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피스 병원 퇴원 후, 시골집에서의 생활 1
8월에 퇴원해서 다음 해 1월까지, 우리는 5개월간 시골집에서 있었다. 다시 호스피스 병원에 입원했을 때, 이렇게 오래 있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는데도 놀라웠다고들 하셨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건 그의 삶에 대한 의지, 호흡명상 수련의 힘, 나름 정성스러웠던 뒷바라지 덕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나보다 먼저 새벽에 일어나서 먼저 1시간에서 1시간 반 정도 호흡명상 수련을 했다. 끝나면 나를 깨우고, 천천히 집 아래까지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가벼운 산책을 했다. 그 사이 아침을 준비하고, 준비가 끝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집 밖으로 나갔다. 암이 심장, 기도, 흉벽을 압박하고 있으니 아주 조금씩 천천히 움직여야 했고, 산책하러 갔다 늦으면 혹시나 하는 불안한 마음은 상존했다. 식사를 준비하던 건 잘 기억나지 않는데, 그를 찾으러 밖으로 나가서 밑으로 내려가서 손잡고 같이 걸어 올라오던 기억은 부럽게 남았다. 좀 더 자주, 매일 늦게 왔다면 좋았을 걸. 손안에 밤을 가득 안고 올 때도 있었다. 집에 밤나무가 있기도 해서 밤 줍는 재미가 쏠쏠했다. 결국 밤은 그를 기억하는 과일이 되었다.
여전히 식사는 세 텀으로 나눠서 하려고 했다. 해독주스류를 좀 마시고 나면 과일을 먹고 – 물론 아주 조금씩 - 그리고 밥을 먹었다. 한 끼에 3번 조금씩 하다 보니 설거지가 많았다. 퇴원 후에는 청소나 잠옷, 침구류 관리도 꽤 피곤한 일이었다. 내가 집안일을 하는 동안 그는 주로 책을 읽거나 잠이 들었다. 잠든 모습을 놀림거리로 삼으려고 사진을 찍어두곤 했는데, 이젠 기억거리가 되었다. 집안일을 하지 않고 그 시간에 좀 더 많이 껴안고 같이 이야기만 하면 좋았을 것을...이라고 후회했으나,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걸 알고 있다. 1주나 2주 만에 동생네가 주말에 와서 보호자 역할을 바꿔주면 인천집에 가서 우편물도 확인하고 이런저런 일을 하다 하룻밤을 쉬고 돌아왔는데, 돌아오면 항상 뛰어나와서 안고 도닥도닥해 줬다. 그때는 무슨 엄마 찾는 애 같구나 하는 마음도 들었었는데, 돌이켜보면 울컥한다. 내가 자리를 비우면 아프거나 힘들다는 말을 안 하고 참다가, 내가 돌아오면 그때부터 참았던 힘들었음이 튀어나왔다.
제일 신경 써야 했던 일은 마약성 패치를 3일마다 교체하는 것. 2번인가 깜빡하고 패치 시간을 놓친 적이 있었는데 서로 깨닫고 화들짝 놀랜 일이 있다. 통증에 시달리던 모습이 트라우마처럼 남아있었으니까. 1달에 한 번씩 호스피스 병원에 외래로 가서 상태를 점검하고 다시 패치 및 변비약 등을 받아왔다. 2번 정도 같이 병원에 갔었는데, 심지어 한 번은 본인이 직접 운전하기도 했다. 그때 승리의 V자를 그리며 자랑스러워했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마도 나는 그가 운전했던 차를 바꾸지 못할 지도. 저녁을 먹고 나면 이틀에 한 번씩 샤워를 시키고, 발바닥 마사지도 했다. 그러다 보면 꽤 편안하고 평온하게 잠이 들었다. 그가 잠들고 나면 나는 밀린 일을 처리하고, 잠든 그 얼굴을 잠깐씩 쳐다보다 잠이 들었다.
이렇게만 지냈다면 좋았을 텐데. 그가 치과를 가야겠다고 했다. 돌이켜보면 통증이 조금씩 잡혀가면서 치아에 대한 불편함이 있었을 텐데 퇴원하기 전엔 딱히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없다. 암이 커지기 전 임플란트 치아를 넣었었는데, 통증을 참느라 너무 앙다물어서 위쪽 어금니로 넣었던 치아가 깨져버렸고, 그런 상태로 오래 버텨서 그런지 아래 이빨들까지 줄줄이 문제가 생겼다. 치과에서 치료를 받고 싶다고 하는데, 몸 상태가 안 좋을 때는 이빨치료를 하는 게 아니란 말을 들었던 것 같아, 좀 더 나중에 하자고 제안했지만 각하당했다. 마약성 진통제를 쓰고 있었으니 통증을 인지하지 못하는 거라며, 이빨의 염증이 이미 오래된 데다가 잘못하면 뇌까지 뚫고 올라갈 수 있어 위험하다며 빨리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는 약간 취한 상태였던 것 같기도 하다. 암이 줄어든 것도 아니고, 단지 강력한 진통제로 통증을 인지하지 못하게 하고 있을 뿐인데 마치 암이 줄어든 것처럼, 죽음이 저 멀리 떠나간 것처럼 행동했다. 여하간 그의 고집이 이겼고, 다시 임플란트를 시술했다. 그리고 아랫니들을 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브릿지로 연결하기 위해 신경치료를 시작했지만, 결국 3번 정도 받고는 포기했다. 온몸이 간지럽기 시작했고, 피부에 얼룩덜룩 문제가 발생했다. 피부과에 가서 연고들을 처방받아왔지만 스테로이드제도 잘 듣지 않았다. 결국 너무 간지러워서 잠을 못 자기 시작했다. 몸 전체가 간지러웠다. 연고를 온몸에 발라도 효과가 별로 없었다. 잠을 자며 긁는데, 그 소리가 너무 커서 피부가 찢어질까 깨울 수밖에 없었다. 낮에는 그나마 좀 나았지만, 밤이 문제였다. 알로에즙도 발라보고, 꿀도 발라보고 별 일을 다했지만 시간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아마도 나름 잘 관리하던 암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 밖에는. 그 이후 마약성 진통제 패치의 용량을 늘렸지만, 이전처럼 편하지 않았다. 병원에선 다시 입원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지만, 그는 아직은 버틸만하다고 괜찮다고 했다. 한 번은 꽤 크게 화를 낸 적도 있다. 진통제의 용량이 잘 맞지 않는 것 같으니 며칠 입원해서 다시 적절한 진통제의 용량을 잡고 오는 게 어떨까라고 물었을 뿐인데, 자기가 다시 입원한다고 할 때는 죽을 때뿐이라고 화를 벌컥 냈다.
돌이켜보면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도,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나눈 적이 없다. 읽던 책들은 모두 호흡명상 관련 책이었는데, 그는 혼자서 죽음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을 생각하고 정돈하고 있었던 걸까. 나랑 이야기하자고, 책만 읽냐고 화낸 적이 있었는데 이야기할 게 뭐가 있냐 같은 반응이었다. 눈을 똑바로 보고 아주 진지하게, 마음이 어떤지 같이 이야기하자고 했다면 달랐을까? 아니었을 것 같다. 별로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자신이 정리가 안돼서 말하기 싫었을 것 같기도 하고, 면이 안 선다고 생각했을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나중에 이야기할 시간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어쨌건 그는 내게 말하지 않거나 못했고, 내게는 끝끝내 알 수 없는 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