이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봤다. 지금과는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까? 조금은 인생이 나아졌을까? 정섭씨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나. 술을 좋아하지 않을 자신은 없었다. 지난번 비가 내렸을 때도, 대구탕 가게에서 송팀장과 싸우고 혼자 남아서 꿀막걸리까지 더 챙겨 마시고 갈 정도였으니.     


 문득 그날 집에 오는 길이 생각났다. 꿀에 막걸리를 타서, 술을 거하게 마시고, 대구탕 가게 사장에게 택시를 불러 달라고 했다. 그런데, 그곳이 산중턱에 위치한 데다가 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이라 그런지 콜택시가 잡히지 않았다.      


“괜찮아요. 저는 뭐, 바쁜 것도 없으니 천천히 잡히는 택시 있으면 타고 가겠습니다.”     


그렇게 기다린 택시가, 30분이 넘도록 잡히지 않았고, 1시간이 다 되도록 잡히지 않자 남자 사장이 정섭씨에게 말했다.     


“저기. 아무래도 오늘 콜택시는 잡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제가 산 아래까지 모셔다 드릴께요. 거기서 택시나 버스를 타시는 게 나을 것 같네요.”     


“예? 아니 굳이 그렇게까지는.......”     


“괜찮습니다. 저희 가게로 택시가 오지 않아서 그런 건데요.”     


“그래도...... 장사하셔야 되잖아요?”   

  

정섭씨는 술이 얼큰하게 취한 상태에서도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에이..... 아까 송팀장하고 같이 내려갔어야 했나?’     


“괜찮아요. 점심시간도 다 지나서 손님도 없고.. 잠시 내려갔다가 올 시간은 됩니다. 가시죠.”     


 정섭씨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렇게 손님이 없는 가게에 죽치고 앉아 있는 것도 민폐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정섭씨는 대구탕 가게 사장의 차에 탔다. 세차게 내리는 비가 마치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지듯 퍼부으며 차를 씻어 내렸다.     


“우와~ 씨. 비 겁내 오네!”     


 정섭씨는 대구탕 매장 입구에서 차까지 불과 얼마 안 되는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잠깐 사이에 비에 흠뻑 젖어 살갗에 찰싹 달라붙은 옷을 꼬집어 당기며 말했다.    

 

 남자 사장이 차에 시동을 걸고 뒤로 서서히 후진을 했다. 빗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차 앞유리의 와이퍼가 왔다 갔다 하며 손으로 땀을 닦듯 빗물을 닦아 주었다.    

  

“어? 2층에도 뭐 합니까?”     


와이퍼가 빗물을 닦아 냈을 때 얼핏 드러난 2층으로 보고 정섭씨가 물었다.     


“네. 공방이요.”     


“오~ 공방도 하십니까? 손재주가 좀 있는가 봐요?”     


“아뇨. 별 재주는 없어서, 간단한 것만 해요. 뭐, 도마 만들기나, 의자, 테이블 이런 것 정도.”     


“이야~ 그런 것도 쉬운 거 아닌데?”     


“그런가요?”     


대구탕 가게 사장이 피식 웃었다.     


“그렇지요. 내가 현장 일만 30년째 하고 있어서 잘 알지.”     


“우와~ 대단하시네요. 30년이나 한 가지 일을 하시고.”     


 ‘대단하시네요.’ 


정말 인사치레로 던진 말일 수도 있었다. 아니, 그냥 형식적인 말임이 분명한 말이었다. 하지만 정섭씨에게는 가볍게 던진 말일 수도 있는 이 한마디 말이 가볍게 다가오지 않았다. 누군가로부터 인정을 받고, 격려를 받는 말 한마디. 언제부터인지 알 순 없지만, 제법 오랫동안 정섭씨는 그런 형식적인 인정조차도 받지 못한 삶을 살고 있었다.     


 같은 ‘대단하시네요.’지만, 가장 최근에 들었던 그 말은 작업 시작하기 전 함바집에서 아침 먹고 똥을 싸고 나왔을 때였다.  

   

“형. 아침에 아무 곳에서나 그렇게 막 나와요? 똥이?”     


“그럼. 아무 때서나 싸면 되지. 배 아픈데 참는 게 더 힘들지.” 

    

“우와. 대단하시네요. 전 집 밖에서는 잘 못 싸겠던데.”     


이때의 대단하시네요는 같은 말이었지만 지금처럼 인정의 의미로 와닿진 않았었다.

      

“사장님은요? 여기서 장사 한지가 얼마나...”     


“한 지가......글쎄요 저한텐 시간의 개념이 참 모호해서....”     


“예?”     


“아, 아닙니다. 한....... 20년? 정도 되었네요.”     


“예? 20년이요? 우와~ 사장님도 오래 했네요. 그런데, 지금 나이가 그렇게 안 많아 보이는데요?”     


“아..... 제가 좀 어릴 때부터 장사를 해서요.”     


“그래요?”     


- 쏴아아아아     


 비가 끊임없이 퍼부었고, 내리는 비 때문에 창문을 꼭 닫은 차 안에는 금세 정섭씨의 술냄새가 가득 찼다.     

 정섭씨는 대구탕 가게가 왜 산에 있는지, 2층에 공방은 왜 차리게 되었는지, 어린 나이에 어떻게 직장을 구하지 않고, 가게를 운영할 생각을 했는지 궁금한 것들을 내리는 비처럼 대구탕 사장에게 세차게 질문세례를 퍼부었다.     


 남자 사장은 그렇게 퍼붓는 빗속에서 든든한 비옷이라도 입은 사람처럼 의연하게 대답을 하는데, 하는 대답마다 어중간하고, 모호하게 대답을 했다. 그런 대답이 정섭씨도 싫지는 않았다. 취객의 주정이라고 치부해버릴 수도 있는 자신의 두서없는 물음에 남자 사장은 미소를 잃지 않고 응대해줬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에게 ‘대단하시네요.’라고 응원을 해준 사람이기 때문에.     


“언제 한 번 오세요.”     


“어디를요?”     


“2층 공방이요. 아까 현장에서 30년 일하셔서 잘 아신다고 하셨잖아요.”     


“아....예. 거기서 뭐 수업 같은 거 합니까?”     


“네. 하루에 끝나는 원데이클래스도 있고, 계속 꾸준히 배우러 오시는 분도 계시구요.”     


“그럼..... 수업료는... 얼마나...”     


 습관이었다. 늘 돈이 빠듯한 정섭씨는 어떤 일이든 가격을 먼저 물어보는 것이. 당연히 가겠다고 물어보는 것은 아니었고, 형식적으로 물어보는 그런 물음이었다.     


“수업료요? 하하.... 공짜에요. 저희 매장에서 식사를 하신 분이면.”     


“예에? 뭐에요? 그럼 남는 게 없잖아요?”     


“식사를 하셨잖아요. 그럼 된 거죠.”     


“참.... 이 양반도 계산을 희한하게 하시네... 그러면 돈 못 벌어요!”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몰랐지만 남자 사장은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암튼 한 번 놀러 오세요. 저희 공방은 시간을 만들어 드리거든요.”     


“뭐, 뭐라고요? 시간을 만들어 준다고요??!!”     


정섭씨는 대화를 나눌수록 남자 사장이 좀 이상한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술이 취해서 그런 건가?     

남자 사장은 버스정류장에 정섭씨를 내려주고 다시 산으로 올라갔다. 비가 내려 안개가 자욱한 산으로. 


그것이 지난 번 송팀장이 자신을 대구탕 가게에 버려두고(정섭씨가 가라고 해서 가버린 것이었지만) 내려가 버렸던 날의 기억이다.         

  

“형! 무슨 생각을 그리 하세요?”     


대구탕 남자 사장과 있었던 일을 생각하는 정섭씨에게 영준이 물었다.     


“어, 어? 아... 내일 비온다니까, 오늘 세탁소에서 옷 찾아가려고.”     


“세탁소에 옷을 맡기세요?”     


“내가 세탁하는 것도 있지만, 좀 괜찮은 옷들은 망치면 안 되니까 맡겨야지.”     


“오~ 내일 괜찮은 옷 입고...... 어디 돈 빌리러 가세요?”     


“야이 씨~”     


“헤헤 농담이에요! 농담! 내일 비 오는데 가긴 어딜 가세요? 그냥 집에서 푹 쉬세요. 술도 많이 드시지 마시구요.”     


영준의 말에 정섭씨는 불쑥 대구탕 가게에서 마셨던 꿀막걸리가 생각나 침을 꼴깍 삼켰다.                                   

15. 나무도마.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못 간다는 거야?!!”     


지연씨는 남편에게 소리를 질렀다.     


“아니...그렇다기 보다는....”     


“그럼!! 이번에는 어디가 가능한데?! 어?!!”     


“...”     


지연씨의 남편 지훈씨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게 이렇게 될 것 같았으면 처음부터 한 달 살기니 뭐니 시작을 안 했어야지!! 이제 사람들한테 뭐라 그럴까? 어? 돈이 없어서 못 간다고 할까?! 매번 가던걸?”     


“휴우.... 일단 회사부터 다녀와서 이야기하자.”     


 지훈씨는 아이들 가방에 물통을 넣으며 말했다. 주방의 식탁엔 아무것도 차려져 있지 않았다. 지훈씨와 지연씨의 두 딸은 학교에 갈 준비를 한 채, 한쪽에서 엄마와 아빠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서 있었다.     


“얘들아. 가자.”      


지훈씨가 아이들을 데리고 현관으로 향했다. 지연씨는 문을 쾅 닫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밤이 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남편과 아이들이 아침 나가는 시간에 오랜만에 깨어 있었는데, 정작 남편과 아이들이 현관문 밖으로 나가는 모습은 보지도 않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지연씨는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물이 또르륵 흘렀다. 이렇게 어설프게 누리고 사는 게 너무 힘들게 느껴졌다. 그냥 죽어버릴까?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지연씨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 

    

 말레이시아와 필리핀으로 한 달 살기를 다녀오고 나서 남편은 시어머니가 아프기 때문에 그동안 보태주던 생활비를 더이상 받을 수가 없다고 했다. 게다가 병원에 입원해 계시기 때문에 오히려 돈이 더 들어간다며, 외국으로 나가던 것을 제주도에 한 달, 강원도에 한 달 이렇게 국내에서 한 달 살기로 대체했다. 쪽팔렸다. 차라리 처음부터 국내에서 한 달 살기를 했었다면 이렇게까지 부끄럽진 않았을 텐데, 갑자기 이렇게 해외에서 국내로 한 달 살기를 바꾸니 주위의 사람들이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     


 코로나가 지금 유행하면 코로나 때문에 해외에 나가기가 꺼림칙하다는 변명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코로나가 다 끝난 마당에, 이젠 사람들이 오히려 외국으로 여행도 많이 떠나는 이 시기에 반대로 해외가 아니라 국내라니!!     


 벌써 5월이다. 두 달 정도 있으면 아이들이 방학을 할 것이고, 7월 말에는 한 달 살기를 하러 떠나야 하는데, 아직 어디로 갈지 정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시끄럽고!! 옷이나 갈아입고 나와 이년아!!”     


 지연씨는 친구 선희로부터 오는 전화를 계속 무시했다. 그러자 집으로 쳐들어온 선희씨가 지연씨의 퉁퉁 부어있는 눈을 보면서 한 말이다. 지연씨는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 선희씨에게 끌려 나오다시피 집에서 나왔다.     

선희씨는 지연씨를 차에 테웠다.      


“나처럼 애 낳지를 말지 그랬냐?!”     


선희씨가 차를 몰아 미끄러지듯 아파트단지를 빠져나가며 말했다.     


“.....그러게....”     


“뭐?! 야! 너 진짜 그렇게 생각해?! 그렇게 이쁜 니 새끼들.....아이고 나쁜 년....쯧쯔....”     


 지연씨는 친구를 만나기 전에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는데, 막상 만나고 나니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이야기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선희씨는 한참 동안 친구 말을 들어주다가 불쑥 내뱉었다.     


“야! 지연아. 참... 지금 너한테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런데.....”     


“뭐? 말해 괜찮아.”     


“....그래. 그럼 말할게. 솔직히 너 지금........ 졸라 웃겨!”     


“뭐?”     


“그거 뭐라고! 어?! 한 달 살기 하는 거. 그게 뭐 그리 중요한데? 그렇게 중요해? 그럼 너 지금 그렇게 훌쩍이면서도 들고 다니는 명품백 팔아. 그럼 갈 수 있잖아? 아님, 너 지금 타고 다니는 외제차 국산으로 바꿔. 그럼 할 수 있잖아. 그것도 아님, 일을 하던가, 돈을 벌러 가. 집에 가만히 앉아서 걱정만 하지 말고. 그럼 되잖아.”     

“...”     


지연씨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봐봐. 넌 지금 네가 가지고 있는 것들 중에 하나도 포기하지 못하고, 남편한테 요구만 하고 있잖아! 명품백 들고 다니지 못하는 사람들은 다 못난 사람들이냐? 외제차 타고 다니지 못하는 사람들은 다 별볼 일 없는 사람들이야? 일하러 다니는 여자들은 다 남편이 못나서 그런 거야? 한 달 살기 하러 못 가는 사람들은. 네 머릿속에 있는 신분의 기준에서 모두 하층민들이냐? 도대체 왜 억지로 주위 사람들을 괴롭혀가면서까지 그런 것들을 하려고 해? 그렇게 하면 주위 사람들이 널 대단하다고 생각할까? 천만에! 오히려 너 없는 곳에서 엄청 깔 걸?”     

“...그게 두려운 거야... 난..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이번에 한 달 살기 하러 가지 못하면 사람들이 날 비웃진 않을까......처음부터 안 했어야 했는데....괜히 남편이 한 달 살기 보낸다고 해가지고......”     


“권호씨도 이렇게 될 줄 알았겠어? 그리고 내가 알기론 그때도 네가 먼저 한 달 살기 하고 싶다고 했잖아. 그래서 권호씨가 보내준 거고. 그걸 이제 와서 권호씨 탓을 하면 너 진짜 썅년이야.”     


“...”     


“물론, 네 말처럼 늘 그렇게 아이들 방학 때마다 한 달 살기 하러 가다가 이번에 안 가면 뒤에서 수군덕거리는 사람들이 있겠지. 그런데, 그런 사람들 말 때문에 너랑 남편이 매일 싸워야 할 일이니? 너랑 남편이 다투면, 사람들이 뒤에서 까는 걸 멈추기라도 한데? 어차피 남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네가 뭘 하든 뒷말하게 되어 있어. 네가 들고 있는 명품. 그것도 누구는 짝퉁이라고 말 할거고, 외제차에 한 달 생활비를 다 갖다 붓는 생각 없는 사람 취급할 거고, 남편 월급은 빤한데 허영심 가득한 여자라고 온갖 말을 다하고 다니겠지. 이번에 외국에 가서 한 달 살기를 해도 어차피 욕 할 사람들이야! 그런데, 도대체 그런 인간들의 말이 뭐가 중요하냐고?! 왜?! 너랑 남편이랑 아이들이랑!! 남들한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너희 가족이 즐거우면, 그거면 된거 아니야?” 

      

 지연씨는 친구 선희의 말이 다 맞는 말인 것 같긴 한데, 어딘지 모르게 좀 갑갑했다. 그렇게 쉽게 생각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친구 선희는 그랬다. 말투부터가. 하고 싶은 대로 말을 던지고, 자유분방하게 행동했다. 결혼을 하면서도 선희는 남편과 아기를 낳지 않기로 했다고 했다. 본인들의 인생을 즐기며 살자고. 지연씨와 친구들은 에이 설마 하고 생각했는데, 선희는 결혼한 지 10년이 넘은 지금까지 그렇게 살고 있었다. 양가 부모님들은 손주를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실망했지만, 선희는 그것이 부모님들께 실망을 드리는 일인지는 몰라도, 피해를 드리는 일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오히려 경제적으로는 더 이득을 드린 거라며.    

 

선희의 차가 대구탕 매장 앞에 섰다.     


“뭐야? 나 지금 밥생각 없어.”


지연씨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은 밥 먹으러 온 거 아니야.”     


“그럼?”     


“2층 공방.”     


“2층....공방? 여기 공방이 있었어?”     


“그래. 너 병원은 계속 가고 있어?”     


우울증을 앓고 있는 지연씨는 정신과를 다녔는데, 요즘엔 거기도 잘 가지 않았다.     


“....뭐, 가끔....”     


“병원을 열심히 다니던가, 어디에 일을 하러 가던가. 뭐,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일하러 가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긴 한 것 같은데, 넌 지금 이도저도 아닌 것 같아서 너랑 취미생활이라도 뭐 하나 같이 해볼까 하다가 찾았어.”     


“여기 이런 곳이 있었어?”     


“나도 지난번에 여기서 밥 먹다가 알았어. 거기다 1층 대구탕 매장에서 밥을 한 번이라도 먹었던 사람은 공방수업이 공짜래.”     


“뭐? 진짜?!”     


“그래. 얼른 올라가 보자. 사장님이 1층 매장 영업을 10시 30분부터 하신다고, 10시에는 내려가 봐야 한다고 하셨어.”     


 지연씨는 진짜진짜 내키지 않았지만, 집까지 자신을 태우러 와서 여기까지 데려온 친구의 마음이 고마워서 일단 2층으로 올라갔다.     


 2층까지 올라가자 울창한 나무와 높은 산이 보이는 경치 그리고 넓은 테라스에 마음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테라스 한쪽에 공방 입구가 보였고, 공방의 입구 옆에는 나무 현판이 걸려 있었다.    

 

- 시간을 달리는 공방     

 

“시간을 달리는 공방? 공방 이름도 참 특이하네.”   

  

- 위이이이이잉!    

 

지연씨와 선희씨가 공방에 들어서자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저기 공방의 한쪽에서 1층 대구탕 가게의 남자 사장이 어떤 기계에 나무를 올려놓고 작업을 하고 있었다.     


선희씨가 작업을 하고 있는 남자 사장의 곁으로 다가가서 기계 소리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외쳤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죄송합니다. 오시는 소리를 못 들었네요.”     


“괜찮아요. 뭐, 작업하시나 봐요?”    

 

“네. 오늘 두 분 오신다고 하셔서 사용할 나무 미리 손질하고 있었어요. 이제 다 했습니다. 가시죠.”     


 공방의 한쪽에 놓인 의자에 지연씨와 선희씨가 앉았다. 며칠 전 홍사장이 앉은 바로 그 자리였다.     

남자 사장은 지연씨를 유심히 지켜보는 것 같더니 혼잣말을 했다. 

    

“급하신 분이네....”     


“네?”     


“아, 아닙니다. 제가 10시에는 내려가 봐야 하니까, 시간이 충분치가 않네요. 원래는 간단히 이론 설명도 드리고 해야 하는데, 일단 지금은 제가 드리는 나무에 연필로 밑그림을 먼저 그려주세요.”     


남자 사장은 다듬어진 네모난 나무 두 장을 지연씨와 선희씨에게 각각 하나씩 나눠줬다. 연필도 함께.     


“도마를 만들 건데요. 만들고 싶은 모양대로 그림을 그려주시면 됩니다. 혹시 모양이 잘 떠오르지 않으시면 스마트폰으로 검색해서 마음에 드는 도마 모양을 찾으시면 되구요, 잘못 그린 그림은 여기 지우개로 지우시면 됩니다.”     


남자 사장의 말에 지연씨와 선희씨가 각자 자신의 휴대폰으로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남자 사장은 집진기로 나무 먼지를 치우며 공방을 정리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지연씨와 선희씨가 각자 연필로 나무판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금세 10시가 되어서 남자 사장이 내려갈 때가 되었다.     


“전 이제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은데, 두분은 천천히 그리는 거 마저 그리세요. 혹시 시간이 되시면 나중에 식당 브레이크타임에 오시면 제가 더 알려드릴 수도 있구요, 바쁘시면 다음에도 아침 10시 전에 여기에 오시면 됩니다.”   

  

“사장님은 여기 몇 시에 오세요?”     


“전 보통 6시 30분에서 7시 사이에 와요. 1층 식당 준비해야 해서요. 어.... 이건 선이 조금 잘못 그려진 것 같으니, 제가 지워드릴게요.”     


남자 사장이 지연씨가 삐뚤빼뚤 선을 그린 것을 지우개로 지웠다. 그리고는 연필을 쥐고 있는 지연씨의 손을 잡고 그림을 함께 그리며 말했다.     


“이건 요렇게 그리면 더 좋을 것 같네요. 도마의 손잡이가 너무 두꺼워도 잡기가 힘들고, 너무 얇으면 쉽게 부러지거든요.”     


“아, 네. 감사합니다.”     


 지연씨는 남자 사장이 잡은 손에서 따뜻한 온기를 느꼈다. 차가운 자신의 손에 와닿는 따스한 온기. 낯선 남자의 손에서 긴장되고, 흥분이 되는 그런 자극적인 기분이 아니라, 차분해지고, 나른해지는 그런 안정감이 느껴지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마저 그리시고, 얼마든지 편히 계시다가 가세요.”     


남자 사장은 인사를 하고 1층으로 내려갔다.      


“뭐야? 네 것만 봐주고 왜 내건 안 봐주는데?”     


선희씨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연씨가 피식 웃었다.     


“넌 잘 그려서 고칠 게 없나 보지.”     


“아, 정말 그런가?”     


지연씨의 말에 선희씨는 금세 기분이 좋아져서 헤헤 웃었다.     


-사각사각     


기계음이 사라진 조용한 공방에는 사각이는 연필 소리만 가득 찼다. 지연씨와 선희씨는 나무에 그림 그리는 일에 집중했다.     


 지연씨는 사각거리는 소리가 마치 자장가처럼 들렸다. 간밤에 한숨도 자지 못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아까 자신의 손을 잡은 남자 사장의 손 따뜻한 온기가 잠을 부추기는 것인지 눈꺼풀이 도저히 견디지 못할 것처럼 무거워졌다.     


그림을 그리다가 선희씨가 곁눈질로 지연씨를 쳐다봤다. 눈꺼풀이 반쯤 내려와 곧 곯아떨어질 기세였다. 잘 되었다. 예민한 친구가 잠을 못 이루더니, 이곳에서 잠을 좀 자도록 내버려 둬야겠다.   

 

 지연씨는 고개를 몇 번 끄덕, 끄덕 하며 졸더니, 이내 머리를 탁자에 파묻고 잠에 곯아떨어졌다.  

   

 선희씨는 잠든 지연씨를 가만히 쳐다봤다. 안타까웠다. 밝고 환하던 친구가 지금은 이렇게 몸도 마음도 모두 지쳐버린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친구가 잠에서 깨어나면 지금 느끼고 있는 불안, 초조, 고통스런 마음이 모두 사라지기를. 마치 마법처럼 사라지기를.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지만, 세상엔 그보다 더 말도 안 되는 일들도 많이 일어나니까.    

 

선희씨는 잠시 친구를 위해 기도를 하고, 다시 나무판에 그림을 그리는 일에 집중했다.                                                                                     

16. 시간을 보는 창문.     


 정부장이 보이질 않았다. 오늘로 3일째. 지난번 홍사장에게 사표를 쓰고나서 며칠 더 회사에 나오더니, 이젠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홍사장은 아직 사표를 뜯어보지도 않았다. 그땐 정부장에게 너무 화가 나서 잘라버리고 싶었는데, 회사 초창기부터 매일 보던 정부장이 보이질 않으니 뭔가 좀 허전하기도 했다.     


“이 자식이! 내가 사표 수리도 아직 안했는데...”     


 그렇다고 다시 회사로 부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정부장이 홍사장의 바짓가랑이라도 붙들고 제발 한 번만 용서해달라고 하면 마지못해 용서해 줄지 모를까, 먼저 전화를 걸어 출근해 달라고 하는 말은 절대 할 일이 없었다. 출근 안 하면 지만 손해지 뭐.     


 홍사장은 회사를 한번 휘 둘러봤다. 정신없이 바쁘게 일하고 있는 직원들. 그들의 젊음이 홍사장은 새삼 부러웠다. 내가 죽고 여기에 없어도, 저들은 여전히 저렇게 일하고 있겠지. 1년 후에도..... 10년 후에도....     


 문득 홍사장은 아내가 임종을 맞이하기 전 나누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여보. 근데, 매미는 칠 년 동안 땅속에 있다가 밖으로 나와서 십일 정도 노래를 부르고 살다가 죽는다고 하잖아요?”     


“음... 그래. 그렇다던데....”     


사람은 평생 죽기 전까지 육십 년, 칠십 년을 일하다가 병들어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몇 년을 앓다가 죽는데..... 예전에 매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고작 십 일 살려고 칠 년을 땅속에 묻혀 지낸다는 게 참 불쌍하다고 생각했는데, 십 일이라도 마음껏 노래 부르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고 죽는다니까.... 어떻게 보면 사람의 인생보다 나은 것 같기도 하고... 그리 불쌍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드네요.”     


 너무 미안했다. 아내는 가정에서도 평생 일을 했고, 회사에서도 평생 일을 했다.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 언제나 휴식은 나중에였다. 회사를 조금 더 키우고 나서, 일 먼저 처리하고 나서, 사람들 좀 만나고 나서, 아이들 뒷바라지하고 나서. 나서. 나서. 나서....     


“병원에 있으니까 드디어 당신하고 둘이서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게 되네요?”     


 아내는 환하게 웃었다. 환자복을 입고서. 평생 일만 하다가, 병원에서 살 수 있다고 말한 주어진 석 달 중에서 두 달을 채우지 못하고 아내는 세상을 떠났다.      


“허허.....”     


 헛웃음이 나왔다.      


 아내가 떠나고 난 이후 홍사장은 한동안 슬픔에 젖어 지내다가 더욱더 일에 매진했다. 여태까지도 홍사장은 워커홀릭 수준으로 일에 매달렸지만, 아내가 죽고 난 이후엔 그 수준을 넘어버린 듯했다. 아내를 잃은 슬픔을 잊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아내와 제대로 휴식다운 휴식도 취해보지 못했는데, 홀로 쉬는 시간이면 괜히 먼저 떠난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해서였다.     


 홍사장은 자신에게도 삶이 이제 한, 두 달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인생이 참 별거 없다고 생각했다. 젊은 시절에는 그저 열심히 일하면, 나이가 들어서 여유가 생기고, 그렇게 여유가 생기면 그동안 열심히 일한 보람을 느끼며 여행도 다니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유유자적 인생을 즐기며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땐 항상 사랑하는 아내가 곁에 함께 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때가 되면 아내도 지금의 고생에 대한 보상을 받을 거라고. 함께 열심히 밤새워 일한 오늘을 추억하며, 열심히 살았던 우리의 젊은 날을 감사할 거라고...     


 사업은 순탄했다. 가끔 뜻하지 않은 사고들도 있긴 했지만, 어떻게든 큰 문제 없이 해결이 되었고, 회사는 계속해서 무난하게 굴러갔다. 처음엔 사업이 쉽지 않을 거라고 걱정하던 사람들도 회사의 규모가 조금씩 커지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홍사장에게 성공했다, 부럽다는 말을 했다.     


 멈춰야 했다. 욕심을. 더, 더, 하는 욕심만 부리지 않았어도, 딱 적당한 선에서 멈추기만 했다면 얼마든지 아내와 여행도 가고, 영화도 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인생을 즐기며 살 수 있었다. 그 정도의 여유는 충분히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질 못했다. 그놈의 욕심 때문에. 늘 허기가 졌고, 갈증을 느꼈다. 허기를 채우면 또 다른 허기가 몰려왔고, 갈증을 해소하면 새로운 갈증이 찾아왔다. 그렇게 늘 헐떡이는 개처럼, 늑대처럼 살았다. 만족할 줄 모르는 짐승처럼.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면... 그럼 멈출 수 있을까? 그건 알 수 없었다. 아내가 곧 죽음을 맞이할 거라는 미래를 볼 수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계속해서 달릴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이제 죽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디론가 훌쩍 떠날까? 그리 내키지 않았다. 좋은 곳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더라도 그리 즐거울 것 같진 않았다. 곧 죽을 텐데....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허선생의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가볼까? 딱히 공예에 흥미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죽을 때까지 마땅히 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이상하게 허선생의 공방이 자꾸만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아들과 딸의 얼굴도 떠오르긴 했지만, 본인들 가정을 잘 일구며 살고 있는데, 근심 걱정거리를 미리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알게 될 일. 마음 같아서는 그냥 자신이 죽고 난 후에 자녀들이 알게 되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럼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조금은 덜 할 수 있을 테니. 그러면 조금 섭섭하려나? 그래도 지금은 알려주고 싶지가 않았다.     


 홍사장은 차를 몰아 회사를 나왔다. 살면서 처음으로 일이 아니라, 허기를 채우기가 위함이 아니라, 급히 다녀와야 하는 곳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기 위함이 아니라, 지극히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움직여 회사를 나서봤다. 여유로웠다. 급할 것이 없었기에.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인 곳으로 향하고 있었기에. 홍사장은 블루투스를 차에 연결하고, 아내가 죽은 뒤 처음으로 차에서 라디오뉴스가 아닌 듣고 싶은 음악을 틀었다.  

   

 천천히 차를 몰면서 가다 보니, 평소에 보지 못했던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이곳은 공장들만 우후죽순 들어선 곳이라 생각했는데, 그 사이사이 울창한 숲도 보였고, 길가에 핀 꽃들도 보였다. 길가에 지어진 공장들의 이름과 어떤 제품을 생산하는 곳인지는 훤히 알았는데, 여태껏 공장과 공장 사이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제대로 본 적도 없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차라리 다행인가? 지금이나마 이런 것들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만약 갑작스런 사고로 죽었다면 이런 것들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고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그럼 평생 일만 하다가 죽는 거겠지. 매미에게 주어진 십 일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한, 두 달의 자유도 누려보지 못하고. 땅속에만 있다가 죽은 매미처럼 일만 하다가 죽는 거겠지.     


 육십을 살든, 칠십을 살든, 팔십을 살든 자신에게 주어진 매미의 십 일과 같은 시간은 마지막 한, 두 달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이라도 빨리 죽는 만큼, 일도, 고생도 덜하고 죽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 살짝 기분이 좋아졌다. 왜 이런 기분이 들지? 죽음을 앞두고 내가 살짝 미쳐버린 건가?     


 홍사장은 음악을 들으며 차를 타고 달렸다. 공방에 가기로 마음먹었기에, 그곳으로 바로 갈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돌아가는 길을 선택해 빙빙 돌아 드라이브를 실컷 하고 대구탕 가게 앞 주차장에 주차를 했다.  

    

 1층 대구탕 가게 앞으로 걸어갔다. 차를 타고 오면서 생각했던 그 꽃이 청초하게 홀로 서 있었다. 아내가 좋아했던 아이리스. 홍사장은 아이리스 가까이 다가가, 아이리스향으로 코를 흠뻑 적셨다.     


“흐음.......”      


 잠시 눈을 감고 향을 음미했다. 지난번 피었던 꽃잎은 지고, 새로운 꽃잎이 올라오고 있었다. 같은 하나의 줄기에서 자라는 꽃잎들도 피고 짐의 시기는 모두 다르다는 것이 신기했다.     


 허선생은 1층 대구탕 가게에서 음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해 보였다. 허선생의 아내인 여자 사장도 보였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둘이서..... 홍사장은 마치 자신과 아내의 젊은 시절을 보는 것 같았다. 물론 이곳 대구탕 매장의 규모는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보다 훨씬 작았지만,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부부가 함께 일을 한다는 것이 비슷한 처지로 다가왔다. 


 허선생은 알까? 저렇게 평생을 일만 하다가 누구 하나가 아프거나, 죽을 때가 다 되어서야 이 고생이 끝난다는 걸...... 아마, 겪어보고 나서야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늦었구나 하는 후회도 들 것이다.     


 남자 사장과 여자 사장 둘이서 열심히 음식준비를 하고 있는데, 괜히 방해하고 싶지 않아 홀로 2층으로 올라갔다.     


“여긴 항상 열려있어요. 문도 잠그지 않으니, 언제든 편하게 오셔서 하고 싶은 걸 하세요.”     


 지난 공방에서의 수업시간. 다음 수업시간을 기약할 수 없는 홍사장에게 허선생이 한 말이었다.  

   

 2층에 걸려 있는 현판. 시간을 달리는 공방, 그 옆에 있는 입구 손잡이를 당기자 문이 열렸다.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나며 공방 특유의 나무 먼지 냄새가 확 풍겼다.      


 나무로 된 공방의 바닥 위에 올라서자 홍사장의 구두 발자국 소리가 크게 울렸다. 홍사장은 공방을 찬찬히 둘러봤다. 지난번 허선생이 있을 때는 자세히 보지 못한 것들까지 천천히 살펴봤다.  

   

 대부분 도마, 의자, 테이블 같은 것들이었는데, 때론 나무뒤주 같은 흔히 볼 수 없는 옛 물건들도 보였다. 그리고 무엇에 쓰이는지 알 수 없는 나무로 만든 물건들은 엄청나게 오래되어 보이기도 했다. 마치 수백 년이나, 수천 년 전쯤 만들어진 것처럼.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한쪽에 작업중인 목판 하나가 보였는데, 그것은 가구를 만드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고, 어떤 글귀를 쓰다가 만 것 같았다.      


'타인의 시간을 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을 불가능...'     


 쓰다가 무슨 일을 하러 갔는지, 글은 여기까지만 쓰여 있었다. 타인의 시간을 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무슨 의미인지 아리송했다. 이것을 불가능..... 이 뒤에는 어떤 글을 쓰려고 했던 것일까? 허선생이 쓰던 글이겠지? 나중에 허선생이 오면 물어봐야 하나? 혹시, 허선생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쓰던 글인가? 알 수 없었다. 물어보기 전까지는.     


 2층 공방에는 차가 다니는 도로 쪽 창문과 뒤에 있는 산 쪽으로 난 창문이 여러 개가 있었다. 차가 다니는 도로 쪽으로 난 창에는 햇빛이 들어왔다. 홍사장은 창가로 걸어가 창밖을 봤다. 왕복 4차선이고, 살짝 커브 길인 도로 위를 차들이 뭐가 그리 급한 일들이 있는지 쌩쌩 바쁘게 달려갔다.    

 

 나도 저렇게 급하게 달리고 있었겠지? 곧 죽을 거란 얘기를 듣기 전이라면. 저렇게 달리는 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도 죽을 때가 돼서야 달리는 속도를 늦추겠지. 왜 저땐 천천히 달릴 생각을 못했을까...    

 

 홍사장은 한동안 창밖의 차들을 그렇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공방의 벽을 따라 나 있는 창문들이 보였다. 공방에는 폭이 좁고 위아래로 길쭉한 창문 여러 개가 벽을 따라 빙 둘러서 있었다. 창틀은 나무틀이었는데, 만든 지 제법 오래되었는지 비틀림이 생겨 벽과 나무창틀 사이에 공간이 생겨 그곳으로 바람이 숭숭 들어왔다.     


'허선생은 공방 창틀부터 우선 고치셔야겠구만.'   

  

 도로의 반대편으로 난 창들엔 햇빛이 들지 않았다. 그곳의 창에는 뒷산과 울창한 숲이 비치고 있었다. 오늘 아침은 바람도 잠이든 듯 숲이 고요했다. 매미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산은 고요했다.    

 

 바쁘게 달리는 차들과, 고요한 숲. 1층엔 대구탕, 2층엔 공방이 있는 건물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방향의 창문들은 서로 너무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홍사장은 자리에 앉았다. 지난번 허선생으로부터 이론수업을 들었던 그 자리였다. 자리 위에는 만들다 만 나무 도마 몇 개가 놓여 있었다.     


 홍사장은 나무도마를 살짝 만져봤다. 손에 나무 먼지가 묻었다. 손을 툭툭 털었다. 왜 왔을까? 문득 홍사장은 그렇게 많은 장소들 중에서 자신이 왜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죽기 전까지 정신없이 돌아다녀도 가고 싶은 곳을 다 못가 볼 텐데. 얼마 전 딱 한 번 처음으로 와본 이곳 2층 공방을 왜 왔을까? 홍사장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냥 머릿속에 떠올랐고, 이곳에 오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홍사장은 편안하게 자세를 취하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조용한 공방. 홀로 이곳에 앉아 있으니 아늑하고 평온했다. 회사에는 될 수 있으면 자신에게 전화하지 말고, 웬만한 결재는 전무님 전결로 하라고 일러뒀다. 작은 것 하나까지 꼬치꼬치 캐묻는 성격인 홍사장의 말에 경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네? 정말요?”     


 믿을 수가 없다는 듯한 경리의 반응에 홍사장은 평소 자신의 성격과 행동을 짐작하며 쓴 웃음을 지었었다.     

 그렇게 살아서 온 마지막 종착지가 여기인가... 아쉬웠다. 딱 여기까지가 마지막이라는 걸 알았다면 그렇게 정신없이 살지는 않았을 텐데. 대기업 CEO 도 아니고, 중견기업도 아니고, 겨우 이런 작은 회사 대표로 삶을 끝낼 줄 알았더라면, 지금보다 조금 더 규모가 작았을 때라도 회사를 처분하고 여행이나 다니며 인생 즐기고 살았을 텐데...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있는데, 마음이 평온해서 그런지 슬슬 졸음이 쏟아졌다. 잠깐 눈 좀 붙일까? 이렇게 잠이 올 때는 억지로 버티면 계속 피곤했다. 잠깐 5분에서 10분 정도 눈을 붙이면 푹 잠을 자고 일어난 것처럼 아주 개운하고 좋았다. 홍사장이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다. 낮잠은 누워서 1시간씩 자버리면 오히려 더 피곤하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1시간이나 허비하다니!! 눕지 말고 앉아서 5분에서 10분. 이 정도가 딱 좋았다. 그래. 잠시만 눈을 붙이자.     


 홍사장은 평소처럼 눈을 감고 졸았다. 그리고 잠시 후 눈을 떴다. 5분쯤 잤을까? 아주 짧은 시간. 개운했다. 평소처럼. 역시 낮잠은 짧게 자는 잠이 최고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 햇빛이 들어와 밝았던 공방에 지금은 햇빛이 없었다. 밤처럼 까맣지는 않았지만, 조금은 어둡게 느껴졌다. 그사이 구름이 끼었나?     

홍사장이 날씨를 가늠하려 바깥 하늘을 보기 위해 공방을 빙 둘러싸고 있는 창문들을 보다가 화들짝 놀랐다.     

“뭐, 뭐야! 이게 뭐야?!!”     


 홍사장은 눈을 비비고 다시 창문들을 쳐다봤다. 홍사장의 입이 떡 벌어졌다. 분명 같은 풍경을 비춰야 할 창들이, 창 하나, 하나마다 전혀 다른 풍경을 비추고 있었다.  

   

 이쪽 창에는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고, 저쪽 창에는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이 펼쳐져 있었으며, 다른 창에는 화창하고 푸른 하늘아래 낙엽이 떨어지고 있었다.     


 이건 무슨 조화야? 지금은 5월인데? 아니, 애초에 이게 말이 되냔 말이야! 홍사장은 너무 놀라 쿵쾅쿵쾅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진정하자! 진정! 이러다가 심장마비라도 오면 죽을 수도..... 아니, 아니지. 어차피 곧 죽을 건데.... 아닌가? 벌써.... 죽었나? 내가 정말 죽은 건가?     


 홍사장은 놀란 마음을 애써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창가로 다가갔다. 여러 개의 창 위에는 아까는 보지 못했던 동그란 시계들이 달려있었다. 각각의 창마다 걸려 있는 시계는, 각기 다른 시간을 나타내고 있었다.     

-째깍째깍     


 창에 가까이 다가가자 시계 소리도 점점 크게 들려왔다. 홍사장은 여러 개의 창 중에서 눈이 내리고 있는 창가로 다가갔다. 5월에 눈이 내리다니!! 홍사장이 창을 들여다보니, 아니 이게 뭐야?!! 그곳에 젊은 시절의 아내와 홍사장 자신이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놀랍기도 했고, 반갑기도 했다. 바로 눈앞에 죽은 아내가 있다니!      


“내가 이 새끼를 그냥!!”     


“아이. 좀 참아요.”     


눈이 내리는 어두운 밤. 사무실에서 홍사장이 화를 내고 있었고, 아내가 말리고 있었다.    

  

“참긴 뭘 참아?! 만날 사고만 치는 이놈의 새끼! 뭐? 이름이 대운이라서 회사에 커다란 운을 몰고 올거라고? 지랄!! 하는 짓 보면 완전 대흉이다 대흉!!”     


'아, 그때구나!'      


 정대운. 지금은 부장이지만, 당시는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사원일 때였다. 신입사원을 뽑는 면접 때 그가 말했다.   

  

“제 이름이 정!대!운!입니다! 사장님 회사에 큰 운을 가져올 인재!”     


“운이 안 들어오면요?”     


홍사장이 농담 삼아 물었다.  

   

“..예?..”     


정대운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대운씨를 뽑았는데, 운이 안 들어오면 어떡하실 거냐고요.”    

 

“그...그렇다면... 뽑아만 주시면 어디서 운을 만들어서라도 가져오겠습니다!!”     


 홍사장이 피식 웃었다. 어디서 만들어서라도 가져오겠다는 그 패기가 마음에 들었고, 서글서글한 인상도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정대운은 홍사장과 함께 하게 됐다.     


 그런데, 입사를 하고나서 보니 일을 배우는 것도 더뎠고, 자잘한 사고도 많이 쳤다. 신입사원을 잘못 뽑았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하고자 하는 열정만큼은 대단해서 조금 더 지켜보자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정말 큰일이 날 뻔한 사고를 쳐서 홍사장은 화가 머리끝까지 뻗쳐 있었다.     


 아내와 둘이서 밤이 늦도록, 때론 날밤을 새울 때도 있을 정도로 홍사장과 아내는 열심히 일했다. 그날도 일이 많이 밀려 있어서 둘이서 밤을 새우며 일을 해야 했는데, 정대운 사원이 홍사장에게 남아서 일을 돕겠다고 했다.   

  

“그냥 퇴근해. 괜찮아.”     


“아닙니다. 사장님. 다른 것도 아니고, 회사 일인데, 당연히 저도 함께해야죠.”     


 홍사장이 괜찮다며 만류했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끝까지 우겨서 함께 밤늦게까지 일을 했다. 그렇게 일을 하다가 홍사장과 아내는 아이들만 집에 있어서, 잠시 집에 다녀와야 했는데, 정대운 사원이 혼자 하고 있을 테니 아무런 걱정 말고 다녀오라고 했다. 밤이 늦었으니 그만하고 퇴근하라 했는데도, 그는 일이 남았는데, 어떻게 퇴근을 하냐며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그럼 얼른 다녀올 테니, 수고 좀 하고 있어.”     


 홍사장과 아내는 집으로 가서, 아이들 챙길 것 챙기고, 본인들 옷가지들도 챙겼다.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는 고생하는 정대운 사원과 함께 먹을 김밥도 샀다.    

 

“치킨도 사갈까?”     


홍사장이 물었다.     


“치킨 드시다가 맥주 생각나면 어떡하려구요?”     


“그럼 좀 마시지 뭐.”   

  

“안돼요. 그리고 그렇게 기름진 음식은 밤에 먹으면 속 쓰려요.”     


 홍사장은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입맛을 다시며 회사로 돌아왔다. 회사의 사무실과 창고는 조금 떨어져 있었는데, 사무실에서 먹으려고 사 온 김밥을 풀었다. 홍사장이 정대운 사원에게 김밥 먹으러 사무실로 오라는 전화를 걸려는데, 사무실 창가에서 보이는 창고 쪽에 이상한 불빛이 반짝이는 게 보였다.  

   

“뭐야?”   

  

“뭐가?”     


홍사장이 자세히 보기 위해 눈살을 찌푸리며 살피는데, 아내가 외쳤다.   

  

“불이다!! 여보!! 불이에요!!”    

 

“뭐, 뭐어? 불?!!”     


 홍사장은 얼른 사무실을 뛰쳐나가 창고로 뛰어갔다. 가보니 정대운 사원은 의자에 앉아서 졸고 있었고, 그의 발치에 있던 작은 석유 난로가 옆으로 엎어져 있었다. 창고에 난 불이 거기서 번지고 있었던 것이다.   

  

“야!! 정대운!! 일어나!!”     


홍사장이 소리를 지르자 정대운 사원이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깼다.     


“아이쿠! 사장님!! 오셨어요?! 제가 깜박 잠이...”     


“불! 빨리 불!!”     


“예? 어? 부.....불이다!! 불이야!!”     


 정대운 사원이 불을 보고 어쩔 줄 몰라 방방 뛰는 동안 홍사장이 한쪽에 놓인 소화기를 찾아 안전핀을 뽑고 뿌렸다. 다행히 불이 크게 번지기 전이라 소화기 한 대 만으로도 불이 잡혔다. 큰 피해는 없었지만, 애써 작업해 놓은 물건 중 일부는 불에 탔고, 다른 것들도 소화기에서 분사된 가루를 흠뻑 뒤집어써서, 다시 작업을 해야만 했다.     


 홍사장의 눈이 뒤집어져서 쌍욕이 터져나가려는 순간 아내가 홍사장의 팔을 붙잡고 이끌었다.     


“여보! 잠깐만요!”     


화가 잔뜩 난 홍사장은 끌려가다시피 아내의 손에 이끌려 사무실로 돌아왔다.     

 

대구탕 가게 2층 공방에서 현재의 홍사장이 창문으로 보고 있는 화난 자신의 모습이 바로 그때의 모습이었다.                                                            

17. 일회용 일기     


 주경씨의 아들이 의식을 잃은 지 8일째.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주경씨는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이 더 심장을 타들어 가게 만들었다.     


 주경씨는 곁에서 늘 응원해주고 희망을 주는 친구 지애씨 덕분에 그나마 숨을 쉴 수가 있었다. 주경씨와 지애씨는 며칠 전 대구탕 매장 2층 테라스에서 둘만의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나서는 매일 그곳을 찾았다. 오전과 오후 딱 30분만 면회가 허락된 중환자실의 복도에서 갑갑한 마음으로 기도만 하던 주경씨도 대구탕 가게 2층 테라스에서는 친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웃기도 하며 조금이나마 희망과 긍정의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편하게 구경하세요. 공방 안에서 커피를 드셔도 괜찮아요.”     


 2층 공방 입구에 있는 시간을 달리는 공방이라는 현판을 보고 1층 대구탕 매장의 사장에게 물었더니 돌아온 말이었다. 고맙게도 남자 사장은 매일 대구탕을 먹으면 금세 물려서 대구탕 간판만 봐도 속이 울렁거릴 수 있으니, 1층에 들리지 말고 곧장 2층으로 올라가도 된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그녀들은 2층 테라스에서 커피도 마시고, 공방도 둘러보곤 했다.      


“야, 주경아. 나무 바닥이 꼭 우리 어릴 때 학교 마룻바닥 같지 않아? 반들반들하게 한다고 양초를 가져와서 나무에 막 문지르고 그랬잖아?”     


“정말 그러네? 나무 냄새가 나는 것도 좀 비슷한 거 같고.”     


 요즘엔 흔하지 않은 나무로 된 바닥을 보며 둘은 학창시절 이야기를 나눴다. 두 사람은 그 시절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들에게도 아이들이 없었던 시절이 있었고, 남편이 없었던 시절이 있었으며, 돌봐야 할 가정도 없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었던 시절도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립네.... 그때가.”     


지애씨가 의자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주경씨도 그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근데....진짜 만약에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똑같은 선택을 할까?”  

   

“미쳤니? 이렇게 살게?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난 결혼 같은 건 죽어도 안 할 거야!”     


지애씨가 단호하게 말했다.     


“뭐가 좋다고 결혼을 해서 이 고생을 하면서 살아? 남편 뒷바라지에, 아이들까지. 어떻게 보면 요즘 젊은 사람들 결혼 안 하고 사는 거. 그게 맞을 수도 있다니까?”     


“그래도... 그런 말도 있잖아. 자녀가 없으면 슬픔도 없지만, 기쁨도 없다.”


자녀란 말을 입에 담는 주경씨가 살짝 괴로운 듯 보였지만, 그래도 처음보단 훨씬 나아졌다.  

    

“그건 그냥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지어낸 말이야. 자기가 자식이 많았거나. 뭐.... 물론 아이들 커 가는 거 보면서 즐거움도 있고, 기쁨도 있지, 그런데 그게 내 인생과 바꿀 만큼의 가치가 있다? 난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 어차피 인생은 한 번 사는 거잖아. 나도 주은이가 있지만........ 잘 모르겠어. 딱 한 번 사는 인생인데...”     

그때 지애씨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딸 주은이였다.     


“주경아, 잠깐만!”     


“어~ 그래 우리 딸~~”     


 지애씨가 전화를 받으며 공방 밖 테라스로 나갔다. 주경씨가 피식 웃었다. 방금 다시 돌아간다면 결혼은 죽어도 하지 않겠다던 사람이 딸의 전화를 받자마자 간드러진 목소리가 꿀처럼 진득하게 녹아내렸다.     


“퍽이나 안 하겠다.”     


 주경씨가 창밖으로 지애씨를 보며 혼잣말을 했다. 딸과 즐겁게 통화를 하는 친구를 보자 주경씨도 아들 생각이 나면서 다시 불안과 슬픔이 엄습해왔다. 주경씨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했다. 하나님, 부처님, 성모마리아까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신들을 다 부르며 제발 하루빨리 승원이의 정신이 돌아오기를 빌었다.     


 또르르 눈물이 흘렀다. 입술이 덜덜 떨렸다. 그렇게 눈을 꼭 감고 마주 잡은 손을 떨면서 계속 기도를 했다. 그렇게 얼마나 오랫동안 기도를 했을까. 기도를 하고 있으면 통화를 끝내고 들어올거라 생각했던 친구가 아주 오랫동안 기도를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도,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주경씨는 천천히 눈을 떴다.     


“어맛?!”     


감았던 눈을 뜬 주경씨는 깜짝 놀랐다. 분명 아침에 이곳에 왔는데, 잠시 기도를 한 사이 지금은 공방이 깜깜한 밤이었다.    

 

“이...이게 도대체....”     


-째깍째깍     


 공방을 쭉 둘러싼 폭이 좁고, 위아래로 길쭉한 창문. 그리고 창마다 위에 걸려 있는 시계에서 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다. 주경씨도 홍사장이 겪었던 것과 똑같은 순간을 지금 경험하고 있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홍사장의 공방은 살짝 어두운 정도였지만, 주경씨의 공방은 아주아주 캄캄하다는 것이었다. 칠흑처럼.     


비가 내리고, 눈이 내리고, 햇볕이 쨍쨍하고, 푸른 달빛이 비치는 각각의 창들. 주경씨는 창마다 펼쳐진 다양한 모습들에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떨리는 몸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그 많은 창들 중 하나의 창에서 아들 승원이가 슥 스쳐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스, 승원아!!”     


 주경씨는 소리를 지르며 방금 승원이가 지나간 창문을 들여다 봤다. 딸깍 불이 켜지고, 승원이의 방이 나타났다.      


“휴우....”     


 승원이가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꿈에도 그리던 승원이의 모습을 보고 주경씨가 손을 뻗었지만, 차가운 유리창만 만져질 뿐, 승원이는 만져지지도, 자신을 인식하지도 못했다.   

  

 승원이의 표정은 평소 주경씨가 보던 밝은 표정이 아니었다. 어딘가 모르게 지치고, 힘들어 보이는 승원이의 모습. 승원이는 책상 의자에 앉아 종이에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그러다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쓰던 종이를 구겨서 휴지통에 버렸다. 주경씨는 평소 휴지통에 그렇게 구겨진 종이가 많은 걸 별생각 없이 버렸었다. 학습지를 보면서 문제를 푸는 연습장이겠거니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승원이는 분명 학습지를 하고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뭔가를 쓰고 있는데, 주경씨는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주경씨가 자세히 보고 싶다고 생각하니 마치 돋보기로 확대라도 하는 것처럼 승원이가 쓰고 있는 종이가 창에 크게 나타났다.  

   

- 아빠랑 이번 주 토요일 야구를 보러 가기로 했는데, 엄마가 그날 영어 과외 선생님이 저녁에 오신다고 안된다고 했다. 지난 수요일 영어 선생님이 일이 있어서 수업을 못했는데, 그걸 토요일 저녁수업으로 대체한다고 했다. 엄마한테 영어 수업을 다른 시간이나, 일요일로 바꾸면 안되냐고 물었는데, 엄마는 안된다고 했다. 영어선생님 시간이 안 될 거라고. 영어선생님께 전화도 해보지 않고, 물어보지도 않고서... 난 그냥 알겠다고 했다. 어떻게 하더라도 엄마의 말대로 될 것이기 때문에. 아빠한테서 전화가 왔다. 엄마에게 들은 말을 전하니, 아빠는 잠시 고민하다가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역시 내 예상대로였다. 가끔 엄마와 아빠가 어떤 일에 의견이 달라 다툴 때도 있었지만, 이렇게 나의 공부나 수업과 관련된 일이 있으면 언제든 나의 공부나 수업이 우선되었다. 이해한다. 전에 아빠는 코로나가 걸렸을 때도 기침을 콜록거리면서도 출근을 했다. 몸도 아프고, 다른 사람들한테 전염이 될 수도 있는데 그냥 집에서 쉬면 안되나? 하고 생각을 했었는데, 아빠가 그렇게 아픈데도 출근을 하는 이유가 나의 과외비 때문이라는 것을 엄마와 아빠가 다툴 때 듣고서 알게 되었다. 그럼 과외를 좀 줄이면 되지 않을까? 내가 이렇게 과외를 한다고 해서 엄청 훌륭한 사람이 된다거나, 공부를 특별히 잘할 수도 없을 것 같은데 말이다. 나는...     


 아들이 글을 쓰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났다. 크게 보이던 글씨가 갑자기 쑥 줄어들며 글을 쓰는 아들의 모습이 멀리서 나타났다. 아들은 얼른 쓰던 종이를 구기더니 쓰레기통에 버렸다. 잠시 후 아들의 방문을 열고 주경씨가 나타났다. 주경씨를 보자 아들의 조금 전 우울한 표정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싹 사라지고, 애써 웃는 표정을 지었다. 어색했다.      


“과외 선생님이 내준 숙제는 다 했어?”     


 집에 오자마자 아들 방문을 열고 한 첫마디. 창문 속 주경씨는 자기 자신이 보기에도 상당히 날카로워 보였다. 게다가 지금 딱 보기에도 애써 웃음을 짓느라 너무 어색해 보이는 아들의 얼굴 표정을 보고서도 물어보는 말이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분 안 좋은 일이 있는지, 어떤 걱정이 있는지가 아니라 숙제는 다 했냐는 말이라는 게 도무지 스스로도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응.”     


“그래. 엄마 아빠 피 같은 돈으로 과외하는 거니까 숙제 빼먹지 말고.”     


 주경씨는 한마티 툭 뱉고서 아들 방문을 닫고 나갔다. 그녀가 나가자 승원이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그동안 자신이 보지 못했던 승원이의 표정. 닫힌 방문 사이로 승원이의 표정이 늘 저랬을 거란 생각을 하니 주경씨의 마음이 찢어지는 듯했다.      


 창문은 곧 불이 꺼진 것처럼 깜깜해지더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주경씨는 고개를 돌려 바로 옆 달빛이 교교하게 비치는 창문으로 갔다. 환하게 떠 있는 푸른 달빛 아래에 주경씨 가족이 살고있는 아파트가 보였다. 창문은 마치 카메라가 움직이듯 점점 주경씨 집으로 가까이 다가가며 비춰줬다. 모든 불이 다 꺼져있는 주경씨의 집. 창에 나타나는 화면은 그곳에서도 승원이의 방 창가를 향해 점점 다가갔다. 불이 꺼진 방. 창가에서 승원이가 창밖의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 째깍째깍     


시계 소리에 주경씨가 고개를 들어 공방의 창문 위에 걸려 있는 시계를 쳐다보니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새벽 2시. 주경씨와 남편이 잠든 시간.   

  

‘이 새벽에 승원이가 창가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목이 아프진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한참 동안 밤하늘을 빤히 쳐다보던 승원이가 책상으로 가더니 책상의 작은 등을 켜고 앉았다. 그리고는 또 종이를 꺼내서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주경씨가 궁금해하니 이번에도 승원이가 쓰는 종이가 돋보기로 확대를 하듯 확 커졌다.     


- 이 시간이 참 좋다. 누구로부터도 방해받지 않는 시간. 엄마 아빠도 모두 잠이 든 이 시간에는 누가 내 방에 들어오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고 편하게 일기(?)를 쓸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물론 다 쓰고 나면 구겨서 버리는 일회용 일기지만... 이렇게라도 마음을 풀 수 있어서 다행이다. 가만히 하늘을 보고 있으면 어릴 적 엄마 아빠와 함께 갔던 천문대가 생각이 난다. 어두운 밤에 산을 걸어서 올랐던 것도 신기했고, 거기서 TV나 책에서 영상과 사진으로만 보던 천체를 망원경으로 직접 본다는 것도 너무나 신기했다. 특히 붉게 빛나는 아름다운 금성의 모습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망원경으로 별들을 관찰하고 난 다음, 정확한 이름이 기억나진 않는데 40~50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동그란 돔 모양의 방에 들어갔다. 뒤로 눕듯이 앉을 수 있는 의자에 앉아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불이 탁 꺼지고, 돔 모양의 천장에 화면이 켜졌다. 의자가 돌아가는 것인지, 화면이 돌아가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천장에 나타난 여러 행성들과 별들이 빙글빙글 돌았다.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재미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내용은 여러 별들의 크기를 비교하는 내용이었다. 지구가 당연히 태양보다 훨씬 작다는 것은 알았지만, 태양보다 더 큰 별과 비교하고, 또 그보다 더 큰 별과 비교하고, 계속 비교해서 태양이 탁구공보다 더 작아지고, 지구가 쌀 한 톨보다 더 작아졌을 때는 뭔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그보다 더 큰 별들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 먼지... 아니, 먼지라고 하기에도 부족한 인간은 이 우주에서 어떤 존재일까? 왜 태어났을까? 수십억 년 된 지구의 나이와 비교하면 눈 깜박할 시간이고, 은하의 시간, 우주의 시간에 비하면 눈 한번 깜박할 시간보다도 더 짧은 시간일 텐데…. 그렇게 짧게 살고 가는 인간은 왜 드넓은 우주에서도 은하계에서, 그중에서도 하필이면 태양계, 거기에서도 지구라는 별에 나타났을까?...     


 승원이의 글을 보던 주경씨는 깜짝 놀랐다. 그때가 초등학교 5학년. 초등학교 5학년의 승원이가, 그냥 의자가 돌아가고, 천장의 화면이 돌아가고, 우주가 나오고, 여러 종류의 별들이 나타나 마냥 재밌게 본 줄만 알았던 승원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너무나 놀라웠고, 여태껏 그런 사실을 짐작조차 하지도 못하고 있었다는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고 무심하게 느껴졌다. 주경씨는 계속해서 승원이의 글을 읽었다.          


- 나는 이렇게 짧은 인간의 시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무엇을 하며 살아야 좋을까? 어떻게 살아야 좋을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사실 별을 보고 온 그때부터 별을 보고 관찰하는 것에 관심이 생겼지만, 평생 직업으로 삼을 만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별 보는 걸 좋아하는 것과, 그것을 직업으로 한다는 것은 다른 일이니까.... 엄마는 내가 커서 의사나 판검사, 변호사 또는 공무원이나 대기업에 취직하길 원한다. 다른 엄마들이 다 그렇듯. 만약 내가 그런 직업을 가지지 못하면 엄마는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부끄러울까? 나는 스스로 만족하며 살 수 있을까? 엄마는 늘 말한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아빠나 엄마처럼 살아야 한다고. 나는 엄마나 아빠가 부끄럽지 않은데... 부담스럽다. 공부. 공부. 공부를 잘 못하면 그건 잘못된 인생인 건가? 사람마다 모두 다른 재능이 있다고 했다. 누구는 공부를 잘하고, 누구는 운동을 잘하고, 누구는 음악을 잘하고... 이 말을 엄마에게 했더니, 엄마가 나에게 물었다. 그럼 넌 뭘 잘하는데? 난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엄마가 나에게 그건 공부를 못하는 사람들이 하는 핑계일 뿐이라고 했다. 우주에서 찰나의 순간을 살고 가는 짧은 인생. 공부. 공부. 공부. 엄마와 아빠가 그렇게 힘들게 돈을 벌고, 나에게 과외를 시키고, 공부를 시키는 게 그럼 엄마와 아빠의 인생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내가 공부를 하고 싶다고, 시켜달라고 해서 시켜주는 거라면 모르겠지만, 내가 하고 싶지 않다고 해도 억지로 시키는 건 본인들의 만족 때문이 아닐까?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래야 본인들 마음이 편하니까.... 난 그 시간에 엄마 아빠와 많이 웃고, 떠들고, 추억을 만들고 싶은데.. 언젠가 엄마한테 또 그런 말을 했었다. 인생의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승자가 아니고, 사는 동안 많이 웃고 산 사람이 승자라는 말을 어디서 봤다고. 그러자 엄마가 말했다. 그건 분명 실컷 놀기만 하다가 실패한 늙은 노인이 지어낸 말일 거라고. 갑갑하다. 벽에게 말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말에 조금만 공감을 해주면, 나도 엄마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주경아!! 얘!!”     


친구 지애씨의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 주경씨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 어?”     


“많이 피곤하지? 깊이 잠든 것 같아서 깨우지 않으려고 했는데, 나도 가봐야 해서.”     


“뭐? 내가.... 잠이 들었었어?”     


“응. 주은이하고 통화하고 오니까 엎드려 잠들어 있더라고. 승원이 일로 잠을 잘 못자서 피곤한가보다 하고 기다렸어. 벌써 30분이 넘게 잤는걸?”     


“뭐? 진짜?”     

 주경씨가 고개를 돌려보니 어두웠던 공방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환했고, 늘어선 창문들 위에는 째깍째깍 돌아가던 시계들도 보이지가 않았다.      


‘뭐지? 그게 다 꿈이었다고?’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생생했다. 주경씨는 아들이 구겨 버린 종이가 생각났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가자!!”     


주경씨는 아들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방을 치우지 않았다. 쓰레기통도 비우지 않았다. 그 종이들을 확인해볼 참이었다. 주경씨가 2층 공방을 나오며 힐긋 돌아보자 공방의 문 옆에 걸려 있는 현판이 또다시 눈에 들어왔다.      


- 시간을 달리는 공방.     


그 글자가 이전과는 다르게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친구 지애씨는 주경씨를 집에 내려다 주고 갔다. 주경씨는 집으로 올라가 현관문을 열고 아들 방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쓰레기통에는 종이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아들이 다치고 나서는 한 번도 치우진 못했지만, 다치기 전에는 매일 치우던 쓰레기통. 그러니까 이 종이들이 하루에 그만큼 쌓인 종이란 의미였다. 주경씨는 쓰레기통을 뒤집었다. 쓰레기가 우르르 쏟아졌다. 주경씨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 하나를 펼쳤다.     


- 일회용 일기. 엄마가 볼 일은 없겠지? 그런데, 나는 이걸 엄마가 보지 않길 바라며 쓰는 걸까? 아니면 언젠가 한 번 봐주길 바라고 쓰는 걸까?  

    

글은 거기서 끊어졌다. 주경씨는 또 다른 구겨진 종이를 펼쳤다.   

   

- 엄마가 설거지를 하느라 수학과외 선생님과 스피커폰으로 통화를 해서 통화 내용을 듣게 되었다. 수학 선생님이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다며 이번 주엔 수업에 오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엄마는 조금 망설이다가 마스크를 쓰고 하면 되지 않을까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수학선생님이 말했다. 어머님. 승원이한테 전염이 될 수도 있구요. 그리고 저도..... 아프거든요? 처음이었다. 수학선생님이 그렇게 짜증스러운 목소리를 내는 것은. 물론, 아닐 수도 있겠지만, 수학선생님이 아빠에게 코로나가 옮았을지도 모른다. 아빠가 코로나에 걸린 사실을 숨겼고, 과외선생님들이 수업을 계속했으니까. 도대체 과외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처음으로 엄마가 부끄러웠다. 아빠가 코로나에 걸렸다는 사실을 숨긴 것도, 아픈 선생님에게 와달라고 부탁한 것도...   

  

주경씨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글이 끊어진 종이를 내려놓고, 또 다른 종이를 들어서 펼쳤다.    

 

- 요즘엔 앉아서 공부하는 시간보다, 이렇게 글을 쓰는 시간이 더 많은 것 같다. 공부에 집중이 되지 않지만, 책상에는 앉아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 뭐라도 하고 있는 줄 아시니까...   

갑갑하다....     

이 생활은 언제쯤 끝날까.... 대학생이 될 때까지? 그럼 앞으로 5년을 더 이런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걸까.....아니, 대학생이 된다면 정말 끝일까....살아가면서도 엄마가 원하는 대로 내 생각과 행동을 맞춰야 하는 건 아닐까?..... 무섭다.     


뚝. 뚝. 주경씨의 눈물이 종이 위에 떨어져 번졌다. 주경씨는 흐느끼며 종이 하나하나를 펴서 읽어내려갔다.


 어떤 글에서는 놀란 표정을 지었고, 또 어떤 글에서는 오열하기도 했다. 그렇게 저녁이 될 때까지 종이에 쓰인 글들을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그날 처음으로 주경씨는 저녁 면회시간에 아들이 누워있는 중환자실에 면회를 가지 않았다. 도저히 아들을 보러 갈 수가 없었다. 아들의 글처럼 찰나의 시간을 살고 죽는 인간의 짧은 삶에서도, 아직 꽃이 피지도 못한 중학교 2학년 아이의 생에 가장 커다란 고통을 준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엄마인 자신이라는 사실 때문에.                                                                                                                                                                                

18. 장례식     


“사무실에 밥이나 먹으러 오세요.”     


송팀장의 전화를 받고 정섭씨는 기분이 좋아졌다. RCS 팀의 팀원들이 자신을 싫어한다는 이유로 사무실에 잘 부르지 않는다는 것을 정섭씨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랬기에 스스로도 송팀장의 사무실에 잘 나가지 않았었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는 사무실에서 같이 밥도 먹고, 카드도 치고 하는 걸 알면서도.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로 밥을 먹으러 오라고 하다니.      


 하긴 요즘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제법 열심히 일을 하긴 했다. 공사장에서 잔뼈가 굵은 자신이 어린 애새끼들 몇 마디 말에 무너지거나 흔들릴 일은 없었다. 몸이 조금 고되긴 했지만, 팀원들이 원하는 대로 최대한 열심히 움직여줬다. 그러자 자신을 대하는 팀원들의 태도도 조금씩 바뀌어 갔다.     


- 쏴아아아아     


 창문을 열자 비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이런 날에는 그냥 여관에서 맥주 한 캔에 드라마나 영화를 보며 뒹굴거리는게 제일 좋긴 했지만, 며칠 전부터 계속 떠오른 생각에 오늘은 꼭 외출을 해볼 생각이었다. 오늘은 송팀장이 사무실에서 밥도 먹여준다니까 더더욱.     


 담배 한 대를 기분 좋게 피우고, 콧노래를 부르며 씻었다. 버스를 타고 송팀장의 사무실로 갔다. 송팀장의 사무실은 2층에 있었는데, 그곳은 인력사무소가 아닌, RCS 팀만의 사무실이었기에 다른 인부들은 없었다.  

    

송팀장의 팀원은 총 15명 정도 되었는데, 사무실에는 5명 정도가 와있었다. 다른 팀원들은 대부분 집에서 쉬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1명은 휴대폰을 보고 있었고, 나머지 4명은 카드를 치고 있었다.     

 

“오~ 형님. 오늘 멋지게 입었네요?”     


영준이 정섭씨가 들어오는 걸 보며 말했다.     


“작업복만 안 입으면 다 멋지게 입은 거냐?”     


 늘 작업복을 입고 만나던 사람들이라 서로 작업복을 입지 않고 만나면, 신기하게도 뭔가 차려입은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근데, 형 몸이 좀 더 불었어요? 살이 찐 것 같은데?”     


“옷이 커서 그런 거야 임마.”     


“얼굴에도 옷 입었어요? 얼굴도 커졌는데?”     


영준의 말에 팀원들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야이 씨.....”     


“형. 뭐 드실래요?”     


 송팀장이 담배를 한 대 꺼내 피우며 물었다. 송팀장의 사무실에서는 누구나 편하게 담배를 피울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디서 시킬 건데?”     


“만리장성.”     


만리장성은 송팀장의 사무실에서 자주 배달시켜서 먹는 중국음식점의 이름이었다.      

“아~ 또 고민되네. 짬뽕이냐 짜장이냐.....”     


“그럼 짬짜면 시켜요.”     


“아니. 그건 안되지. 맛이 없어.”     


“똑같은 건데, 왜 맛이 없어요?”  

   

“몰라. 암튼 난 짬짜면은 별로다. 짬뽕이랑 짜장이랑 주문해서 나눠 먹자.”     


똑같은 짬뽕과 짜장이었는데, 정섭씨는 이상하게 짬뽕과 짜장이 각자 한 그릇씩 따로 되어 있는 것과, 한 그릇에 짜장과 짬뽕이 반으로 나눠있는 짬짜면의 맛이 다르게 느껴졌다.     


“난 볶음밥 먹을 건데요?”     


영준이 얇밉게 말했다.     


“야이씨. 그럼 볶음밥도 나눠 먹으면 되지!”     


송팀장이 피식 웃더니 짜장과 짬뽕, 볶음밥, 탕수육을 골고루 주문했다.   

  

“병규야. 가서 소주 3병만 사올래?”     


송팀장이 팀의 막내 병규에게 카드를 건넸다.     


“야. 송팀장. 3병 가지고 돼?”     


정섭씨가 3병이라는 말에 다급히 끼어들었다.     


“그냥 적당히 마셔요. 목만 적시면 되지. 야, 야. 병규야 얼른 갔다 와. 딱 3병만 사와라.”  

   

송팀장은 술을 더 마시고 싶어하는 정섭씨를 흘겨봤다. 정섭씨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입맛을 다셨다. 

    

“한게임 하실래요?”     


영준이 정섭씨에게 카드게임을 권했다.     


“됐다. 돈도 없고.”     


정섭씨는 담배를 한 대 꺼내서 입에 물고, 스마트폰을 켰다. 영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패돌려.”     


 카드를 하는 일행은 카드를 하고, 스마트폰을 보는 사람은 폰을 봤다. 자욱한 담배 연기. 타닥타닥 떨어지는 빗소리. 함께 모여서 느긋한 낮 시간을 보내는 게 얼마 만인가. 정섭씨는 모처럼 몸이 간질간질거리는 좋은 기분을 느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이 배달 왔다. 가운데 모아 놓고, 각자 종이컵에 먹고 싶은 음식을 덜어 먹으며 소주도 한 잔씩 했다.     


“크으~~ 이 맛이지!”     


내리는 빗소리. 소주. 맛있는 중국요리에 자욱한 담배연기. 그리고 왁자지껄한 소리까지. 정섭씨는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는 분위기에 흠뻑 젖었다.     


음식을 먹고, 술을 몇 잔 마시다 보니 속에서 트림이 올라왔는데, 정섭씨는 그것을 억지로 참다가 희안한 소리를 냈다.     


“구구꾹!!”     


이를 놓칠 새라 영준이 정섭씨를 쳐다보며 말했다.     


“뭐예요? 남들 밥 먹는데 비둘기 설사할 때 내는 소리나 내고.”


“아이~ 씨. 저 새끼는 진짜 사람 완죤 쫀득~ 쫀득하게 놀린다니까?”     


“제가 뭘 또 형을 놀려요? 형이 연세가 있으시니까 소화기관에 대해서 걱정해드리는 거지. 자, 자. 파인애플 많이 드세요. 소화에 좋데요.”     


영준이 탕수육 소스에 들어있는 파인애플을 정섭씨의 종이컵에 담으며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고, 옆에 사람들은 낄낄거리며 웃고 넘어갔다.     


“아오~ 진짜! 파인애플이 있으면 껍질째 니 입속에 쳐넣고 싶다!”  

   

정섭씨가 소주를 더 마시려고 병을 들어 소주잔에 붓는데, 절반도 차지 않았다. 정섭씨가 병을 탈탈 털었다. 소주 몇 방울이 더 떨어졌다.     


“야. 송팀장. 안주도 좋은데 우리 몇 병만 더 마시자.”     


“안돼요. 내일부터 날도 맑은데, 일해야죠. 오늘 낮부터 그렇게 달리면 내일 또 일 못 나옵니다.”  

   

“줘 보세요. 제가 조금 더 짜드릴께요.”   

  

영준이 소주병을 쥐더니 정섭씨의 잔 위에서 빨래를 짜듯 비틀었다.     


“이이익!!”     


그 모습에 다들 또 한 번 배를 잡고 넘어갔다.     


-또옥     


한 방울이 더 떨어졌다.     


“휴우..... 제가 힘들게 병에서 짜낸 거니까 맛있게 드세요~”     


“진짜 영준이 너는.... 죽을 때까지 꼬집어서 죽이고 싶다!! 일루와!!”     


“아! 아야!!”     


정섭씨가 영준을 막 꼬집었고, 영준이 도망쳤다. 한바탕 왁자지껄 소란이 끝나고, 음식을 다 먹은 후 다시 카드를 칠 사람은 카드를 쳤다. 정섭씨는 앉아서 담배를 몇 대 피우며 스마트폰을 보다가 오늘 자신이 가야 할 곳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정섭씨는 담배를 비벼끄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간다.”     


“어디를요?”     


송팀장이 물었다.     


“어디긴? 집이지.”     


“많이 마시지 마세요.”     


“뭐, 뭘 마셔?”     


“형이 술 더 마실거라는 거. 형 빼곤 다 알걸요?”     


“아이씨. 송팀장 너까지...... 암튼 고맙다. 밥도 고맙고. 불러줘서 고맙고.”     


정섭씨는 진심으로 송팀장에게 고마웠다.     

“아이. 뭐에요? 갑자기 소름 돋게. 돈 필요해요?? 나 돈 없어~”     


“야이씨. 진짜 뭔 말만 하면 돈 필요해서 그런 줄 아냐?”     


정섭씨가 사무실을 둘러보면서 거기 있는 팀원들에게도 말했다.     


“너희들도 송팀장한테 감사해라. 내가 평생을 공사판에서 굴러먹었지만, 쉬는 날에 이렇게 팀원들 불러서 밥 사주고, 술 사주고, 목욕탕도 같이 가고 하는 팀장 없다.”     


“됐어요. 얼른 들어가세요.”     


송팀장이 쑥스러워했다.     


“이게 다~ 송팀장이 장가를 못가서 가능한 거야! 결혼이라도 했어 봐라!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아~ 놔! 이 형이 무슨 일인가 싶었다. 못간 게 아니라 안 간 거라고요!”     


“그래. 그래. 그렇다고 치자. 암튼 그러니까 너희들은 송팀장이 계속 장가 못가기를 빌어라! 송팀장. 잘 먹었어~”      


“아, 이게 뭔말이야?! 얼른 가세요! 얼른!”     

 

송팀장이 정섭씨를 쫓아내듯 문밖으로 밀어내고 문을 쾅 닫았다. 정섭씨가 씩 웃으며 1층으로 내려왔다. 결혼 이야기로 송팀장을 놀리긴 했지만, 고맙다고 한 말은 진심이었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늘 같은 날에는 막걸리가 딱이지! 정섭씨의 머리에는 양은잔에 담긴 조각 벌집꿀 위로 막걸리가 쏟아지는 모습이 슬로우모션 영상처럼 펼쳐졌다. 크으~     


“택시!!”     


정섭씨는 급히 택시를 세웠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대구탕 가게로 갔다. 산에 위치한 대구탕 가게에 도착해 택시를 보내고, 매장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엇?! 이게 뭐야?!! 매장의 불이 다 꺼져있고, 문이 닫혀있었다. 문 앞에 종이가 한 장 붙어있었다.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브레이크타임입니다. 

    

정섭씨는 휴대폰을 꺼냈다.   

  

3시 10분.      


“아~ 씨!!”     


이제 막 브레이크타임 시작. 두 시간 가까이를 기다려야 했다. 브레이크타임을 생각못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택시를 돌려보내지 않았을 텐데!! 이곳은 산이라 지나가는 택시도 없었다.     


혹시나 싶어 유리창을 통해 매장 안을 두리번거렸다. 만약 매장에 사람이 있으면 사정을 말하고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말할 참이었다. 그 남자 사장이 없나?     


 그러고 보니, 가게 앞에 차가 한 대도 없었다. 여기가 산이니, 남자 사장이나 여자 사장이 걸어서 가게에 올 것도 아니었고... 결국 아무도 없다는 의미다. 


'와~ 나! 쉬는 날!! 이 귀한 시간에!'


 정섭씨는 갑자기 기분이 우울해졌다. 1층 가게 입구의 처마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 담배는 넉넉히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이곳은 산이라 담배를 살 수 있는 곳도 없었는데, 만약 이런 상황에서 담배까지 뚝 떨어졌다면 미쳐버릴지도 모를 거라 정섭씨는 생각했다.     

 추적추적 비가 계속 내렸다. 택시를 불러볼까? 잠시 생각했으나, 지난번에도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 택시가 잡히지 않아서 남자 사장이 자신을 태워서 산 아래에까지 데려다 줬던 사실이 떠올랐다. 에이~ 씨. 정섭씨는 하는 수 없이 내리는 비를 보며 담배를 계속 피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30분 정도를 기다리고 있는데, 주위의 식당에 일하는 사람들이 오며 가며 계속 그곳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는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산속에 있는 주인 없는 가게에 그렇게 앉아 있으니 이상하게 보일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이~씨. 여기 뭐 사람들 눈에 안 띄는 곳은 없나? 정섭씨가 두리번거리며 살펴보니, 건물 한쪽에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순간 정섭씨의 뇌리에 2층에 공방이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정섭씨는 피우던 담배를 얼른 끄고,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다 올라가 2층 모통이를 돌아선 정섭씨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이야~~”     


 비가 내리는 산에는 안개가 자욱하게 서려 있었고, 2층 테라스 주위에 죽 둘러선 복숭아 나무, 오디나무 등 여러 과실수는 비에 젖어 싱그러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리고 테라스 한쪽에 놓인 테이블과 그 테이블에 꽂혀 있는 파라솔에 투둑투둑 떨어지는 빗소리는 정겨움을 느끼게 했다.     


“술 마시기 쥑이겠네!”     


 정섭씨는 비오는 날 이곳 테이블에 앉아서 술을 마시면, 여기가 바로 무릉도원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테이블 옆에 놓인 의자는 흩날리는 비에 젖어 있어 앉을 수는 없었다. 잠시 테라스를 둘러보던 정섭씨는 2층 공방 입구를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다가갔다.     


- 시간을 달리는 공방.     


정섭씨는 나무 현판을 봤다.     

 

“뭐야? 공방 이름도 존나 희한하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을 당겨봤다.     


- 끼이이익.     


 오래된 나무문 소리가 나며 공방 문이 열렸다. 비가 내려 그런지, 평소에 공방에서 나는 것보다 더욱 진한 나무 분진 냄새가 정섭씨의 코를 덮쳤다.    


 정섭씨는 공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공방 문이 열려 있어서, 1층 대구탕 가게의 브레이크 타임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곳이 있어 다행이었다.      


 "후우..."


 나무 냄새를 깊게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정섭씨는 공사 현장에서 발판으로 사용하는 나무로 만든 토루판에서 나는 냄새를 좋아했는데, 공방에서 나는 냄새가 토루판에서 나는 나무 냄새와 비슷해서 좋았다.   

  

 편안했다. 엄마의 품처럼. 고향의 품처럼. 평생 공사현장에서 일을 하며 살아온 정섭씨에게 나무분진의 냄새는 편안함을 느끼게 해줬다.      


 공방 화이트보드 앞에 놓인 의자에 가서 앉았다. 의자 옆 탁자 위에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몇 개의 도마가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시간은 오후 4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아직 남은 한 시간. 정섭씨는 스마트폰을 꺼내 유튜브를 봤다가, 이내 지겨워져 뉴스를 봤다. 빗소리는 타닥타닥 들려오고, 송팀장 사무실에서 마셨던 술기운도 있고, 포근한 나무분진 냄새도 있어 눈이 자꾸만 감겼다. 정섭씨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 책상에 털썩 엎드려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잠이 들었을까? 정섭씨가 눈을 뜨자 공방에 옅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아까도 비가 내리고 있어 그리 밝은 편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아까보다도 조금 더 어두웠다. 잠이 들었었나? 아, 씨. 쉬는 날 아깝게 이런 데서 잠이나 자고.     


- 쏴아아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까보다 더 세차게 내리는 것 같았다. 


'비는 오지게 내리네. 내일 그치긴 그치는 건가? 어? 뭐지? 허허. 웃기네. 저쪽 창문에는 오지게 내리는데, 이쪽 창문에는 별로 안 내리네? 이제 막 몰려오는 건가? 아님 이제 막 물러가는 건가?'

     

정섭씨가 공방에서 산 쪽 방향으로 난 창문을 보니 창마다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창문마다 내리는 비의 강도가 달랐다.     


- 꽈과광!!     


세차게 비가 내리는 창에서는 번개가 번쩍이더니 천둥까지 쳤다.     


“아, 씨바! 깜짝이야!”     


정섭씨가 천둥소리에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는데, 도로가쪽으로 난 창에는 태양이 쨍쨍했다.   

  

“뭐...이거 뭐 와.. 씹.... 이거 뭐야?!”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더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 째깍째깍     


 각각의 창 위에 걸린 시계 소리가 정섭씨의 귀에 커다랗게 들려왔다. 


'어? 원래 저것들이 걸려 있었나? 그런데, 지금 이게 말이 되나? 이쪽 창에서는 비가 저렇게 쏟아지는데, 여기는 쨍쨍 하다고?'      


그때 한 창가에서 정섭씨가 상복을 입고 쓱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엥?? 저, 저거 나? 나 아니야? 진짜 이게 도대체 뭐야?'     


정섭씨는 후다닥 자신이 상복을 입고 지나간 창가로 뛰쳐 갔다. 


'아, 저, 저 때!! 장인어른 장례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장모에게 인정을 받았던 곳!'

      

 장인과 장모는 정섭씨를 무척 싫어했다. 금이야 옥이야 곱게 키운 딸을 데려가 여관방 살이를 하는 공사장 막노동꾼 사위를 누가 좋아할 수 있겠는가!     


 정섭씨도 그 마음을 십분 이해하면서도 자신을 미워하는 장인, 장모가 싫었다. 


'당신들만 사람 싫어할 줄 아나? 나도 싫어할 줄 안다!'


 그러다 보니 명절을 제외하곤 평소 교류가 거의 없었다. 명절 때도 이런저런 핑계로 처가에 안 갈 때도 잦았고, 가더라도 정섭씨와 장인, 장모는 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런데 이날. 장인어른의 장례식. 자매지간인 아내의 동생. 즉, 정섭씨의 처제는 아직 시집을 가지 않았다. 아들 없이 딸 둘인 아내의 집에서 상주 노릇을 할 사람은 사위인 정섭씨 밖에 없었다.    

 

 3일상을 치르는 중 첫날과 이튿날. 정섭씨는 의젓하게 상주노릇을 잘했다. 오는 손님을 맞이하는 것도, 수육과 밥, 국 등 음식을 모자라지 않게 주문하는 것도. 현장에서 오래 일하며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근조화환도 많이 보내왔다.     


“사위가 활동을 많이 하는 모양이네.”    

 

“사위가 참 의젓하네. 이래서 집에는 역시 남자가 있어야 한다니까.”    

 

 자세한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장모에게 정섭씨 칭찬을 했다. 정섭씨도 들려오는 칭찬에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래서 부러 더 늠름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손님들께 깍듯이 인사도 하고, 정중히 모셨다.  

   

 그렇게 장례식 이틀이 지나고, 발인을 하루 앞둔 날.   

  

“내일 화장장 일정에 맞춰야 해서 발인을 6시에 해야 한다고 합니다. 어머님. 일찍 눈 좀 붙이십시오.”     


 밤 11시. 정섭씨가 장모에게 말했다. 그러자 장모가 정섭씨에게 빈소 곁에 딸린 상주와 가족들이 쉬는 방으로 잠시 들어오라고 했다. 처음이었다. 정섭씨는 상주였지만, 이틀 동안 한 번도 그 방에 들어가지 않았었다.


물론, 장모나 아내와 처제도 정섭씨에게 방으로 들어오라고 권한 적이 없었다.     


“예? 저는 손님 오시면.....”     


“이 시간에 올 손님이 어디 있겠나? 어쨌든 잠시면 되니 들어오게.”    

  

정섭씨는 쭈뼛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앉게.”     


작은 방은 장모, 처제, 아내, 그리고 잠든 아들과 정섭씨로 꽉 찼다. 처제가 자신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쏘아보는 건 여전했는데, 장모의 눈빛은 예전처럼 차갑지만은 않았다.    

 

“다른 건 잘 모르겠고, 이번에 큰일 치르면서 자넬 보니까... 그래도 어느 정도 믿음은 가네.” 

    

 장모의 말에 정섭씨는 순간 울컥했다. 결혼 전으로도 후로도 장모에게서 처음으로 받아보는 인정이었다. 정섭씨는 애써 격해진 감정을 추스르며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정섭씨의 아내는 아버지의 장례식날 처음으로 남편을 인정해준 엄마 앞에서 뭐가 그리도 서러운지 울음을 터트렸다.     


“자네는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지만.. 바깥양반이 늘 명현이 사진을 전화기로 보면서 싱글벙글......”   

  

 장모가 한쪽에 잠들어 있는 정섭씨의 아들을 보며 말했다. 명현이. 정섭씨 아들의 이름이었다.  

   

“...자식 미운 부모는 있어도.. 손주 미운 사람은 없다고... 미정이 아빠가... 늘 명현이 생각을 많이 했어...” 

    

 장모도 감정이 북받치는지 목소리가 떨렸고, 장모의 말에 미정이. 그러니까 정섭씨의 아내는 점점 더 많은 눈물을 쏟았다. 한참 흐느끼는 소리가 흐르고 나서 장모가 조심스레 말했다.    


“미정이 너도 알겠지만, 너희 아빠가 저축은 많이 안 했어. 버는 돈으로 저축 대신 보험을 다 들어 놓았거든.”        

 정섭씨도 예전에 아내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집안에서 연락도 잘되지 않던 아버지의 8촌 동생이 어느 날 명절에 선물을 들고 나타나 보험회사에 다닌다며, 친척 어른들에게 보험을 권유했다고. 아버지에게도 따로 연락이 왔었고, 아버지는 보험을 들어 줬었다고.    

 

“뭐, 사업에 투자하라는 것도 아니고, 보증을 서달라는 것도 아니고, 결국 보험이라는게 나한테 다시 돌아오는 건데, 그것 하나 해주는 거 뭐 어렵다고. 같은 핏줄에.” 

    

 ‘보험은 쓸데없는 걱정을 미리 하는 것.’ 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그동안 쳐다 보지도 않던 정섭씨의 장인은 집안의 8촌 동생이 한다는 말에 본인이 정립한 보험의 정의마저도 바꿔버렸다. 혈연. 정녕 무서운 것이었다

    

 그때부터 아버지의 저축 방식은 은행예금과 적금이 아니라 암보험과 종신보험, 연금보험 등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당장 간이든 쓸개든 모든 걸 다 꺼내줄 것처럼 살갑게 대하던 8촌 동생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보험회사를 그만뒀다. 그리고 예전처럼 집안사람들과의 연락을 끊어버렸다.     


“그게 뭐 어때서? 그놈이 있건, 없건, 내 보험은 계속 유지하면 되는 건데. 지도 지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 어쨌든 나한테 사기를 친 건 아니잖아?”     


미정씨의 아버지는 그러거나 말거나 본인의 보험을 계속 이어갔다.     


 정섭씨의 장모는 잠든 명현이를 쳐다보며 말했다.    

  

“명현이 태어났을 때, 어찌나 좋아 하시던지.... 어쨌든 뭐, 이것저것 긴말할 거 없고 미정이 아버지가 들어놓은 보험이 제법 돼서, 장례식 치르고 나서 절차를 끝내면 보험금이 제법 나올거야. 그러니까 자네도 여관 전전하면서 사는 생활은 이제 끝내고, 집 하나 장만해서 어디든 정착을 하도록 하게.”     


정섭씨는 보험금이 제법 나올 거란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뭐야? 그럼 나는? 내 거는 없어?”     


“너도 있어. 언니보다는 적겠지만 섭섭해하지 말고. 언니는 명현이도 있잖니.”  

   

“그래서? 그게 얼마나 되는데?”    

 

정섭씨는 자신이 너무나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물을 수 없었던 그 질문을 처제가 대신 해줘서 너무 다행이었다.     


“정확한 액수는 나와봐야 알겠지만, 언니는 10억이 조금 넘을 것 같고, 너도 5억 정도는 될 거야.”  

   

2층 공방의 창문에서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정섭씨는 장모 앞에 앉아서 그 말을 듣고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깜짝 놀랐다. 당시 스스로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보였다고 생각했었는데, 포커페이스를 잘  유지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창을 통해서 바라보는 모습에서는 기쁨을 감출 수 없는 얼굴이었다. 와 씨! 진짜 저때 내 표정이 저랬었다고? 이야~~ 씨. 개쪽팔린다! 개쪽팔려!!     


 보험금. 10억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자신의 표정이란. 장인의 장례식장에서 지을 수 있는 얼굴표정이 아니었다. 처제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몇 억이 생긴다는 말에 입을 떡 벌리고 기쁨이 넘쳐흐르는 표정을 지었다. 정섭씨의 아내인 미정도 조금 놀란 표정을 짓긴 했지만, 정섭씨나 미정씨의 동생처럼 마냥 기쁘기만 한 얼굴은 아니었다.      


 부모에게서 돌아서더라도 끝까지 고집을 부려 선택한 남편 정섭씨. 결혼 전에는 세상 물정을 몰라 마냥 남편만을 쫓았고, 결혼 후 세상을 알고 나서는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에 부모님에게 차마 다가갈 수 없었다. 그런 못난 딸을 위해, 딸이 낳은 손주를 위해 당신의 죽음 이후 물려줄 것들까지 준비해 놓은 아버지께, 살아생전 해드리지 못했던 일들이 떠올라 더욱더 눈물이 쏟아졌다.      


“네 아버지가, 너 고생하는 거 보면서 많이 안타까워 하시면서도, 네가 고생을 해봐야 세상을 알고, 그래야 명현이도 바르게 키울 수 있다면서 돌아가실 때까지 꾹 참았어. 네가 여관방 월세 밀렸다고 네 동생 현정이한테 20만 원 빌려 갔다는 말을 들었을 땐, 혼자 밤에 어디를 나가서 술을 마셨는지, 만취해가지고 집에 와서는 혼자서 얼마나 울어 대던지......”    

 

“야! 너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걸 아빠한테 말했어?!! 내가 금방 갚아줬잖아!!”    

 

미정씨의 동생 현정씨는 우물쭈물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그냥 확 내질렀다.    

 

“아, 몰라!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왔는데 어떡해?!”    

 

 정섭씨의 아내는 자기 때문에 눈물을 흘렸을 아버지를 생각하며 오열했다. 정섭씨는 그런 아내를 위로한다며 위로하고 있었지만, 보험금 생각으로 얼굴에 묻어있는 기쁨은 차마 감추지 못했다.    

 

“손님 오셨네요.”     


다음 날 발인식에 함께 가기 위해 머물러 있던 친척들중 한 명이 방 앞에서 말했다.  

   

“엇? 이 시간에?”     


정섭씨는 얼른 방에서 일어나 빈소로 나갔다.    

 

“어? 뭐야?!!”     


“야~ 잘 지냈냐? 이런 큰일을 당했으면 미리미리 연락을 했어야지!”     


정섭씨의 군대 동기인 철웅씨였다.     


그가 나타난 모습을 공방의 창문으로 보고서 정섭씨가 외쳤다.   

  

“저 씨바 새끼!! 저 새끼!!”     


하지만, 현재 공방의 정섭씨와는 다르게 과거의 정섭씨는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연락은 씨! 연락이 되야 하지!! 그나저나 어떻게 알고 왔냐?”     


“다 아는 수가 있지. 우선 잔부터 올리고.”     


“어? 어, 그래.”     


 철웅씨는 무릎을 꿇고 향 옆에 놓인 술잔에 담긴 술을 퇴잔그릇에 비웠다. 빈 술잔을 정섭씨가 채워 줬다. 철웅씨는 채운 술잔을 향 위 허공에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세 바퀴를 돌린 후 영정 사진 앞에 놓고 절을 했다. 상주와 손님의 인사를 마치고 둘은 자리에 마주 앉았다. 시간은 이미 자정이 다 되어가고 있어서 장례식장에 일을 도와주던 도우미 아주머니들은 모두 퇴근하고 없었다. 정섭씨의 아내가 수육과 밥, 반찬들을 내왔다.   

  

“여긴 우리 와이프. 여보. 여긴 내 군대 동기야.”     


“아~ 그 철웅씨?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정섭씨 부인은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 아니라, 정섭씨로부터 정말 군대 동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구타와 얼차려가 하루 일상이었던 군대에서. 그 힘든 시절을 같이 보냈던 군대 동기. 인간답지 못한 대접을 받는 극한의 상황에서 볼 거, 못 볼 거까지 다 본 사이였기에 그 누구보다 더 가깝게 지낸, 단 둘밖에 없는 전우였다.   

   

 함께 전역식을 마치고 국밥에 소주 한잔 하면서, 사회에서도 자주 연락하고 지내자고 다짐했다. 처음 몇 년간은 만나진 못해도 꾸준히 연락을 하고 지냈다. 그런데, 그런 친구가 정섭씨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렇게 결혼식에 오지 않은 친구는 몇 년이 지나도록 그동안 연락조차 되지 않았었다.       


 그런 전우가 정섭씨 장인의 장례식에 찾아온 것이다. 당시엔 몰랐다. 전우의 방문이 정섭씨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리는 시발점이 될 줄은.

매거진의 이전글 대구탕집 2층 공방 3 (완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