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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건우 Aug 31. 2024

일회용 일기

쓰고... 지운다.

주경 씨의 아들 승원이가 의식을 잃은 지 8일째.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주경 씨는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이 더 심장을 타들어 가게 만들었다.     


주경 씨는 곁에서 늘 응원해 주고 희망을 주는 친구 지애 씨 덕분에 그나마 숨을 쉴 수가 있었다. 


주경 씨와 지애 씨는 며칠 전 대구탕 매장 2층 테라스에서 둘만의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나서는 매일 그곳을 찾았다. 


오전과 오후 딱 30분만 면회가 허락된 중환자실의 복도에서 갑갑한 마음으로 기도만 하던 주경 씨도 대구탕 가게 2층 테라스에서는 친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웃기도 하며 조금이나마 희망과 긍정의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편하게 구경하세요. 공방 안에서 커피를 드셔도 괜찮아요.”     


 2층 공방 입구에 있는 시간을 달리는 공방이라는 현판을 보고 1층 대구탕 매장의 사장에게 물었더니 돌아온 말이었다. 


고맙게도 남자 사장은 매일 대구탕을 먹으면 금세 물려서 대구탕 간판만 봐도 속이 울렁거릴 수 있으니, 1층에 들리지 말고 곧장 2층으로 올라가도 된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그녀들은 2층 테라스에서 커피도 마시고, 공방도 둘러보곤 했다.      


“야, 주경아. 나무 바닥이 꼭 우리 어릴 때 학교 마룻바닥 같지 않아? 반들반들하게 한다고 양초를 가져와서 나무에 막 문지르고 그랬잖아?”     


“정말 그러네? 나무 냄새가 나는 것도 좀 비슷한 거 같고.”   

  

요즘엔 흔하지 않은 나무로 된 바닥을 보며 둘은 학창 시절 이야기를 나눴다. 


두 사람은 그 시절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들에게도 아이들이 없었던 시절이 있었고, 남편이 없었던 시절이 있었으며, 돌봐야 할 가정도 없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었던 시절도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립네.... 그때가.”     


지애 씨가 의자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주경 씨도 그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근데.... 진짜 만약에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똑같은 선택을 할까?”   

  

“미쳤니? 이렇게 살게?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난 결혼 같은 건 죽어도 안 할 거야!”     


지애 씨가 단호하게 말했다.     


“뭐가 좋다고 결혼을 해서 이 고생을 하면서 살아? 남편 뒷바라지에, 아이들까지. 어떻게 보면 요즘 젊은 사람들 결혼 안 하고 사는 거. 그게 맞을 수도 있다니까?”     


“그래도... 그런 말도 있잖아. 자녀가 없으면 슬픔도 없지만, 기쁨도 없다.”


자녀란 말을 입에 담는 주경 씨가 살짝 괴로운 듯 보였지만, 그래도 처음보단 훨씬 나아졌다.     

 

“그건 그냥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지어낸 말이야. 자기가 자식이 많았거나. 물론 아이들 커 가는 거 보면서 즐거움도 있고, 기쁨도 있지, 그런데 그게 내 인생과 바꿀 만큼의 가치가 있다? 난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 어차피 인생은 한 번 사는 거잖아. 나도 주은이가 있지만........ 잘 모르겠어. 딱 한 번 사는 인생인데...”    

 

그때 지애 씨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딸 주은이었다.     


“주경아, 잠깐만!”     


“어~ 그래 우리 딸~~”     


지애 씨가 전화를 받으며 공방 밖 테라스로 나갔다. 


주경 씨가 피식 웃었다. 


방금 다시 돌아간다면 결혼은 죽어도 하지 않겠다던 사람이 딸의 전화를 받자 간드러진 목소리가 꿀처럼 진득하게 녹아내렸다.   

  

“퍽이나 안 하겠다.”   

  

 주경 씨가 창밖으로 지애 씨를 보며 혼잣말을 했다. 


딸과 즐겁게 통화를 하는 친구를 보자 주경 씨도 아들 생각이 나면서 다시 불안과 슬픔이 엄습해 왔다. 


주경 씨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했다. 


하나님, 부처님, 성모마리아까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신들을 다 부르며 제발 하루빨리 승원의 정신이 돌아오기를 빌었다. 

    

또르르 눈물이 흘렀다. 


입술이 덜덜 떨렸다. 


그렇게 눈을 꼭 감고 마주 잡은 손을 떨면서 계속 기도를 했다. 


그렇게 얼마나 오랫동안 기도를 했을까. 


기도를 하고 있으면 통화를 끝내고 들어올 거라 생각했던 친구가 아주 오랫동안 기도를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도,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주경 씨는 천천히 눈을 떴다.     


“어맛?!”     


감았던 눈을 뜬 주경 씨는 깜짝 놀랐다. 


분명 아침에 이곳에 왔는데, 지금은 공방이 깜깜한 밤이었다.    

 

“이... 이게 도대체....”     


-째깍째깍     


공방을 쭉 둘러싼 좁고, 위아래로 길쭉한 창문. 


그리고 창마다 위에 걸려 있는 시계에서 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다. 


주경 씨도 홍사장이 겪었던 것과 똑같은 순간을 지금 경험하고 있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홍사장의 공방은 살짝 어두운 정도였지만, 주경 씨의 공방은 아주아주 캄캄하다는 것이었다. 칠흑처럼. 

    

비가 내리고, 눈이 내리고, 햇볕이 쨍쨍하고, 푸른 달빛이 비치는 각각의 창들. 


주경 씨는 창마다 펼쳐진 다양한 모습들에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떨리는 몸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그 많은 창들 중 하나의 창에서 아들 승원이가 쓱 스쳐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스, 승원아!!”    

 

 주경 씨는 소리를 지르며 방금 승원이가 지나간 창문을 들여다봤다. 딸깍 불이 켜지고, 승원이의 방이 나타났다.   

   

“휴우....”     


 승원이가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꿈에도 그리던 승원이의 모습을 보고 주경 씨가 손을 뻗었지만, 차가운 유리창만 만져질 뿐, 승원이는 만져지지도, 자신을 인식하지도 못했다.   

  

 승원이의 표정은 평소 주경 씨가 보던 밝은 표정이 아니었다. 


어딘가 모르게 지치고, 힘들어 보이는 승원이의 모습. 


승원이는 책상 의자에 앉아 종이에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그러다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쓰던 종이를 구겨서 휴지통에 버렸다. 


주경 씨는 평소 휴지통에 그렇게 구겨진 종이가 많은 걸 별생각 없이 버렸었다. 


학습지를 보면서 문제를 푸는 연습장이겠거니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승원이는 분명 학습지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뭔가를 쓰고 있는데, 주경 씨는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주경 씨가 자세히 보고 싶다고 생각하니 마치 돋보기로 확대라도 하는 것처럼 승원이가 쓰고 있는 종이가 창에 크게 나타났다.   

  

아빠랑 이번 주 토요일 야구를 보러 가기로 했는데, 엄마가 그날 영어 과외 선생님이 저녁에 오신다고 안된다고 했다. 


지난 수요일 영어 선생님이 일이 있어서 수업을 못했는데, 그걸 토요일 저녁수업으로 대체한다고 했다. 


엄마한테 영어 수업을 다른 시간이나, 일요일로 바꾸면 안 되냐고 물었는데, 엄마는 안된다고 했다. 


영어선생님 시간이 안 될 거라고. 


영어선생님께 전화도 해보지 않고, 물어보지도 않고서... 난 그냥 알겠다고 했다. 


어떻게 하더라도 엄마의 말대로 될 것이기 때문에. 


아빠한테서 전화가 왔다. 


엄마에게 들은 말을 전하니, 아빠는 잠시 고민하다가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역시 내 예상대로였다. 


가끔 엄마와 아빠가 어떤 일에 의견이 달라 다툴 때도 있었지만, 이렇게 나의 공부나 수업과 관련된 일이 있으면 언제든 나의 공부나 수업이 우선되었다. 


이해한다. 


전에 아빠는 코로나가 걸렸을 때도 기침을 콜록거리면서도 출근을 했다. 


몸도 아프고, 다른 사람들한테 전염이 될 수도 있는데 그냥 집에서 쉬면 안 되나? 하고 생각을 했었는데, 아빠가 그렇게 아픈데도 출근을 하는 이유가 나의 과외비 때문이라는 것을 엄마와 아빠가 다툴 때 듣고서 알게 되었다. 


그럼 과외를 좀 줄이면 되지 않을까? 


내가 이렇게 과외를 한다고 해서 엄청 훌륭한 사람이 된다거나, 공부를 특별히 잘할 수도 없을 것 같은데 말이다. 나는...     




아들이 글을 쓰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났다. 


크게 보이던 글씨가 갑자기 쑥 줄어들며 글을 쓰는 아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들은 얼른 쓰던 종이를 구기더니 쓰레기통에 버렸다. 


잠시 후 아들의 방문을 열고 주경 씨가 나타났다. 


주경 씨를 보자 아들의 조금 전 우울한 표정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싹 사라지고, 애써 웃는 표정을 지었다. 


어색했다.      


“과외 선생님이 내준 숙제는 다 했어?”     


집에 오자마자 아들 방문을 열고 한 첫마디. 


창문 속 주경 씨는 자기 자신이 보기에도 조금 날카로워 보였다. 


게다가 지금 딱 보기에도 애써 웃음을 짓느라 너무 어색해 보이는 아들의 얼굴 표정을 보고서도 물어보는 말이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분 안 좋은 일이 있는지, 어떤 걱정이 있는지가 아니라 숙제는 다 했냐는 말이라는 게 도무지 스스로도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응.”     


“그래. 엄마 아빠 피 같은 돈으로 과외하는 거니까 숙제 빼먹지 말고.”     


주경 씨가 아들 방문을 닫고 나갔다. 


승원이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그동안 자신이 보지 못했던 승원이의 표정. 닫힌 방문 사이로 승원이의 표정이 늘 저랬을 거란 생각을 하니 주경 씨의 마음이 찢어지는 듯했다.   

   

창문은 곧 불이 꺼진 것처럼 깜깜해지더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주경 씨는 고개를 돌려 바로 옆 달빛이 교교하게 비치는 창문으로 갔다. 


환하게 떠 있는 푸른 달빛 아래에 주경 씨 가족이 살고 있는 아파트가 보였다. 


창문은 마치 카메라가 움직이듯 점점 주경 씨 집으로 가까이 다가가며 비춰줬다. 


모든 불이 다 꺼져있는 주경 씨의 집. 


창에 나타나는 화면은 그곳에서도 승원이의 방 창가를 향해 점점 다가갔다. 


불이 꺼진 방. 


창가에서 승원이가 창밖의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 째깍째깍     


시계 소리에 주경 씨가 고개를 들어 공방의 창문 위에 걸려 있는 시계를 쳐다보니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새벽 2시. 


주경 씨와 남편이 잠든 시간. 

    

‘이 새벽에 승원이가 창가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목이 아프진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한참 동안 밤하늘을 빤히 쳐다보던 승원이가 책상으로 가더니 책상의 작은 등을 켜고 앉았다. 


그리고는 또 종이를 꺼내서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주경 씨가 궁금해하니 이번에도 승원이가 쓰는 종이가 돋보기로 확대를 하듯 확 커졌다.  

   

이 시간이 참 좋다. 


누구로부터도 방해받지 않는 시간. 


엄마 아빠도 모두 잠이 든 이 시간에는 누가 내 방에 들어오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고 편하게 일기(?)를 쓸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물론 다 쓰고 나면 구겨서 버리는 일회용 일기지만... 


이렇게라도 마음을 풀 수 있어서 다행이다. 


가만히 하늘을 보고 있으면 어릴 적 엄마 아빠와 함께 갔던 천문대가 생각이 난다. 


어두운 밤에 산을 걸어서 오른다는 것이 신기했고, 거기서 TV나 책에서 영상과 사진으로만 보던 천체를 망원경으로 직접 본다는 것도 너무나 신기했다. 


특히 붉게 빛나는 아름다운 금성의 모습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망원경으로 별들을 관찰하고 난 다음, 정확한 이름이 기억나진 않는데 40~50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동그란 돔 모양의 방에 들어갔다. 


뒤로 눕듯이 앉을 수 있는 의자에 앉아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불이 탁 꺼지고, 돔 모양의 천장에 화면이 켜졌다. 


의자가 돌아가는 것인지, 화면이 돌아가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천장에 나타난 여러 행성들과 별들이 빙글빙글 돌았다.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재미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내용은 여러 별들의 크기를 비교하는 내용이었다. 


지구가 당연히 태양보다 훨씬 작다는 것은 알았지만, 태양보다 더 큰 별과 비교하고, 또 그보다 더 큰 별과 비교하고, 계속 비교해서 태양이 탁구공보다 더 작아지고, 지구가 쌀 한 톨보다 더 작아졌을 때는 뭔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그보다 더 큰 별들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 먼지... 아니, 먼지라고 하기에도 부족한 인간은 이 우주에서 어떤 존재일까? 


왜 태어났을까? 


수십억 년 된 지구의 나이와 비교하면 눈 깜박할 시간이고, 은하의 시간, 우주의 시간에 비하면 눈 한번 깜박할 시간보다도 더 짧은 시간일 텐데…. 그렇게 짧게 살고 가는 인간은 왜 드넓은 우주에서도 은하계에서, 그리고 하필이면 태양계, 거기에서도 지구라는 별에 나타났을까?...     


승원이의 글을 보던 주경 씨는 깜짝 놀랐다. 


그때가 초등학교 5학년. 초등학교 5학년의 승원이가, 그냥 의자가 돌아가고, 천장의 화면이 돌아가고, 우주가 나오고, 여러 종류의 별들이 나타나 마냥 재밌게 본 줄만 알았던 승원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너무나 놀라웠고, 여태껏 그런 사실을 짐작조차 하지도 못하고 있었다는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고 무심하게 느껴졌다.          


다시 승원이의 글을 계속 읽었다.


나는 이렇게 짧은 인간의 시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무엇을 하며 살아야 좋을까? 어떻게 살아야 좋을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사실 별을 보고 온 그때부터 별을 보고 관찰하는 것에 관심이 생겼지만, 평생 직업으로 삼을 만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별 보는 걸 좋아하는 것과, 그것을 직업으로 한다는 것은 다른 일이니까.... 


엄마는 내가 커서 의사나 판검사, 변호사 또는 공무원이나 대기업에 취직하길 원한다. 


다른 엄마들이 다 그렇듯이. 


만약 내가 그런 직업을 가지지 못하면 엄마는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부끄러울까? 


나는 스스로 만족하며 살 수 있을까? 


엄마는 늘 말한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아빠나 엄마처럼 살아야 한다고. 


나는 엄마나 아빠가 부끄럽지 않은데... 


부담스럽다. 


공부. 공부. 


공부를 잘 못하면 그건 잘못된 인생인 건가? 


사람마다 모두 다른 재능이 있다고 했다. 


누구는 공부를 잘하고, 누구는 운동을 잘하고, 누구는 음악을 잘하고... 


이 말을 엄마에게 했더니, 엄마가 나에게 물었다. 


그럼 넌 뭘 잘하는데? 


난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엄마가 나에게 그건 공부를 못하는 사람들이 하는 핑계일 뿐이라고 했다. 


우주에서 찰나의 순간을 살고 가는 짧은 인생. 


공부. 공부. 공부. 


엄마와 아빠가 그렇게 힘들게 돈을 벌고, 나에게 과외를 시키고, 공부를 시키는 게 그럼 엄마와 아빠의 인생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내가 공부를 하고 싶다고, 시켜달라고 해서 시켜주시면 모르겠지만, 내가 하고 싶지 않다고 해도 억지로 시키는 건 본인들의 만족 때문이 아닐까?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래야 본인들 마음이 편하니까.... 


난 그 시간에 엄마 아빠와 많이 웃고, 떠들고, 추억을 만들고 싶은데.. 


언젠가 엄마한테 또 그런 말을 했었다. 


인생의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승자가 아니고, 사는 동안 많이 웃고 산 사람이 승자라는 말을 어디서 봤다고.


그러자 엄마가 말했다. 


그건 분명 실컷 놀기만 하다가 실패한 늙은 노인이 지어낸 말일 거라고. 


갑갑하다. 


벽에게 말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말에 조금만 공감을 해주면, 나도 엄마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주경아!! 얘!!”     


친구 지애 씨의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 주경 씨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 어?”     


“많이 피곤하지? 깊이 잠든 것 같아서 깨우지 않으려고 했는데, 나도 가봐야 해서.”   

  

“뭐? 내가.... 잠이 들었었어?”     


“응. 주은이하고 통화하고 오니까 엎드려 잠들어 있더라고. 승원이 일로 잠을 잘 못 자서 피곤한가 보다 하고 기다렸어. 벌써 30분이 넘게 잤는걸?”     


“뭐? 진짜?”    

 

 주경 씨가 고개를 돌려보니 어두웠던 공방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환했고, 늘어선 창문들 위에는 째깍째깍 돌아가던 시계들도 보이지가 않았다.      


‘뭐지? 그게 다 꿈이었다고?’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생생했다. 주경 씨는 아들이 구겨 버린 종이가 생각났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가자!!”     


주경 씨는 아들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방을 치우지 않았다. 


쓰레기통도 비우지 않았다. 


그 종이들을 확인해 볼 참이었다. 


주경 씨가 2층 공방을 나오며 힐긋 돌아보자 공방의 문 옆에 걸려 있는 현판이 또다시 눈에 들어왔다.   

   

시간을 달리는 공방.     


그 글자가 이전과는 다르게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친구 지애 씨는 주경 씨를 집에 내려다 주고 갔다. 


주경 씨는 집으로 올라가 현관문을 열고 아들 방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쓰레기통에는 종이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아들이 다치고 나서는 한 번도 치우진 못했지만, 다치기 전에는 매일 치우던 쓰레기통. 


그러니까 이 종이들이 하루에 그만큼 쌓인 종이란 의미였다. 


주경 씨는 쓰레기통을 뒤집었다. 


쓰레기가 우르르 쏟아졌다. 


주경 씨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 하나를 펼쳤다.   

 

일회용 일기. 엄마가 볼 일은 없겠지? 


그런데, 나는 이걸 엄마가 보지 않길 바라며 쓰는 걸까? 아니면 언젠가 한 번 봐주길 바라고 쓰는 걸까?      


글은 거기서 끊어졌다.


 주경 씨는 또 다른 구겨진 종이를 펼쳤다.  

    

엄마가 설거지를 하느라 수학과외 선생님과 스피커폰으로 통화를 해서 통화 내용을 듣게 되었다. 


수학 선생님이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다며 이번 주엔 수업에 오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엄마는 조금 망설이다가 마스크를 쓰고 하면 되지 않을까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수학선생님이 말했다. 


어머님. 승원이한테 전염이 될 수도 있고요. 그리고 저도..... 아프거든요? 


처음이었다. 수학선생님이 그렇게 짜증스러운 목소리를 내는 것은. 


물론, 아닐 수도 있겠지만, 수학선생님이 아빠에게 코로나가 옮았을지도 모른다. 


아빠가 코로나에 걸린 사실을 숨겼고, 과외선생님들이 수업을 계속했으니까... 


도대체 과외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처음으로 엄마가 부끄러웠다. 


아빠가 코로나에 걸렸다는 사실을 숨긴 것도, 아픈 선생님에게 와달라고 부탁한 것도...     


주경 씨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글이 끊어진 종이를 내려놓고, 또 다른 종이를 들어서 펼쳤다.   

  

요즘엔 앉아서 공부하는 시간보다, 이렇게 글을 쓰는 시간이 더 많은 것 같다. 


공부에 집중이 되지 않지만, 책상에는 앉아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 뭐라도 하고 있는 줄 아시니까...     


갑갑하다....     


이 생활은 언제쯤 끝날까.... 


대학생이 될 때까지? 


그럼 앞으로 5년을 더 이런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걸까.....?


아니, 대학생이 된다면 정말 끝일까....?


살아가면서도 엄마가 원하는 대로 내 생각과 행동을 맞춰야 하는 건 아닐까?..... 무섭다.     


뚝. 뚝. 


주경 씨의 눈물이 종이 위에 떨어져 번졌다. 


주경 씨는 흐느끼며 종이 하나하나를 펴서 읽어 내려갔다. 


어떤 글에서는 놀란 표정을 지었고, 또 어떤 글에서는 오열하기도 했다. 


그렇게 저녁이 될 때까지 종이에 쓰인 글들을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그날 처음으로 주경 씨는 저녁 면회시간에 아들이 누워있는 중환자실에 면회를 가지 않았다. 


도저히 아들을 보러 갈 수가 없었다. 


아들의 글처럼 찰나의 시간을 살고 죽는 인간의 짧은 삶에서도, 아직 꽃이 피지도 못한 중학교 2학년 아이의 생에 가장 커다란 고통을 준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라는 사실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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