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도서관 01

by 산너머

미술관 도서관만 아니길 바랐다. 이 도서관은 시내 중심에 있고 유동 인구가 많은 곳이라 이용자가 끊이질 않는다고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만 꺼리는 게 아니고 정규직 10명 모두 여기만 발령 안 받길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난 이곳에 발령이 났다. 재수 오지게 없다. 한 달 전만 해도 기막히게 재수가 좋다고, 20대 1의 경쟁을 뚫었다고 눈물까지 흘렸던 나였는데…. 변덕이 죽을 끓이고, 복에 겨웠다.


두 가지를 한꺼번에 못 하는 사람인 줄 여기 와서 알았다. 젊었을 때는 물론 몰랐고, 사실 오십 초반까지도 몰랐다. 오십 중반이 넘어서 멀티가 안 되는 두뇌로 바뀌었고 한 가지밖에 못하는 단순 노동자가 되어 있었다.


근데, 다시 떠올려보니 젊었을 때 남자를 만나도 한 명만 만났다. 양다리를 할 줄 몰랐다. 만나다가 잠깐 눈을 돌려 다른 남자와 다방에 갈 수 있는 거지, 이 남자 저 남자 만나면서 맘에 드는 남자를 고르면 되는 거지 융통성이라곤 벼룩이 만하다. 마음을 열기까지 시간도 오래 걸렸다. 순진하기는, 고지식하기는 종로 바닥에서 일등을 먹고도 남겠다. 버티다 버티다 한 남자를 만났는데 지뢰를 밟았다.

친구들과 다방에 앉아 있으면 쪽지가 왔다.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남자가 주고, 다방 디제이도 내게 쪽지를 줬다. 이름과 전화번호나 주소를 적어줬다. 쪽지는 받았지만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는데, 그 ‘별따라’ 다방 디제이에게 처음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가 터졌다. 별 따라는 무슨, 고생길 따라간 거지, 에구 내 팔자야.


정규직 발령 이야기를 하다가 딴 길로 빠졌다. 무거운 마음으로 미술관 도서관으로 첫 출근을 했다. 여기는 사실 도서관 건물로 지은 것이 아니고 미술관으로 지을 예정이었는데, 도서관으로 갑자기 변경되었다. 설계도는 이미 들어갔고, 기초공사 다지고, 건물이 올라가고 있는데, 도서관으로 변경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리하여 건물 가운데가 뻥 뚫려있고, 계단이 예술 조각품처럼 놓여있다. 그리하여 이 도서관은 예술자료가 특히 많았다. 지하부터 3층까지 하얀 벽마다 추상화, 풍경화, 뭔지 모르는 네모, 세모, 동그라미 기하학적인 그림이 화장실 입구까지 걸려있다.


정규직 10명은 일단 미술관 도서관 사무실로 모였다. 관장님을 중심으로 소파에 앉아서 축하 인사를 들었고, 여러분이 잘해서 되었으니 도서관을 잘 부탁한다는 관장님 말씀이 이어졌다.

“일하다가 불편 사항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시고, 지금 불편한 걸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한 분씩 차례대로 말씀해 보시겠어요?”

둘러보시며 앉은 순서대로 말하라고 했다.

“거리가 멀어서 출근하기 힘들어요.”

“그렇군요. 한 곳에만 계속 있을 게 아니고 1, 2년마다 발령할 예정입니다. 그때 참고하겠습니다. 그럼 다음 분?”

“전 아이가 어려 야간연장을 안 하고 주간만 했었어요. 그게 고민입니다.”

정규직은 주간과 야간을 돌아가며 해야 해서 아이가 어리면 여러 가지로 고민이 많겠다.

“이해합니다. 그럼 발령받은 도서관 선생님들과 의논해면 어느 정도는 배려해주지 않을까요? 다음 선생님 말씀해 주세요?”

내 차례가 되었다.

“바쁜 곳 안 바쁜 곳이 있는데, 전 너무 바쁜 곳에 발령을 받아서 걱정이 많습니다.”

“네, 맞아요. 이번에 바쁜 곳이 됐으면 다음엔 원하는 도서관으로 발령하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은?”

“저는 불편한 게 하나도 없어요, 일하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앞에 말한 사람들은 뭐가 되고 뒤에 말하고 싶었던 사람들은 입을 꽉 다물었다. 정년까지 다닐 수 있는 정규직이 되었고, 서로 불편한 사항을 말해도 되는 자리에서 이렇게 치사하고 간사하게 물을 끼얹을 필요가 있을까 싶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집에서 가깝고, 바쁘지 않은 도서관에 발령이 난 선생이었다. 불편한 게 없었을 수 있다고 이해하라고요? 이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렇더라도 그러면 안 되지. 사회생활은 잘하겠네. 원래 사회생활은 실력이 아니고 줄타기라고 들었다. 줄만 잘 타면 출세도 할 수 있다고 들었다. 들은 건 많은데, 나는 그쪽 방면으로 간사하지 못하다.


발령받은 종합자료실로 내려갔다. 사서들이 입구에 쭉 앉아 있었다. 인사를 하려고 그 옆에 서 있는데, 이용자 응대 중이고, 전화받고 책 찾느라 인사할 틈이 없었다. 데스크 뒤에 책장이 높아 창문을 가려 그늘져 있고, 끝이 안 보이는 서가가 장벽같이 거대하고 위협적이다. 오늘은 낮에 일하지만, 내일부터 오후 1시에 출근해 종합자료실에서 일하고 6시부터는 디지털 자료실 야간근무를 해야 한다.

큰일이다. 종합자료실 시스템도 다르고, 디지털 자료실은 한 번도 일해본 적이 없었다. 이 장벽을 별 탈 없이 넘어갈 수 있을까…. 감옥에 들어온 게 아닌데, 탈옥을 준비한 죄수같이 말하고 있네. 탈옥하는 영화를 너무 봤나 보다. 쇼생크 탈출은 대리만족이라 감명이 깊었고, 주말의 명화 몬테 크리스토 백작은 텔레비전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빠삐용을 영화로 보고, 나중에 책으로도 봤다. 한동안 살인하다 들켜 감옥에 가면 어떻게 탈옥할까 하는 상상을 더럽게 많이 했다.


길치이기도 하고 기계치다. 정문으로 들어갔다 후문으로 나오면 길을 잃는다. 기계는 세탁기와 핸드폰 간단 조작만 할 줄 알았다. 이과는 머리가 모자라고 문과는 남들보다 뛰어난 편이다. 그래서 디지털 자료실 근처에도 가 본 적이 없고, 그곳에 이력서를 내 본 적이 없다.

정규직이라서 어떤 자료실이든 투입되어 경력직처럼 일해야 한다. 전쟁터에 떨어진 풋내기 군인이 이런 심정일까. 알지도 못하는 부서에 던져져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사회초년생 심정이 이렇지. 엄마 품을 갓 벗어난 콩닥거리는 새끼 새 가슴이 되어 서 있지도, 앉아 있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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