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똑같은 일 년의 반복
1,498,931원.
이번달 정섭 씨의 카드값이었다.
“아이.... 씨바! 쓴 것도 별로 없는데, 맨날 백만 원 넘게 나오네 씨.”
정섭 씨는 카드값 문자를 받고 벌써부터 기분이 다운됐다. 옆에서 같이 담배를 태우고 있던 영준이 정섭 씨의 말을 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팀장님이 그냥 체크카드만 쓰시라고 했잖아요.”
“야. 처음 만들 때 15만 원 준다고 하는데. 그거 공돈인데 받아야지.”
정섭 씨는 지난번 마트에 갔다가 카드판촉 아주머니가 카드를 만들면 15만 원을 준다고 해서 만들었었다.
정섭 씨는 4대 보험이 들어가지 않아도 만들어지냐고 물었는데, 아주머니가 조회를 해보고는 한도가 많이 되지는 않지만 만들어진다고 했다.
다만 재직증명서 등 몇 가지 서류들이 필요하다고 했다.
정섭 씨는 송팀장에게 부탁을 했다. 송팀장은 번거롭기도 하고, 정섭 씨에게도 좋을 것이 없을 것 같아 그냥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정섭 씨가 바락바락 우겨서 결국 재직증명서를 발급해 줬다.
정섭 씨는 몇 가지 서류를 더 챙겨서 카드발급하는 아주머니에게 건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드를 발급받았다.
그리고 아주머니가 약속한 15만 원도. 횡재한 기분이었다. 카드를 만들기만 했는데도 돈을 받다니!!
카드를 만든 다음 날 송팀장에게 자랑하며 말하자, 송팀장이 그거 다 미끼라며 그냥 체크카드만 쓰라고 말했다.
“형. 지금 내 주머니에 없는 돈이 있는 것처럼 만들어 주는 게 그 카드라는 거예요. 포인트 모으고 할인받고 잘 사용하는 사람들한테는 좋을지 몰라도, 형처럼 별생각 없이 쓰는 사람한테는 완전 마약 같은 거예요!”
“마! 말을 해도 이 씨! 내가 뭘 생각 없이 써!”
“맞잖아요. 형 빼곤 다 아는데?”
송팀장의 말에 RCS 팀원들이 킥킥 거리며 웃었다.
“이것들이! 딱 봐라! 내가 카드 만든 거 절대로 안 쓴다! 돈만 받고 안 쓸 거라고! 두고 봐!”
얼마 후 여관으로 배송 온 카드를 받고, 처음 며칠간은 안 쓰고 잘 버텼다.
하지만, 비가 내리고, 며칠 일을 못 나가게 되자, 평소 모아둔 것도 없던 정섭 씨는 주머니에 당장 사용할 수 있는 남의 돈을 참지 못하고 써버렸다.
그렇게 지금까지 남의 돈을 먼저 쓰고, 채워 넣고, 먼저 쓰고, 채워 넣는 반복된 카드 생활을 해왔다. 그렇게 하면서도 모자란 돈은 송팀장에게 가불 해서 생활했다.
“그나마 한도가 얼마 안 돼서 얼마나 다행이에요.”
“야. 씨... 지금 놀리냐?”
“카드값 메울 순 있어요?”
“모르지. 그래도 여태껏 5일은 안 넘기고 다 냈다.”
영업일 기준 5일이 넘을 때까지 입금이 되지 않으면 연체정보가 타 금융업체에 공유되는데, 그렇게 되면 신용도가 내려가기 때문에 많은 불이익이 따랐다.
그럴 경우 어쩌면 지금 겨우 한도를 유지하고 있는 150만 원에서도 더 내려갈지 몰랐다.
개인회생을 한 번 겪어본 정섭 씨는 최대한 5 영업일 이내에 카드값을 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영준이 입을 씰룩하고는 피우던 담배를 껐다.
“저 먼저 갑니다.”
영준이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섰다. 그리곤 쇠파이프를 어깨에 짊어지고 옮기기 시작했다.
“한대만 더 피고, 같이 하자!”
“괜찮아요. 천천히 오세요.”
“씨..... 저래 놓고 자기들 일하는데 혼자 담배 피우고 있다고 뒤에서 뭐라고 할 거면서.”
정섭 씨는 얼른 피우던 담배를 비벼 끄고,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파이프를 나르러 갔다.
탱크랑!!
“와 씨! 개 뜨겁다!!”
현장에 일용직으로 온 대학생 아르바이트생 하나가 파이프를 들어서 어깨에 둘러메려다가 목 주위 맨살 위에 쇠파이프가 닿자, 깜짝 놀라 파이프를 던지며 말했다.
발판을 만들 때 사용하는 쇠파이프.
5월의 햇살은 한여름의 햇살 못지않게 뜨거워 쇠파이프를 달궈놓았다.
장갑을 낀 손으로 파이프를 잡을 때는 몰랐다가 목에 닿자 깜짝 놀란 것이다.
“학생아! 현장에서는 뭐든 함부로 던지면 안 된다! 그러다가 주위 사람들 다쳐!”
정섭 씨가 어깨에 파이프를 짊어지고 땀을 뻘뻘 흘리며, 쇠파이프를 던진 학생 곁을 지나며 혼냈다.
“예.”
학생은 정섭 씨 눈치를 살피며 파이프를 다시 집어 어깨 위에 살이 닿지 않도록 조심해서 올려서 들고 갔다.
정섭 씨가 그 모습을 보며 자신이 처음 공사현장에 왔던 때를 떠올렸다.
고등학생 때 처음으로 새벽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던 날.
그때 처음 인력소라는 곳을 가봤다.
요즘은 거의 볼 수 없지만, 당시엔 인력사무소 안에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작업화에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
누가 보더라도 딱 공사현장에서 일할 것처럼 복장을 한 사람들.
다 타들어 가, 금방이라도 손이 데일 것 같이 짧아진 담배를 검지와 중지 사이에 낀 인력사무소 소장은 새벽부터 바쁘게 현장에 전화를 돌렸다.
자욱한 담배 연기.
그리고 거기에 섞인 믹스커피 냄새와 작업복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가벼운 인사만 나누고 말없이 담배만 피우는 사람들.
정섭 씨는 처음 간 인력사무소에서 묘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전투에 임하기 전 의식을 치르는 전사들 같은 느낌??
멋있었다. 그런 모습들이.
그렇게 시작한 공사현장의 일은 정섭 씨에게 딱 맞았다.
이른 아침을 열고, 땀 흘려 열심히 일하고, 일을 마친 뒤 마시는 한 잔의 술.
다른 사람들은 노가다판이라 무시하듯 부르는 이 판이 정섭 씨는 무척 좋았다.
그렇게 10년, 20년 세월이 흘렀다.
만약에 내가 저 나이로 돌아간다면....
정섭 씨는 오늘 일을 하러 온 20대의 대학생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면 이번에도 똑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당시 세상 물정 모르던 자신의 눈에 비쳤던 전사들의 모습.
그 모습이 지금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결코 멋있는 전사처럼 보이지는 않을 것 같았다.
오히려 지독히도 치열한 전투에서 가까스로 도망친 패배자들의 모습에 가깝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씁쓸했다.
어린 나이.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전장 중에서, 하필이면 결국 패배자로 전락할 곳을 택했다는 것이.
정섭 씨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차피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는 것이었다.
오전에 발판 2개를 조립했다.
그리 나쁘지 않은 성과다.
11시 40분에 오전 일과를 마쳤다.
공사장 근처 함바집에서 밥을 먹고, 다시 현장으로 돌아왔다.
1시까지는 아직 30분 정도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때까지는 자유로운 시간인데, 대부분의 현장 사람들은 그 시간에 잠을 잤다.
아무래도 이른 아침에 나오다 보니, 점심을 먹고 나면 몸이 노곤해져서 잠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대부분 햇빛이 나지 않는 그늘진 곳을 찾아서 잠을 자는데, 개중에 어떤 사람들은 정말 신기하게도 땡볕 아래에서 팔로 눈만 턱 가리고 잠을 자는 사람도 있었다.
정섭 씨도 평소 같으면 그늘진 곳을 찾아 스티로폼 한 장을 깔고 그 위에서 잠을 청했을 텐데, 요즘 들어 이상하게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그날. 비가 세차게 쏟아지던 날.
이혼 후 홀로 공사현장에서 왜 모래요정 바람돌이가 생각났던 걸까? 하고 궁금해 한 날 이후부터.
공사현장의 점심시간.
이 시간에도 쉬지 않고, 일하는 사람들이 간간이 있었지만, 대체로 조용했다.
대부분의 현장 인부들이 잠을 자는 시간이기에.
몇몇 잠을 자지 않는 사람들은 대부분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정섭 씨는 한쪽 벽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 깡. 깡.
점심시간의 고요한 공사현장. 어딘가에서 누군가 망치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숙련된 노동자의 손놀림인지 소리가 일정하고 안정적이었다.
저쪽에선 아까 쇠파이프를 던졌던, 오늘 일하러 온 아르바이트 학생이 누워서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런 공사현장에서 눈을 붙이기엔 아직 익숙하지 않을 것이었다.
정섭 씨는 담배 한 대를 다 피우고 물을 한 모금 마시곤 학생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잠이 안 와?”
“아, 네.”
학생은 누운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일은 할 만하고?”
“네. 뭐, 그럭저럭 할 만은 한데....”
“그런데?”
“다른 현장보다 좀 힘들긴 하네요.”
정섭 씨처럼 송팀장의 RCS 팀에 속한 사람들은 팀을 따라 움직였지만, 인력사무소에서 오는 인력들은 딱히 정해진 곳 없이 사무소에서 가라고 한 곳으로 여기저기 움직였다.
RCS의 일이 다른 일보다 강도가 있기는 했기 때문에, 인력사무소에서 정해진 일당을 받는 아르바이트생의 입장에서는 조금 더 편한 곳으로 빠지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내일은 여기 안 오려고?”
“....뭐 제 마음대로 되나요? 사무소 소장님이 가라고 하시면 와야죠.”
“공사장 일은 언제까지 하려고?”
“모르겠어요. 학기 중에는 주말에 하고, 방학 땐 평일에도 하면서..... 졸업할 때까지 하면 되지 않을까요? 아저씨는요?”
“야이씨! 아저씨라니! 그냥 형이라고 불러 인마!”
정섭 씨의 말에 학생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나이차이가....”
“괜찮아! 같이 일하면 다 형, 동생이지. 아저씨가 뭐냐? 그렇게 말하면 내가 늙은이 같잖아!!”
“..... 네....”
“술은 좀 마시냐?”
정섭 씨가 손을 입으로 가져가 잔을 꺾는 포즈를 취하며 물었다.
“아뇨. 잘 못 마셔요.”
“다행이다. 그럼 돈은 좀 모을 수 있겠다. 담배는 얼마나?”
“하루에 반 갑 정도?”
“양호하네.”
“근데...... 여기 오니까 오전에 벌써 반 갑을 피웠어요.”
“그렇지. 현장이니까. 여기는 쉴 때마다 담배를 피워야 되거든.”
“마치.... 의무적인 것 같네요?”
“쉬는데 혼자 안 피우고 있으면 뻘쭘하잖아! 뻘쭘할 바에야 피우는 게 낫지.”
“.... 아.... 그렇구나....”
“그리고.....”
“....”
“혼자 담배 안 피우고 있으면 잡일은 내가 다 해야 해. 알잖아? 군대 다녀왔지?”
“네.”
“그래. 군대에서도 동기들 다 담배 피우고 있는데, 혼자 안 피면 안 피는 놈한테 일 다 시키잖아. 그러니까 차라리 담배를 피우는 게 낫지.”
“.... 다양하게 피울 이유들이 있네요.”
“한 대 필래?”
정섭 씨가 담배를 꺼내며 물었다.
“제 것 필게요.”
학생이 작업복 윗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며 말했다.
작업복의 윗주머니.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주머니였다.
바지에 넣으면 담배를 비롯한 주머니 속 물건들이 모두 땀에 다 젖어버렸기에, 인부들은 휴대폰이나 담배를 모두 작업복의 윗주머니에 넣어 뒀다.
학생은 자연스럽게 정섭 씨 앞에서 담배를 물고 피웠다.
아침에 왔을 때만 해도,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정섭 씨 앞에서 담배를 피우길 망설이던 학생이 반나절이 지난 지금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함께 담배를 피웠다.
함께 고된 노동을 하는 공사현장은 담배에 나이와 격식을 차리지 않는 그런 평등한 곳이었다.
“그래서 졸업하면 뭐 할 건데?”
정섭 씨의 물음에 학생이 담배 연기를 훅 내뿜었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솔직히.... 딱히 목표는 없고, 그냥 돈이나 많이 벌고 싶어요.”
딱히 목표는 없고, 돈이나 많이 벌고 싶다...... 그게 목표 아닌가?
부자.
한때는 정섭 씨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돈을 많이 벌어야지! 많이 벌어서 떵떵거리고 살아야지!
공사현장에서 뭘 어떻게 해서 많이 벌어서 떵떵거리고 살지는 본인 스스로도 몰랐지만, 어쨌든 많이 벌어야겠다는 마음은 먹고살았었다.
그리고 그게 꿈이고, 목표라고 생각했다.
돈을 많이 버는 것.
그렇게 한 해, 한 해 흘러갔다.
매년 한 해가 넘어갈 때마다 올해는 많이 못 벌었지만, 새해에는 돈복이 터질 거다!!라고 막연한 응원을 스스로 해가면서.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돈복이 터지는 새해는 없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몸은 점점 늙어가서 입술이 터지고, 코피가 터지고, 불어나는 살에 옷이 터질 뿐.
이제 와 정섭 씨는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던 것이 아니라, 똑같은 일 년을 수없이 반복해 제자리를 돌고 돌았을 뿐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고, 막연히 잘될 거라는 생각만 하고, 술만 마시며 파이팅을 외치던 똑같은 일 년을.
“그런데요. 아침에 일어나기 안 힘드세요? 저는 이런 일한 지 얼마 안 돼서 어떻게 나오긴 했는데,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나오려면 엄청 피곤할 것 같은데......”
학생의 말에 정섭 씨가 피식 웃었다.
“이봐 학생. 어차피 인생은 존나 자기 싫은 밤과 더 자고 싶은 아침의 연속 아니겠냐? 남들이 유튜브, 넷플 이런 거 보면서 존나게 자기 싫어하는 밤에 조금 더 일찍 자면 되는 건데 뭐. 그럼 아침에 절로 눈이 떠져.”
술만 마시면 다음날 일어나기 힘들어 일을 째기가 일쑤인 정섭 씨가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 아...”
정섭 씨의 말에 학생은 뭔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담배를 피웠다.
“갑시다!”
누군가 외쳤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벌써 점심시간이 끝났다. 정섭 씨와 학생은 담배를 끄고 현장으로 향했다.
5월의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사람들은 땀을 흘리며, 망치질을 하고, 쇠파이프를 옮기고, 발판을 나르고, 피스를 조였다.
정섭 씨는 일을 하면서, 학생의 모습이 계속 눈에 들어왔다.
마치 예전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다행히 학생은 술을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정말 다행이었다.
만약 자신이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봤다.
지금과는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까? 조금은 인생이 나아졌을까? 정섭 씨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나.
술을 좋아하지 않을 자신은 없었다.
지난번 비가 내렸을 때도, 대구탕 가게에서 송팀장과 싸우고 혼자 남아서 꿀막걸리까지 더 마시고 갈 정도였으니.
문득 그날 집에 오는 길이 생각났다.
꿀에 막걸리를 타서, 술을 거하게 마시고, 대구탕 가게 사장에게 택시를 불러 달라고 했다.
그런데, 그곳이 산중턱에 위치한 데다가 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이라 그런지 콜택시가 잡히지 않았다.
“괜찮아요. 저는 뭐, 바쁜 것도 없으니 천천히 잡히는 택시 있으면 타고 가겠습니다.”
그렇게 기다린 택시가, 30분이 넘도록 잡히지 않았고, 1시간이 다 되도록 잡히지 않자 남자 사장이 정섭 씨에게 말했다.
“저기. 아무래도 오늘 콜택시는 잡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제가 산 아래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거기서 택시나 버스를 타시는 게 나을 것 같네요.”
“예? 아니 굳이 그렇게까지는.......”
“괜찮습니다. 저희 가게로 택시가 오지 않아서 그런 건데요.”
“그래도...... 장사하셔야 되잖아요?”
정섭 씨는 술이 얼큰하게 취한 상태에서도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까 송팀장하고 같이 내려갔어야 했나?’
“괜찮아요. 점심시간도 다 지나서 잠시 내려갔다가 올 시간은 됩니다. 가시죠.”
정섭 씨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렇게 손님이 없는 가게에 죽치고 앉아 있는 것도 민폐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정섭 씨는 대구탕 가게 사장의 차에 탔다. 세차게 내리는 비가 마치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지듯 퍼부으며 차를 씻어 내렸다.
“우와~ 씨. 비 겁내 오네!”
정섭 씨는 대구탕 매장 입구에서 차까지 불과 얼마 안 되는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잠깐 사이에 비에 흠뻑 젖어 살갗에 찰싹 달라붙은 옷을 꼬집어 당기며 말했다.
남자 사장이 차에 시동을 걸고 뒤로 서서히 후진을 했다.
빗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차 앞유리의 와이퍼가 왔다 갔다 하며 손으로 땀을 닦듯 빗물을 닦아 주었다.
“어? 2층에도 뭐 합니까?”
와이퍼가 빗물을 닦아 냈을 때 얼핏 드러난 2층으로 보고 정섭 씨가 물었다.
“네. 공방이요.”
“와~ 공방도 하십니까? 손재주가 좀 있는가 봐요?”
“아뇨. 별 재주는 없어서, 간단한 것만 해요. 뭐, 도마 만들기나, 의자, 테이블 이런 것 정도.”
“이야~ 그런 것도 쉬운 거 아닌데?”
“그런가요?”
대구탕 가게 사장이 피식 웃었다.
“그렇지요. 내가 현장 일만 30년째 하고 있어서 잘 알지.”
“우와~ 대단하시네요. 30년이나 한 가지 일을 하시고.”
대. 단. 하. 시. 네. 요.
그냥 인사치레로 던진 말일 수도 있었다.
아니, 그냥 형식적인 말임이 분명한 말이었다.
하지만 정섭 씨에게는 가볍게 던진 말일 수도 있는 이 한마디 말이 가볍게 다가오지 않았다.
누군가로부터 인정을 받고, 격려를 받는 말 한마디.
언제부터인지 알 순 없지만, 제법 오랫동안 정섭 씨는 그런 형식적인 인정조차도 받지 못한 삶을 살고 있었다.
같은 ‘대단하시네요.’지만, 가장 최근에 들었던 그 말은 작업 시작하기 전 함바집에서 아침 먹고 똥을 싸고 나왔을 때였다.
“형. 아침에 아무 곳에서나 그렇게 막 나와요? 똥이?”
“그럼. 아무 때서나 싸면 되지. 배 아픈데 참는 게 더 힘들지.”
“우와. 대단하시네요. 전 집 밖에서는 잘 못 싸겠던데.”
이때의 대단하시네요는 같은 말이었지만 지금처럼 인정의 의미로 와닿진 않았었다.
“사장님은요? 여기서 장사 한지가 얼마나...”
“한 지가...... 글쎄요 저한텐 시간의 개념이 참 모호해서....”
“예?”
“아, 아닙니다. 한....... 20년? 정도 되었네요.”
“예? 20년이요? 우와~ 사장님도 오래 했네요. 그런데, 지금 나이가 그렇게 안 많아 보이는데요?”
“아..... 제가 좀 어릴 때부터 장사를 해서요.”
“그래요?”
- 쏴아아아아
비가 끊임없이 퍼부었고, 내리는 비 때문에 창문을 꼭 닫은 차 안에는 금세 정섭 씨의 술냄새가 가득 찼다.
정섭 씨는 대구탕 가게가 왜 산에 있는지, 2층 공방은 왜 차리게 되었는지, 어린 나이에 어떻게 직장을 구하지 않고, 가게를 운영할 생각을 했는지 궁금한 것들을 내리는 비처럼 대구탕 사장에게 세차게 질문세례를 퍼부었다.
남자 사장은 그렇게 퍼붓는 빗속에서 든든한 비옷이라도 입은 사람처럼 의연하게 대답을 하는데, 하는 대답마다 어중간하고, 모호하게 대답을 했다.
그런 대답이 정섭 씨도 싫지는 않았다.
취객의 주정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는 자신의 두서없는 물음에 남자 사장은 미소를 잃지 않고 응대해 줬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에게 ‘대단하시네요.’라고 응원을 해준 사람이기 때문에.
“언제 한 번 오세요.”
“어디를요?”
“2층 공방. 아까 현장에서 30년 일하셔서 잘 아신다고 하셨잖아요.”
“아.... 예. 거기서 뭐 수업 같은 거 합니까?”
“네. 하루에 끝나는 원데이클래스도 있고, 계속 꾸준히 배우러 오시는 분도 계시구요.”
“그럼..... 수업료는... 얼마나...”
습관이었다.
늘 돈이 빠듯한 정섭 씨는 어떤 일이든 가격을 먼저 물어보는 것이.
당연히 가겠다고 물어보는 것은 아니었고, 형식적으로 물어보는 그런 물음이었다.
“공짜예요. 저희 매장에서 식사를 하신 분이면.”
“예에? 뭐예요? 그럼 남는 게 없잖아요?”
“식사를 하셨잖아요. 그럼 된 거죠.”
“참.... 이 양반도 계산을 희한하게 하시네... 그러면 돈 못 벌어요.”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몰랐지만 남자 사장은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암튼 한 번 놀러 오세요. 저희 공방은 시간을 만들어 드리거든요.”
“뭐, 뭐라고요? 시간을 만들어 준다고요??!!”
정섭 씨는 대화를 나눌수록 남자 사장이 좀 이상한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술이 취해서 그런 건가?
남자 사장은 버스정류장에 정섭 씨를 내려주고 다시 산으로 올라갔다.
비가 내려 안개가 자욱한 산으로.
그것이 지난번 송팀장이 자신을 대구탕 가게에 버려두고(정섭 씨가 가라고 해서 가버린 것이었지만) 내려가 버렸던 날의 기억이다.
“형! 무슨 생각을 그리 하세요?”
대구탕 남자 사장과 있었던 일을 생각하는 정섭 씨에게 영준이 물었다.
“어, 어? 아... 내일 비 온다니까, 오늘 세탁소에서 옷 찾아가려고.”
“세탁소에 옷을 맡기세요?”
“내가 세탁하는 것도 있지만, 좀 괜찮은 옷들은 망치면 안 되니까 맡겨야지.”
“오~ 내일 괜찮은 옷 입고...... 어디 돈 빌리러 가세요?”
“야이 씨~”
“헤헤 농담이에요! 농담! 내일 비 오는데 가긴 어딜 가세요? 그냥 집에서 푹 쉬세요. 술도 많이 드시지 마시구요.”
영준의 말에 정섭 씨는 불쑥 대구탕 가게에서 마셨던 꿀막걸리가 생각나 침을 꼴깍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