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아십니까, 도를 잃어서요
정신과 선생님께서 이건 내가 우울해하고 의욕을 잃을 게 아니라 화를 내야 할 일이라고 하셨다. 그건 나도 당연하게 알고 있다. 내가 더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이다. 알고 있지만, 알지만, 그래도 마음이 쓰인다는 걸 이해하셨고 굉장히 안타까워하셨다. 하지만 정말 맞는 말이다. 나는 실제로 화가 나기도 했다. 나를 자책하다가도 나를 농락했던 그 사람을, 그 집단을 끔찍이 원망했다.
시내로 나가면 나는 한순간에 불안장애와 피해망상증 환자가 된다. 멀리서 저들이 나를 노리고 있을 것 같은, 지나가던 누군가가 갑자기 길을 물어올 것 같은, 아니면 그때 그 아주머니와 마주칠 것만 같은 불안감. 그동안 그런 종류의 두려움 때문에 시내에 나가지 못했다. 그러다 새로 개봉한 영화를 보기 위해 용기 내어 큰길을 거쳐 극장으로 향했고, 그 길이 천 리보다 멀게 느껴졌다. 일행이 있는 자들은 대부분 놀러 나온 시민일 테고, 양손에 짐을 들고 바쁘게 걷는 사람들도 전도자는 아닐 테지 하며 초면부지 행인들을 샅샅이 의심해 보았다. 얼핏 마주친 사람이 '이곳 어르신'이라던 사람과 닮았던 것 같기도 해서 급하게 지나쳐 갔고, 심장이 떨렸다. 마침내 극장 건물을 눈앞에 두고 누군가와 스쳤는데 마스크를 쓴 그 중년의 인자한 얼굴이 소름끼치게 익숙했다.
뒤돌아보면 눈이 마주칠까, 나에게 아는 체를 하며 뒤쫓아 올까 잰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너 빠르게 건물 4층까지 올라갔다. 그러고 나서야 뒤를 돌아봤고,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그때 느꼈던 안도감이 동시에 얼마나 비참했던지 형언할 수도 없다. 그 아찔한 순간이 전부 나의 망상이었을지도 모른다. 무고한 얼굴에 악마의 가면을 씌워 보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당시 그곳에서 내가 내 얘기를 술술 털어놓을 때, 당신은 자기도 해당 지역에 아는 병원이나 지인이 있다며 인맥 자랑을 해댔었다. 그래서 나는 어쩌면 내가 다니는 병원도, 가까운 지인이나 학원 강사 및 수강생 중 일부도, 경찰마저도 믿을 수 없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었다. 끔찍한 기분이었다. 존재하지도 않는 사기꾼들에게 쫓기면서 살 수는 없다. 무고한 사람들을 멋대로 용의 선상에 올리며 유령들로부터 도망쳐 다닐 수도 없다.
감히 내가 순수하고 선한 사람이라고는 못하겠다. 하지만 도움을 요구하는 손이 보이면 언제나 붙잡았다. 지난번에 어떤 분이 내게 길을 물었다. 반려견이 아파서 동물 병원을 예약했는데, 병원 가는 길을 못 찾겠다고. 50분까지 가야 한다는데 그때가 45분이었다. 나는 당장 지도 어플로 병원 이름을 검색했고, 다행히도 나와 방향이 겹쳐 안내해 드리며 함께했다. 강아지가 아프지 않길, 견주 분의 마음이 안정되길 바라면서. 그리고 몇 달 전에는, 아직 추울 때였는데 옷을 얇게 입은 날이었다. 학원 수업을 마치고 나왔더니 바람이 너무 찼다. 같은 건물에서 나온 분이 내게 춥지 않냐며, 주머니에서 뜨끈한 핫팩을 꺼내 내게 쥐여 주셨다. 나는 추위를 잘 안 타니 괜찮다고 했지만, 그분이 자기는 껴입었지만 나는 너무 춥게 입어서 핫팩을 주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하셨다. 모두들 가슴속에 그런 사소한 배려와 다정 한 움큼씩이라도 품고 사는 게 아닌가?
아직 어린 내가 세상을 너무 좋게만 바라본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선생님의 말대로 나는 화를 좀 내야겠다. 나에게 왜 그랬냐고. 왜 처음부터 "도를 아세요" 하지 않았냐고. 그랬다면 정중히 사양하고 지나쳐 드릴 수 있었는데, 왜 병원 가는 길을 물어서 내 시간과 데이터 낭비하며 나도 모르는 건물까지 안내하게 만들었냐고. 그리고 당신은 내게 보답해 주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같이 식사도 했다. 그러는 내내 즐거운 이야기를 나눴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고 재치 있게 맞장구쳐줬다. 당신은 종교가 없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그래서 성격이나 성향이 잘 맞는다고 생각했고 좋은 친구를 사귀었다는 착각을 했다. 잠시나마 기분이 좋았고 교감에서 희열을 느꼈다.
정신과 선생님과의 첫만남에서, 몇 마디도 나누지 않은 상태로 그분이 내 성격을 전부 파악하셨던 것처럼 당신도 그랬을 것이다. 나는 마음이 여려서 거절을 못하고 순진해서 쉽게 내어줄 것이라는 사실을 단시간에 통찰했을 것이다. 그런 능력으로 길가의 수많은 사람들 중 내가 간택되었을 테니까. 다시금 내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여기서 또 자책하지 말지어다. 당신은 당연하다는 듯 100만원 이상이라는 액수를 입에 올렸지만 내 신분과 상황 등을 고려해 5만원을 제시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8만원. 그러더니 10만원, 그러고는 20만원. 내 적금 통장을 깨도 괜찮다고 했다. 적금 통장을 해지해도 아무 문제 없다고 다시금 강조했다. 주변인에게 돈을 빌리라고 했다. 엄마 아빠에게 용돈을 부탁하라고 했다. 지금 당장 전화를 걸라고 했다. 딸이 좋은 데에 쓴다는데 거절할 부모는 없을 거라고 했다. 친구에게 만 원만이라도 좋으니 한 번만 빌려달라고 연락하라고 했다. 그때 내가 어떤 기분을 느꼈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당신은 내 팔을 붙들어 끌었고, 나는 내 손으로 거액의 현금을 인출했다는 것밖에는.
이제부터 조상에게 공을 바칠 건데 조금 오래 걸릴 거라고, 그전에 화장실에 가고 싶으냐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했고 당신은 나를 따라왔다. 볼일을 보던 중 문을 벌컥 열어 "어디 간 거 아니지?" 하던 얼굴이 아직 선명하다. 당신은 내게 맞는 한복을 주면서, 옷을 갈아입어야 하니 CCTV를 가려 주겠다고 했다. 나는 어째서인지 한복 입은 내 모습이 예쁘고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버선까지 신고 나니 그곳의 '어르신'이라는 사람이 나한테 안경도 벗고 머리를 묶으라고 했다. 그래서 그렇게 했고, 또 이 문장을 외우라고 했다. "원 많고 한 많은 조상님들, 구천에 가셔서 해원하십시오." 중간에 소원을 비는데, 그때 무슨 소원을 빌지 생각해 놓으라고 했다. 생각이 안 나면 그냥 '가족 건강'을 빌라고 했다.
당신과 나는 똑같은 한복을 입고 어떤 방으로 들어갔다. 제사상이 차려져 있었다. 향을 피웠고, 점점 더워졌다. 우리는 한 시간 내내 절을 했다. 팔을 위로 들어올렸다가, 가슴 중앙에 대었다가, 아래로 내렸다가, 모았다가, 절을 하고, 무조건 왼발이 앞으로 와야 하며, 일어설 때는 바닥을 짚어서는 안 되는 특이한 규칙이 있었다. 왼쪽으로 갔다가, 오른쪽으로 갔다가, 뒤로 갔다가, 앞으로 갔다가, 절을 계속 하고, 술을 따르고 다시 절을 하고,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만큼은 분명히 기억한다. '원 많고 한 많은 조상님들, 구천에 가셔서 해원하십시오. 원 많고 한 많은 조상님들, 구천에 가셔서 해원하십시오. 원 많고 한 많은 조상님들, 구천에 가셔서 해원하십시오. 원 많고 한 많은 조상님들, 구천에 가셔서 해원하십시오.' 소원을 비는 시간에는, '가족 건강. 가족 건강. 가족 건강. 가족 건강. 가족 건강.' 원 많고 한 많은 조상님들, 구천에 가셔서 해원하십시오, 가족 건강, 원 많고 한 많은 조상님들, 구천에 가셔서 해원하십시오, 가족 건강, 원 많고 한 많은 조상님들, 구천에 가셔서 해원하십시오, 가족 건강, 원 많고 한 많은 조상님들, 구천에 가셔서 해원하십시오, 가족 건강......
모든 과정이 끝났을 때, 당신은 제사상에 올랐던 과일과 술을 한 조각 한 모금씩 무조건 먹어야만 한다며 건네주었다. 욱여넣으며 당신이 묻는 질문에 하는 말에 꼬박꼬박 대답했다. 다이어트와 당뇨 때문에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말아야 했는데 그것도 그냥 받아 마셨다. 근데, 그때 잠깐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여기 이상한 게 들었으면 어떡하지?' 얼마 안 가 다음날 약속을 잡고(당신은 나를 더 알고 싶댔고 내 이야기를 들려주면 비로소 나도 나를 알게 될 것 같았다) 나는 떠났다. 그리고 건물에서 나와 다시 시내에 던져지자마자, 당신에게서 뒤돌아 멀어지자마자 극심한 허탈감, 두려움, 죄책감, 자괴감, 공포감, 무엇을 향해 가는지 모를 분노 같은 온갖 감정에 휩싸여 자살 충동이 들었다. 그제야 짧고도 억겁 같았던 시간이 온통 소름 끼쳤다. 전부 이상했다고 자각했다. 모아둔 돈이 그냥,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는 것도 깨달았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쓰러질 것 같았지만 하염없이 걸었다. 나는 순간 지나가는 차에 몸을 던질까 싶었다.
하지만 죽어야 한다면 그건 당신이어야 한다. 왜냐면 나는 그저 길 잃은 당신을 병원까지 데려다주고 싶었을 뿐이니까. 그래도 당신이 죽기를 바라며 저주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면 낯선 사람을 병원까지 데려다주려는 사람의 어수룩한 마음이 그런 거니까. 어째서 선한 의도의 베풂이 세뇌의 시도라는 배신으로 돌아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당신은 내가 많이 외로웠을 거라고, 나에게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그건 맞는 말이다. 그래서 그 다음날 당신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을 때, 차라리 전화를 받고 약속 장소로 나가 그 이상한 집단으로 완전히 잠식돼 버릴까 하는 자기 파괴적인 고민도 짧게 했다. 그러나 이내 전화를 받지 않았고 모든 연락처를 차단했다. 잃어버린 돈은 시간으로 되찾을 수 있지만, 나를 잃어버리면 그러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당신은 이 시내를 10년간 돌아다녔다고 고백했다. 나는 당신을 저주하지 않지만, 누군가는 할 것이다. 인생 고작 당신의 반만큼도 못 산 주제에 단언하자면 평생 동안 그렇게 살 수는 없다. 언젠가는 뼈저리게 후회할 테고 내가 느꼈던 수백 배의 소용돌이와 함께 뉘우칠 테다. 빼앗고 상처 입힌 만큼 베풀며 속죄하기를. 나는 앞으로도 어쩌면 오랫동안 시내의 사람들을 무서워하겠지만, 길을 묻는 사람이 온다면 아는 대로 방향을 안내할 것이고, 곤경에 처한 이를 최대한 돕게 될 것이다, 불가피하게도. 하지만 쉽게 팔을 붙잡히진 않을 것이다. 사람이 필요하다 느껴질 때면 다름 아닌 사랑하는 사람에게 손 뻗을 테다. 이건 당신에게서 얻은 배움이 아니며, 이 편지는 당신을 용서하는 글이 아니다. 용서받고 해방되는 건 바로 나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