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나무꼬챙이로 휘저은 도랑물 같은 여름은 갔다.
가을이 오면서 탐스러운 국화 화분을 사무실에서 사다 줬다. 파란색 하늘과 주황색, 찐 노란색. 자주색과 녹색 잎이 보색관계라 눈부셨다.
‘노래를 들을 땐 노래만, 일할 땐 일만 하고, 먹을 땐 먹기만 하고 딴생각이랑 말자. 복잡한 생각일랑 접어두고 알록달록한 국화꽃만 보자.’
화단을 가꾸면서 소소하게 바빴다. 지는 꽃과 잎은 따줘야 했고, 죽은 가지를 가위로 잘라줬다. 도서관은 한가했지만, 화단은 분주했다. 훌훌 시간 보내기 좋았다.
최 선생은 목숨은 건졌지만, 병가를 냈고 휴직을 신청했다. 그 뒤 최 선생은 볼 수 없었다. 백 선생은 사적인 이야기를 할 때 눈까풀을 연실 깜빡인다. 백 선생은 모르는 버릇이지만 듣는 나는 집중이 안 된다. 주말 선생은 수시로 간식을 먹으며 애인이랑 수시로 통화하느라 분주하다. 둘 다 가증스럽다. 하긴 누구 못지않게 나도 가증스럽긴 하다.
사건이 있는 당사자는 고통스러웠겠지만, 사건이 없는 나날은 지루했다. 싸움 구경이 재미났었는데.
여럿이 있으면 괴롭고 혼자 있으면 고독하다. 이런 모순된 위안은 여행, 취미, 자연 그리고 노래였다. 여행이야 데리고 다닐 남편이 가까이 없어 포기했고, 취미는 책 보기, 자연은 내가 기르는 꽃이면 된다. 요즘 좋아하는 노래가 있다. 올드팝송과 재즈, 옛 가요. 기교 부리지 않는 담백한 가요와 흐느적거리는 재즈 선율에 따라 내가 만든 꽃길을 가볍게 흔들흔들 거닐었다.
오전에는 이용자가 거의 없다. 서향 창가 선 따라 놓인 탁자에 매일 오는 이용자 세 명이 책을 본다. 이들을 보면 물질도 사람 관계에도 통달한 것 같다. 평일 오전에 도서관에 있다는 건 물질에 관심이 없는 게 아니겠어. 혼자 오는 걸 보면 사람과 엮이지 않고 홀로 가는 길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도 물질과 사람에게 얽매이지 않는 편인데도 일하면서 사람에게 엮여 응징했고 싸움 구경을 하면서 즐겼는데. 이들은 나보다 정신이 건강한 사람들이다.
물질과 사람에게 기대지 않아, 하면서 위장일 수도 있다. 내가 이용자에게 다정함으로 위장해 십몇 년을 살았고 앞으로 몇 달을 위장하며 사는 것처럼.
지하철역 2번 출구에 이어폰을 끼고 매일 춤을 추는 여자가 있었다. 간헐적으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음정도 박자도 맞지 않았다. 2번 출구 옆에는 작은 공원이 있다.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공원으로 산책하러 나가면서 춤을 추는 여자를 맞닥뜨리게 된다. 이상하게 소리를 지르며 춤을 추는 여자를 경찰이 데려가길 여러 번. 며칠 뜸하다가 다시 이 자리에서 춤과 노래를 불렀다. 이젠 정신이 아픈 사람이려니 하고 못 본 척하게 되었다.
나도 공원에 사람이 없으면 노래를 부르며 몸을 흔들었다. 올드팝 고엽을 불렀고, 개여울을 불렀다.
“웬 어텀 리브스 스타트 투 펄 라라라라~ 라라라라~”
가을은 깊어 나뭇잎이 떨어지고 있다.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까~”
더러운 실개천이 공원 가장자리로 흐르고 있다.
정신이 온전하지 않아도 정신이 똑바르다 해도 사는 게 거기가 거기다. 2번 출구 여자처럼 대놓고 춤을 추지는 못해도 사람이 없으면 음정도 가사도 박자도 안 맞는 노래를 부르며 흐느적 흐적 흐적 느리게 걸으며 춤을 추었다.
남들이 보기엔 똑바로 정신이 박힌 것 같아도 나는 누구보다 정신이 나간 여자다. 어떻게 살려고 하냐고 묻는다면 그냥 산다. 홀로 가는 길, 오늘 편하게 내일을 걱정할 필요 없다. 후회해 봤자 소용없다. 상실하지 말자. 자책하지 말자. 무모했어도 오늘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가을 나뭇잎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지금 사색을 즐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