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시간
정 부장이 보이질 않았다.
오늘로 3일째.
지난번 홍사장에게 사표를 쓰고 나서 며칠 더 회사에 나오더니, 이젠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홍사장은 아직 사표를 뜯어보지도 않았다.
그땐 정 부장에게 너무 화가 나서 잘라버리고 싶었는데, 회사 초창기부터 매일 보던 정 부장이 보이질 않으니 뭔가 좀 허전하기도 했다.
“이 자식이! 내가 사표 수리도 아직 안 했는데...”
그렇다고 다시 회사로 부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정 부장이 홍사장의 바짓가랑이라도 붙들고 제발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하면 마지못해 용서해 줄지 모를까, 먼저 전화를 걸어 출근해 달라고 하는 말은 절대 할 일이 없었다.
출근 안 하면 지만 손해지 뭐.
홍사장은 회사를 한번 휘 둘러봤다.
정신없이 바쁘게 일하고 있는 직원들.
그들의 젊음이 홍사장은 새삼 부러웠다.
내가 죽고 여기에 없어도, 저들은 여전히 저렇게 일하고 있겠지. 1년 후에도..... 10년 후에도....
문득 홍사장은 아내가 임종을 맞이하기 전 나누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여보. 근데... 매미는 칠 년 동안 땅속에 있다가 밖으로 나와서 십일 정도 노래를 부르고 살다가 죽는다고 하잖아요?”
“음... 그래. 그렇다던데....”
“사람은 평생 죽기 전까지 육십 년, 칠십 년을 일하다가 병들어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몇 년을 앓다가 죽는데..... 예전에 매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고작 십일 살려고 칠 년을 땅속에 묻혀 지낸다는 게 참 불쌍하다고 생각했는데... 십일이라도 마음껏 노래 부르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고 죽는다니까.... 어떻게 보면 사람의 인생보다 나은 것 같기도 하고... 그리 불쌍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드네요.”
너무 미안했다.
아내는 가정에서도 평생 일을 했고, 회사에서도 평생 일을 했다.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
언제나 휴식은 나중에였다.
회사를 조금 더 키우고 나서, 일 먼저 처리하고 나서, 사람들 좀 만나고 나서, 아이들 뒷바라지하고 나서.
나서. 나서. 나서....
“병원에 있으니까 드디어 당신하고 둘이서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게 되네요?”
아내는 환하게 웃었다.
환자복을 입고서.
평생 일만 하다가, 병원에서 살 수 있다고 말한 주어진 석 달 중에서 두 달을 채우지 못하고 아내는 세상을 떠났다.
“허허.....”
헛웃음이 나왔다.
아내가 떠나고 난 이후 홍사장은 한동안 슬픔에 젖어 지내다가 더욱더 일에 매진했다.
여태까지도 홍사장은 워커홀릭 수준으로 일에 매달렸지만, 아내가 죽고 난 이후엔 그 수준마저도 넘어버린 듯했다.
아내를 잃은 슬픔을 잊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아내와 제대로 휴식다운 휴식도 취해보지 못했는데, 홀로 쉬는 시간이면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해서였다.
홍사장은 자신에게도 삶이 이제 한, 두 달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인생이 참 별거 없다고 생각했다.
젊은 시절에는 그저 열심히 일하면, 나이가 들어서 여유가 생기고, 그렇게 여유가 생기면 그동안 열심히 일한 보람을 느끼며 여행도 다니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유유자적 인생을 즐기며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땐 항상 사랑하는 아내가 곁에 함께 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때가 되면 아내도 지금의 고생에 대한 보상을 받을 거라고.
함께 열심히 밤새워 일한 오늘을 추억하며, 열심히 살았던 우리의 젊은 날을 감사할 거라고...
사업은 순탄했다.
가끔 뜻하지 않은 사고들도 있긴 했지만, 어떻게든 큰 문제없이 해결이 되었고, 회사는 계속해서 무난하게 굴러갔다.
처음엔 사업이 쉽지 않을 거라고 걱정하던 사람들도 회사의 규모가 조금씩 커지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홍사장에게 성공했다, 부럽다는 말을 했다.
멈춰야 했다. 욕심을.
더, 더, 하는 욕심만 부리지 않았어도, 딱 적당한 선에서 멈추기만 했다면 얼마든지 아내와 여행도 가고, 영화도 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인생을 즐기며 살 수 있었다.
그 정도의 여유는 충분히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질 못했다.
그놈의 욕심 때문에.
늘 허기가 졌고, 갈증을 느꼈다.
허기를 채우면 또 다른 허기가 몰려왔고, 갈증을 해소하면 새로운 갈증이 찾아왔다.
그렇게 늘 헐떡이는 개처럼, 늑대처럼 살았다.
만족할 줄 모르는 짐승처럼.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면... 그럼 멈출 수 있을까?
그건 알 수 없었다.
아내가 곧 죽음을 맞이할 거라는 미래를 볼 수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계속해서 달릴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이제 죽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디론가 훌쩍 떠날까? 그리 내키지 않았다.
좋은 곳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더라도 그리 즐거울 것 같진 않았다.
곧 죽을 텐데....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허 선생의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가볼까?'
딱히 공예에 흥미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죽을 때까지 마땅히 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이상하게 허 선생의 공방이 자꾸만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아들과 딸의 얼굴도 떠오르긴 했지만, 본인들 가정을 잘 일구며 살고 있는데, 근심 걱정거리를 급히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알게 될 일.
마음 같아서는 그냥 자신이 죽고 난 후에 자녀들이 알게 되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럼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조금은 덜 할 수 있을 테니.
그러면 조금 섭섭하려나? 그래도 지금은 알려주고 싶지가 않았다.
홍사장은 차를 몰아 회사를 나왔다.
살면서 처음으로 일이 아니라, 배를 채우기가 위함이 아니라, 급히 다녀와야 하는 곳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기 위함이 아니라, 지극히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움직여 회사를 나서봤다.
여유로웠다.
급할 것이 없었기에.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인 곳으로 향하고 있었기에.
홍사장은 블루투스를 차에 연결하고, 아내가 죽은 뒤 처음으로 차에서 라디오뉴스가 아닌 듣고 싶은 음악을 틀었다.
천천히 차를 몰면서 가다 보니, 평소에 보지 못했던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이곳은 공장들만 우후죽순 들어선 곳이라 생각했는데, 그 사이사이 울창한 숲도 보였고, 길가에 핀 꽃들도 보였다.
길가에 지어진 공장들의 이름과 어떤 제품을 생산하는 곳인지는 훤히 알았는데, 여태껏 공장과 공장 사이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제대로 본 적도 없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차라리 다행인가? 지금이나마 이런 것들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만약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었다면 이런 것들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고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그럼 평생 일만 하다가 죽는 거겠지. 매미에게 주어진 십일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한, 두 달의 자유도 누려보지 못하고. 땅속에만 있다가 죽은 매미처럼 일만 하다가 죽는 거겠지.
육십을 살든, 칠십을 살든, 팔십을 살든 자신에게 주어진 매미의 십 일과 같은 시간은 마지막 한, 두 달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이라도 빨리 죽는 만큼, 일도, 고생도 덜하고 죽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 살짝 기분이 좋아졌다.
왜 이런 기분이 들지? 죽음을 앞두고 내가 살짝 미쳐버린 건가?
홍사장은 음악을 들으며 차를 타고 달렸다.
공방에 가기로 마음먹었기에, 바로 갈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돌아가는 길을 선택해 빙빙 돌아 드라이브를 실컷 하고 대구탕 가게 앞 주차장에 주차를 했다.
1층 대구탕 가게 앞으로 걸어갔다.
차를 타고 오면서 생각했던 그 꽃이 청초하게 홀로 서 있었다.
아내가 좋아했던 아이리스.
홍사장은 아이리스 가까이 다가가, 아이리스향으로 코를 흠뻑 적셨다.
“흐음.......”
잠시 눈을 감고 향을 음미했다.
지난번 피었던 꽃잎은 지고, 새로운 꽃잎이 올라오고 있었다.
같은 하나의 줄기에서 자라는 꽃잎들도 피고 짐의 시기는 모두 다르다는 것이 신기했다.
허 선생은 1층 대구탕 가게에서 음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해 보였다.
허 선생의 아내인 여자 사장도 보였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둘이서.....'
홍사장은 마치 자신과 아내의 젊은 시절을 보는 것 같았다.
물론 이곳 대구탕 매장의 규모는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보다 훨씬 작았지만,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부부가 함께 일을 한다는 것이 비슷한 처지로 다가왔다.
'허 선생은 알까? 저렇게 평생을 일만 하다가 누구 하나가 아프거나, 죽을 때가 다 되어서야 이 고생이 끝난다는 걸......'
아마, 겪어보고 나서야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늦었구나 하는 후회도 들 것이다.
남자 사장과 여자 사장 둘이서 열심히 음식준비를 하고 있는데, 괜히 방해하고 싶지 않아 홀로 2층으로 올라갔다.
“여긴 항상 열려있어요. 문도 잠그지 않으니, 언제든 편하게 오셔서 하고 싶은 걸 하세요.”
지난 공방에서의 수업시간.
다음 수업시간을 기약할 수 없는 홍사장에게 허 선생이 한 말이었다.
2층에 걸려 있는 현판.
시간을 달리는 공방.
그 옆에 있는 입구 문을 당기자 문이 열렸다.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나며 공방 특유의 나무 먼지 냄새가 확 풍겼다.
나무로 된 공방의 바닥 위에 올라서자 홍사장의 구두 발자국 소리가 크게 울렸다.
홍사장은 공방을 찬찬히 둘러봤다.
지난번 허 선생이 있을 때는 자세히 보지 못한 것들까지 천천히 살펴봤다.
대부분 도마, 의자, 테이블 같은 것들이었는데, 때론 나무뒤주 같은 흔히 볼 수 없는 옛 물건들도 보였다.
그리고 무엇에 쓰이는지 알 수 없는 나무로 만든 물건들은 엄청나게 오래되어 보이기도 했다.
마치 수백 년이나, 수천 년 전쯤 만들어진 것처럼.
조금 더 안쪽으로 가자, 한쪽에 작업 중인 목판 하나가 보였는데, 그것은 가구를 만드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고, 어떤 글귀를 쓰다가 만 것 같았다.
- 타인의 시간을 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을 불가능....
쓰다가 무슨 일을 하러 갔는지, 글은 여기까지만 쓰여 있었다.
타인의 시간을 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무슨 의미인지 아리송했다.
이것을 불가능.....
이 뒤에는 어떤 글을 쓰려고 했던 것일까?
허 선생이 쓰던 글이겠지? 나중에 허 선생이 오면 물어봐야 하나? 혹시, 허 선생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쓰던 글인가?
알 수 없었다. 물어보기 전까지는.
2층 공방에는 차가 다니는 도로 쪽 창문과 뒤에 있는 산 쪽으로 난 창문이 여러 개가 있었다.
차가 다니는 도로 쪽으로 난 창에는 햇빛이 들어왔다.
홍사장은 창가로 걸어가 창밖을 봤다. 왕복 4차선이고, 살짝 커브 길인 도로 위를 차들이 뭐가 그리 급한 일들이 있는지 쌩쌩 바쁘게 달려갔다.
나도 저렇게 급하게 달리고 있었겠지? 곧 죽을 거란 얘기를 듣기 전이라면.
저렇게 달리는 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도 죽을 때가 돼서야 달리는 속도를 늦추겠지.
왜 저땐 천천히 달릴 생각을 못했을까...
홍사장은 한동안 창밖의 차들을 그렇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공방의 벽을 따라 나 있는 창문들이 보였다.
공방에는 폭이 좁고 위아래로 길쭉한 창문 여러 개가 벽을 따라 빙 둘러서 있었다.
창틀은 나무틀이었는데, 만든 지 제법 오래되었는지 비틀림이 생겨 벽과 나무창틀 사이에 공간이 생겨 그곳으로 바람이 숭숭 들어왔다.
'허 선생은 공방 창틀부터 우선 고치셔야겠구먼.'
도로의 반대편으로 난 창들엔 햇빛이 들지 않았다.
그곳의 창에는 뒷산과 울창한 숲이 비치고 있었다.
오늘 아침은 바람도 잠이든 듯 숲이 고요했다.
매미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산은 고요했다.
바쁘게 달리는 차들과, 고요한 숲.
1층엔 대구탕, 2층엔 공방이 있는 건물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방향의 창문들은 서로 너무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홍사장은 자리에 앉았다.
지난번 허 선생으로부터 이론수업을 들었던 그 자리였다.
자리 위에는 만들다 만 나무 도마 몇 개가 놓여 있었다.
홍사장은 나무도마를 살짝 만져봤다.
손에 나무 먼지가 묻었다.
손을 툭툭 털었다.
'왜 왔을까?'
문득 홍사장은 그렇게 많은 장소들 중에서 자신이 왜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죽기 전까지 정신없이 돌아다녀도 가고 싶은 곳을 다 못가 볼 텐데.
얼마 전 딱 한 번 처음으로 와본 이곳 2층 공방을 왜 왔을까?
홍사장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냥 머릿속에 떠올랐고, 이곳에 오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홍사장은 편안하게 자세를 취하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조용한 공방.
홀로 이곳에 앉아 있으니 아늑하고 평온했다.
회사에는 될 수 있으면 자신에게 전화하지 말고, 웬만한 결재는 전무님 전결로 하라고 일러뒀다.
작은 것 하나까지 꼬치꼬치 캐묻는 성격인 홍사장의 말에 경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네? 정말요?”
믿을 수가 없다는 듯한 경리의 반응에 홍사장은 평소 자신의 성격과 행동을 짐작하며 쓴웃음을 지었었다.
그렇게 살아서 온 마지막 종착지가 여기인가... 아쉬웠다.
딱 여기까지가 마지막이라는 걸 알았다면 그렇게 정신없이 살지는 않았을 텐데.
대기업 CEO 도 아니고, 중견기업도 아니고, 겨우 이런 작은 회사 대표로 삶을 끝낼 줄 알았더라면, 지금보다 조금 더 규모가 작았을 때라도 처분하고 여행이나 다니며 인생 즐기고 살았을 텐데...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있는데, 마음이 평온해서 그런지 슬슬 졸음이 쏟아졌다.
'잠깐 눈 좀 붙일까?'
이렇게 잠이 올 때는 억지로 버티면 계속 피곤했다.
잠깐 5분에서 10분 정도 눈을 붙이면 푹 잠을 자고 일어난 것처럼 아주 개운하고 좋았다.
홍사장이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다.
낮잠은 누워서 1시간씩 자버리면 오히려 더 피곤하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1시간이나 허비하다니!!
눕지 말고 앉아서 5분에서 10분. 이 정도가 딱 좋았다.
그래.
잠시만 눈을 붙이자.
홍사장은 평소처럼 눈을 감고 졸았다.
그리고 잠시 후 눈을 떴다.
5분쯤 잤을까? 아주 짧은 시간.
개운했다. 평소처럼.
역시 낮잠은 짧게 자는 잠이 최고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 햇빛이 들어와 밝았던 공방에 지금은 햇빛이 없었다.
밤처럼 까맣지는 않았지만, 조금은 어둡게 느껴졌다. 그사이 구름이 끼었나?
홍사장이 날씨를 가늠하려 바깥 하늘을 보기 위해 공방을 빙 둘러싸고 있는 창문들을 보다가 화들짝 놀랐다.
“뭐, 뭐야! 이게 뭐야?!!”
홍사장은 눈을 비비고 다시 창문들을 쳐다봤다.
홍사장의 입이 떡 벌어졌다. 분명 같은 풍경을 비춰야 할 창들이, 창 하나, 하나마다 전혀 다른 풍경을 비추고 있었다.
이쪽 창에는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고, 저쪽 창에는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이 펼쳐져 있었으며, 다른 창에는 화창하고 푸른 하늘아래 낙엽이 떨어지고 있었다.
이건 무슨 조화야? 지금은 5월인데? 아니, 애초에 이게 말이 되냔 말이야!
홍사장은 너무 놀라 쿵쾅쿵쾅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진정하자! 진정! 이러다가 심장마비라도 오면 죽을 수도..... 아니, 아니지. 어차피 곧 죽을 건데.... 아닌가? 벌써.... 죽었나? 내가 정말 죽은 건가?'
홍사장은 놀란 마음을 애써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창가로 다가갔다.
여러 개의 창 위에는 아까는 보지 못했던 동그란 시계들이 달려있었다.
각각의 창마다 걸려 있는 시계는, 각기 다른 시간을 나타내고 있었다.
-째깍째깍
창에 가까이 다가가자 시계 소리도 점점 크게 들려왔다.
홍사장은 여러 개의 창 중에서 눈이 내리고 있는 창가로 다가갔다.
5월에 눈이 내리다니!!
홍사장이 창을 들여다보니, 아니 이게 뭐야?!!
그곳에 젊은 시절의 아내와 홍사장 자신이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놀랍기도 했고, 반갑기도 했다. 바로 눈앞에 죽은 아내가 있다니!
.
.
.
“내가 이 새끼를 그냥!!”
“아이. 좀 참아요.”
눈이 내리는 어두운 밤. 사무실에서 홍사장이 화를 내고 있었고, 아내가 말리고 있었다.
“참긴 뭘 참아?! 만날 사고만 치는 이놈의 새끼! 뭐? 이름이 대운이라서 회사에 운을 몰고 올 거라고? 지랄!! 하는 짓 보면 완전 대흉이다 대흉!!”
'아, 그때구나!'
정대운.
지금은 부장이지만, 당시는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사원일 때였다.
신입사원을 뽑는 면접 때 그가 말했다.
“제 이름이 정! 대! 운!입니다! 사장님 회사에 큰 운을 가져올 인재!”
“운이 안 들어오면요?”
홍사장이 농담 삼아 물었다.
“.. 예?..”
정대운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대운 씨를 뽑았는데, 운이 안 들어오면 어떡하실 거냐고요.”
“그... 그렇다면... 뽑아만 주시면 어디서 운을 만들어서라도 가져오겠습니다!!”
홍사장이 피식 웃었다.
어디서 만들어서라도 가져오겠다는 그 패기가 마음에 들었고, 서글서글한 인상도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정대운은 홍사장과 함께 하게 됐다.
그런데, 입사를 하고 나서 보니 일을 배우는 것도 더뎠고, 자잘한 사고도 많이 쳤다.
신입사원을 잘못 뽑았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하고자 하는 열정만큼은 대단해서 조금 더 지켜보자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정말 큰일이 날 뻔한 사고를 쳐서 홍사장은 화가 머리끝까지 뻗쳐 있었다
.
.
.
.
아내와 둘이서 밤이 늦도록, 때론 날밤을 새울 때도 있을 정도로 홍사장과 아내는 열심히 일했다.
그날도 일이 많이 밀려 있어서 둘이서 밤을 새우며 일을 해야 했는데, 정대운 사원이 홍사장에게 남아서 일을 돕겠다고 했다.
“그냥 퇴근해. 괜찮아.”
“아닙니다. 사장님. 다른 것도 아니고, 회사 일인데, 당연히 저도 함께해야죠.”
홍사장이 괜찮다며 만류했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끝까지 우겨서 함께 밤늦게까지 일을 했다.
그렇게 일을 하다가 홍사장과 아내는 아이들만 집에 있어서, 잠시 집에 다녀와야 했는데, 정대운 사원이 혼자 하고 있을 테니 아무런 걱정 말고 다녀오라고 했다.
밤이 늦었으니 그만하고 퇴근하라 했는데도, 그는 일이 남았는데, 어떻게 퇴근을 하냐며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그럼 얼른 다녀올 테니, 수고 좀 하고 있어.”
홍사장과 아내는 집으로 가서, 아이들 챙길 것 챙기고, 본인들 옷가지들도 챙겼다.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는 고생하는 정대운 사원과 함께 먹을 김밥도 샀다.
“치킨도 사갈까?”
홍사장이 물었다.
“치킨 드시다가 맥주 생각나면 어떡하려고요?”
“그럼 좀 마시지 뭐.”
“안 돼요. 그리고 그렇게 기름진 음식은 밤에 먹으면 속 쓰려요.”
홍사장은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입맛을 다시며 회사로 돌아왔다.
회사의 사무실과 창고는 조금 떨어져 있었는데, 사무실에서 먹으려고 사 온 김밥을 풀었다.
홍사장이 정대운 사원에게 김밥 먹으러 사무실로 오라는 전화를 걸려는데, 사무실 창가에서 보이는 창고 쪽에 이상한 불빛이 반짝이는 게 보였다.
“뭐야?”
“뭐가?”
홍사장이 자세히 보기 위해 눈살을 찌푸리며 살피는데, 아내가 외쳤다.
“불이다!! 여보!! 불이에요!!”
“뭐, 뭐어? 불?!!”
홍사장은 얼른 사무실을 뛰쳐나가 창고로 뛰어갔다.
가보니 정대운 사원은 의자에 앉아서 졸고 있었고, 그의 발치에 있던 작은 석유난로가 옆으로 엎어져 있었다. 창고에서 난 불이 거기서 번지고 있었던 것이다.
“야!! 정대운!! 일어나!!”
홍사장이 소리를 지르자 정대운 사원이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깼다.
“아이쿠! 사장님!! 오셨어요?! 제가 깜박 잠이...”
“불! 빨리 불!!”
“예? 어? 부..... 불이다!! 불이야!!”
정대운 사원이 불을 보고 어쩔 줄 몰라 방방 뛰는 동안 홍사장이 한쪽에 놓인 소화기를 찾아 안전핀을 뽑고 뿌렸다.
다행히 불이 크게 번지기 전이라 소화기 한 대 만으로도 불이 잡혔다.
큰 피해는 없었지만, 애써 작업해 놓은 물건 중 일부는 불에 탔고, 다른 것들도 소화기에서 분사된 가루를 흠뻑 뒤집어써서, 다시 작업을 해야 했다.
홍사장의 눈이 뒤집어져서 쌍욕이 터져나가려는 순간 아내가 홍사장의 팔을 붙잡고 이끌었다.
“여보! 잠깐만요!”
화가 잔뜩 난 홍사장은 끌려가다시피 아내의 손에 이끌려 사무실로 돌아왔다.
대구탕 가게 2층 공방에서 현재의 홍사장이 창문으로 보고 있는 화난 자신의 모습이 바로 그때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