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스레 기분이 좋아지는 날이 있다. 오늘이 그랬다. 서두르지 말고 기다리자. 침착하자. 도서관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왔고, 책을 통해 과거 시대를 오르고 미래를 봤잖아.
아침에 일어나니 몸이 가뿐해서 산 나비처럼 훨훨 날아 높은 산도 오를 것 같았다. 면접 날은 언제나 가슴속이 떨려 손끝까지 그 느낌이 그대로 전해졌는데, 오늘은 달랐다. 예감이 좋았다.
가끔 예지몽을 꿨다. 한 번은 아는 사람이 병상에 누워있는 모습을 봤다. 다음날 그 사람이 다쳐 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했다. 평상시에 생각조차 한 적이 없던 사람이었다. 안 좋은 꿈을 꾸면 며칠 안으로 그대로 일어났다. 꿈에 똥을 한 바가지 싸서 주택복권을 샀더니 꽝이었다. 나쁜 꿈은 맞추는데 좋은 꿈은 맞추지 못했다.
1조부터 면접 장소로 들어갔다. 나는 8조라서 한참 기다렸다. 이 선생과 안부만 몇 마디 나누고 서로 말을 줄였다. 그땐 잘 지내는 직장 동료였지만 오늘은 경쟁자 중 한 명이 되어 있다. 도서관 정규직 취업만 된다면 정년까지 철밥통이 되는 공무원이니 어떤 누구를 막론하고 합격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뿐 배려 같은 건 있을 수 없다.
시청 강당은 천장이 높았다. 정면엔 아치형 무대가 보였다. 수첩을 들고 갔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원래 자신감도 없고, 자존감도 약하고, 뭐든 어색해하고, 순간순간 망상에 빠지는 망상가인데 오늘은 정신이 맑겠다.
천장이 높아 답답하지 않았고, 무대가 보여 몇년전 정태춘 콘서트에 갔던 S대 강당이 떠올랐다. 남편이 나 몰래 콘서트를 예매해서 S대 교정을 처음 거닐어 봤다. 물안개 낀 무대에서 정태춘은 ‘북한강에서’를 불렀다.
ㅡ서울이라는 낯선 이름과 또 당신 이름과 그 텅 빈 거릴 생각하고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가득 피어나고ㅡ
그때 그 알싸하고 몽환적인 기분을 끌어드려 초조함을 달랬다.
“8조 들어가세요”
면접관이 면접자만큼 많았다. 6~7명인가? 8명인가? 기억나지 않는다. 막상 닥치니 당연히 떨렸다. 이 선생은 세 번째에 앉았고, 나는 다섯 번째에 앉았다. 면접관이 질문을 하면 첫 번째부터 순서대로 대답하라고 했다. 일단 자기소개가 먼저였다. 첫 번째, 두 번째는 길었다. 세 번째 이 선생은 더듬었다. 나는 짧게 또박또박 말했다.
내 순서는 뒤라서 정리할 겨를이 있었다. 너무 길다, 너무 장황하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간결하고 정확하게 대답했다. 마지막 질문이었다. 앞 면접자들은 젊어서 자신만만해 보였고, 잘 보이려고 애쓰는 느낌이었다. 이 선생은 대답을 잘하지 못해 더듬거리다가 울음을 터트리더니 면접 끝나는 내내 울었다. 이 선생은 나오면서 죄송합니다 했고, 면접관은 괜찮다고는 했지만, 면접장에서 우는 건 서로가 무안하고 황당한 상황이었다.
후련한 마음으로 시청 강당을 나왔다. 계절은 초가을이었다. 걸어도 괜찮고 등받이 벤치에 앉아도 괜찮은 날씨였다. 이 선생이 차 한잔하자고 했다.
“눈물이 그치지 않아서 창피스럽네요. 참았어야 했는데…. 그게….”
“무슨 일 있었어요?”
“남편이 파킨슨병에 걸려 바깥출입을 못 해요. 제가 돈을 벌어야 하는데, 취업이 어렵네요. 도서관에 여러 번 면접을 봤는데 안 되니까. 그만….”
“그랬군요. 고칠 수는 있나요?”
“고칠 수 없는 병이래요. 점점 몸이 굳어진대요. 휴~요즘 너무 힘들어요.”
이 선생은 한숨을 깊게 내리 쉰다. 서러움에 복받쳐서 그랬구나. 선팅을 까맣게 한 그랜저를 몰고 다니며 매사에 긍정적이고 사리 판단을 잘했던 이 선생은 많이 무너져 있었다.
“제가 봐서는 강 선생님은 합격될 것 같아요.”
“아니에요. 앞에 젊은 두 분이 말도 잘하고 똑 부러지던데요.”
“강 선생님이 더 똑 부러졌어요.”
“그래요? 하하하”
“네. 하하하”
우린 웃었다. 뭘 할 수 없어 웃었지만 서로 연락하자는 말은 삼갔다.
합격 통지를 기다리는 며칠 동안 담담해지려 애썼다. 자꾸 베란다로 나가 창밖을 보다가, 창문에 얼룩이 많아 닦다가 창문틀이 더러워 본격적으로 베란다 청소를 했다. 나는 초조하면 청소를 한다.
드디어 합격 문자가 먼저 들어오더니, 조금 있다가 시청에서 전화가 왔다.
“강순희 님? 합격하셨습니다. 축하합니다.”
전화기를 그대로 들고 울었다. 그다음은 몽롱해 어떻게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정신이 나갔다가 돌아왔다. 단풍이 곱게 물든 북한강으로 드라이브 가고 싶었다. 강이 보이는 언덕에 차를 세우고 끝없이 흘러가는 강을 보고, 그 자리에서 평생을 지킨 산을 보고, 변화무쌍한 하늘을 보며 노래를 듣고 싶었다. 온 대한민국이 다 알게 볼륨을 제일 크게 올리고 소리쳐 따라 부르고 싶었다.
ㅡ거기 처음처럼 신선한 새벽이 있소. 흘러가도 또 오는 시간과 언제나 새로운 그 강물에 발을 담그면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천천히 걷힐 거요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