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도서관 02

by 산너머

재래시장에 가서 꽃씨를 사 왔다. 봉숭아, 과꽃, 해바라기, 백일홍, 채송화, 코스모스, 나팔꽃, 한련화.

4월이 오자마자 화단을 일궈 꽃씨를 뿌렸다. 흙에는 쓰레기와 시멘트 잔해가 매립돼 있었다. 돌을 캐내듯 캐냈다. 벽에 바짝 붙어 있는 화단은 넓지는 않았지만 길었고 흙은 깊지 않고 얕았다. 거름흙을 사다가 섞었다. 이틀에 한 번씩 물뿌리개로 물을 주었다. 일주일부터 싹이 나왔고 열흘이 되니 온통 새싹이다. 싹부터 무슨 꽃인지 알 것 같다. 저마다의 모습으로 태어나 자랐다. 깨물어주고 싶도록 귀엽고 앙증맞다.


주중은 나랑 포함 세 명이 일했고, 주말에는 한 명이 출근한다. 그들 셋은 같이 일하고 있었고 나만 그 속으로 들떠서 들어간 상태다. 매사에 밝고 편하게 그들을 대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 뭐든 베풀었다. 점심도 내가 사겠다고 하면서 한 명씩 돌아가며 외식을 했다. 평상시엔 간단하게 도시락을 싸서 다녔다.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었다.


원래 일했던 세 명은 사이가 나빴다. 뒷문을 열고 화단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들은 미친 듯이 싸웠다. 나는 싸움에 낄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내가 오긴 전부터 하도 싸워서 관장이 한 명씩 불러 계속 싸우면 멀고 힘든 도서관으로 찢어 놓는다고 했단다. 셋은 돌아가며 상대방이 나쁘다고 흉을 봤다. 공감하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자기가 잘했다고 하도 떠들어대서 골치가 아팠다. 공사하는 주변 소리보다 듣기 싫었다.

그들 사이에 샌드위치 소스가 되기 위해 가만히 스며들었다. 하등에 참견할 일이 아니었다. 듣다 보니 누구 잘못이 큰지 모르겠고, 섞여서 뭐가 뭔지 헷갈렸다. 꽃은 자기의 영역에서 자기 생김새대로 태어나 쑥쑥 자라 순서대로 피었다. 튼튼하게 피게끔 새싹을 살살 솎아 이리저리 고르게 옮겨줬더니 꽃 잔치가 열렸다.

한련화가 피고, 나팔꽃이 피고, 채송화가 피고 백일홍이 피고, 지고 폈다.


셋은 싸우고 또 싸우고 외면하고, 나한테 고자질을 했다. 순서별로 떠들어댔다. 나중엔 청소하는 반장님 하고도 싸웠다. 관장이 나를 따로 불렀다.

“선생님들과 잘 지내시나요? 안 싸우셨나요?”

“네. 싸운 적 없습니다.”

사실이다. 직원들이 다 알고 있다.

“청소 반장님이 성희롱은 하지 않았습니까?”

“아니요. 그런 적 없습니다.”

알고 보니 청소 반장님이 사서 선생들에게 과하게 장난을 쳤다는데, 자초지종을 듣기 위해 나를 부른 거였다. 장난 정도야 암것도 아니지. 그깟 일로 예민하게 굴고 그래, 꽤나 도덕적인 척은.


장마가 왔다. 꽃들에서 물을 챙길 필요가 없었다. 비가 너무 오니 채송화가 녹아 없어졌다. 필만큼 폈으니 이제는 시들어버릴 때가 되긴 했다.


셋 중의 한 명이 견디지 못해 시들어지고 있었다. 신경 정신과를 다닌다고 했다. 집중을 못 해 실수가 잦아지고, 땀을 흘리고 한숨을 많이 쉬었다.

희한하게도 선생 셋 다 꽃에 관심이 없었다. 보조직원 한 명이 꽃이 예쁘다며 하루에 몇 번씩 화단에 나와 꽃을 들여다보며 꽃 이름을 물어봤다. 사무실에서도 내려와 꽃을 보며 감탄을 했다.


담벼락에는 나팔꽃이 주렁주렁 달렸고 바닥엔 꽃모양과 크기는 달라도 서로 참견하지 않고 어울렁더울렁 조화롭게 피었다. 주물러 터트리고 싶을 만큼 예쁘다.

뒷문 밖은 꽃길인데, 도서관 안은 원망이 그득그득 피어나 누구 한 명이 잘못될 것 같았다.

살인은 망치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말로도 살인은 일어난다.


이전 15화지하철 도서관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