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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나무 Aug 12. 2024

3. 암치료 컨베이어벨트에 올라가다

- 잘 떠나보내고, 덜 후회하며 살아가기 위하여

     

수없이 옷장을 여닫았으나 보이지 않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의 겨울용 두툼한 파카에 내 옷들이 눌려있는 게 보였다. 눈 쌓인 한라산 백록담을 평생 처음 함께 오를 때 입었던, 나중에 요양병원에선 새벽마다 뒷산 올라간다고 입었던, 그래서 차마 정리 못하고 있던.

그래, 보이지 않던 게 보이려면 뭔가 필요하겠지. 그게 지식이건, 시간이건, 마음이건.

암병원에서 우리는 앞을 볼 수 없었던 채로 암치료라는 컨베이어벨트에 올랐던 것 같다.    

       

대학병원의 암치료 3종 세트, 항암, 수술, 방사선. 우리의 경우는 예방용 방사선, 1차 폐전이 절제 수술, 항암, 2차 폐전이 절제 수술, 방사선, 그리고 마지막으로 통증을 줄이는 목적의 방사선으로 이어졌다. 컨베이어벨트만큼 적절한 단어가 없다. 요양병원으로 밀려 나간 뒤 아무리 돌이켜봐도 왜 저 과정을 시키는 대로 다 했을까를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그렇게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주치의의 진료실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아마 보통 그렇겠지만 우리도 혈액종양내과(항암), 방사선종양학과(방사선), 심장혈관흉부외과(수술)와 협진하는 시스템이었다. 다른 진료실들은 크게 인상적이지 않았다. 주치의의 진료실만 중간에 미닫이문으로 이어진 방 2개를 쓰고 있었다. 한 방에서 환자를 만나는 동안, 옆방에서 다음 환자를 호출한다. 옆방으로 들어가서 앉으면 옆쪽에 두 명의 의사후보생(?)들이 각자 컴퓨터에 열심히 타이핑한다. 화면에는 검사했던 영상결과물들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검사 결과가 걱정스러운 우리는 뭔가 조금이라도 읽어낼 수 있을까 싶어 화면을 훔쳐보지만 알아먹을 수가 없다. 불안하고 답답하다. 몇 분이 느리게 흘러가고, 초조하게 기다리다 보면 미닫이문을 열고 드디어 주치의가 다른 의사 한 두 명과 함께 나타난다. 본인은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보는 동안, 다른 의사들은 서서 지켜본다. 한 방에 환자와 보호자 2명이 있다면, 의사군은 최소한 4-5명이 있는 셈이다. 양적으로도 밀리고, 질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는 약자이다. 이런 곳에서 ‘아니요’, ‘더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이해가 안 돼요’ 같은 말들을 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주치의는 컴퓨터를 보며 우리와 대화를 한다. 종종 화면을 우리 쪽으로 돌려서 보여주며, 이게 암세포이고, 또는 부위가 깨끗하다는 등의 설명을 해주지만, 사실상 제대로 인지하기 어렵다. 대부분은 아, 그렇군요 라는 답변이 튀어나왔다.

이제 할 만큼 다 했으니, 컨베이어벨트에서 내려가라는 통보를 받고서야 후회했다. 너무 몰라서, 제대로 물어보질 못해서, 당연히 모든 판단을 맡겨버려서, 설마 하니 그럴 리가 하며 의심도 안 해서. 이제는 이 기간의 치료과정도 흐릿하다. 전체적으로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뉘앙스는 남아있지만, 그 이후의 과정이 몇 배나 힘들었기 때문인지, 인상적이었던 것과 억울했던 것만 부분적으로 뚜렷할 뿐이다. 정리해 두었던 면담 일정과 치료 일자들, 주치의에게 물었던 질문지가 파일로 남아있어 조금씩 기억을 되짚어볼 뿐이다.           


주치의는 검사 결과를 보고, 일단 방사선 치료를 권했다. 광범위 절제 수술은 잘 되었지만, 혹시나 암세포가 남아있을지도 모르니 방사선 치료를 하자고 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암 후보자들은 엄청 많다고 했다. 그것이 눈에 보일 만큼 커지기도 하고, 그 상태 그대로 있기도, 줄어들기도 한단다. 암세포가 보이지 않는데도 방사선 치료를 꼭 선제적으로 해야 하는 거였을까. 바보야, 그때 물었어야지. 그때 생각했었어야지... 이제 무슨 의미가 있냐.   

방사선을 투사할 곳을 정하고, 특수잉크로 선을 긋고 절대 지워지지 않게 하라고 했다. “아니, 자기 엄청 땀돌이잖아 어떡하냐 매번 혼나겠다, 한여름 아니라 얼마나 다행이야” 하며 놀렸었다. 수술한 부위가 아물기를 기다렸다가 7주간, 매주 5일씩. 뒤로 갈수록 살갗이 시꺼멓게 타갔고, 속도 불편해했다. 그래도 힘들다 소리 한마디 안 하고 다녔다. 암이 없어질 수만 있다면 이 정도 고생이야 감내하겠다며. 그가 앓는 소리라도 크게 냈다면, 내가 그만하자고 할 수 있었을까. 나중에 껍질이 다 벗겨지고 피부재생 연고를 열심히 발랐지만 이 흔적은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남았다.      


방사선 치료가 끝나고 주치의를 만났을 때 치료가 잘 되었다며, 5개월 뒤에 보자고 했다. 괜찮았다. 또 5개월 뒤에 보자고 했다. “좋네요, 별 문제없어요. 5개월 뒤에 봅시다.” 그런 판정을 받고 나면, 검사 결과가 어떨지 불안에 떨고 있던 마음은 다 사라지고 무성의한 것 같았던 진료실 분위기도 금방 잊어버리고, 감사하다며 깊은 인사를 하고 나온다. 다음 검사 일정을 잡고 긴장했던 마음을 풀며 오늘은 뭐 맛있는 걸 먹을까 하며 바보들처럼 기뻐했다. 이 행복은 딱 2번밖에 없었지만.

주중에 각자 직장생활을 하고, 주말에는 이것저것 반찬도 해놓으랴 바빴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수술과 방사선으로 힘들었던 몸을 보양해야 한다며 이때 아니면 언제 먹냐고 아낌없이 지갑을 열자고 외치며 한우를 구워댔다. 이런 구이가 암환자에게 좋지 않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힘들게 수술도 하고 방사선 치료도 했으니, 이제 암치료가 끝난 것만 같았다. 매일 운동도 하고 같이 여행도 다니며 나중에 더 나이가 들어 일을 안 하게 되면 수도권을 떠나자며 여기저기 후보지를 물색했다. 이 시간에, 다양한 섬유육종 사례들을 찾아보고, 자연치유 공부도 하고, 3종 세트를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될지도 생각하며 우리의 상태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봤어야 했다. 이 시기를 놓친 것이, 그가 삶이 아니라 죽음으로 가게 되는 첫 번째 스텝이다. 내가 그 스텝을 같이 밟은 거다.     


결국 방사선 선치료 후, 1년 3개월 만에 왼쪽 폐 전이를 진단받았다. 마지막 진료가 5개월 전이었고 그때는 괜찮았는데, 5개월 만에 거의 50미리가 되었으니 사실상 방사선 치료 효과가 1년도 못 간 셈이다. 원발 육종암 폐 전이. 완치는커녕, 5년 생존율 10%라는, 4기 암환자가 되었다. 상당히 공격성이 높다며 최대한 빨리 외과수술을 하자고 했다. 충격을 소화하기도 전에 면담과 검사 등의 다음 일정이 몰아쳤다. 최대한 빨리라고 해도 18일 뒤에나 잡혔고 왼쪽 폐 아랫부분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며 거의 절반을 제거해야 할 거라고 했다. 수술을 위해 입원했을 때, 옆 침대의 60대 아저씨도 수술을 앞두고 있었다. 폐암 5년 완치를 앞두고 또다시 재발했다고. 아저씨는 힘내라고, 당신도 폐암이지만 지금까지 살았다고 절대 포기하면 안 된다고 위로해 주셨다. 포기라니요, 의지 하나는 정말 존경스러운 사람이거든요. 포기해서가 아니라, 강제로 포기당했을 뿐이에요. 아저씨라도 암을 관리하며 잘 살아계시길.    

   

수술 후, 마취가 깨자마자 끙끙 앓았다. 제일 힘든 건 아예 침대에 누울 수가 없었던 것. 뒤에서 안아 기대게 해서 약간씩이라도 재웠다.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그래도 아직 윤기가 있었다. 이제 암을 제거했으니 회복만 잘하면 된다고 여전히 기대하고 있었으니까. 걸어야 빨리 낫는다는 말에 함께 병원 복도를 조금씩 걸으면서 조금이라도 웃기려고 노력하는 나를 보며 결심했다고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나아서 고생시킨 만큼 더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아니, 다 안 나아도 됐어. 그건 고생도 아니었어. 노력하지 않아도 돼, 그냥 옆에 있기만 해도 충분히 행복한 거였어.

수술 후 무거운 걸 들면 안 되니 짐은 다 내 몫이었다. 그걸 보며 또 얼마나 미안해하는지. 다 나으면 이거보다 몇 배는 무거운 거 혼자 다 들게 할 거라고 으름장을 놨어도 그 표정을 없애주지는 못했다. 으름장 놓지 말고 그냥 꽉 껴안고 토닥여줄걸. 괜찮다고,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고. 나중에는 통증 때문에 꼭 안지도 못할 때가 온다는 걸, 이때는 몰랐으니까.      



그가 떠난 후 혼잣말은 일상이 되었다. 옷걸이 간격도 가지런히 걸던 자기가 이 옷장 상태를 보면 또 미안해하겠네, 입지도 않을 자기 옷 때문에 내 옷들이 구겨진다고. 알았어, 인상 찌푸리지 마. 이제 치우면 되지? 파카야, 그동안 그를 따뜻하게 해 줘서 고마웠어. 마지막이니 한번, 이러며 품에 안았더니 푹신하면서도 콤콤하니 그의 냄새가 스며있었다. 꽤 오랫동안, 침대 한쪽에 두고 잠을 자지 못할 때마다 아주 꽉, 안아보곤 했었다.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은 더 평온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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