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사무실에 밥 먹으러 오세요.”
송팀장의 전화를 받고 정섭 씨는 기분이 좋아졌다.
RCS 팀의 팀원들이 자신을 싫어한다는 이유로 사무실에 잘 부르지 않는다는 것을 정섭 씨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랬기에 스스로도 송팀장의 사무실에 잘 나가지 않았었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는 사무실에서 같이 밥도 먹고, 카드도 치고 하는 걸 알면서도.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로 밥을 먹으러 오라고 하다니.
하긴 요즘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제법 열심히 하긴 했다.
공사장에서 잔뼈가 굵은 자신이 어린 애새끼들 몇 마디 말에 무너지거나 흔들릴 일은 없었다.
몸이 조금 고되긴 했지만, 팀원들이 원하는 대로 최대한 열심히 움직여줬다.
그러자 자신을 대하는 팀원들의 태도도 조금씩 바뀌어 갔다.
- 쏴아아아아
창문을 열자 비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이런 날에는 그냥 여관에서 맥주 한 캔에 드라마나 영화를 보며 뒹굴거리는 게 제일 좋긴 했지만, 며칠 전부터 계속 떠오른 생각에 오늘은 꼭 외출을 해볼 생각이었다.
오늘은 송팀장이 사무실에서 밥도 먹여준다니까 더더욱.
담배 한 대를 기분 좋게 피우고, 콧노래를 부르며 씻었다.
버스를 타고 송팀장의 사무실로 갔다.
송팀장의 사무실은 2층에 있었는데, 그곳은 인력사무소가 아닌, RCS 팀만의 사무실이었기에 다른 인부들은 없었다.
송팀장의 팀원은 총 15명 정도 되었는데, 사무실에는 5명 정도가 와있었다.
다른 팀원들은 대부분 집에서 쉬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1명은 휴대폰을 보고 있었고, 나머지 4명은 카드를 치고 있었다.
“오~ 형님. 오늘 멋지게 입었네요?”
영준이 정섭 씨가 들어오는 걸 보며 말했다.
“작업복만 안 입으면 다 멋지게 입은 거냐?”
늘 작업복을 입고 만나던 사람들이라 서로 작업복을 입지 않고 만나면, 신기하게도 뭔가 차려입은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근데, 형 몸이 좀 더 불었어요? 살이 찐 것 같은데?”
“옷이 커서 그런 거야 인마.”
“얼굴에도 옷 입었어요? 얼굴도 커졌는데?”
영준의 말에 팀원들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야이 씨.....”
“형. 뭐 드실래요?”
송팀장이 담배를 한 대 꺼내 피우며 물었다.
송팀장의 사무실에서는 누구나 편하게 담배를 피울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디서 시킬 건데?”
“만리장성.”
만리장성은 송팀장의 사무실에서 자주 배달시켜서 먹는 중국음식점의 이름이었다.
“아~ 또 고민되네. 짬뽕이냐 짜장이냐.....”
“그럼 짬짜면 시켜요.”
“아니. 그건 안되지. 맛이 없어.”
“똑같은 건데, 왜 맛이 없어요?”
“몰라. 암튼 난 짬짜면은 별로다. 짬뽕이랑 짜장이랑 주문해서 나눠 먹자.”
똑같은 짬뽕과 짜장이었는데, 정섭 씨는 이상하게 짬뽕과 짜장이 각자 한 그릇씩 따로 되어 있는 것과, 한 그릇에 짜장과 짬뽕이 반으로 나눠있는 짬짜면의 맛이 다르게 느껴졌다.
“난 볶음밥 먹을 건데요?”
영준이 얄밉게 말했다.
“야이씨. 그럼 볶음밥도 나눠 먹으면 되지!”
송팀장이 피식 웃더니 짜장과 짬뽕, 볶음밥, 탕수육을 골고루 주문했다.
“병규야. 가서 소주 3병만 사 올래?”
송팀장이 팀의 막내 병규에게 카드를 건넸다.
“야. 송팀장. 3병 가지고 돼?”
정섭 씨가 3병이라는 말에 다급히 끼어들었다.
“그냥 적당히 마셔요. 목만 적시면 되지. 야, 야. 병규야 얼른 갔다 와. 딱 3병만 사와라.”
송팀장은 술을 더 마시고 싶어 하는 정섭 씨를 흘겨봤다.
정섭 씨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입맛을 다셨다.
“한게임 하실래요?”
영준이 정섭 씨에게 카드게임을 권했다.
“됐다. 돈도 없고.”
정섭 씨는 담배를 한 대 꺼내서 입에 물고, 스마트폰을 켰다. 영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패 돌려.”
카드를 하는 일행은 카드를 하고, 스마트폰을 보는 사람은 폰을 봤다.
자욱한 담배 연기.
타닥타닥 떨어지는 빗소리. 함께 모여서 느긋한 낮 시간을 보내는 게 얼마 만인가.
정섭 씨는 모처럼 몸이 간질간질거리는 좋은 기분을 느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이 배달 왔다.
가운데 모아 놓고, 각자 종이컵에 먹고 싶은 음식을 덜어 먹으며 소주도 한 잔씩 했다.
“크으~~ 이 맛이지!”
내리는 빗소리.
소주.
맛있는 중국요리에 자욱한 담배연기.
그리고 왁자지껄한 소리까지.
정섭 씨는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는 분위기에 흠뻑 젖었다.
음식을 먹고, 술을 몇 잔 마시다 보니 속에서 트림이 올라왔는데, 정섭 씨는 그것을 억지로 참다가 희한한 소리를 냈다.
“구구꾹!!”
이를 놓칠 새라 영준이 정섭 씨를 쳐다보며 말했다.
“뭐예요? 남들 밥 먹는데 비둘기 설사할 때 내는 소리나 내고.”
“아이~ 씨. 저 새끼는 진짜 사람 완죤 쫀득~ 쫀득하게 놀린다니까?”
“제가 뭘 또 형을 놀려요? 형이 연세가 있으시니까 소화기관에 대해서 걱정해 드리는 거지. 자, 자. 파인애플 많이 드세요. 소화에 좋데요.”
영준이 탕수육 소스에 들어있는 파인애플을 정섭 씨의 종이컵에 담으며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고, 옆에 사람들은 낄낄거리며 웃고 넘어갔다.
“아오~ 진짜! 파인애플 있으면 껍질째 니 입속에 쳐넣고 싶다!”
정섭 씨가 소주를 더 마시려고 병을 들어 소주잔에 붓는데, 절반도 차지 않았다.
정섭 씨가 병을 탈탈 털었다.
소주 몇 방울이 더 떨어졌다.
“야. 송팀장. 안주도 좋은데 우리 몇 병만 더 마시자.”
“안 돼요. 내일부터 날도 맑은데, 일해야죠. 오늘 낮부터 그렇게 달리면 내일 또 일 못 나옵니다.”
“줘 보세요. 제가 조금 더 짜드릴게요.”
영준이 소주병을 쥐더니 정섭 씨의 잔 위에서 빨래를 짜듯 비틀었다.
“이이익!!”
그 모습에 다들 또 한 번 배를 잡고 넘어갔다.
-또옥
한 방울이 더 떨어졌다.
“휴우..... 제가 힘들게 병에서 짜낸 거니까 맛있게 드세요~”
“진짜 영준이 너는.... 죽을 때까지 꼬집어서 죽이고 싶다!! 일루 와!!”
“아! 아야!!”
정섭 씨가 영준을 막 꼬집었고, 영준이 도망쳤다.
한바탕 왁자지껄 소란이 끝나고, 음식을 다 먹은 후 다시 카드를 칠 사람은 카드를 쳤고, 스마트폰을 할 사람은 폰을 했다.
정섭 씨는 앉아서 담배를 몇 대 피우며 스마트폰을 보다가 오늘 자신이 가야 할 곳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정섭 씨는 담배를 비벼 끄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간다.”
“어디를요?”
송팀장이 물었다.
“어디긴? 집이지.”
“많이 마시지 마세요.”
“뭐, 뭘 마셔?”
“형이 술 더 마실 거라는 거. 형 빼곤 다 알걸요?”
“아이씨. 송팀장 너까지...... 암튼 고맙다. 밥도 고맙고. 불러줘서 고맙고.”
정섭 씨는 진심으로 송팀장에게 고마웠다.
“아이. 뭐예요? 갑자기 소름 돋게. 돈 필요해요?? 나 돈 없어~”
“야이씨. 진짜 뭔 말만 하면 돈 필요해서 그런 줄 아냐?”
정섭 씨가 사무실을 둘러보면서 거기 있는 팀원들에게도 말했다.
“너희들도 송팀장한테 감사해라. 내가 평생을 공사판에서 굴러먹었지만, 쉬는 날에 이렇게 팀원들 불러서 밥 사주고, 술 사주고, 목욕탕도 같이 가고 하는 팀장 없다.”
“됐어요. 얼른 들어가세요.”
송팀장이 쑥스러워했다.
“이게 다~ 송팀장이 장가를 못 가서 가능한 거야! 결혼이라도 했어 봐라!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아~ 놔! 이 형이 무슨 일인가 싶었다. 못 간 게 아니라 안 간 거라고요!”
“그래. 그래. 그렇다고 치자. 암튼 그러니까 너희들은 송팀장이 계속 장가 못 가기를 빌어라! 송팀장. 잘 먹었어~”
“아, 이게 뭔 말이야?! 얼른 가세요! 얼른!”
송팀장이 정섭 씨를 쫓아내듯 문밖으로 밀어내고 문을 쾅 닫았다.
정섭 씨가 씩 웃으며 1층으로 내려왔다.
결혼 이야기로 송팀장을 놀리긴 했지만, 고맙다고 한 말은 진심이었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늘 같은 날에는 막걸리가 딱이지!
정섭 씨의 머리에는 양은잔에 담긴 조각 벌집꿀 위로 막걸리가 쏟아지는 모습이 슬로모션 영상처럼 펼쳐졌다.
크으~
“택시!!”
정섭 씨는 급히 택시를 세웠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대구탕 가게로 갔다.
산에 위치한 대구탕 가게에 도착해 택시를 보내고, 매장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엇?! 이게 뭐야?!!
매장의 불이 다 꺼져있고, 문이 닫혀있었다.
문 앞에 종이가 한 장 붙어있어서 읽어보니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브레이크타임입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정섭 씨는 휴대폰을 꺼냈다.
3시 10분.
“아~ 씨!!”
이제 막 브레이크타임 시작.
두 시간 가까이를 기다려야 했다.
브레이크타임을 생각 못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택시를 돌려보내지 않았을 텐데!!
이곳은 산이라 지나가는 택시도 없었다.
혹시나 싶어 유리창을 통해 매장 안을 두리번거렸다.
만약 매장에 사람이 있으면 사정을 말하고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말할 참이었다.
그 남자 사장이 없나?
그러고 보니, 가게 앞에 차가 한 대도 없었다.
여기가 산이니, 남자 사장이나 여자 사장이 걸어서 가게에 올 것도 아니었고... 결국 아무도 없다는 의미다.
와~ 나! 쉬는 날!! 이 귀한 시간에!
정섭 씨는 갑자기 기분이 우울해졌다.
1층 가게 입구의 처마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 담배는 넉넉히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이곳은 산이라 담배를 살 수 있는 곳도 없었는데, 만약 이런 상황에서 담배까지 뚝 떨어졌다면 미쳐버릴지도 모를 거라 정섭 씨는 생각했다.
추적추적 비가 계속 내렸다.
택시를 불러볼까?
잠시 생각했으나, 지난번에도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 택시가 잡히지 않아서 남자 사장이 자신을 태워서 산 아래에까지 데려다줬던 사실이 떠올랐다.
에이~ 씨!!
정섭 씨는 하는 수 없이 내리는 비를 보며 담배를 계속 피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30분 정도를 기다리고 있는데, 주위의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오며 가며 계속 그곳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는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산속에 있는 주인 없는 가게에 그렇게 앉아 있으니 이상하게 보일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이~씨. 여기 뭐 사람들 눈에 안 띄는 곳은 없나?'
정섭 씨가 두리번거리며 살펴보니, 건물 한쪽에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순간 정섭 씨의 뇌리에 2층에 공방이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정섭 씨는 피우던 담배를 얼른 끄고,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다 올라가 2층 모퉁이를 돌아선 정섭 씨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이야~~”
비가 내리는 산에는 안개가 자욱하게 서려 있었고, 2층 테라스 주위에 죽 둘러선 복숭아나무, 오디나무 등 여러 과실수는 비에 젖어 싱그러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리고 테라스 한쪽에 놓인 테이블과 그 테이블에 꽂혀 있는 파라솔에 투둑투둑 떨어지는 빗소리는 정겨움을 느끼게 했다.
“술 마시기 쥑이겠네!”
정섭 씨는 비 오는 날 이곳 테이블에 앉아서 술을 마시면, 여기가 바로 무릉도원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테이블 옆에 놓인 의자는 흩날리는 비에 젖어 있어 앉을 수는 없었다.
잠시 테라스를 둘러보던 정섭 씨는 2층 공방 입구를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다가갔다.
시간을 달리는 공방.
정섭 씨는 나무 현판을 봤다.
“뭐야? 공방 이름도 존나 희한하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을 당겨봤다.
끼이이익.
오래된 나무문 소리가 나며 공방 문이 열렸다.
비가 내려 그런지, 평소에 공방에서 나는 것보다 더욱 진한 나무 분진 냄새가 정섭 씨의 코를 덮쳤다.
정섭 씨는 공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공방 문이 열려 있어서, 1층 대구탕 가게의 브레이크 타임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곳이 있어 다행이었다.
후우... 나무 냄새를 깊게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정섭 씨는 공사 현장에서 발판으로 사용하는 나무로 만든 토루판에서 나는 냄새를 좋아했는데, 공방에서 나는 냄새가 토루판에서 나는 나무 냄새와 비슷해서 좋았다.
편안했다.
엄마의 품처럼.
고향의 품처럼.
평생 공사현장에서 일을 하며 살아온 정섭 씨에게 나무분진의 냄새는 편안함을 느끼게 해 줬다.
공방 화이트보드 앞에 놓인 의자에 가서 앉았다.
의자 옆 탁자 위에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몇 개의 도마가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시간은 오후 4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아직 남은 한 시간.
정섭 씨는 스마트폰을 꺼내 유튜브를 보다가, 이내 지겨워져 뉴스를 봤다.
빗소리는 타닥타닥 들려오고, 송팀장 사무실에서 마셨던 술기운도 있고, 포근한 나무분진 냄새도 있어 눈이 자꾸만 감겼다.
정섭 씨는 억지로 눈썹을 추켜올리며,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 책상에 털썩 엎드려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잠이 들었을까? 정섭 씨가 눈을 뜨자 공방에 옅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아까도 비가 내리고 있어 그리 밝은 편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아까보다도 조금 더 어두웠다.
'잠이 들었었나? 아, 씨.... 쉬는 날인데 아깝게 이런 데서 잠이나 자고. '
- 쏴아아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까보다 더 세차게 내리는 것 같았다.
비는 오지게 내리네. 내일 그치긴 그치는 건가? 어? 뭐지? 허허. 웃기네. 저쪽 창문에는 오지게 내리는데, 이쪽 창문에는 별로 안 내리네? 이제 막 몰려오는 건가? 아님 이제 막 물러가는 건가?
정섭 씨가 공방에서 산 쪽 방향으로 난 창문을 보니 창마다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창문마다 내리는 비의 강도가 달랐다.
꽈과광!!
세차게 비가 내리는 창에서는 번개가 번쩍이더니 천둥까지 쳤다.
“아, 씨바 깜짝이야!”
정섭 씨가 천둥소리에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는데, 도로가 쪽으로 난 창에는 태양이 쨍쨍했다.
“뭐... 이거 뭐 와.. 씹.... 이거 뭐야?”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더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째깍째깍
각각의 창 위에 걸린 시계 소리가 정섭 씨의 귀에 커다랗게 들려왔다. 어? 원래 저것들이 걸려 있었나? 그런데, 지금 이게 말이 되나? 이쪽 창에서는 비가 저렇게 쏟아지는데, 여기는 쨍쨍하다고?
그때 한 창가에서 정섭 씨가 상복을 입고 쓱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엥?? 저, 저거 나? 나 아니야? 진짜 이거 뭐야?
정섭 씨는 후다닥 자신이 상복을 입고 지나간 창가로 뛰쳐 갔다.
아, 저, 저 때!! 장인어른 장례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장모에게 인정을 받았던 곳!
장인과 장모는 정섭 씨를 무척 싫어했다.
금이야 옥이야 곱게 키운 딸을 데려가 여관방 살이를 하는 공사장 막노동꾼 사위를 누가 좋아할 수 있겠는가!
정섭 씨도 그 마음을 십분 이해하면서도 자신을 미워하는 장인, 장모가 싫었다.
당신들만 사람 싫어할 줄 아나? 나도 싫어할 줄 안다!
그러다 보니 명절을 제외하곤 평소 교류가 거의 없었다.
명절 때도 이런저런 핑계로 처가에 안 갈 때도 잦았고, 가더라도 정섭 씨와 장인, 장모는 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런데 이날.
장인어른의 장례식.
자매지간인 아내의 동생. 즉, 정섭 씨의 처제는 아직 시집을 가지 않았다.
아들 없이 딸 둘인 아내의 집에서 상주 노릇을 할 사람은 사위인 정섭 씨 밖에 없었다.
3일 상을 치르는 중 첫날과 이튿날.
정섭 씨는 의젓하게 상주노릇을 잘했다.
오는 손님을 맞이하는 것도, 수육과 밥, 국 등 음식을 모자라지 않게 주문하는 것도.
현장에서 오래 일하며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근조화환도 많이 보내왔다.
“사위가 활동을 많이 하는 모양이네.”
“사위가 참 의젓하네. 이래서 집에는 역시 남자가 있어야 한다니까.”
자세한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장모에게 정섭 씨 칭찬을 했다.
정섭 씨도 들려오는 칭찬에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래서 부러 더 늠름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손님들께 깍듯이 인사도 하고, 정중히 모셨다.
그렇게 장례식 이틀이 지나고, 발인을 하루 앞둔 날.
“내일 화장장 일정에 맞춰야 해서 발인을 6시에 해야 한다고 합니다. 어머님. 일찍 눈 좀 붙이십시오.”
밤 11시.
정섭 씨가 장모에게 말했다.
그러자 장모가 정섭 씨에게 빈소 곁에 딸린 상주와 가족들이 쉬는 방으로 잠시 들어오라고 했다.
처음이었다.
정섭 씨는 상주였지만, 이틀 동안 한 번도 그 방에 들어가지 않았었다.
물론, 장모나 아내와 처제도 정섭 씨에게 방으로 들어오라고 권한 적이 없었다.
“예? 저는 손님 오시면.....”
“이 시간에 올 손님이 어디 있겠나? 어쨌든 잠시면 되니 들어오게.”
정섭 씨는 쭈뼛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앉게.”
작은 방은 장모, 처제, 아내, 그리고 잠든 아들과 정섭 씨로 꽉 찼다.
처제가 자신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쏘아보는 건 여전했는데, 장모의 눈빛은 예전처럼 차갑지만은 않았다.
“다른 건 잘 모르겠고, 이번에 큰일 치르면서 자넬 보니까... 그래도 어느 정도 믿음은 가네.”
장모의 말에 정섭 씨는 순간 울컥했다.
결혼 전으로도 후로도 장모에게서 처음으로 받아보는 인정이었다.
정섭 씨는 애써 격해진 감정을 추스르며 입을 열었다.
“... 감사합니다...”
정섭 씨의 아내는 아버지의 장례식날 처음으로 남편을 인정해 준 엄마 앞에서 뭐가 그리도 서러운지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자네는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지만.. 바깥양반이 늘 명현이 사진을 전화기로 보면서 싱글벙글......”
장모가 한쪽에 잠들어 있는 정섭 씨의 아들을 보며 말했다.
명현이.
정섭 씨 아들의 이름이었다.
“... 자식 미운 부모는 있어도.. 손주 미운 사람은 없다고... 미정이 아빠가... 늘 명현이 생각을 많이 했어...”
장모도 감정이 북받치는지 목소리가 떨렸고, 장모의 말에 미정이. 그러니까 정섭 씨의 아내는 더 많은 눈물을 쏟았다.
“미정이 너도 알겠지만, 너희 아빠가 저축은 많이 안 했어. 버는 돈으로 저축 대신 보험을 다 들어 놓았거든.”
정섭 씨도 예전에 아내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집안에서 연락도 잘되지 않던 아버지의 8촌 동생이 어느 날 명절에 선물을 들고 나타나 보험회사에 다닌다며, 친척 어른들에게 보험을 권유했다고.
아버지에게도 따로 연락이 왔었고, 아버지는 보험을 들어줬었다고.
“뭐, 사업에 투자하라는 것도 아니고, 보증을 서 달라는 것도 아니고, 결국 보험이라는 게 나한테 다시 돌아오는 건데, 그것 하나 해주는 거 뭐 어렵다고. 같은 핏줄에.”
‘보험은 쓸데없는 걱정을 미리 하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렸던 정섭 씨의 장인은 집안의 8촌 동생이 한다는 말에 본인이 정립한 보험의 정의마저도 바꿔버렸다.
혈연.
정녕 무서운 것이었다.
그때부터 아버지의 저축 방식은 은행예금과 적금이 아니라 암보험과 종신보험, 연금보험 등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당장 간이든 쓸개든 모든 걸 다 꺼내줄 것처럼 살갑게 대하던 8촌 동생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보험회사를 그만뒀다.
그리고 예전처럼 집안사람들과의 연락을 끊어버렸다.
“그게 뭐 어때서? 그놈이 있건, 없건, 내 보험은 계속 유지하면 되는 건데. 지도 지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 어쨌든 나한테 사기를 친 건 아니잖아?”
미정 씨의 아버지는 그러거나 말거나 본인의 보험을 계속 이어갔다.
정섭 씨의 장모는 잠든 명현이를 쳐다보며 말했다.
“명현이 태어났을 때, 어찌나 좋아하시던지.... 휴우..... 어쨌든.... 이것저것 긴말할 거 없고 미정이 아버지가 들어놓은 보험이 제법 돼서, 장례식 치르고 나서 절차를 끝내면 보험금이 제법 나올 거야. 그러니까 자네도 여관 전전하면서 사는 생활은 이제 끝내고, 전세든, 월세든 집 하나 장만해서 어디든 정착을 하도록 하게.”
정섭 씨는 보험금이 제법 나올 거란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뭐야? 그럼 나는? 내 거는 없어?”
“너도 있어. 언니보다는 적겠지만 섭섭해하지 말고. 언니는 명현이도 있잖니.”
“그래서? 그게 얼마나 되는데?”
정섭 씨는 자신이 너무나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물을 수 없었던 그 질문을 처제가 대신해줘서 아주아주 감사했다.
“정확한 액수는 나와봐야 알겠지만, 언니는 10억이 조금 넘을 것 같고, 너도 5억 정도는 될 거야.”
2층 공방의 창문에서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정섭 씨는 장모 앞에 앉아서 그 말을 듣고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깜짝 놀랐다.
당시 스스로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보였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창을 통해서 바라보는 모습에서는 기쁨을 감출 수 없는 얼굴이었다.
와 씨! 진짜 저 때 내 표정이 저랬었다고? 이야~~ 씨. 개쪽팔린다! 개쪽팔려!!
보험금.
10억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자신의 표정이란.
장인의 장례식장에서 지을 수 있는 얼굴표정이 아니었다.
처제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몇억이 생긴다는 말에 입을 떡 벌리고 기쁨이 넘쳐흐르는 표정을 지었다.
정섭 씨의 아내인 미정도 조금 놀란 표정을 짓긴 했지만, 정섭 씨나 미정 씨의 동생처럼 마냥 기쁘기만 한 얼굴은 아니었다.
부모님에게서 돌아서더라도 끝까지 고집을 부려 선택한 남편 정섭 씨.
결혼 전에는 세상 물정을 몰라 마냥 남편만을 쫓았고, 결혼 후 세상을 알고 나서는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에 부모님에게 차마 다가갈 수 없었다.
그런 못난 딸을 위해, 딸이 낳은 손주를 위해 당신의 죽음 이후 물려줄 것들까지 준비해 놓은 아버지께, 살아생전 해드리지 못했던 일들이 떠올라 더욱더 눈물이 쏟아졌다.
“네 아버지가, 너 고생하는 거 보면서 많이 안타까워하시면서도, 네가 고생을 해봐야 세상을 알고, 그래야 명현이도 바르게 키울 수 있다면서 돌아가실 때까지 꾹 참았어. 네가 여관방 월세 밀렸다고 네 동생 현정이한테 20만 원 빌려 갔다는 말을 들었을 땐, 혼자 밤에 어디를 나가서 술을 마셨는지, 만취해 가지고 집에 와서는 혼자서 얼마나 울어 대던지......”
“야! 너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걸 아빠한테 말했어?!! 내가 금방 갚아줬잖아!!”
미정 씨의 동생 현정 씨는 우물쭈물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그냥 확 내질렀다.
“아, 몰라!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왔는데 어떡해?!”
정섭 씨의 아내는 자기 때문에 눈물을 흘렸을 아버지를 생각하며 또 한 번 오열했다.
정섭 씨는 그런 아내를 위로한다며 위로하고 있었지만, 보험금 생각으로 얼굴에 묻어있는 기쁨은 차마 감추지 못했다.
“손님 오셨네요.”
다음 날 발인식에 함께 가기 위해 머물러 있던 친척들 중 한 명이 방 앞에서 말했다.
“엇? 이 시간에?”
정섭 씨는 얼른 방에서 일어나 빈소로 나갔다.
“어? 뭐야?!”
“야~ 잘 지냈냐? 이런 큰일을 당했으면 미리미리 연락을 했어야지!”
정섭 씨의 군대 동기인 철웅 씨였다.
그가 나타난 모습을 공방의 창문으로 보는 정섭 씨가 외쳤다.
“저 씨바 새끼!! 저 새끼!!”
하지만, 현재 공방의 정섭 씨와는 다르게 과거의 정섭 씨는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연락은 씨! 연락이 돼야 하지!! 그나저나 어떻게 알고 왔냐?”
“다 아는 수가 있지. 우선 잔부터 올리고.”
“어? 어, 그래.”
철웅 씨는 무릎을 꿇고 향 옆에 놓인 술잔에 담긴 술을 퇴잔그릇에 비웠다.
빈 술잔을 정섭 씨가 채워 줬다.
철웅 씨는 채운 술잔을 향 위 허공에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세 바퀴를 돌린 후 영정 사진 앞에 놓고 절을 했다.
상주와 손님의 인사를 마치고 둘은 자리에 마주 앉았다.
시간은 이미 자정이 다 되어가고 있어서 장례식장에 일을 도와주던 도우미 아주머니들은 모두 퇴근하고 없었다.
정섭 씨의 아내가 수육과 밥, 반찬들을 내왔다.
“여긴 우리 와이프. 여보. 여긴 내 군대 동기야.”
“아~ 그 철웅 씨?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정섭 씨 부인은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 아니라, 정섭 씨로부터 정말 군대 동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구타와 얼차려가 하루 일상이었던 군대에서. 그 힘든 시절을 같이 보냈던 군대 동기.
인간답지 못한 대접을 받는 극한의 상황에서 볼 거, 못 볼 거까지 다 본 사이였기에 그 누구보다 더 가깝게 지낸, 단 둘밖에 없는 전우였다.
함께 전역식을 마치고 국밥에 소주 한잔 하면서, 사회에서도 자주 연락하고 지내자고 다짐했다.
처음 몇 년간은 만나진 못해도 꾸준히 연락을 하고 지냈다.
그런데, 그런 친구가 정섭 씨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렇게 결혼식에 오지 않은 친구는 몇 년이 지나도록 그동안 연락조차 되지 않았었다.
그런 전우가 정섭 씨 장인의 장례식에 찾아온 것이다.
당시엔 몰랐다.
전우의 방문이 정섭 씨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리는 시발점이 될 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