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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나무 Oct 07. 2024

11. 호스피스 병원에서의 1달과 퇴원

- 조용하고 평온했던 시간들 

이 호스피스 병원의 시스템은 참 훌륭했다. 어디서 삶을 마감하고 싶냐고 물었을 때 의사들 대부분이 호스피스 병원이라고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불행히도 중대 질병 4가지에 해당하는 이의 마지막 순간에만 입원이 가능하고 최대 2개월이라는 제한이 있긴 했지만, 죽음을 생각하고 함께 준비하게 해 준다는 점이 참 좋았다. 의료(담당 주치의 선생님과 간호사 선생님), 정신적 지지(수녀님), 그리고 사회적 지지(사회복지사)와 자원봉사 하시는 다양한 분들이 환자와 보호자를 돌봐주었다. 


이 병원은 암에 걸렸던 신부님이 병원 생활을 하며 불편했던 요인들을 최대한 제거하며 지을 수 있게끔 했다고 한다. 그래선지 기본적인 환경이 참 좋았다. 병실의 구조, 병실의 가격, 로비의 활용, 무엇보다 침대 통째로 나갈 수 있는 정원이 가꿔져 있었다. 1인실에 환자 침대와 보호자 침대, 냉장고와 조리대가 있는 싱크대가 갖춰져 있었고, 화장실에는 샤워 시설이 있었다. 


이런 환경이나 시설도 중요하지만 가장 좋았던 건, 웬만해선 환자나 보호자가 원하는 걸 들어준다는 점이었다. 전문적인 조언은 해주지만, 결정은 우리가 논의해서 할 수 있었다. 예컨대 우리는 절대 소변줄을 끼지 않고, 필요하다면 소변통으로 정확히 측정하겠다고 주장했다. 아마 케모포트도 여러 부작용을 감수하고도 안 하겠다고 주장했다면 안 했을 것 같다. 처음엔 식사량을 체크해야 한다고 환자식을 먹고 얼마만큼 먹었는지 말해달라고 했지만, 그에게는 이 환자식이 취향이 아니었다. 음식도 우리가 그냥 알아서 먹고 뭘 먹었는지만 보고하겠다고 했다. 이것도 받아들여졌다. 그가 좋아하는 이불과 베개도 집에서 들고 와서 그걸 썼다. 침대도 보호자침대를 썼다. 간이부엌의 조리냄새나 소리를 걱정할 때도 아무 염려 말라고 말해주었다. 편안하고 든든한 안정감이 이 병원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암병원과 요양병원을 거치며 만들어졌던 의료진에 대한 불만감이 상당부분 누그러졌다. 


통증이 잡히고 음식을 섭취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전처럼 해독 주스라든가 암환자에게 좋다고 하는 음식들은 잘 섭취하지 못했다. 속에서 받아들이질 않았다. 컨디션이 아주 좋은 날은 해독 주스를 반 잔 정도 먹을 수 있었다. 그 외 각종 유기농 과일이나 야채 주스 같은 걸 마셨다. 마약성 진통제가 혈관으로 바로 들어가니 이전처럼 위가 아프진 않았지만, 변비는 항상 문제였다. 음식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었기에 언제나 변비약을 먹었다. 변을 보면 병실 달력에 똥 그림을 그려 축하했고, 3일간 변을 못 보면 할 수 없이 관장을 했다. 주식은 주로 유기농 현미누룽지였다. 현미누룽지에 물을 넣어 끓인 누룽지를 주로 먹었고, 반찬은 오징어 젓갈 같이 먹고 싶다는 것을 생협에서 구입하거나 물김치나 배추김치도 조금씩 먹었다. 부드러운 과일, 특히 수박과 복숭아를 좋아했다. 병실의 작은 부엌살림이 점점 더 늘었다. 


아침에 잠이 깨면 침대에 앉거나 휠체어에 앉아서 명상호흡을 했다. 끝나면 소소한 아침 식사를 하고, 그는 커피 향을 맡고 싶다고 핑계대며 내가 편히 커피를 마시게 했다. 나는 커피를 내려 마시고 그는 야채나 과일 주스를 마시며 하루의 일정을 짰다. 10시에 의사 선생님 순회할 때 뵙고 나면 오늘은 뭐 할까. 아직 더우니 바깥에 나가지 말고 병실에서 책이나 볼까? 그래도 3층이랑 1층 로비는 한 바퀴 돌자. 오늘은 누구누구가 방문한다고 했는데 그러고 나면 좀 쉬자. 저녁 먹고 나면 샤워할까? 병원에서도 샤워를 도와주시는 자원봉사자들이 있었지만, 한번 받고 오더니 손길이 좀 거칠어서 아프다고 했다. 기댈 수 있는 플라스틱 의자위에 앉혀서 샤워를 시켰더니 살이 너무 빠져서 엉덩이가 아프다고 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동생네의 친구가 물이 빠질 수 있는 푹신한 플라스틱 방석을 공수해 왔다. 병원에서 잘 사용하고 퇴원해서도 사용했다. 주삿줄 때문에 처음엔 윗옷을 벗기는 것도 요양보호사님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점차 익숙해지니 도움 없이도 가능했다. 맨몸을 다른 사람들에게 별로 보이고 싶어 하지 않아서 주로 혼자 갈아입고 샤워하는 작업들을 했다. 샤워를 하고 환자복을 갈아입고 나면 뽀송하니 기분이 서로 좋았다. 암에 좋다고 하는 프랑킨센스 오일을 몇 방을 몸에 떨어트리고, 다른 유기농 오일은 발바닥에 바르고 수면양말 위로 괄사 마사지를 했다. 그러면 부종들이 좀 잘 가라앉았다. 엄청 간지러워하면서도 좋다고 헤헤 웃었다. 그의 통증이 좀 잡히자 긴장을 놓은 내가 다리에 힘이 풀렸다. 영양제 수액을 맞고 누워있는 나를 말기 암환자인 그가 안타깝게 쳐다보는 모습을 간호사 선생님이 몰래 찍어서 우리에게 전달해 주셨다. 이 사진을 보고 둘이서 깔깔 웃었다. 평온한 시간이 차분히 흘러갔다.


죽음은 당연하고도 분명히 호스피스 병원에 존재했다. 밤새 뭔가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낌새가 있으면, 병실 앞에 있는 문패의 이름이 바뀌면, 또는 어떤 병실을 청소하고 있으면 누군가가 하늘의 별이 된 것이었다. 병실 바깥에 환자 이름과 나이가 있었는데, 그 나이가 20대부터 80대까지 다양했다. 우리보다 나이 어린 문패를 보면 안타까워했고, 우리보다 나이 많은 문패를 보면 저 나이까지만 살 수 있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이는 종일 혼자 침대에 누워있었고, 방문자가 아무도 없어 보였다. 어떤 이는 가족이나 친구가 자주 들렀다. 어떤 이는 침대에 누워있는 이를 두고 전화통화로 신세 한탄만 하고 있었고, 어떤 이는 병원에서 자고 다음 날 허겁지겁 바쁘게 출근하곤 했다. 모두 달랐다. 


우리도 우리에게 닥칠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병원에서도 그걸 권했다. 진지하게 간호팀장님께 물었던 적이 있다. ‘저 같은 일반인도 그이가 집에서 세상을 떠나게 하는 걸 할 수 있을까요’ 엄청나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경험과 훈련이 조금 필요한 일이라고 했다.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해 찾아 읽었다. 읽었던 책에선 - 내용이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 1980년대만 해도 병원보다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게 훨씬 많았지만, 지금은 병원에서 사망하는 경우가 90% 정도라고 했다. 그러다 보니 사람을 떠나보내는 경험을 한 이들이 집에는 없다. 병원이 아닌 곳에서 사망하면 경찰 조사를 받아야 하기도 하고. 대가족제도에선 탄생과 죽음을 함께 준비할 수 있었으나, 지금 같은 가족 구조에선 쉽지 않은 일이 된 것이다. 일본에선 집에서 출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출산 도우미처럼, 자신이 살고 있던 집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도와주는 도우미가 있다고 한다.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사람만 있다면, 나는 그를 데리고 시골집으로 가자고 할 수 있었을 텐데. 물론 통증을 제어할 수 있다는 조건 하에. 나중에 물어봤을 때 그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고, 이후에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아서 고민을 더 진행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이건 나의 고민이 될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이때 영정사진도 정하고, 장지도 정하고, 유산도 어떻게 하자고 방향을 모두 논의해서 정리했다. 어느 날 갑자기 상태가 안 좋아진다는 설명을 자주 듣다 보니 꼭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그가 떠나고 난 지금 생각해 보니, 이런 것들은 최소한의 의견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논의를 하면서도 내심으로 그는 절대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세세하게 논의하지 않았던 것 같다. 결국 준비를 잘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아무리 준비했다고 해도 영원히 불충분할 뿐이다.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시간처럼. 


하나 아쉬웠던 건, 이 병원의 출장시스템을 활용할 수 없었던 점이다. 이 병원의 근거리에 집이 있는 환자들은 출장시스템을 활용할 수 있었다. 의사와 간호사 선생님들이 집으로 와서 각종 처치를 도와주는 것이다. 환자의 상태마다 모두 다르겠지만, 우리의 경우는 그 정도라면 충분한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오래 입원해 있을 필요도 없었고, 퇴원 후 상태가 안 좋아졌을 때도 도움을 바로 받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우리는 병원에서 1시간이 넘는 거리라 해당 사항이 없었다. 가까운 곳에 호스피스 병원이 있다는 것, 이것도 나이가 들면 고려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4대 중대 질병 이외의 환자에게도 호스피스 병원문이 열리면 말이겠지만. 


통증이 조금씩 잡히자 그는 시골집으로 언제 갈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휠체어를 타고 통증으로 너무나 고통스러워하며 죽을 듯이 들어왔다가, 서서히 조금씩 걷게 되고 나중엔 휠체어 없이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주치의는 이제 퇴원할 수 있다고, 집으로 돌아갔다가 더 안 좋아지면 그때 다시 오라고 말씀해 주셨다. 너무나 기뻤다. 드디어 주사줄을 떼고 펜타닐 패치 사용을 시작했다. 패치의 용량이 계획대로 잘 들어맞아서 통증이 제어되자 패치와 사용법을 들고 퇴원을 하게 되었다. 


바로 우리가 그 흔치 않은, 호스피스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하는 환자가 된 것이다. 

입원할 때만 해도 죽음이 바로 앞에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퇴원하게 되자 죽음과의 거리가 멀어진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런 가짜 기적이 어쩌면 우리의 조심성을 무너트리고 우리의 헤어짐을 더 빨리 당겨왔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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