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통사고 그리고 코로나 19
자연치유를 하며 우리는 서서히, 암을 없애려고 하는 게 아니라 잘 "관리"한다는, 잘 데리고 산다는 생각으로 접근했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진단받을 때부터 이미 전이되어 있을 확률이 높은 우리의 육종암은, 사실상 항암도 방사선도 수술로도 완치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암을 없애버리겠다고 생각하지 않고, 관리하겠다고 생각했다면 항암도 수술도 방사선도 꼭 필요했을까 싶다. 나중에 이 모든 치료들이 불가능해졌을 때에 가서야 항암 담당의사는, “환자분의 암은 완치가 불가능하며, 치료는 생명 연장의 의미밖에 없다”라고 말해줬다.
의사는 세 가지 치료방법을 통해 생명을 ‘연장’시키는 게 역할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생명 연장보다 생명의 질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이다. 처음부터 생명연장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 모든 치료로 인한 고통과 후과들이 생명연장의 의미밖에 없다는 걸 명확히 알았었다면, 항암 방사선 수술 컨베이어 벨트에 무작정 올라타지 않았을 거다. 환자에게 면담시간 10-15분 만을 허용해 주는 의사는 모든 환자가 생명연장을 원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평균적인 치료절차를 밟고, 환자들은 의사에게 자신의 특수성을 꼬치꼬치 주장하지 않으며, 못한다. 그래서 이렇게 된 것이다.
그가 떠나고 나서, 시골집을 빌렸던 것에 대한 후회가 몰아쳤을 때 주변에선 모두 그랬다. 그래도 그 집에 있을 때 얼마나 행복해했냐고. 전원주택이라는 본인의 꿈을 실현해 봤으니 좋았을 거라고. 죽음을 전제하면 그 말이 맞다. 집을 빌리지 않았다면 더 살 수 있었을 테고, 나중에 더 길게 함께 전원주택에서 살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후회하는 거다. 이미 끝난 일. 이제 조금씩 그 집에서의 좋았던 기억들을 인정하는 걸 보니, 그의 죽음을 진짜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나 보다.
그가 뽑았던 그 집의 최고 장점은 불멍이었다. 방 1개가 황토방이었는데 장작으로 불을 붙여두고 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 그런 평온이 없다고 했다. 나는 장작을 태울 때 배출되는 이산화탄소가 걱정되었지만, 원체 행복해하는 모습에서 ‘그러려니, 좋으려니’ 하고 그냥 넘어갔다. 언젠가 함께 나란히 앉아서 불을 피우고 있는데 비가 오기 시작했다. 원래 좋아하던 처마밑으로 타닥거리며 떨어지는 빗소리, 아궁이 안에서 또 다른 타닥거리는 소리들, 좋아하는 것들을 듣고 보면서 나지막이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은 여전히 행복하다.
내가 뽑은 최고의 장점은 정말 조용하다는 것. 도시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고요함. 어쩌다 한 번씩 나는 차 소리 정도가 최대의 소음이었고, 동네주민들이 모두 귀가하고 나면 압도적으로 고요했다. 그가 오래간만에 바깥세상으로 나가자고 하면, 바깥세상에서 들어온 나는 나가기 싫다며 집에 달라붙어 있었다. 별 보기를 좋아했던 우리는 멀리 가지 않아도 별이 잘 보인다며 즐거워했고, 텃밭에서 상추가 올라오고 계속 따도 나오는 걸 보고 신기해했으며, 방울토마토나 고추가 겨우 2개 달린 걸 따와서 서로 완전한 자연산 유기농이라며 먹으라며 양보했다. 가을이 되면 밤이 떨어졌고, 밤을 모아 내가 좋아하는 맛밤을 만들어주었다. 봄에는 뒷산에 두릅을 따서 먹었고 머위도 삶아 먹었다. 이렇게만 죽 살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밤에는 멧돼지가 내려올 수 있다는 둥, 얼마 전에 고라니를 봤다는 둥 하며 자기 덕분에 시골생활도 해보는 거라며 놀리곤 했다. 집을 건사하기 위해 그가 하는 노동은, 본인이 재미있고 즐겁다고 하니 그냥 그러려니 했다.
요양병원에 있을 때 몇몇 환우들이 소개해서 호흡명상수련을 새로 시작했는데, 나중엔 모든 치유활동 중에서 가장 우선적인 것이 되었다. 처음엔 같이 하자고 열심히 꼬드겼으나, 어느 날부터인가는 본인이 열심히 해서 가르쳐주겠다로 바뀌었다. 어느 날엔가 큰 목소리로 “자기야, 이리 와봐!” 해서 깜짝 놀라 달려갔더니, 배 좀 만져보라고 했다. 만졌더니 정말로 배가 따뜻한 게 아닌가! 이제 슬슬 체온이 올라가는 것 같고, 이전보다 추위를 덜 타는 것 같다고. 옛날엔 눈동자가 탁했었는데 눈동자 근처의 흰자위도 깨끗해졌고, 거칠었던 발뒤꿈치도 아기처럼 보들보들해졌다. 이게 바로 수련의 힘이라며 귀여운 호들갑을 떨며 자랑했다.
그러던 어느 날엔가, 중증 암환자인 자신의 전망을 호흡수련 사범님을 따라 암환자들의 호흡명상을 도와주는 작은 사범으로 정했다며, 괜찮겠냐고 동의를 구했다. 돈은 못 벌겠지만, 몸도 관리하며 다른 사람도 돕고 의미가 있겠다고. 세상에 그런 좋은 일이 어디 있냐고, 너무 좋은 생각이라며 적극 찬성했다. 삶의 의미를 중요시하는 사람이었으니까.
1주에 1번은 호흡명상을 배우러 가고, 또 1-2번은 근처 요양병원에 가서 침치료도 받고, 몸 관리에 도움이 된다는 한약도 먹고 이런저런 마사지도 받으면서 나름 평온하게 지냈다. 한번 정도 암병원에 가서 검사하고 방사선과 의사를 만났던 기억이 있다. 그분은 계속 방사선 치료를 권했고, 우리는 최대한 핑계를 대며 치료를 미뤘다. 암이 눈에 띄게 커지거나 하지도 않았고, 한쪽 암 크기가 커지는 만큼 다른 암 크기는 작아졌으므로 또 표준 치료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봄에 시골집에 들어가서 여름, 가을을 보내고, 겨울의 중간 즈음, 2022년 1월에 혼자 집에 가다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났다. 앞차들이 비상등에 급정거를 해서 따라 하고 백미러를 봤는데, 앞 상황을 못 봤는지 1톤 트럭이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이제 죽었구나 했다. 부딪히고 충격으로 앞차들 2대를 박았다. 차 뒷부분이 다 찌그러졌는데, 다행히도 외상은 없었다. 그는 내가 다쳤다면 제대로 치병도 못했을 거고, 혹시나 죽었다면 자기도 혼자 제대로 치병도 못하고 슬퍼서 죽었을 거라고, 정말 신이 도왔다고 했다. 나중에는 우리의 운을 이 사고에서 다 쓴 건가 생각도 들었다. 문제는 그다음. 외상은 없는데 차를 타기 어려웠다. 하필 이때 암병원에 진료가 잡혀있었다. 별 수 없이 혼자 의사를 만나러 갔다. 다녀와서는 상태가 별로라고, 아무래도 요양병원에 다시 입원해서 100일 정진을 해야겠다고 했다. 혼이 나가있는 상태였으니 자세히 말해주지도 않았다. 조금의 정신이라도 있었다면, 진료를 좀 미루자고 했을 텐데. 그리고 요양병원에 입원하는 것도 생각해 보자고 했을 텐데. 한참이 지난 후에야 이때 면담에서 의사가 암이 조금만 더 커지면 통증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었다고 말해주었다.
요양병원에서 코로나에 걸린 것 같다. 100%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던 상태에서 감염되었으니 그럴 확률이 높다. 당시 코로나 백신에 대해 말이 많았는데, 암환자들은 백신을 맞고 몸이 더 나빠진다는 말도 돌았다. 백신을 맞는 문제에 대해서는 각자 선택을 했다. 그는 백신을 맞지 않았다. 이제야 좀 몸에 치유력을 키워내고 있는데 백신을 맞으면 면역력이 또 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요양병원에서 코로나에 걸렸다고 격리를 당하는 바람에 바이러스가 없다는 결과가 나을 때까지 병원에서 나오지 못했다. 짐 싸는 걸 도와주러 가지고 못했다. 고열로 엄청 고생했다고 이제 다 나았다고 말했지만, 이미 병원에 있을 때부터도 통증이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요양병원에 거칠게 항의할까 봐 어디에서 걸렸는지 모르겠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퇴원하고 나서는 원인을 찾고 항의하고 할 겨를도 없었다. 시골집으로 돌아온 그의 모습은 입원 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암이 급속도로 커진 듯, 본격적으로 암성 통증이 시작되었다.
요양병원에서 식사나 청소 등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오직 몸 상태만 생각하는 것과, 시골집을 얻어 식사나 청소, 집 관리를 신경 쓰며 지내는 게 어떻게 같은 효과를 가져오겠는가. 당연히 요양병원에 있을 때보다 시골집에 있을 때가 암 관리엔 더 힘든 조건이었을 것이다. 오랫동안의 꾸준하고 지난한 암 관리를 위해선 주변 환경, 산에의 접근성이나 병원과의 거리도 중요하지만, 생활의 편의성, 정신적인 편안함과 안정감, 외롭지 않은 충족감 이런 것들이 총체적으로 필요하다. 왜냐하면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아주 기나긴 장거리 경주이고, 더 정확히는 그냥 일생을 암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거니까. 시골집을 얻은 마음의 기저에 사실상, “빨리 암을 안정시키겠다”는 욕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 조급함이 결국 과함을 불러오고, 결국 몸에 무리를 불러왔던 것 같다.
시골집을 얻었던 게 실패의 원인 중 하나라면, 내 교통사고는 두 번째 원인일 것이다. 판단력이 멀쩡했다면 암이 전체적으로 커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했을까. 코로나 시국이고, 요양병원이 코로나 관리를 일반 병원처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입원은 못하게 했을 것이다. 만약 코로나만 걸리지 않았다면, 요양병원에 있을 때만큼의 몸 관리를 하게 하고 커진 암을 다시 진정시킬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확보할 수 있었을 텐데. 그랬다면 우리는 함께 있는 시간을 더 벌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교통사고와 코로나 19는 묘하게 톱니바퀴처럼 맞물렸고, 벗어날 수 없는 그물망처럼 우리를 덮쳤다.
* 코로나 19 같은 감염병 사태가 있을 때, 특히 폐암, 폐수술 환자들은 요양병원이 어떻게 관리하는지 미리 알아보고 입원할 필요가 있다. 병실에서는 마스크를 사용해도 병원 내 치료실에선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 암세포를 지병처럼 생각하고 잘 관리하자고 생각하면 급한 마음은 좀 줄어들지 않을까. 급한 마음이 없어야 과도한 계획을 무리해서 잡지 않게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