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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나무 Sep 30. 2024

10. 호스피스 병원에의 첫 입원

- 통증의 완벽한 제어

방사선 3 회차쯤 방사선과 의사를 만나러 갔는데, 통증이 힘들다고 호소하니 보다 못한 간호사가 ‘완화의료센터’에 연결시켜 주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사실 치료 목적이 아니라 통증 완화용으로 방사선 치료를 하고 있는 환자라면, 아니 사실은 암이 너무 커져서 손쓸 수 없다고 판단했을 때, 일찌감치 완화의료센터를 소개했어야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2달간 그 고통을 아무런 대안 없이 그냥 참고 버티고 있지 않아도 되었을 거다. 그동안 아마도 암은 더 커지지 않았을까. 완화의료센터에서 마약성 진통제 사용법을 다시 설명 듣고, 호스피스 병원을 예약하라는 설명도 들었다. 그를 위해서는 연명치료 거부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말도. 어차피 연명치료는 우리 둘 다 생각이 없었던 터라 잘 됐다 하면서 함께 서류를 작성했다.

아직도 완화의료센터에서 상담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 앞에서 문을 열고 나왔던 여성분에 대한 기억이 뚜렷하다. 머리가 많이 빠진 거로 봐서 아마 항암 중이었거나, 항암을 중단한 분이었던 것 같다. 호스피스 병원 목록이 적힌 인쇄물을 들고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연신 눈물을 닦고 있었다. 혼자서. 누군지도 알지 못하는 그녀가 울고 있던 그 모습에 꽤 오랫동안 마음이 쓰였다. 혼자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것,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그가 떠난 후 남을 내 모습을 떠올렸던 걸까. 그녀가 편안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기를 기원한다.


함께 상담을 받고 와서, 그에게 긴 편지를 썼다. 말로 하면 울어버릴 것 같으니까, 그리고 내가 울면 안 되니까. 나도 그가 말해왔던 것처럼, 그와 나를 만나게 해 준 그 모든 인연 - 설사 그것들이 종종 고통스러웠더라도 - 에 감사할 만큼 그를 사랑한다고. 왜 사랑한다는 말을 지금까지 피했는지, 그 말을 하면 꼭 먼저 떠날 것만 같아서 못했다고, 이제 떠날지도 모르니 아끼지 않고 말하겠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언젠가 고통이 더 커진다면, 절대 나를 생각해서 버티면 안 된다고 썼다. 그가 겪어야 했던 그 끔찍한 고통을 옆에서 무력하게 지켜보면서, 아무리 도운다고 해도 결국은 잠들고야 마는 그런 상황을 경험하면서, 결국은 고통은 그의 몫이라는 걸 알면서 어떻게 나를 위해 이 세상에 조금 더 오래 남아달라고 말하겠냐고. 그 편지를 읽고 그는 펑펑 울었다. 그가 이렇게 우는 모습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소리 내어 크게 울고 나서 통증이 다 날아간 것 같다고 말했다. 정말 그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런 상황에 와서도 우리는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굉장히 모순적인데, 호스피스 병원에 입원해서 통증이 좀 잡히면 아주 천천히라도 다시 암을 줄여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죽음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다. 분명히 상태가 나빠지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음에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태는 그가 세상을 떠나는 전날까지 계속되었는데, 이게 말기암 환자와 보호자들에게 공통적인 현상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그런 헛된 희망이라도 품어야 그 시기, 몸과 마음이 힘들었던 시기를 버텨나갈 수 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를 위해 자기 최면을 걸었던 것일지도.


그러다 보니 그렇게 힘든데도 방사선 치료를 끝내고 입원하는 게 우리로서는 최고로 좋은 경우라고 생각했다. 분명히 이게 통증 경감용 방사선 치료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쨌건 사이즈를 줄이는 거 아니냐, 그러면 또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여겼다. 실지로 그런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방사선의 조사량이 달라서 통증경감용이라고 하는 건지, 아니면 몸에 쐴 수 있는 방사선량이 이미 다 찼기 때문에 통증을 느끼는 부분에만 쏜다는 것인지. 그때는 제대로 물어볼 정신조차 없었고 지금은 알고 싶지도 않다.


호스피스 병원에 입원하기 위해선 상담을 받아야 했는데, 암병원 의사의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내용의 소견서, 현재 상태를 담은 의료자료가 필요하다. 환자가 움직이기 힘들 때는 가족관계증명서를 지니고 증명서에 기재되어 있는 가족이 상담을 받으러 가야 했는데, 자료는 우편으로 보내고 전화상담이 가능한 곳도 있었다. 너무 감사했다. 스피커폰으로 그와 함께 상담내역을 들을 수 있는 것이. 함께 결정할 수 있으니까. 사실 말기암 환자를 두고 보호자가 상담받으러 가는 것 자체가 보호자 숫자가 많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1인 독거인이나 가족관계증명서를 제출할 수 없는 현제 자매 같은 보호자들을 떠올리면, 전화상담으로 이 과정을 갈무리하는 호스피스 병원들이 더 늘어났으면 좋겠다. 아마도 비용처리 같은 문제 때문이 아닌가 하는데, 좀 다른 방법을 고안했으면 좋겠다 싶다.


수도권의 호스피스 병원을 검색하는데, 당시가 코로나 시국이다 보니 호스피스 병원도 시스템이 각기 모두 달랐다. 주로 대학병원의 호스피스는 호스피스 병실 몇 개만 가지고 있었다. 이런 병원들은 침상이 많지도 않아서 예약하기도 힘들었지만 방문수칙 등이 꽤 강한 편이었다. 입원하면 보호자를 제외한 어떤 이들도 면회실 창문 밖에서만 볼 수 있는 경우도, 바깥 산책도 복도만 가능한 경우도 있었다.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모르니 그가 편하게 떠날 수 있는 곳을 찾고 싶었다. 이번엔 병원 선택에 실패하지 않겠노라며 열심히 호스피스 병원에 대한 평가들을 검색했다. 호스피스 병원들은 입원하려는 환자의 경중도를 따지지 않고, 예약한 순서대로 입원한다고 이야기를 해줬다. 어차피 큰 차이도 아니겠지만. 여하간 대부분 담당의사 선생님을 만나 상담을 했어야 하는데, 병원마다 이야기해 주는 방식이 달랐다. 어떤 병원의 의사는 방사선 치료가 무의미하니 즉각 입원해야 한다고 통보했고, 다른 병원의 의사는 자료를 보며 방사선 피폭량의 한계에 도달한 것 같고 그러니 아마 조금만 쏠 수밖에 없는 것 같다는 설명을 덧붙여줬다. 여러 병원 의사를 만나면서 아주 뚜렷하게 알게 되었다. 의사마다 의견과 태도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지만.


결국 우리는 3군데의 호스피스 병원을 예약하고, 최종적으로는 용인의 동백성루카 호스피스 병원을 가기로 결정했다. 둘 다 무교인 우리는 종교색이 강한 곳은 불편해했는데, 가톨릭에 대해선 평상시 거부감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먼저 병실이 비는 곳에 입원해 있다가 자리가 나는 즉시 이 병원으로 옮기자고 했으나 운이 좋게도, 방사선 치료가 끝났을 때 성루카에서 연락이 왔다. 특실이 비었는데 입원하겠냐고. 일단 입원해서 나중에 다른 병실로 옮기겠다고, 당장 짐을 쌌다. 입원할 짐을 챙기고, 집을 정리하느라 바빴다. 그는 어쩌면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을까, 부축을 하고 같이 집 바깥을 천천히 걸으며 그 풍경을 한참 눈에 담았다. 이 무렵 그는 이미 그는 모든 지탱할 수 있는 에너지는 다 끌어다 쓴 것만 같았다.


7월 11일, 입원하면서 그간 마약성 진통제를 어떻게 섭취했는지 써 둔 목록을 병동의 간호사와 의사 선생님들께 드렸더니 이런 목록은 진짜 오래간만에 본다며 깜짝 놀라셨다. 진통제 용량과 섭취에 대한 걱정은 하지 말라고, 이런 거 안 써도 될 정도로 자신들이 알아서 통증을 케어할 거라고 말씀해 주셨다. 하지만 우리는, 특히 그는 원체 오랫동안 병원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 터라 딱히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입원한 첫날밤, 특실의 많은 침대들을 두고 그는 소파 위에서 내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잠을 청했다. 그 든든했던 어깨가 얼마나 작아졌는지, 너무 바짝 말라서 코끝이 찡했다. 그러면서 이 병실, 이 병원이 너무 싫다고, 시골집으로 돌아가자고, 자기는 집에서 죽고 싶다고 말했다. 나중에 물어봤을 때는 자기가 그런 말을 했었냐고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시골집을 떠나 낯선 병원에 와서, 그것도 죽음을 전제한 호스피스 병원에 와서 자신의 두 번째 삶의 결정체인 시골집에서 죽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하루인가 이틀인가 우리에겐 너무 큰 특실에서 지내고, 1인실로 이동했다. 1인실이 너무 좋았다. 환자 침대의 1.5배는 큰 보호자 침대가 있었는데 그는 주로 그 보호자 침대를 이용했다. 요양병원에 있을 때부터 병원 침대는 엄청 싫어했었으니까. 병원에서는 최대한 환자와 보호자의 생각을 존중해 줬기 때문에, 위급한 환자가 아니라면 꼭 환자용 침대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고 해줬다. 단, 암이 너무 커져서 기도를 압박하고 있으니 혹시나 약을 먹다가 잘못해서 기도로 물이 넘어가면 너무 위험하기도 하고, 안정적인 진통의 제어를 위해서 주사로 진통제를 투입하기를 권했다. 그리고 정말 기적처럼, 기존에 쓰던 진통제 분량의 반만으로 통증이 잡혔다. 결과적으로는 대학병원의 완화의료센터의 마약성 진통제 사용법 지도가 적절치 않았다는 것이다. 이미 2년 전이니 지금은 좀 달라졌을 수 있겠지만.


통증이 잡히니 그도 점점 원래의 그로, 여유롭고 너그럽던 그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여전히 나만 새끼를 돌보는 고슴도치처럼 온몸과 마음이 긴장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그의 혈관은 이미 항암제 때문에 거의 다 망가져 있었지만, 외관상으로는 멀쩡히 보였던 것 같다. 몇 번이나 보기와는 다르다, 혈관 찾기 힘드니 혈관을 가장 잘 찾는 간호사선생님이 놔달라고 부탁했으나, 자신만만 해 하던 어떤 간호사가 세 번째로 찌르고도 실패했을 때 온 병동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렀다. 뭐 하는 짓이냐고. 지금 생각하면 창피하고 죄송한 노릇이지만, 항암 할 때의 주사 트라우마가 드디어 터져나왔던 것 같다고 핑계를 대본다. 그의 혈관은 계속 도망 다녀서 간호사 선생님들이 힘들어했다. 게다가 겨우 혈관을 찾아서 주사제를 연결해도 결국은 혈관이 막혀서 다시 찔러야 하는 경우도 잦았다. 결국은 케모포트를 시술해서 항상 마약성 진통제를 걸어둔 주사대를 데리고 매일 산책을 다니게 되었다. 처음에는 휠체어에 탄 채였지만,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걸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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