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사이에...
지연 씨는 친구 선희 씨와 도마에 그림을 그리다가 너무 잠이 쏟아져서 잠깐 졸았다가 눈을 떴다.
우울증에다 수면장애도 있어 평소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해 선잠을 자다 보니, 자고 일어나도 늘 피곤하고, 개운하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로 잠시 졸았다가 깼는데 너무나 상쾌했다.
마치 오랫동안 푹 숙면을 취한 것처럼.
그런데 얘는 어딜 간 거지? 그리고 여긴 또 왜 이렇게 어두워?
지연 씨는 밝았던 공방이 너무 어둡게 느껴져 살짝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나무 분진 냄새와 여기저기 놓여있는 나무 자재들.
그리고 나무를 자르거나, 켤 때 쓰는 기계들이 밝을 때 친구와 함께 볼 때는 뭔가 포근한 느낌이었는데, 어두워지고, 친구가 보이질 않으니 뭔가 섬뜩하게 느껴졌다.
“선희야~”
지연 씨는 선희 씨를 불러봤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지연 씨는 두려운 마음에 자리에서 조심조심 일어서서 공방 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끼이익
지연 씨가 밟은 나무 바닥의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와 지연 씨는 스스로 놀라며 걸음을 멈춰서 공방을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지연 씨는 다시 한 걸음 내디뎠다.
또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지만, 이번에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해!
지연 씨는 걸음을 빠르게 걸었다.
삐그덕 삐그덕 요란하게 소리가 나는 발걸음을 계속 옮겨 들어왔던 공방의 입구 문 앞에 도착을 했는데,
뭐야? 문이 없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분명히 여기로 들어왔는데!!
지연 씨가 문이 있었던 곳을 만져보고, 밀어봤지만 딱딱한 벽만 만져질 뿐이었다.
허어업!!
두렵고 무서운 마음에 갑자기 숨이 막혀왔다.
지연 씨는 정신을 차리려 가까스로 애쓰며 호흡을 조절했다.
찾아야 해! 여기서 나가는 문을!
내가 잠시 착각한 걸 수도 있잖아? 그래. 그럴 수도 있어. 어서 찾아보자. 찾지 못하면 창문을 깨서라도..... 어? 뭐야? 남편이잖아? 날 데리러 온 건가? 여보!
지연 씨는 죽 늘어선 공방의 여러 창문들 중 한 곳에서 남편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는 급히 그곳 창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어? 뭐야?.. 여기는 이곳이 아닌데?..... 지연 씨가 창을 통해서 본 남편은 어느 술집으로 급히 들어가고 있었고, 내리는 비가 우산을 쓰지 않은 남편의 몸을 적셨다.
저긴 어디고 날씨는 또 왜 이래?
지금 비가 내리나?
지연 씨가 다른 창문을 쳐다봤는데,
헉! 이건 또 무슨 조화야?
다른 창에서는 해가 쨍쨍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그 옆 창에선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지연 씨는 너무 놀라 입을 떡 벌리고 멍한 눈으로 창문들을 쳐다봤다.
“미안. 미안. 늦었지?”
남편의 목소리가 조금 전 남편이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던 그 창에서 들렸다.
지연 씨가 다시 그 창을 들여다보니 남편이 술집으로 들어서는 장면에서 어느새 술집 안으로 바뀌어 있었다.
“괜찮아. 야. 우산 없냐? 다 젖었네.”
어? 은우 씨? 요즘 남편하고 연락을 거의 안 하던데....
남편이 들어간 술집에서 은우 씨가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은우 씨는 남편과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낸 절친이었다.
가끔 부부끼리 모임도 함께 하고는 해서 지연 씨도 은우 씨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자주 연락하던 은우 씨와 남편이 이상하게 요즘 들어 연락을 잘하지 않았다.
“술만 마시면 우산을 잃어버려서 그냥 놔두고 왔다.”
“개념도 놔두고 오지 그러냐. 술 마시면 잃어버릴 텐데.”
“당연히 놔두고 왔지. 그래도 지갑은 챙겨 왔다. 가는 길에 너 집 사주려고.”
“집?”
“그래. 요기 옆 철물점에 신상 개집 있더라. 너 술 마시면 필요할 것 같아서.”
“야이씨!”
“하하하하하!!”
둘은 시답잖은 농담을 하면서 소주를 마셨다.
처음 농담을 주고받으며 술을 마시기 시작했을 땐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는데, 술자리가 무르익어가면서 점점 지연 씨 남편과 은우 씨가 나누는 대화가 뚝. 뚝. 끊기면서 어색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뭐지? 둘이 신나게 웃고 떠들다가 왜 점점 어색해지는 거지? 벌써 술이 취했나?
이제 둘이서 겨우 소주 한 병 반을 비웠을 뿐이었다.
한 사람당 아직 한 병도 다 마시지 않았는데, 평소 혼자서 두 병은 거뜬히 마시는 사람들이 취할 정도는 아직 아니었다.
그리고 만약 취했다면 더 많은 말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뭔가 이상했다.
편하게 술을 마시던 두 사람 사이에 묘하게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어색한 몇 마디의 말이 더 지나가고, 은우 씨가 결심을 한 듯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지훈아.”
“어?”
지연 씨의 남편 지훈 씨는 은우 씨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긴장한 모습이었다.
“저번에 말한 돈.”
“어.”
“미안한데 이번에는 좀 어렵겠다.”
“아... 괜찮아.”
“미안하다.”
“아니야. 아니야. 미안하긴... 부탁한 내가 미안하지.”
미안한 표정으로 말하는 은우 씨의 말에 지훈 씨는 애써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 웃음에도 아쉬움이 가득 묻어 있었다.
“나도 빌려주고는 싶은데... 상황이 좀 그래. 요즘 경기도 안 좋고.”
“이해하지. 이해해. 괜찮다니까. 내가 괜히 돈 이야길 해가지고. 야! 마셔! 오늘은 이 형님이 쏜다!”
상황을 보아하니 남편이 친구에게 돈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다.
지연 씨는 의아했다.
남편은 늘 돈이 있는 줄 알았는데, 친구에게 돈을 빌리려고 했다니.
만약 부족한 돈이 있다면 일단 카드로 결제를 먼저 하면 되는 일일 텐데, 굳이 빌려야 할 필요가 있나?
돈 이야기가 나오고 나서야 둘은 다시 농담을 하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보통의 술자리처럼.
술병이 계속 늘어가고 둘의 모습에서도 취기가 오르는 것이 보였다.
소주를 거나하게 마시고, 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연 씨의 남편 지훈 씨가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려는데, 계산하는 직원이 말했다.
“계산하셨는데요?”
“예?”
지훈 씨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데 은우 씨가 다가왔다.
“야. 그냥 가. 내가 계산했다.”
“뭐? 야이씨... 내가 계산한다고 했잖아!”
“뭘... 누가 계산하면 어떠냐?”
“안 돼. 안 돼. 야. 어쩔 수 없어. 네가 저지른 일이다. 네가 계산했으니까 2차 가자.”
“이렇게 많이 마셔놓고 2차는 무슨 2차야?”
“그럼 네가 계산을 안 했어야지.”
“괜찮아. 그냥 들어가자.”
“에이. 왜 그래? 그냥 맥주나 딱 한잔 더 하고 들어가자. 가볍게.”
은우 씨는 계속 사양을 했지만, 남편은 자신이 계산하지 못한 걸 아쉬워하며 2차를 고집했다.
결국 둘은 짧은 실랑이 끝에 바로 옆에 있는 술집으로 들어갔다.
“크으~ 비도 시원~하게 내리고, 친구도 있고! 조오~타!”
생맥주 500 두 잔을 시켜 한 모금을 마신 남편이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얼큰~하게 취하셨네. 지연 씨는 남편이 취했을 때 하는 행동과 말투를 잘 알았기에, 남편이 지금 제법 거나하게 취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도 조~~ 타!!”
은우 씨도 살짝 혀가 꼬인 발음으로 맞장구쳤다. 둘 다 제법 취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은우야... 나는... 니가 그렇게 상황이 어려운 줄 몰랐다...”
“어?... 뭐가....”
“너 인마. 상황이.... 안 좋아서.. 나한테 돈 못 빌려 준다며... 너 형편도 어려운데... 내가... 빨리 저번에 빌린 5천만 원 갚아줄게...... 이번에도.... 네가 나한테 빌려 줬으면..... 내가 아파트를 팔아서라도..... 갚아주려고 했다....”
남편의 말에 지연 씨는 깜짝 놀랐다.
뭐? 저번에 빌린 5천만 원? 그럼, 저번에 빌리고, 이번에 또 빌리려고 한 거란 말이야?
지훈 씨의 말에 술에 취한 은우 씨가 순간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피식 웃었다.
“야.... 내가 아무리 그래도.... 지훈이 너보다 힘들겠냐....?”
“.... 뭐?....”
“.... 너 인마... 경수한테도... 3천만 원 빌렸다며?...”
은우 씨의 말에 남편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술에 취해서 살짝 감긴 눈이 똑바로 떠지지가 않는 모양이었다.
“.... 뭐야?.. 경수가 말했어?... 이 새끼... 비밀로 하기로 해놓고....”
“야 인마... 그게 중요하냐?.... 솔직히 말해서... 내가... 너.. 돈도 더 빌려줄 수 있다.. 그런데.. 빌려 주고 싶지가 않아! 인마....”
“... 뭐?.... 왜? 왜 안 빌려 주고 싶은데?... 못 받을까... 봐?”
“... 하.... 놔.... 이 새끼..... 너 인마... 내가 처음에 너... 5천만 원 빌려 줬을 때... 반드시 받아낼 거라 생각하고 빌려준 것 같냐? 어?.... 우리 아버지가... 늘 말씀하셨어..... 친구사이에.. 돈거래는 하는 거 아니라고.... 빌려준 돈이 계속 생각날 것 같으면.... 빌려 주지를 말고.... 빌려 줬다면.... 못 받는 돈이라 생각하고 잊어버리라고.... 진짜 친구는.... 그런 거라고....”
은우 씨의 말에 지연 씨의 남편은 울컥하는 모양인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래서 말인데... 지훈아.... 진짜 친구니까.... 내가 말을 할게.....”
“.. 뭐를?...”
“.... 너 말이야... 내가 이번에 돈을 더 빌려줄 수 있는데도... 왜 안 빌려주는지 아냐?....”
“.... 빌려준 돈이..... 생각날까 봐?.....”
“그래... 인마.... 그런데, 왜 생각이 날 것 같은지는 아냐?......”
“.... 너도.... 힘들게... 번 돈이니까...”
지훈 씨가 고개를 저었다.
“... 세상에... 힘들게 돈 벌지 않는 사람 있냐?.... 너도 마찬가지고, 나도 마찬가지고.... 다른 사람들도.... 다들 힘들게 버는데....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쓴다는 말이... 괜히 있겠냐?...”
“그럼... 왜 생각날 것 같은데?..”
“... 바로 그 정승처럼 써야 하는 것 때문에...”
“.. 뭐?...”
“.. 지훈아... 너 친구들 돈 빌려서.... 어디다 썼냐?...”
“... 그야.... 생활비에... 썼지...”
“.. 네가 생각하는 그 생활비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생활비가 맞는 거냐?....”
“... 뭐야?.... 너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 진짜... 친구니까 내가 얘기할게.... 기분 나쁘게 듣지 마라..”
“... 해 봐... 무슨 말인지....”
남편은 술에 취한 와중에도 살짝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 너... 저번에 빌려간 돈으로... 해외여행 간 거 아니냐?..... 그리고 한 달 살기 하러 간 것도...”
은우 씨의 말에 남편이 어이없다는 듯 피식 냉소했다.
“.. 야.... 너까지.... 왜 그래...? 그놈의 한 달 살기..한 달.. 해외여행.... 그건 못 가는 사람들이 질투가 나서...”
“아니! 그게 아니지.... 지훈아. 너... 저번에 경수한테도.... 그렇게 말했다며?.. 돈 없고, 가진 것 없는 인간들이 네가... 가족들 한 달 살기 보내주고..... 해외여행 가고 하는 거.... 부러워하고, 질투한다고.... 그게 아니야 지훈아.... 네가... 친구들한테 돈 안 빌리고... 네가 모은 돈으로 가면... 누가 뭐라고 하냐?..... 도대체 그게 뭔데... 친구들한테 돈까지 빌려가면서.... 그렇게 해야 하는 거냐고...”
“.......”
지연 씨의 남편은 무거운 표정을 짓고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넌 정말... 네 와이프가... 외제차 타고 다니고.... 명품 핸드백 들고 다니고... 아이들 한 달 살기 하러 보내고... 해외여행 일 년에 몇 번씩 가면.... 사람들이... 너를 부러워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 네 형편을 모르고.... 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그런데, 우리 친구들은... 네 사정 뻔히 다 알고 있잖아?.... 네 형편에.... 그런 생활을 한다는 게 제정신이냐?.. 뭐, 오늘만 살고... 내일 죽을 거야?... 너... 하고 다니는 거만 보면... 우리 회사 대표보다 더 잘 나가는.... 무슨.. 기업 대표님처럼 보여......”
“후우.....”
지연 씨의 남편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 그리고.... 네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너를 부러워한다고 치자.... 그런 사람들한테 부러움을 사기 위해서.... 인생을 사는 거냐?.... 보여주고... 뽐내고... 형편에 맞지도 않는 자랑이나 하면서?....”
“.... 아니야.. 그런 거...”
“.. 아니긴 이 새끼.... 야! 내가 경수 말 듣고 너네 집 등본도 떼 봤는데.... 너 사채까지 썼더라?”
“뭐?.... 아니... 야이 새끼야! 남의 집 등본은 왜..... 도대체 왜 이 지랄이야!?”
“네가 처음에 돈 빌려달라고 할 때..... 뭐라고 했냐?... 나중에 집을 팔아서라도 갚는다며?.... 그럼 당연히 떼 봐야 하는 거 아니냐? 그때 안 떼보고, 조금 늦게 떼보니 것뿐이다... 너 지금.... 집 당장 처분해도.... 나한테 이미 빌려간 돈 5천만 원도 못 갚아..... 그런데 돈을 더 빌려가고.... 집을 처분해서라도 갚는다고?..... 이 새끼야... 나는 없는 돈이라 생각하고 그냥 주려고도 마음먹었는데, 넌 거짓말을 해서라도.... 어떻게든 나한테 돈을 빌리려고 했었냐?.... 부끄러운 줄이나 알아 인마.....”
남편 지훈 씨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 도대체... 그렇게까지 너희 애들 한 달 살기 하러 가서..... 얻어 온 건 뭔데?... 갑자기 성적이라도 팍 올라갔냐?..... 왜 집을 저당 잡히고, 사채까지 쓰고, 친구들한테 돈까지 빌려가면서..... 그렇게까지 하면서 해외여행을 가야 하고.... 외제차를 몰고 다녀야 하고.... 명품 가방을 사야 하는 거냐?.... 지금 네 형편에, 이런 상황이면... 솔직히 네 와이프도 일하러 가야 하는 거 아니야?...... 너네 와이프는 무슨.... 용가리 통뼈라고 이런 상황에서 집에서 놀고먹는 거냐?.....”
“야.... 이.. 씨발.... 가족은 건드리지 말자.....”
“... 왜? 내가 뭐 틀린 말 했냐?... 너네 어머니도 아프시기 전까지는 평생 일하셨잖냐?..... 너네 어머니는 일을 해도 되는 사람이고...... 네 와이프는 일하면 안 되는 분이냐?..... 시어머니는 일하는 사람이고..... 며느리는 집에서 놀고.... 먹고... 여행 가고.. 그래야 하는 사람이냐고..... 그럼, 우리 와이프는?... 못 나서 일하러 나가냐?..... 나는 여태껏.... 와이프한테 명품가방 하나 사준 적도 없어.... 외제차는 꿈도 못 꾸고..... 그럼 나는 존나 못난 가장인 거냐?... 한 달 살기도 못해 주고... 해외여행도 일 년에 한 번 갈까 말까 하고..... 명품백도 못 사주고..... 외제차도 못 사고..... 좋아. 좋아. 내가 존나게 못난 가장이라고 치자.... 그럼 너는? 이렇게 존나게 못난 가장에게 돈을 빌리러 온.... 존나 멋진 가장인 거냐?”
“아, 씨바!! 닥치라고!!”
지연 씨의 남편이 소리를 지르며 은우 씨의 멱살을 잡았다.
술집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쳐다보고, 술집 직원이 와서 말렸다.
은우 씨가 지연 씨 남편의 손을 떨쳐내고는 직원에게 괜찮다며 돌려보냈다.
“이제 그만.... 일어나자.”
은우 씨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지연 씨의 남편은 일어서지 않았다.
“안 가냐?”
“먼저.. 가라..”
지연 씨 남편의 말에 은우 씨가 잠시 그를 쳐다보다가, 테이블 옆으로 나와 지연 씨 남편의 곁을 지나며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여기 술값은... 네가 내라.... 앞전에 빌려 간 5천만 원 퉁치는 걸로....”
“......”
“5천만 원.... 그까짓 돈... 처음부터... 받을 생각도 없었다.... 난... 오늘 네가.. 솔직히 사실을 말해주길 바랐다.... 오늘 내가 너무 기분이 엿 같은 건.... 그까짓 돈이 아니라.... 내 친구.... 아니, 내 친구였었던..... 늘 바르고.... 정직하고..... 거짓이 없었기에..... 항상 당당했던.... 우리 지훈이를 잃었다는 것.... 그게 너무나 슬프다.....”
은우 씨의 목소리가 떨렸다.
“......”
“먼저 간다.”
은우 씨는 술집에서 먼저 나갔다.
지연 씨의 남편은 신경질적으로 남은 맥주를 다 마시고, 술집에서 나왔다.
지연 씨의 남편이 술집에서 나오자, 공방 창문에 비치는 모습이 다시 술집 밖으로 바뀌었다.
쏴아아아
세차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술집 앞에는 택시들이 많이 있었는데, 남편은 그 많은 택시들을 놔두고 비를 맞으며 찰박찰박 걷기 시작했다.
세차게 내리는 비에 남편의 몸은 금세 흠뻑 젖었다.
“끄으흐흐흑.....”
남편은 비를 맞고 걸으며 서럽게도 울었다.
그렇게 울고, 또 울면서, 비를 쫄딱 맞고 집까지 걸었다.
째깍째깍
공방의 창문 위에서 째깍이는 시계 소리에 그곳을 쳐다보니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지연 씨의 남편은 집에 들어가기 전에 빗물로 세수를 하고, 심호흡을 깊이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집 앞 현관에서 다시 한번 더 깊이 심호흡을 하더니, 조심스레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고 조심조심 현관 안으로 발을 들였다.
공방 창문에 비치는 모습은 남편의 뒤를 쫓아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센서등이 팟 켜졌다. 남편은 조심조심 구두를 벗는다고 벗는데, 술이 취한 데다가, 양말이 비에 젖어 잘 빠지지가 않는지, 몇 번 더그덕 거리며 소리를 내고서 벗었다.
구두를 벗고 나서 고양이걸음처럼 살금살금 걸어서 거실을 지나가려는데, 안방에서 지연 씨가 문을 벌컥 열고 나왔다.
“지금 몇 시야?”
“.. 어? 여보..”
뭐야? 나잖아? 신기했다. 창문 속에서 내가 나타나는 모습이.
“뭐야? 비도 쫄딱 다 맞고 왔어? 그거 세탁은 누구보고 하라고?! 어?!”
지연 씨가 남편의 모습을 보고 신경질을 냈다.
“미안.. 미안... 내가 할게. 내가 세탁소에 맡길게....”
“어우... 술 냄새. 술을 지금 이 시간까지 퍼마시고!!..... 나 예민해서 잘 깨는 거 몰라? 그리고 이렇게 잠에서 깨면 몇 시간이고 잠 못 드는 거 모르냐고!!”
“아.... 알지... 미안해.. 미안... 일단 좀 씻을게...”
“지금 샤워하면! 또 민원 들어오면 어떡하려고!!”
여기 아파트에는 어쩜 그렇게 예민한 사람들만 사는 것인지, 새벽에 조금만 뭘 해도 바로바로 민원이 들어왔다.
“알았어.... 적당히 씻을게.. 적당히... 어서 들어가. 나 거실에서 잘게.”
2층 공방의 창으로 남편과 자신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는 지연 씨는 남편의 눈이 그렇게 퉁퉁 부어 있고, 누가 보더라도 방금 눈물을 흘린 사람이 분명해 보이는 남편을 눈치채지 못하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소리 나지 않게 조심해!”
지연 씨는 방문을 탁 닫고 들어갔다.
지연 씨의 남편은 욕실로 후딱 들어갔다.
젖은 옷을 다 벗고, 차마 샤워기를 틀진 못하고, 세면대에서 세수를 하고, 대충 씻은 후 비에 젖은 몸은 그냥 수건으로 대충 닦아 내고서, 마른 속옷을 입고 거실 소파에 누웠다.
술기운이 잔뜩 올라 소파에 웅크리고 누운 남편은 금세 잠이 들었다.
공방 2층의 창으로 이 모든 걸 지켜본 지연 씨는 남편의 움츠러든 어깨가 새삼스럽게 느껴져 눈물이 핑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