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산문집과 짭문집

#비정기산문집 #서점의기쁨과슬픔

by 서점원

2월

02


산문집에 이런 이름이 붙을 줄이야. 이름하여 ‘짭문집’.

무릇 명품도 짝퉁이 있어야 명품이듯 산문집에도 짭문집이 생긴 것이다.

짭문집은 [무엇이든 쓰는 밤]의 오랜 멤버인 K 님의 친구, S 님의 창조물이다.

서점을 아껴주는 분들이 많지만, 이렇게 진심인 분은 처음이라 웃기면서도 반가웠다.


그날은 올해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아들을 위해 책 추천을 부탁하셨는데 지금, 이 글을 쓰며 생각해 보니 이 또한 산문집의 매출을 올려주기 위한 하나의 마음 쏟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근 몇 년간 책을 전혀 보지 않는 아들을 위해 갑자기 책을 사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리는 없으니.


글자라면 벌레를 보듯 질겁하는 우리네 아이들이 떠올라 글자를 최소화한 책들을 선별해 추천했다. 그중 선택된 책은 이윤희 작가의 <안경을 쓴 가을>. 서점원이 아끼는 마음으로 보는 책 중에 하나기도 한데 스토리가 알차면서 귀엽고 그림체가 사랑스럽다. 특히 사춘기를 보내는 청소년기 아이들이 읽으면 좋은 책이라 적당한 선택이라 생각했다. 글자가 많지 않은 것도 중요 포인트.


책을 계산하며 S 님은 심오한 질문을 하나 하셨다.


‘마감’이란 무엇인가.


글을 쓰며 마감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는 그는 서점원이 ‘마감’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했다.

갑자기 진행된 인터뷰에 당황했으나 예전과는 다른 개념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과거 마감이 있는 삶을 살았을 때는 돈을 받고 하는 업이니까 무조건 지켜야만 하는 것, 지키지 않으면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강한 의무감의 한 조각이라 생각했다면 지금의 마감은 조금은 풀어진 마감, 기꺼이 압박을 느끼고 싶은 마감이다.

지금 쓰고 있는 이것, 브런치도 매주 연재해야 하는 마감이지만 만약 어떤 일이 생겨 지키지 않더라도 ‘넌 자격이 없어’ 이런 식의 비난을 받을 일은 아니니까. 그래서 생각해 보니 나에게 마감은 루틴 같은 것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감해야 끝! 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더 이상의 수정이 없는, 아니 수정을 허용하지 않는 원고의 탄생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답변이 S 님이 원하는 답변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이내 자신이 하고 있다는 마감을 보여주었다(그간 S 님의 성격을 보면 서점원에게 자신의 글을 보여준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 그 이상의 무엇이 분명하다. 심지어 먼저 글을 보여준다니! 예상 밖의 행보라 많이 놀랐지만 당황하지 않고 글을 읽는다).

매주 수요일 서점에서 진행하는 [무엇이든 쓰는 밤]처럼 집에서 무엇이든 쓰고 있는 그는 자신의 노션(notion)을 선보였는데 타이틀이 단박에 눈에 들어왔다.


‘나의 작은 짭문집’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타이틀을 보자마자 웃음이 빵 터졌다. 짭문집이라니!

매우 귀여운 네이밍이 아닌가.


그중 하나를 읽었는데 첫 문장부터 <인간 실격> 속 요조의 향이 강하게 풍겼다. 짠 내 나지만 미친(p) 필력에 감탄하며 웃고 웃으며 읽은 글. 정말 너무나 감사한 마음뿐이다. 작은 동네서점을 생각하는 마음, 엥겔 계수라는 두터운 현실의 벽에 부딪히지만 꺾이지는 않겠다는 작고 귀여운 자존심이 한데 섞여 서점원의 마음을 흔들었다. 나는 지인들에게 농담 식으로 ‘산문집의 라이벌은 전자책도 도서관도 아니야. 교보문고야’라고 말하곤 하는데 S 님 덕분에 한 번은 교보문고를 이겼을지도.


그리고 글에서 왠지 모르게 무밤 멤버이자 S 님의 친구인 K 님의 향기도 느껴졌다. 두 분이 친구인 이유를 알 것 같기도. 두 분은 요즘 ‘마감’에 대해 고민 중이라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K 님이 지난주부터 ‘뭐라도 마감해야겠어요’ 라고 마구 강조하셨는데 두 분이 어떤 합의에 이르신 것 같다. 어디서든 글을 쓰고 또 애써서 쓰려는 마음은 언제나 참 좋다.


그래서 나는 브런치 같은 곳에 짭문집을 정식 연재해서 매주 마감하면 어떠냐고 제안(짭문집 이름도 너무 귀엽지 않은가!)했는데 그는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것이 마감의 1요소가 되면 그건 너무 무서운 일이 될 것 같다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맞아요, 무섭긴 하죠. 나의 마음을 드러내 보인다는 건.

그래도 S 님은 이 글만큼은 서점원에게 보여줌으로써 ‘마감’이라는 것을 했다!며 만족해하셨다.


산문집을 너무도 애틋하게 생각하는 애청자? 애독자? 비슷한 마음이 가득 느껴지는 이 글만큼은 나 혼자 볼 수 없어 이곳에 공유(허락받음)한다.

‘나의 작은 짭문집’이라는 그만의 작은 공간 속 끼어든 산문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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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산문집을 짠하게 바라보는 S 님의 짠한 마음이 가득 담긴 글입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로 인해 S 님이 첫 번째 ‘마감’을 해낸 게 아닐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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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14_안녕 교보문고


공짜로 책도 구경하고 마음에 드는 펜을 직접 써보고도 싶어서 교보문고에 갔습니다.


하지만 진실로 세상에 공짜는 없었습니다. 교보문고에는, 자동차 끌고 젠체하며 들어와서 구경은 교보문고에서 하고 돈은 산문집에 쓰려는 그런 얍삽이들의 뚝배기를 깨버릴, <주차 요금>이란 이름의 철퇴가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가히 말레우스 말레피카룸. 그것은 10분에 무려 천 원의 압력으로 실업자를 옥죄어 왔습니다. 안 그래도 실낱같은 중년의 집중력을 산산이 흩으며, 다만 구경꾼을 충동적 소비자로 몰아세우는 것입니다.


하지만 000 아파트 거주자(전세)로서, ‘작고 작은 동네 서점은 오히려 책을 쉽게 놓을 수 있다는 두려움’을 외면할 수는 없었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들려오는 것도 같았습니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하기엔 산문집 구매 이력이 달랑 책 한 권이라 민망했으나, 드높은 엥겔 계수를 떠올려 요사이 책을 살 형편이 아니었지 않냐고 적당히 자신과 타협할 수 있었습니다.


아니 그런 식의 합리화라니. 그것은 스크루테이프의 달콤한 속삭임 같은 것입니다. 독서 행위를 통해 스스로 사유함으로써 불의한 세상을 명백하고 현저하게 위협하는 독자적 독서가가 되기 위해, 부패 정치인과 전세 사기꾼만이 아니라 시인과 서점원도 호의호식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책을 사치품으로 취급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뭐 그러든지 말든지, INFJ의 번뇌 따위는 아랑곳없이 교보문고의 시간은 따박따박 잘도 흘러갔습니다. 체감적으로는 0.4초에 1초씩 흘러갔습니다. 딱히 구경한 것도 없는데 벌써 한 시간. 원하는 책도, 써보고 싶은 펜도 찾지 못한 채 주차 요금만 6천 원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이쯤이면 빈손으로 떠나는 값으로는 너무나 커져버린 금액이었습니다. 꼬꼬스토리 월곡본점 사장님이라도 잠깐은 고민할 것입니다.


이곳 교보문고에서 산문집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시험당하고 있었습니다. 얼마어치 사랑인지를. 기껏 6천 원짜리인지를. 주차 요금으로는 너무 크고 사랑의 대가로는 너무나 작은. 기분은 이미 다자이 오사무가 되어 절망감, 무력감에 시달렸습니다. 돈 앞에 다른 순수한 가치들을 뒤로 물리는 비굴함은 그만큼이나 거대했습니다. 윤봉길 의사가 돈이 모자라 터질지 안 터질지 모를 짭폭탄을 테무에서 주문하는 그런 마음 같은 것일지. 그렇다면 산문집마저 짭문집으로 즐기고 있는 인생에게 오히려 어울리는 엔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책은 사주지 않을 테다. 하지만 주차 요금도 낼 수는 없지. 그러던 저의 눈앞에 마치 신의 응답처럼, 마음에 쏙 드는 2만 원짜리 귀여운 말 인형 열쇠고리가 나타난 것입니다. Made in Nepal. 에베레스트의 기상과 구르카 용병의 손맛이 담긴 핸드메이드 말 인형. 만두인간에게 어울리는 카트만두의 말 인형. 말의 해에 말없이 나타난 말 인형 열쇠고리. 염하림 생일 선물로 저거 하나면 두 시간 무료 주차… 아아 나의 승리다 교보여.


열쇠고리를 들고 계산대로 향하는 발걸음에는 여유가 넘쳤습니다. 어느 휴양지에서 한가로운 오후를 즐기던 중인 브루나이 국왕이라도 이렇게 여유롭지는 못할 것이었습니다. 최첨단 비접촉 결제 서비스를 실행하는 손놀림에는 은은한 우월감이, 무료 주차 처리를 요청하는 목소리에는 일종의 위엄마저 감돌았습니다.


삐빅, 네 호갱님 무료 주차 한 시간 처리됐습니다.


엣? 한 시간요? 두 시간 무료는 3만 원부터라고요? 허허…. 그럼 당장 튀어 나가야 되는데…. 어허허허 내가 이런 실수하는 사람이 아닌데… 허허허...


주차장으로 가는 길은 골고다 언덕이 되어, 말 인형 열쇠고리는 나의 십자가가 되어, 서글프고 무겁고 질척이는 걸음. 예수님도 그러셨을까요. 저는 마침내 분노했습니다. 작은 것에만 분노하는 나의 졸렬함에 분노했습니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던 김수영 시인처럼이었습니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안녕 안녕히 교보문고.

주차 요금이여 안녕히.


『나만의 작은 짭문집』 중 ⌜안녕 교보문고⌟



2026년 2월 8일 일요일

주차요금으로 이렇게 재미난 글 쓸 수 있는 것 또한 재능의 영역이다




서점원의 문장과 책

도망가고 싶은 순간을 넘어 꾸준히 달리다 보면 글쓰기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게 된다고. 소중한 사람들과 한 걸음 한 걸음 힘주어 나아가면 문장 안에 나만의 냄새와 지문이 새겨질 것이라고.


『연중마감, 오늘도 씁니다』 김현정 지음, 흐름출판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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