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무소 도서관 08

by 산너머

어릴 때부터 홀로서기를 하다 생긴 습관 때문인지 스스로 토닥이다 보니 느긋해졌다. 이미 안 되는 걸 어쩌겠어하면 낙천적으로 된다. 사실 나는 낙천적인 성격은 아니다.

남편이 소문난 낙천가였다. 내일 몇천만 원을 갚지 않으면 집이 날아간다고 해도 오늘 밤엔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머리가 땅에 닿자마자 코를 골았다. 괴로워서 술을 마셨냐 하면 아니다. 원래 총각 때부터 술에 빠져 살아서 술 항아리였다. 그것도 비싼 양주만 마셨다. 보리차를 탄 것 같은 양주가 분윳값보다 비쌌다.

낙관적, 사전을 찾아보니 인생이나 사물을 밝고 희망 있게 보는 것이라고 적혀 있다. 그래 나는, 낙천적이 아니고 낙관적이다.


노력해서 세 번째 야간연장을 마쳤지만 노력한다고 무기계약직 전환은 안 되는 일이었다. 노력해서 되는 일, 노력해도 안 되는 것. 이 두 가지를 터득하게 된 도서관이 여기였다.


계속이어서 자원봉사를 했다. 낙관적으로 돌리니 정말 편했다. 종합자료실 2에서 오후 5시에서 밤 9시까지 하루 4시간. 자원봉사는 무보수이기 때문에 벌어다 주는 사람이 없는 나는 오래 할 수는 없다. 다음 취업까지 일단 도서관에 붙어서 도서관 돌아가는 내막을 알고 싶었고, 집에 있으면 잡생각만 꼬물꼬물 무성하게 자라서 머리가 무거웠다.

종합자료실 2는 한쪽 벽면이 박공지붕 형태였다. 그 아래 기계실이 있어 온종일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윙~찡~끊이질 않았다. 좁은 집에 있는 냉장고 소리보다 커서 책을 볼 수 없었지만, 나중엔 창가에 새소리가 더 크게 들리게 되었다. 처음엔 편두통이 올 정도로 기계 소리가 신경이 쓰였는데, 자연에서 나는 소리 때문에 편두통도 사라졌다.

앉아있는 책상 뒤로 창문이 있어 몹시 춥거나 몹시 덥지 않으면 종일 창을 열어놨다, 바람이 나뭇잎을 건드리는 소리, 이름 모를 온갖 새소리, 귀를 가만히 기울이면 길 건너 물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자원봉사 하는 동안 심신을 다독이기로 했다. 돈 주고 명상도 한다는데…. 뒤 창으로 다리 하얀 자작나무가 사람에게 손짓하는 곳, 여긴 아직도 동사무소 도서관이다.


큰아들은 머리가 좋다. 일 년 공부하더니 서울 사대문 안에 있는 대학에 들어갔다. 작은아들은 대학에 안 가고 공무원 시험을 본다고 밤낮 도서관에 있다. 집에서 가까운 목백일홍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한다. 딸은 영문학과를 다시 들어갔다. 자랑이지만 우리 애들은 공부를 잘하는 편이다. 허드렛일은 하기 싫고 기술이나 장사에 소질이 없으니 자랑이지만 공부를 하는 게 맞긴 하다.


큰아들은 누굴 닮았는지 매일 옷을 갈아입고 멋을 부린다. 대학을 멋 부리려고 간 모양이다. 작은아들은 멋이라고는 일절 없다. 매일 똑같은 옷을, 그것도 무채색만 입는다. 딸은 머리 모양을 자주 바꾼다. 어느 날은 커트, 어느 날은 디스코 파마, 어느 날은 노랗게 물을 들여 나타난다.


손녀가 참 예쁘다, 누굴 닮아 예쁘냐고 물어봤더니 엄마를 닮았단다 하하하. 딸은 얼굴이 조막만 하고 코가 오뚝하다. 이번 편은 자랑 편이냐고요? 꼭 그렇지만은 않다. 큰아들은 이름 있는 대학교는 들어갔는데, 매일 늦게 들어오고 매일 돈을 달라고 손을 내민다. 자원봉사를 하는데 돈이 어디 있겠냐 아르바이트를 해서 네 용돈은 네가 벌어 쓰라고 소리를 지르며 누굴 닮아 이따위냐고 했더니 아빠 닮았겠죠 한다. 옳은 말을 해서 기가 찼다.


작은아들은 전혀 반대다. 오천 원을 주면 일주일이 지나도 주머니에 그대로 있다. 점심, 저녁 집에 와서 먹고 술도 담배도 안 한다.


딸도 지독한 편이다. 머리는 도깨비처럼 자주 바뀌어도 쓸데없이 돈을 안 쓴다. 솔직하게 말하면 쓸 돈이 없다. 한심한 놈팡이 사위가 다 써버려서 쓸 돈이 없다. 사위는 엄밀히 말해 놈팡이는 아니다. 직장은 꼬박꼬박 출근하는데 돈 개념이 없다. 버는 족족 다 써버린다. 그래서 딸은 공부를 얼른 마치고 직장을 다니고 싶어 한다. 공부하러 갈 때 손녀는 가까이 사는 시댁에 맡겼다. 생각이 깊은 딸은 엄마는 도서관에 다녀야 하고 힘들까 봐 안 맡겼다. 집에서 종일 펑펑 노는 시어머니에게 맡기는 게 옳다고 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딸 시댁이 잘 사는 편이다. 서울에 집도 당연히 있고,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은행 비밀금고에 현찰을 많이 넣어놨단다. 짐작만 할 뿐 사실 얼마나 있는지는 사위도 딸도 모른다. 딸이 참고 사는 이유는 손녀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댁에서 넘어올 재산을 노리고 있는 듯하다. 실속파 우리 딸 누굴 닮았을까? 나든 아빠든 둘 중 하나 닮았겠지.


자원봉사를 하면서 다른 도서관에 이력서를 넣고 면접까지 봤지만, 취업이 어렵다. 한 명 뽑는데 20명이 서류를 넣었다. 갈수록 나는 나이가 많아지고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이들이 취업을 기다리고 있으니 재취업이 어려울 것 같다. 8개월이 넘도록 취업하기 힘들어 다른 일거리를 찾아야 하나 고민 중에 획기적인 공고가 올라왔다.

<시립도서관 정규직 채용공고. 사서 10명.

자격요건; 사서 자격증. 도서관 경력직.

나이; 만 60세까지>


10명 뽑는데, 200명이 서류를 넣었다고 한다. 그중 서류통과는 60명이었다.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면접 보는 날은 덥지도 춥지도 않았다. 머리를 단정하게 빗고, 화장도 요란하게 하지 않고, 최대한 성실하게 보이는 옷을 입었다. 자기소개서를 간단하게 준비는 했는데, 다른 준비는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도서관 정규직은 나도 처음이지만 다른 면접대상자들도 처음이나 마찬가지니, 운에 맡기기로 했다. 물론 면접 문자를 받고 그날부터 많은 생각을 하다가 도서관 다니면서 수첩에 적어놓은 일하는 방법, 민원 처리하는 요령, 그날그날 겪었던 일을 짧게 메모한 수첩을 뒤적여 봤다.


면접은 6명씩 10조로 나뉘어 있었다. 한 조씩 나란히 서서 주민등록증을 확인하고 같은 조끼리 한 줄로 앉아서 기다렸다. 나는 8조였다. 기다리는 시간이 초조했다. 다들 나보다 젊었고, 각자 준비한 메모지를 들여다보고 있다. 그중에 원두막 도서관에서 같이 일했던 이 선생이 있었다. 번쩍번쩍한 그랜저를 몰고 다니던 이 선생이 옆 옆에 앉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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