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 도서관 05

by 산너머

소설 ‘좀머 씨 이야기’에서 좀머는 폐소공포증 환자다. 한 공간에 가만히 있지 못하는 좀머 씨는 긴 지팡이를 짚으며 비가 오나 우박이 쏟아지거나 계속 걸어야 하는 사람이다. 소년의 관점에서 좀머 씨를 본 성장소설은 얇은 책 속 중간중간에 삽화가 있어서 동화 속 같지만,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내용이다. 몇 번 읽다가 이 책을 샀다.


큰 걱정은 없는데 한 곳에 오래 있으면 답답증이 올라왔다. 영화를 보러 갔다가 숨이 막힐 것 같아서 중간에 나왔다. 공황장애라는 병명을 얻었다. 듣기 싫은 잔소리에 가슴이 아프도록 두근거렸다. 심장초음파에도 이상이 없었다. 지하 공간에 오래 있지 못하고 창문이 안 열리는 버스를 못 탔다.

창문이 없는 백화점은 답답하지만, 도서관은 창문이 많아서 숨쉬기가 편하다. 이래저래 도서관 서가만 빙빙 돌며 살아야 한다. 야외 탁자가 놓여 있는 탁 트인 자연공간이 가슴을 뻥 뚫리게 한다. 자연이 예쁜 카페만 돌아다니며 살아야겠다.


도서관에서 십몇 년을 일했지만 친한 동료가 없다.

술 한 잔씩 기울인 동료 언니가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면접을 같이 봤는데 최종면접에서 떨어졌다고 대 놓고 나를 미워했다. 결혼도 안 하고 혼자 사는 여자였는데, 죽을 때까지 혼자이길 바란다.

한 동료는 남편이 의처증이 심해 만난 지 두 시간만 되면 전화가 오고 감시를 해 불편했다. 저런 남편은 없는 게 낫다. 이혼을 하지 않고 사는 동료가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다. 하긴 부부만이 통하는 매력이 있겠지.

자원봉사를 하면서 친해진 사서 선생이 몇 명 생겼다. 모임을 만들어 몇 달마다 한 번씩 만난다. 일하는 영역이 달라 질투도 무시도 안 해서 친하게 된 것 같다.


출근하기 멀어서 가까운 곳으로 옮기려다가 이곳이 익숙해져서 여행 삼아 다닌다. 나이 먹을수록 새로운 곳에 적응하기 불편하고, 십 년 이상 다니다 보니 집같이 편하다.

내가 정한 순서대로 일하고 칸막이로 가려진 원탁에 앉아 창문을 연다. 창밖을 보다가, 책 읽다가 먹고 싶은 간식을 꺼내 먹는다. 20분에 한 번씩 서가를 한 바퀴 돌며 반납한 책을 꽂고 삐뚤어진 서가를 정리한다.

어디에 책이 있는지, 어떻게 도서관 이용을 하는지 빠삭하다. 이용자를 만나면 살짝 미소를 짓고 낮은 소리로 인사를 한다. 내 목소리는 톤이 높고 쇳소리가 나서 사실 별로다. 목소리 때문에 오해가 생기고 첫인상이 별로라고 한다.


삼십 년 만에 만나 동창이 나보고 늙었다고 한다. “너도 나만큼 늙었어.”

몇 년 만에 만난 친구가 왜 살이 안 찌고 말랐냐고 한다. “뚱뚱한 너보다 낫다.”

일 년 만에 본 친척 동생이 흰머리가 그게 뭐냐고 한다. “너는 주름이 왜 케 많아?”

칠십이 되면 서로 더 나을 것도 없으면서 대 놓고 뇌까린다. 말이 없더니 말이 많아졌다고 놀란다. 나도 할 말을 하며 살기로 했다고 되받아친다.

이 나이에 부자가 될 수 없거니와 딱히 욕심도 없다. 보고픈 사람도 없고, 그리운 것도 빛바래졌다. 외모 까짓 거 너나 나나 비슷하다.

내리깔려고 기를 써도 도서관에서 정년퇴직하고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고 하면 부러운 눈치다. 늙어 출근할 곳이 있다는 그것만으로도 삶의 판도가 달라진다. 부러울 것이다.

여행도 거기가 거기고, 뭘 새로 배우는 게 힘이 들고, 수다 떠는 것도 무의미하다. 수다가 성격에 맞으면 텔레비전이나 먼 창만 바라보는 것보다는 훨씬 낫긴 하다. 근데 나는 사람들과 만남이 별 의미가 없다. 자랑질, 남 흉보는 게 대부분인 주제가 싫다.


도서관에서 자원봉사를 하지 않았으면 '좀머 씨'처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걸어 다녔을 것 같다. 집안에만 있으면 답답증이 올라오고 사람들과 만나면 울화증이 도지고 한 곳에 오래 앉아 있으면 숨이 막힌다. 도서관 다니길 잘했다. 정년퇴직 후 선택한 일 중에 제일 잘했다.

칠십이 될 때까지 다녔으니 앞으로 계획은 팔십 살까지 다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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