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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나무 Sep 16. 2024

8. 말기암 환자의 통증 제어

처음 우리를 그 요양병원에 이끌었던 후배가 얼마 전부터 상태가 좋지 않았다. 뭔가 삶의 의지를 잃은 것처럼. 물어봐도 괜찮다고만 할 뿐 제대로 말해주지 않았다. 뭐가 그 녀석을 괴롭게 했을까. 자신을 지탱하고 있던 무언가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제대로 뭘 못 먹는데 쑥떡은 먹는다고 해서 겸사겸사 현미 쑥떡을 만들어서 요양병원 앞으로 가지고 갔다. 병원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으니, 얼굴도 못 보고 전달해주기만 했다. '쑥떡 잘 먹을게요'라는 문자를 받았지만 실지로는 얼마 먹지도 못했을 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학 동창들이 1박 2일로 그 녀석을 보러 근처에 놀러 온다고 했는데 거기를 간다고 마약성 진통제를 엄청 먹었다고 들었다. 요양병원 환우들이 무슨 짓이냐고 말렸으나 그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아마 자신이 떠날 걸 알고 그랬던 것 같다.

상태가 위중해져서 응급실로 갔다가 의사가 호스피스 병실로 옮기라고 했는데 보호자가 거부해서 상당히 힘들었다고 한다. 병의 진행에 대해 잘 몰랐던 누님은 호스피스에 가면 죽는다는 생각만 하셨다고. 다행히도 마지막엔 호스피스 병실에서 숨을 거뒀다고 전해 들었다. 후배의 상가의 벽에 붙어있던 후배가 남긴 글이다.      


“아름답고 빛나던 시절에 만나 함께 한 동기, 동문, 우인, 지인분들,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파도를 헤쳐온 시간들이 순간인 듯 영원인 듯 행복하고 감사했습니다.

소중하고 기쁘게 하루하루를 사십시오”      


OO아, 네가 떠난 후 형이 더 안 좋아져서 내가 정신이 없었어. 아, 둘이 벌써 만났겠구나. 아직도 네가 있는 곳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네. 내 년 네 기일에는 꼭 들러볼게. 소중하고 기쁘게 하루하루를 사는 건 아직은 안 되고 있지만, 언젠가는 되겠지, 될꺼야.     

    

그 후배를 보며 그는 암환자의 치병에 있어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고 했다. 암환자를 괴롭히는 건 셀 수 없이 많지만, 암환자를 행복하게 하는 건 몇 개 되지 않는다. 물론 나을 수 있다는 희망도 포함되겠지만, 최고는 자신이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는 안정감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지도교수님이 시골집에 한번 오셨는데, 몰래 편지와 용돈을 감춰두고 가신 적이 있다. 그 편지의 내용이 혼자 세상과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고, 많은 이들이 쾌차해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거였다. 그 편지를 읽고 행복해져서 속으로 많이 울었다고 했다.     


격리 기간이 끝나고 돌아와서, 본격적으로 통증이 시작되었다. 일반적인 진통제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참을성이 너무 많아서 웬만하면 밖으로 아프다는 반응을 안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암에 걸린 거라고 할 정도로. 그런 그가 너무 아프다고 호소했을 때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 암병원을 찾아갔다. 왜 그랬는지 이유가 기억나지 않지만, 육종암 주치의가 아니고 방사선과 교수님을 만났다. 원래 우리를 담당하던, 우리가 좋아하던 의사는 연구년으로 자리를 비웠고 다른 의사가 담당자가 되어있었다. 통증을 호소하고, 마약성 진통제 처방을 받았다. 엑스레이로만 보아도 왼쪽 폐가 다 희다고 할 정도로 암 크기가 엄청나게 커져 있었다. 통증을 줄이려면 암 크기를 줄여야 하니 방사선 치료를 받기로 했다. 그러려면 CT를 찍어야 했는데, 알다시피 이것도 오래 기다려야 했다. CT 결과는, 커진 암세포가 심장과 기관지, 갈비뼈를 압박해서 위험할 뿐만 아니라 아플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문제는, 이 의사가 마약성 진통제 처방에 대한 경험이 별로 없다는 점이었다. 그는 타진, 아이알코돈 같은 진통제만 처방했는데 마약성 진통제를 몰랐던 우리는 구토에다가 위가 너무 쓰려서 도저히 약을 먹을 수조차 없었다. 동네 내과의 문을 두드려 위보호제와 구토방지제를 처방받았다. 나중에야 마약성 진통제들을 먹을 때 이것들이 필수적으로 따라붙어야 하는 약들인 줄 알았다. 게다가 필히 변비를 야기하므로, 변비를 예방할 수 있는 약도 필요하다. 이 병원의 완화의료센터도 마약성 진통제 사용법을 설명하긴 했지만, 설명을 잘못한 건지 우리가 잘 못들은건지, 통증을 제어하지 못했다.  

이 기간 동안, 통증 발생 후 호스피스 병원에 입원하기 전 2달간의 어마무시한 고통과 통증은 그의 암을 더 크게 만들었을 것 같다. 이젠 음식 섭취도 힘들 뿐 아니라 통증 때문에 제대로 누워있거나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마약성 진통제를 지시한 대로 먹어도 통증이 가라앉지 않았고, 이때만 하더라도 마약성 진통제를 많이 먹으면 중독된다는 걱정으로 최대한 자제해서 먹으려고 했다. 나중에야 먹는 방식이 틀렸다는 걸 알았지만. 모든 보호자가 그렇겠지만, 이때의 무력함은 정말...


할 수 있는 거라곤 퇴근하자마자 달려가서 등을 마사지해 주는 것 밖엔 없었다. 통증은 밤이 오면 더 심해졌다. 너무 아파하니 한참 동안 등을 쓸어주듯이 계속 마사지하면 좀 가라앉는 것 같다며 고맙다고, 자겠다고 눕는다. 함께 누워 자다 기척이 없어서 놀라 깨면 침대 아래 내려가서 엎드려 있었다. 호흡이라도 해서 조금 가라앉혀보겠다고. 왜 안 깨웠냐고 하면 어떻게 계속 깨우냐고. 요가 매트 위에 엎드려 단전호흠으로 고통을 조금이라도 내려보려던 그 모습은 지금도 회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참 아프다.


통증을 조금이라도 경감시켜 줄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수소문했다. 20분 정도 가면 효소치료라는 걸 하는 곳이 있었는데, 효소를 부어 숙성시킨 모레 속에 옷을 다 벗고 들어가서 치료하는 것이었다. 희한하게도 이 속에 있는 동안은 통증을 느끼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이 큰 효소통을 집으로 옮기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오래 있으면 몸에 힘이 떨어져서 불가능했다. 그래도 밤이 오면 힘들었다. 그다지 관심 없어했던 작은 다리미 같은 마사지기도 구입했다. 통증 부위를 마사지하면 어떨 땐 괜찮아졌고, 어떨 땐 더 심해져서 하지도 못했다. 이마저도 나중엔 쓸 수가 없었다. 계속 마사지하기 힘드니 안마의자나 누워서 받는 안마 침대도 고민했으나, 통증 때문에 쓸 수가 없는 거다. 최고는 인간의 손인데, 인간의 손이 2개뿐인 데다 계속 마사지만 하고 있을 수도 없다. 통증 때문에 용을 쓰니 하룻밤 안에 잠옷은 흠뻑 젖었다. 일반식을 할 수 없으니 음식에도 시간이 많이 들었고, 청소에 약 챙기기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결국 동생네가 주말마다 시골집으로 들렀다. 그들이 없었다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견디지 못했을 거다.      


방사선과 의사는 13회 방사선 치료를 처방했다. 멀리서 다녀야 하는데 10회 정도 2주로 해주면 좋았을 것을, 4주 일정으로 잡아주었다. 1주 차에 금요일 1회, 2주 내내 10회, 4주 차에 2회. 애원해도 변동은 없었다. 야속했다. 나중에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이미 치료가 아니라 통증 경감이 목적이었으니 나을 확률이 있는 환자들에게 우선적으로 시간대를 배정했을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이때 이동 자체가 힘들었다. 차에 타려면 이불을 깔고 앞뒤로 보호하고 타야 할 정도였다. 차 속도를 20킬로 이상 내면 약간의 돌멩이 위를 바퀴가 튕겨도 밖으로 악하고 소리를 낼 정도로 아플 때였다. 멋도 모르고 1회 차를 서울까지 다녀오느라 몸과 마음이 걸레가 되었다. 방사선도 힘든 건데, 그 몸으로 왕복 3시간을 움직였으니... 버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 담주엔 그러지 말자고 병원 근처의 친구 작업실을 빌렸으나, 너무 바보 같은 일이었다. 10분밖에 안 되는 거리였으나, 출근 시간에 움직여야 하다 보니 차가 너무 밀려서 30분이 걸렸다. 아무리 못 먹는다고 해도 뭔가를 먹여야 하니, 음식을 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다. 그다음 주는 서울에 있는 요양병원에서 5일을 다녔다. 그래도 암환자용 식사도 나오니 편하게 통증만 관리하자고. 그래도 멀어서 힘들었다. 마지막 4주 차 이틀은 그냥 병원 근처의 호텔을 잡았다.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다. 5분 거리의 호텔을 두고, 뭘 얼마나 먹일 거라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데. 차라리 호텔을 잡아두고, 말기암 환자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나가서 공수해 오는 게 훨씬 나았을 텐데.


환자의 통증에 집중하다 보면 모든 판단력이 다 떨어진다. 정말 누군가는 몸 쓰는 일만 하고, 누군가 1명이 더 있어서 판단해야 하는 일을 해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동생네도 내가 제일 잘 안다고 생각하고 판단을 맡겨두었으니, 이런 오류를 저질렀다. 멀쩡할 때라면 항상 의견을 같이 조율하다 보니 문제 발생 소지가 적었었는데... 내가 혼자 하다 보니 이런 실패들을 저지른 거다. 제일 큰 실패는 호스피스 병원을 빨리 알아봤어야 한다는 거다. 꼭 입원이 아니라 마약성 진통제 관련 투약상담도 가능했는데.  





* 통증이 커져서 손쓸수 없을 정도가 되면, 마약성 진통제로도 통증이 안잡히면, 투약방법과 용량에 문제가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 마약성 진통제가 중독성이 있다는 건 신경쓸 필요가 없습니다. 환자의 고통 경감이 제일 중요합니다. 이 통증은 정말 상상을 초월합니다.  

* 말기암환자의 통증 제어에 가장 경력이 많은 곳은 호스피스 병원이니, 꼭 투약종류, 투약방법이나 용량 관련 상담을 받아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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