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9월. 남편은 장돌뱅이

by 산너머

방랑벽이 있는 남편은 출근했다 하면 들어오질 않았다. 저녁을 먹으면서 술을 먹고 2차는 맥줏집으로 3차는 청평으로 양주를 마시러 가는 사람이라 신새벽에 들어오는 일이 일주일에 서너 번은 됐다. 그러더니 멀리 원정 술집을 안 가면 도박을 했다. 성인 오락실이나 화투를 치느라 외박도 잦았다. 먼동이 뜰 때까지 남편을 기다리며 밤을 새웠고 해 뜨는 창가를 보며 아침을 맞았다. 마음 갈 곳 없이 외로웠고, 다리를 부러뜨리고 싶을 만큼 증오했다.


매형이 넣어준 직장에 오래 다니지 못하고, 운전하는 걸 좋아해 운송회사에 들어가 택시를 몰았다. 하루 할당금을 못 채워 겨우겨우 생활비를 줬다, 경기가 안 좋아서 조금밖에 못 번다고 하길래 그런 줄 알았다. 동료끼리 화투를 치느라 영업을 안 나가서 그랬던 거였다. 최소한의 생활비는 카드로 대출을 받아서 주고 도박을 하느라 없앴다. 카드로 돌려 막기를 하다가 독촉장이 날아와서 알았다.

단골이었던 은행 카드들을 본인이 잘라버리더니 운송회사를 그만두었다. 회사에서도 도박만 하고 운행을 안 하는 직원은 필요 없어서 옳다구나! 퇴직 처리를 총알택시처럼 해 줬다.

시댁에서 봉고차를 사 줘서 잡다한 물건을 싣고 장돌뱅이를 시작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느라 엿새 동안 밖으로만 돌았다. 일요일 하루만 집에 있는데, 온종일 잠만 잤다. 남편은 술 항아리, 도박꾼, 방랑자, 잠충이었다.


삼 년 조용하다 싶으면 몇천만 원 빚을 져 조용히 내 눈치만 봤다. 서울 집을 팔아서 지방으로 전세를 얻어 이사를 했다. 결혼했으니 끝까지 살아야 하는 줄 알았지, 이혼한다는 개념조차 없었다. 주변에선 법도 없이 살 사람이라고 칭찬이 자자했다. 밥값, 술값을 솔선수범해서 냈고 집까지 다 바래다주고 왔다. 운전하는 게 천직인 것 같다.


자식에게도 나쁜 아빠는 아니었다. 나는 자식들에게 원하는 걸 다 사주지 않았다. 형편도 그랬고, 버릇이 나빠질까 봐 그런 것도 있다. 아이들이 나 몰래 아빠를 데리고 나가서 갖고 싶은 걸 손에 쥐었다. 특히 큰아들이 아빠를 적절하게 이용하더니 돈 씀씀이가 헤퍼졌다. 물건을 사면 최고 좋을 걸 마구 사들였다. 남편은 자기 옷 한 벌 제대로 못 사 입고 오만 잡것, 유흥비에 몰빵을 했으니…. 차라리 큰아들이 나은 건지도 모르겠다. 둘 다 저축이란 걸 모른다.


장사한다고 방방곡곡을 트로트를 들으며 다니더니 나중엔 빚만 신명나게 남았다. 차 안엔 테이프 한 상자, CD 만 한 상자였다. 발로 확 차 버렸다. 밟아버리려다 참은 거다. 노래는 죄가 없지만 그래서 트로트를 질색한다.


시집에서 두 번째 집을 사줬는데 그마저 빚으로 찢어져 분해 돼 버렸다. 길거리에 나 앉았다는 뉴스를 봤는데 우리 가족이 그 꼴이었다. 가전제품과 이부자리만 남았다. 홍수가 훑고 지나간 집도 뉴스에서 봤다. 생활 쓰레기만 엉겨있는 방바닥이 우리 집과 별다를 게 없다.


남편이 우는 걸 두 번 봤다. 두 번째 집을 팔면서 아이들과 헤어질 때 밤새 잠 못 자고 우는 걸 봤다. 나는 울지 않았다.

딸이 결혼할 때 혼주석에 앉아서 남편은 울었다. 주례사 없이 내가 쓴 편지글을 내가 읽었는데, 나는 울지 않았다.


나는 겉으론 약한 건 같은 데 냉정하고, 남편은 착한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있었을 뿐 냉정하지 못해 끌려다닌 것 같다.

남편의 취미는 경조사 챙기기. 사돈의 팔촌까지 찾아다닌다. 결혼식에 가면 돌잔치 때 부르고, 개업할 때 부르고, 그들 부모님이나 장모님 장례식까지 불렀다. 부르면 오고 오면 봉투를 두둑이 주니까 얕잡아 봤을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필요할 때 이용하는 기회주의자들이다. 착하면 우습게 여긴다.

남편 친구 마누라는 필요한 게 있으면 자기 남편을 놔두고 내 남편을 시켰다. 남편은 출석에 답하듯 얼른 대답하고 메뚜기처럼 팔딱 뛰어 사러 갔다. 한쪽 뇌가 모자란 것 같다. 경계성 지능이 아닐까 의심했다.


나는 아무도 안 부른다. 준 만큼 돌아오는 게 맞긴 하다. 갈수록 사람 만날 일이 없어지고 일직선 고속도로처럼 주변이 휑하다.

남편은 모임도 많고, 전화 거는 사람들도 많다. 주변머리가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교차로같이 혼잡하다,

남편이 맞는지 내가 옳은지 종잡을 수가 없다.


1989년 9월 초 남편은 봉고차에 옷가지만 싣고 떠나고, 나는 눈치만 보는 아이들 셋을 데리고 손때 묻어 정들은 가전제품을 싣고 임대아파트로 옮겼다. 여름도 가을도 아닌 도롯가엔 때 이른 코스모스가 색종이처럼 드문드문 붙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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