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비가 많이 왔다. 땅이 추수 끝낸 논바닥처럼 축축했다. 꺼진 보도블록엔 빗물이 고여 있어 쇠똥 피하듯 걸었다. 움푹한 도로로 차가 오면 몸을 인도 안쪽으로 바짝 붙였다.
도서관 옆에는 도넛 가게가 있었다. 내가 발령 나기 전부터 있었다. 가끔 도시락을 안 싸 오면 마호병에 커피를 타 작은 공원 벤치에 앉아서 먹었다. 꽈배기 하나 찹쌀 도넛 두 개. 꽈배기는 설탕을 듬뿍 묻혀 달라고 했다. 공원이라 설탕이 떨어져도 상관없었다. 설탕 묻은 손가락을 빨아먹고 넓은 풀잎에 닦았다.
도넛 가게 옆에 보세 옷 집이 있었다. 구경하다가 가끔 하나씩 샀다. 세탁기에 빨아서 입었다. 가끔 어디서 옷을 사 입냐고 물었다. 보세 집에서 샀다는 말은 안 했다. 동네 양품점에서 샀다고 했다. 누구는 그랬다 죽은 사람 옷이라서 보세 집 옷은 안 산다고. 멀쩡한 옷이 많았는데, 죽은 사람 옷일 수도 있겠구나.
보세 옷 집 맞은편엔 헌책방이 있었다. 책은 도서관에서 실컷 보기 때문에 산 적은 없었다. 도서관 위치를 물어보면 헌책방 맞은편에 있다고 하면 알아들었다. 헌책방은 이 동네만큼 오래된 가게였기 때문이었다. 헌책도 죽은 사람이 보던 거였을까?
연체가 오래되어서 반납 독촉 전화를 걸면 병원에 입원해서 반납 못 했다는 이용자도 있다. 핸드폰을 안 받아 집 번호로 걸면 가족이 전화를 받았다. 돌아가셔서 몰랐다고 한다. 그럼 도서관 책을 찾아보고 찾으면 택배로 보내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책 읽다가 반납 못 하고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십몇 년 도서관에서 일하다 보니 생각하지도 못한 일들이 생겼다.
국화꽃이 지니 겨울이 왔다. 마른 가지는 뽑아내던지 잘랐다. 대부분 일 년생 꽃이라 뽑아야 한다. 뽑은 꽃대를 한쪽에 쌓아놓았다. 태우면 좋겠지만 불법이라 불을 피울 수 없었다. 쓰레기로 처리를 했다.
태어나면 죽음이라는 곳으로 매일 걸어가는 것이라는데…. 들어오려고 애쓴 도서관도 마지막 출근을 남겨두고 있다. 가뿐하면서 착잡했다.
정년퇴직이 다가왔다. 도서관 총괄 과장님과 식사 자리를 가졌다.
“자원봉사 할 생각은 없으신지요? 앞으로의 계획은 뭔가요?”
“일단 쉬다가 자원봉사는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무 계획 없는 게 계획입니다. 하하하.”
그랬다. 아무런 계획이 없다.
정년퇴직하면 딸과 함께 유럽 여행을 가고 싶었지만, 형편이 그렇지 못하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물감 짜는 것도 귀찮다. 글을 쓰고 싶었지만 잘 쓸 자신이 없어 벅차다. 시골에 들어가 꽃 가꾸면서 살고 싶었는데, 혼자는 무서워 갈 수 없고 땅도 없다. 그래서 아무 계획도 없다. 늘어지게 자고 늘어지게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것이 계획이라면 계획이다.
‘외딴방’ 작가는 바닷가에 방을 얻어 글을 썼다고 한다. 성장소설인 외딴방은 나를 사로잡았다. 여행 가방을 챙기듯 챙겨 온 소지품을 쇼핑백에 다시 넣으면서 외딴방을 대출했다.
비싸지도 깨끗하지도 않은 좁은 집으로 돌아왔다. 이곳은 외딴방이지만 평수만큼 창이 크고 밝다. 작가는 제목을 왜 이렇게 붙였을지 다시 첫 장부터 넘기려 한다.
정년퇴직 수료식은 따로 없었다. 기념패와 수료증 한 장을 받았다. 아! 퇴직금이 두둑했다. 그거면 됐다.
직장 그만 다녀도 되는 나이가 되었다. 이제 내 맘대로 쉬어도 된다. 그거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