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 도서관 04

by 산너머

남아도는 게 시간이었다. 심심했다. 잘하는 것보다 좋아하는 걸 찾아봤더니 꽃이었다. 그중에서도 야생화. 꽃을 심고 싶지만, 땅이 없어 동네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꽃을 좋아하는 모임이 있다는 걸 알았다. 검색해 봤다. 회원 수가 적당하고 활성화된 곳을 찾았다. ‘야생화에 미친 사람들’ 이름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미친’ 이런 표현에 거부반응이 많았지만, 돈이 드는 게 아니니 일단 회원가입을 했다.

눈팅만 했다. 눈팅이 뭔지는 모르다가 내가 하는 짓거리가 눈팅임을 알았다. 신조어는 어렵지만, 확 와닿은 표현이긴 하다. 야생화 사진이 예쁘고 설명이 재미있었다. 꽃 이름을 모르고 보는 것과 알고 보는 것은 확실히 다르다. 게시글만 보다가 ‘계절마다 피는 야생화’ 책을 샀다. 동네 산이나 들을 다니며 익혔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가까운 곳으로 야생화를 보러 다녔다. 오솔길 가장자리, 돌 사이 자잘한 꽃을 발견하면 흥분됐다.


정모 공지가 올라왔다. 가까운 곳으로 간다고 해서 신청을 하고 모이는 장소로 나갔다. 남양주 쪽 산으로 눈 속에 올라오는 꽃을 보러 간다고 해서 망설이지 않고 나갔다. 단체 버스를 타고 도착한 산에는 초입부터 바람꽃이 피어있었다. 눈 속에 고개를 들고 핀 하얀색 꽃. 흰 눈을 뚫고 나와서 그런지 시린 눈을 닮았다. 꽃 모양도 잎 모양도 색깔도…. 아아 투명하다. 아아아 신비롭다.


여기서 이 남자를 만났다. 바라보는 취미가 같아서, 동갑이라서 친구로 삼았다. 친구 이상은 신경 쓰여서 거부했지만 같은 꽃을 보며 떠들고 걸어서 좋았다. 나는 카메라가 없어서 핸드폰으로 담았지만, 이 남자는 큰 카메라로 앉았다가, 엎드렸다가, 옆에서, 뒤에서, 위에서 야생화를 담아냈다. 사진을 잘 찍는 편이었다. 피사체를 가까이 찍는 것보다 전체 풍경을 담아냈다. 아름다웠다. 단체 버스를 타고 야생화 만발한 미지의 세상을 헤집고 다녔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이 네 거냐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 네 거냐고.

파릇파릇 돋아나는 풀이 너만의 것이 아니잖아. 이것들아?

자잘 자잘 피어나는 산 꽃이 네 게 아니었잖아. 이기적인 것들아!"


꽃을 보며 억울함을 풀어냈다. 야생화는 누구의 것도 아닌 모두의 것이었고, 너만 보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껏 볼 수 있어서 공평했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고 여겼는데 야생화를 보는 동안 설움도 미움도 잊혔다.


바람꽃을 같이 본 이 남자를 ‘바람꽃’이라 하겠다. 몇 달은 제대로 된 남자를 만난 줄 알아서 남편한테 이혼해 달라고 할까 고민을 했었다. 좋은 남자를 만나 사랑받고 싶었고 제대로 된 결혼생활을 해 보고 싶었다.


처음엔 밥값을 내라고 했다. 기름을 넣어달라고 했다. 가끔은 바람꽃 차를 타고 야생화를 보러 다니니 기름을 넣어주고 밥을 사줘도 괜찮았다. 그러더니 점점 단위가 커졌다. 급하게 필요하다고 백만 원을 빌려 달라고 했다. 처음엔 잘 갚았다. 삼백만 원을 빌려 달라고 했다. 차일피일 미루더니 모르는 척 지나갔다. 야생화꽃을 보러 가려면 바람꽃이 필요한데…. 삼백만 원. 없다 샘 치자. 이해하고 넘어갔다.


은행 신용카드를 내 이름으로 해 달라며 몰아붙이길래 무지 싸웠다. 안 만났다. 그런데 앉아서도 누워서도 야생화꽃이 뭉텅이로 보였다. 미안하다고 안 그럴 테니 꽃 보러 가잖다. 안개 자욱한 새벽에 복잡한 세상을 뒤로하고 꽃을 찾아가는 산길이 몽환적이었다. 그러더니 집을 잡혀 대출해 달란다,

13평 임대 아파트를 내 집으로 등기부 등록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전 재산을 저당 잡히라니. 내 생활신조는 빚을 만들지 말라며 여태까지 살았는데, 이 인간 뭐야!

정모에 처음 나갔을 때 정년퇴직하고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고 자랑을 했고, 자식이 좋은 직장 다닌다고 자랑을 해서 돈이 많은 줄 알고 접근을 한 것 같았다.


죽여야겠다. 연락 안 받고 헤어지면 되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그게 아니다. 내가 사는 곳과 자원봉사를 하는 곳을 알고 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카드도 대출도 안 된다고 했더니 도서관으로 찾아온다고 협박을 했다. 그래서 죽여야 한다.


CCTV가 사방에 깔려있어서 신중해야 했다. 수면제를 음료수에 타 잠을 재우고 그다음은 길가에 있는 돌로 쳐서 죽이려는 계획을 짰다. CCTV에 안 잡히고 죽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저놈의 CCTV는 절대 내 취향이 아니다.

수면제 탄 음료수를 준비했다. 차 안에 앉아서 음료수를 줬다. 바람꽃 음료수는 오렌지 맛, 내 음료수는 포도 맛이었다. 오렌지 맛을 한 모금 마시더니 맛이 없다고 내 거로 바꿔 채더니 홀랑 마셨다. 나는 한 모금 마시는 척하며 차창 밖으로 쏟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기적인 새끼.

몇 번 수면제 음료수를 준비했지만,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어떻게 죽여야 할지 도통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살인할 용기도 없고 감옥에 들어가기도 두려웠다.

야생화 안 보러 다녀도 될 만큼 이 만남이 진절머리가 났다.


근데…. 한 달 동안 연락이 없다. 야생화에 미친 사람들 모임에서 바람꽃이 죽었다고 얘기를 전해 들었다. 사채 압박에 못 이겨 차와 함께 저수지로 돌진을 했단다.

휴~잘됐다. 죽이고 싶었는데 스스로 죽었으니 잘 됐다.


바람꽃을 마지막으로 만나던 날 대출해 달라고 사정을 했었다. 절대 못 해준다고 했더니 핸들을 잡아 틀면서 죽겠다고 했다. 너 혼자 죽어버리라고,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있는 대로 발악을 쓰며 대들었는데...


자식을 낳은 남편도 빚에 쪼들려 만나지 않아도 그만인데, 길 가다가 만난 남이 자기가 빚을 져 놓고 누구한테 떠넘겨. 재수 옴 붙었다. 재수 없다며 머리를 감쌌다가 한시름 놓았다. 남자 복 지지리도 없다.


죽어도 마땅한 인간이 죽었다. ‘야생화에 미친….’ 내가 미칠뻔했다. 야생화는 가까운 곳에 가서 혼자 봐야겠다.


집에 찾아오면 문을 안 열어 주면 되는데, 도서관으로 찾아올까 봐 무지하게 불안했었다.

남자는 필요 없지만, 도서관은 육신이 멀쩡할 때까지 다녀야 한다. 출근 준비를 하면서 멋을 한껏 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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