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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건우 Aug 13. 2024

나이가 주는 여유

소상공인랩소디

며칠 전.


친구 아버지의 장례식장.


매장 손님이 늦게까지 있어서, 가게를 다 정리하고, 집에 가서 씻고 집을 나서니 벌써 11시가 넘었다.


함께 가기로 했던 친구는 이미 초저녁에 다녀갔고, 나 홀로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남아있는 친구들이 있을까?'


난 간단히 인사만 하고 집으로 돌아올 생각을 했다.


예전엔 밤을 새워 자리를 지키는 게 예의였으나, 지금은 늦은 시간 가는 것도 실례가 되어버린 세상.


12시 전에 꼭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에 급히 달려갔다.


장례식에 도착하니, 다행히 사람들이 제법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한쪽에는 친구들도 있었다.


빈소에서 인사를 올리고,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왔어?"


10명 남짓의 친구들이 있었는데, 대부분은 아는 얼굴이었고, 한 두 명은 같은 학교 출신이지만 이름도 모르는 사이였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어디서 뭘 하는지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얼마 전에 우리 매장 근처 가야컨트리클럽에서 있었던 총동창회 골프대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야. 그때 누가 상 타지 않았어?"


누가 몇 타를 쳤는지, 어떤 상을 탔는지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협찬을 한 우리 제품 멸치육수 선물세트에 대한 이야기도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어떻게 우리 동기가 협찬한 제품을 동기들 중에 받은 사람이 한 명도 없냐?"


"그러게. 집에 가져다주면 좋아할 텐데? 요리할 때 쓰기 편하다고."


"아니지. 요즘 어느 집 와이프들이 요리하냐? 들고 가봤자 본인이 요리해야 하니까 거른 거 아닐까?"


웃고 떠들다가 한 친구가 물었다.


"근데, 넌 왜 제품 협찬만 하고 공치러 안 왔냐?"


친구들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예전 같았으면 대답이 길었겠지만, 요즘엔 이런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잘 안다.


"어? 아, 나 골프 못 쳐."


"아......."


대부분의 친구들이 수긍을 한다. 가끔 몇몇 친구들이 이런 대답에 고개를 갸웃 거리며 물어볼 때도 있다.


"뭐? 골프장 주위에서 장사하는데, 공을 못 쳐?"


그럼 나도 한마디 한다.


"야. 그럼 뭐, 버스 종점에서 기사식당 하시는 이모님들은 다 버스 몰 줄 알아야 되냐?"


친구들이 웃는다. 나도 그냥 웃고 만다.


사실 전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괜히 말이 길어지고 피곤해진다. 치지 않은지가 벌써 20년이 다 되어 가기에. 당시엔 같이 칠 친구도 없었다. 대부분이 학생이었기 때문에.


이젠 대부분의 친구들이 다 골프를 친 지가 제법 오래되었으니, 이런 질문은 거의 하지 않지만, 예전에 공을 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공을 친다고 하면 꼭 물어보는 질문이 있었다.


"어디서 머리 올리셨어요?"


기생들에게 사용하던 이런 표현이 왜 여기에도 적용을 하게 되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지만, 이렇게 물어보고 자기는 어디서 머리를 올렸는데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즐겁게 웃고 떠든다. 


처음 시작할 땐 모든 것들이 신기하고, 재밌으니까.


당시 나에게도 물어보면,


"아. 제가 외국에 있을 때......"


20대 중반. 당시엔 어울리던 사람들이 거의 다 형님들이라 웃으며 즐겁게 받아주시는 분들도 계셨지만, 때론 이런 대답으로 내가 재수 없는 사람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몇 번 고쳐보다가, 시행착오 끝에 가장 편안한 대답을 찾은 것이 그냥 못한다였다.


편했다.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이 그 이상의 질문은 던지지 않았으니까.


친구들은 자신의 영웅담을 늘어놓듯 이야기를 하다가, 나의 가게가 골프장 근처에 있다는 사실에 신경이 쓰였는지, 한 친구가 말했다.


"야. 미안하다. 내가 먹으러 가자고 해도, 같이 공치러 나가는 사람들이 계속 다른 걸 먹으러 가자고 해서. 진짜 미안. 다음엔 나 혼자서라도 갈게."


친구들 사이에서 공을 가장 잘 친다고 소문난 친구가 말했다.


건물주.


우스갯소리로 조물주 위에 있다는 건물주.


그 친구는 따박따박 월세를 받으며 인생을 즐기는 건물주다.


나는 이것도 본인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능력? 그게 무슨 능력이냐? 부모님이 물려주신 걸로 평생 먹고사는 놈이! 젊은 놈이 그게 할 짓이냐?! 일을 해야지! 일을!"


언젠가 누군가 입에 침을 튀기며 이 친구에 대해 깠던 말.


그런데...... 부모가 물려준 것을 잘 지키는 것도 능력 아닌가? 나는 주위에서 부모님 재산 다 까먹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도 수두룩하게 봤는데??


뭔가 막 저지르는 걸 좋아하는 나에게 이 친구의 방어적인 성향이 맞지는 않지만, 그게 누군가로부터 욕먹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게 뒤에서 이렇게 험담하는 놈들은 자신의 것을 가만히 지키고 있는 사람도 욕하고, 도전했다가 실패한 사람도 욕한다. 


게. 다. 가 도전해서 성공한 사람조차도 이들에겐 욕먹을 대상이다!


"그렇게 돈 벌어서 뭐 하냐? 나 같으면 안 벌고 만다!!!"


남의 험담을 하는 인간들은 상대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험담을 하게 마련이다. 


본인의 자존감이 낮기 때문에 그렇게 험담을 함으로써 자신의 부족한 자존감을 채워보려고 애쓰지만, 그럴수록 본인의 자존감만 더욱 낮아지는 일의 반복일 뿐이다.


건물주 친구도 안다. 누가 그런 소릴 하고 다니는지. 나도 안다. 누가 나에 대해 뭐라 말하고 다니는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다. 말이란 돌고 돌아 나의 귀에 들어오는 법이기에.


욕을 하는 사람 자신만 모른다. 상대가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을.


'하..... 이놈의 자식을 어떻게 사람 만들지?'


동기들 중에도 주야장천 남 험담만 하는 친구가 있다.


예전엔 험담을 잘하기로 유명한 이 친구를 어떻게 바꿔야 하나 고민도 많이 했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그냥 자기 인생 자기가 알아서 사는 거다.


누군가 그랬다. 가장 좋은 충고는....... 하지 않는 거라고.


장례식장을 다니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이런 생각이 더 많이 든다. 


남의 인생에 간섭하지 말자.


이젠 남은 내 삶에 더 충실하자.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물론, 무릎도 아프고, 발목도 아프고, 허리도 아픈 횟수가 더욱 잦아지지만, 예전엔 바쁘다는 핑계로 지나쳤던 집 앞마당의 꽃들과, 가게 앞 심어 놓은 야채들이 몸이 아픈 횟수보다 더 자주 눈에 들어온다.


매일 아침 해결해야 할 일들은 여전하지만, 예전엔 그것들에 불안한 마음으로 눈을 떴다면, 요즘은 오늘 아침 무탈하게 일어난 나에게 감사함을 느끼며 하루를 시작한다.


당장 내일 아니, 오늘이라도 나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남의 인생에 대해 불평할 시간에, 나의 삶에 더 충실하자.




나 자신도 바꾸지 못하면서, 남을 바꾸려고 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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