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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나무 Oct 28. 2024

13. 천백 년 살아온 은행나무라면

           - 호스피스 병원 퇴원 후, 시골집에서의 생활 2

웃기는 일이지만, 암이 커지기 전 시골집에서 주전자 때문에 싸웠었다. 주인집이 우리가 전세로 들어올 때 우물을 파줬는데, 거기에서 모터로 끌어올린 물을 집안으로 이동할 도구로 그가 스텐 재질이 아닌 주전자를 주문했던 거였다. 나는 암환자가 무슨 그런 재질로 물을 담아놓고 쓰겠다고 하냐고 바꾸라고 하고, 그는 괜찮다고 하고... 그걸로 화를 내고 연락을 안 했던가. 결국 그가 스텐 재질의 30리터 물통으로 바꿨다고  물러설 때까지. 그러고 보면 나도 한 고집했는데. 왜 이런 사소한 일에만 고집을 부렸을까. 아마 이런 건 확신할 수 있는 거였고, 치과 치료 같은 건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여하간, 호스피스 병원생활 전후로 당연히 이 30리터 물통을 내가 채워서 들고 와야 했는데 낑낑거리며 들고 오던 나를 보면 항상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 이 정도는 근육훈련이야”라고 해도 잘 없어지지 않던 그 미안한 표정이 마음에 남는다.      


여전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힘들었던 시기였는데, 그가 갑자기 용문사를 가자고 했다. 딱 2년 전 오늘, 10월 28일이었다(이렇게 뭔가 날짜가 딱딱 맞아떨어지면 - 물론 내 맘대로의 해석이겠지만 - 그가 여전히 내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곳에 엄청나게 큰 은행나무가 있는데, 마침 지금이 가장 노랗게 물들 시기라며 엄청 멋질 거라고 말했다. 그래도 좀 걸어야 할 텐데 걱정했지만, 꼭 가고 싶다고 해서 비상시 먹을 약들을 챙겨서 길을 나섰다. 주차를 하고 은행나무를  보러 가는 길지도 않은 길을 아주 힘겹게 오래 걸었다. 짧게는 두 걸음, 좀 길게는 다섯 걸음을 걷다가 멈춰 숨을 가다듬었다. 헉헉거리며 구토가 나올 것 같다고 하면서도 돌아가려고는 하지 않았다. 손을 잡다가 때론 허리를 감싸고 천천히 그 걸음에 따라 함께 올라가는데, 사람들이 너무나 뒤돌아보았다. 예의 없이 훔쳐보고 손짓하며 수군대는 눈길들. 막을 수만 있다면 그 눈길들을 모두 쳐내고 쳐다보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새끼를 감싼 고슴도치의 심정이었던 것 같다. 사실은 마음의 여유라곤 하나도 없었다.  


내려갈 때는 그냥 용문사에 부탁해서 차로 태워달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시스템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없다면 엎드려 빌어서라도. 다행히 카페에 앉아서 진통제를 하나 먹었더니 좀 나아졌다. 함께 은행나무 앞으로 갔다. 손을 모아 소원을 빌고, 사진도 찍었다. 그 앞에서 우리는 “오늘은 완벽하게 노랗게 물들지 않은 거 같아, 언젠가 꼭 다시 한번 완전히 물들었을 때 같이 보러 오자”라고 약속했다. 꼭 다시 올 수 있기를 빌었다. 하지만 이 약속은 내가 죽고 나서야, 아니 죽고 나서도 이뤄질지 아무도 알 수 없을 것 같다. 내려오는 길엔 일부러 사진을 찍으며 느린 발걸음을 사람들로부터 감췄다. 이 용문사가 둘이 함께 간 마지막 여행지가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 아마도 그는 알고 있었을 것 같기도 하다. 어찌 될지 모르니 다녀와야겠다고.  


천백 년을 넘게 살아온 은행나무 앞에서 그는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말해주지는 않았지만 알 것 같기도 하다. 아마도 그는 이렇게 빌었을 것 같다. '같이 오래 살 수 있게 해 주세요, 길기가 어렵다면 몇 년이라도 조금이라도 더. 하지만 만약 그게 불가능하다면, 우리 마님이 너무 힘들지 않게 내가 떠나게 해 주세요. 그리고 내가 없어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게끔 도와주세요'  두 번째 소원은 이뤄졌다. 세 번째 소원은...내가 이루게 만들어줘야 하는데, 아직 어렵다. 일단은 아슬아슬하게 그냥 살아가는 것부터 하고 있다.


천백 년, 그 오랜 시간 동안 그 앞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 소원을 빌었을까. 당연히 그 소원이 모두 이뤄지진 않았겠지. 오래된 은행나무는 이런 인간들을 보고 어리석다고 했을까, 가엾다고 생각했을까. 설사 안타깝다고 생각한다 쳐도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겠지.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역시 아무것도 없다. 천백 년 정도 이런 불가항력을 경험하면 그 어떤 일에도 '운명인 게야' 하며 침잠할 수 있을까. 아니면, 다시 태어나서 다시 만나게 되는, 막무가내의 시간도 감히 어쩌지 못하는 인연도 보았을까. 그도 아니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미칠 것 같은 그 괴로움들도 서서히 가라앉는 것을 지켜보았을까. 그래서 잔잔한 마음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서있는 걸까.      


———


소화를 잘못하면서도 좋아하던 음식은 좀 먹었다. 우리나라의 택배 시스템에 이렇게 깊은 감사를 하게 될지 몰랐다. 암투병 하던 동안 자제하던 음식들을 자제하지 않았다. 평소에 좋아하던 식재료들을 주문해서 마음껏 먹었다. 그래봤자 먹을 수 있는 양이 제한적이었지만. 한우사골은 별로일 것 같아서, 민어뼈를 사서 사골처럼 오래 고아서 먹기도 했다. 회도, 참꼬막도 모두 배달이 되니 좋아했다. 조금씩 밖에 못 먹어도 애호박새우젓국도, 잡채도 맛있다고 칭찬하며 먹어줬다. 한 번은 인천에 와서 맛있는 초밥집에 갔는데 1인분을 다 먹기도 했다. 그런 일이 생기면 동생네들과 함께 다 같이 멋지다며 훌륭하다며 기운을 북돋아 줬다.


빈방 하나를 꾸며서 아예 호흡명상실로 만들기도 했다. 커튼을 주문해서 천정부터 달아 내리고, 방에 아무것도 놓지 않고 오로지 난로와 방석만 두고 명상에 집중할 수 있도록. 나도, 그도, 동생네들도 당연히 이렇게 꾸며 오래 쓸 거라고 생각했지 죽음을 앞두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새벽엔 항상 일어나서 이 방으로 건너가서 되건 안되건 명상수련 시간을 가졌으니까. 1주에 한 번씩 사범님이 오셔서 기혈순환을 도와주고 나면 확실히 호흡도 잘 되고 소화도 잘 된다고 했고, 이렇게 느리더라도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통제가 잘 듣지 않았다. 진통제 패치 양을 꽤 올렸는데도 통증이 잘 제어되지 않았고, 구토억제제를 먹어도 구토가 잦았다. 인터넷을 뒤졌더니, 동일한 성분의 마약성 진통제를 오래 사용하면 잘 듣지 않는다는 분석을 찾아냈다. 펜타닐 부작용인 것 같다고, 이제 다른 성분의 마약성 진통제로 바꿔야 할 것 같다고, 병원에 입원해서 며칠만 좀 진통을 잡고 나오는 게 어떻겠냐고 다시 권했다. 이렇게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통증에 시달리고 구토를 하면 몸이 더 안 좋아진다고, 최근 호흡수련도 잘 못하지 않냐며 열심히 설득을 했더니 결국 입원하겠다고 큰 결심을 했다.    

  

입원 일정을 잡아놓고, 입원 전에 동생네와 함께 1박 2일로 속초로 여행을 갔다. 그동안 동생네가 수고가 많았다면서 그는 “이번 여행경비는 모두 내가 쏠 테니 절대 계산하지 말라”라고 엄포를 놓고 출발했다. 콘도에 짐을 풀고, 차에 시달린 그를 혼자 쉬게 하고 셋이서 게를 사러 나갔다. 다녀오는 사이 엄청 큰 굵기의 응가를 성공했다며 자랑하고, 다 같이 축하하며 게를 함께 먹었다. 맛집, 뷰맛집 카페를 다 찾아놓은 그를 보고 역시 아주버님! 하며 치켜세우는 제수씨의 리액션에 당연한 거 아닌가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내심 엄청 뿌듯해했던, 우리의 마지막 여행이었다.    

  

두 번째 입원이다 보니, 이전보다 훨씬 더 체계적으로 필요한 짐들을 쌌다. 그가 좋아하는 베개부터 이불까지, 허리를 기댈 큰 방석, 차와 커피를 비롯 각종 요리 도구들, 누룽지를 비롯한 음식재료들, 칫솔부터 의자까지 화장실에서 쓸 용품들 등등. 차 두 대에 가득 싣고, 길어봤자 일주일이겠지 하며 딱히 집을 오래 떠날 거라는 생각도 없이, 마침 눈이 내리기 시작한 길로 천천히 출발했다.      


나중에 그의 유골함을 들고 혼자 돌아오게 될 거라고는 정말 꿈에도 생각 못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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