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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나무 Sep 02. 2024

6. 죽음으로의 걸음을 딛게끔, 내가      

- 내가 삶의  방식을 바꿔야 했어

작지만 육종암의 크기가 줄었다는 건, 분명히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리고 그 기적 같은 일이 한 더 일어났다. 작은 암은 좀 커지고, 큰 암은 더 작아지는. 게다가 그가 엄청 기뻐했던 일이 생겼는데, 노래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폐를 상당 부분 절제하면서 숨 쉴 때도 약간씩 헉헉대던 그가, 노래까지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요양병원에서 6개월을 열심히 보낸 결과, 큰 암은 1.5cm 줄었고 작았던 암은 0.5cm 커졌다. 전체적으로는 좋아진 거고, 주치의는 크기가 줄었다는 것에 대해 신기해할 뿐이었다. 아침 전 2시간, 점심 후 3시간, 저녁 후 2시간의 산책과 등산, 호흡을 매일 하고 이 외에도 다양한 치유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결과였을까.     

  

그런데 왜, 이런 기적 같은 일은 계속되지 않았던 걸까.

나 때문이다. 그의 기본적인 마음가짐은, 나의 버팀목이 되는 것이었다. 내가 남들이 보면 사막에서도 우물을 팔 것 같지만, 실제는 그런 에너지가 쉽게 고갈되는 경향이 강하다는 걸 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본인이 아프고 힘들어도 내게 잘 말하지 않는 스타일인 것이다. 언젠가 호스피스병원에서 그가 말했던 것처럼, “조용히 가만히 관찰하고 파악해서 알아서 해주는 거, 그런 거 못하잖아” 몸도 마음도 힘들었을 때 들었기에 힐난이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힐난을 받을만했다.


내가 그의 온전한 버팀목이었다면, 어쩌면 그는 선택을 달리 했을지도 모른다. 예컨대 나는 “힘들면 뭐라도 해달라고 말해, 다 해줄게”하고 말하는 사람이었지, 그에게 필요한 걸 알아서 해주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다정다감한 이였지만, 나는 무뚝뚝한 이였다.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힘이 넘칠 때는 그래도 아무 상관없었겠지만, 몸과 마음이 힘들 때는 뭔가 필요하다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 힘든 것이건만. 그걸 정말 몰랐을까. 아무리 일에 정신이 팔려도 그럴 수가 있을까. 그렇게 정신 팔려서 그를 제대로 보지 않으며 해냈던 일들이 이제 와서 없었던 일처럼 되어버린 것을 보면, 나란 인간은, 나이가 이렇게 들 때까지 삶에 있어서 뭔가 중요한지 모르는 얼간이이다. 그러니 오늘날 이리 고통스러운 것도 당연한 거다.  

     

최악의 스텝은, 요양병원에서 9개월을 보낸 뒤 병원 근처에 집을 구한 것이다. 실손보험 면책기간 90일이 있으므로 어차피 병원에서는 퇴원해야 했고, 다시 재입원하려면 3개월이 지나야 했다. 식사와 청소 등을 안 해도 되고, 오로지 자신의 몸만 생각하는 게 정말 중요하다. 조금 더, 1년 넘게 지냈다면 자연치유에 대한 과다한 정보들 중에서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만 뽑아냈을지도 모르는데. 9개월은 짧았다. 뭐랄까 암병원의 치료법에 절망한 나머지 자연치유법에 과도하게 경도되었던 시기? 오랫동안 차분히 경험했다면, 우리는 우리의 집으로 돌아왔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요양병원 근처에 있고 싶다고 해서 황토방을 월세 300만 원으로 구할 수 있는 곳들을 들러봤다. 식사가 제공되긴 했으나 어쩌다 내가 같이 있으려면 공간이 협소했고, 딱히 마음에 들지 않는 식사비용으론 과다하다고 생각했다. 그냥 인천 집에서 다니는 방법도 있었으나, 주 2회는 인천집에서 1시간 반이 걸리는 이 지역까지 나와야 했다. 요양병원에서 침 치료를 받거나, 새로 시작한 명상호흡 수련 역시 주 1회이므로, 주 2회씩 다니기는 피곤한 일인 데다 인천집 근처에는 산이 없어서 환경이 별로라고 했다.


아마도 요양병원 근처의 산 아래 집을 고집하게 된 건, 요양병원 근처에 있어야 안심이 된다는 마음 - 달리 말하면, 아직 자연치유의 핵심이 몸에 완전히 배어있지 않다는 반증 - 과 내가 내 생활을 바꿀 의지가 없어 보였다는 것, 그리고 또 그래서, 암환우 커뮤니티와의 편안함 때문이었을 것 같다. 내가 버팀목이 못되니, 당연히 주변의 암경험자들, 이심전심이 되는 사람들이 편하지 않았을까. 당시 요양병원 모임에 있는 암환자들의 로망이 산 아래 텃밭이 있는 황토방이었다. 자신들이 할 수 없는 것을 누군가 해주면 좋겠다고 반응하지 않았을까. 실제로 집을 구한 후 종종 모임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꽤 투덜거렸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으면 제대로 암치유가 되겠냐고 잔소리를 했다. 이거 봐, 내가 삶을 바꿨어야 했다니까. 내가 일을 줄이고, 그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시골집에 오고, 함께 손잡고 산에 오르고 산책하고, 비건식을 함께 만들어먹고, 명상호흡하고, 몸과 마음의 상태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고. 그랬어야 한다고. 그런데 나는 어떻게 했더라? 암 치유에 대해선 나보다 그가 더 전문가라고 생각해서 그냥 맡겨버렸지. 게다가 이미 9개월을 떨어져 지냈는데, 또 떨어져 지내겠다고 해서 화도 냈고. 1개월 동안 요양병원에서 같이 있었던 것으로는, 암환자의 몸과 마음이 어떤지 알 수 없었다.

왜? 나는 제대로 보려고 하지 않았고, 그는 힘든 모습을 숨겼으니까. 나는 그냥 자연치유의 원리가 어떤 거다 정도만 파악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거기서도 노트북을 가져가서 일을 하고 있었으니.      


지금이라면, 그냥 집에 같이 있으면서 주 2회 건 3회 건 필요하면 내가 운전을 해서라도 다니면 된다고, 꼭 그렇게 하자고 말했을 거다. 왜냐하면, 그는 전이된 4기 암환자였기 때문이다. 오로지 이기적으로 자신의 몸과 마음만 돌봐야 살 수 있다. 산책이나 등산, 운동도 과하면 안 된다. 산의 좋은 공기가 필요하면 오히려 집 근처에서 최대한 가까이에 등산용 공간을 하나 찾는 방법도 있었을 거다. 그리고 암환자에게 가장 좋은 건, 가족이 삶의 스타일을 함께 변화시키는 거다. 환자에게만 몸에 좋은 걸 하라고 강제하는 게 하니라, 함께, 같이. 그랬어야 했다.


그는 여러 번 내게 표현했다. 간접적으로.

“마님, 일을 좀 줄여야 돼, 일을 너무 많이 해”.

나는 못 알아들었다. 같이 일을 하다, 그는 암환자가 되었으니 쉬어야 하고, 나는 암환자가 아니니 일을 해도 된다고만 생각했다. 그게 같이 있어달라는 말인지 몰랐다. 앞으로 달리느라 귓가로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       


왜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을까.

“나 힘들고 무서워, 같이 하자, 나랑 같이 시간을 더 많이 보내 줘, 혼자 있는 거 싫어, 같이 밥 먹고 같이 운동하고 같이 이 어려움을 나누고 싶어.” 왜냐하면, 그는 나의 버팀목이고 싶어 했으니까. 또는 내가 바뀌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아니면 그게 그가 나를 사랑하는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냥 나대로, 내가 하던 대로 두는 것.


봐, 그 결과가 이거야. 이 고통이 자기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벌이라고 생각하면 나도 나름 억울하기는 해. 나, 의외로 유연한 사람이야. 제대로 말해주었더라면, 나는 분명 바꿨을 거야. 하지만 그럼 뭐 하나. 이미 자기는 없는데.




오늘은 자기 생일. 산소에 꽃을 바꾸러 갔더니, 사마귀가 있더라. 시골집에서 산책할 때, 어스름이 해가 질 때, 함께 사마귀를 보면서 ‘어릴 땐 사마귀가 물면 사마귀가 생긴다고 생각했다’면서 한참 웃었던 기억이 났어.

아 사진이 있었지 하며 찾아보니, 2022년 9월 11일.




* 가족 중의 한 명이 암환자가 되면, 그 사람을 결코 혼자 외롭게 두지 말자. 

* 가족은 같은 환경에서 함께 지내므로, 함께 같은 걸 먹고 같은 곳을 산책하고 운동하며, 함께 걱정을 나누는, 가족이 함께 일상을 바꾸는 게 좋다.  

* 암환자는 완치 판정을 받더라도 언제나 재발이나 전이의 공포를 갖고 살며, 결코 몸이 치료 전과 같지 않다. 완치되었는데 왜 그러냐고 생각하지 말자. 

* 게다가 5년간 재발이 없어서 완치판정을 받아도, 5년 지나서 재발하는 경우도 많으므로 완치판정받았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다. 계속 추적치료 중인 환자는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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