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여중생 친구들)
중학교는 버스를 타고 다녔다. 버스에서 내려 골목길을 한참 올라가면 언덕 꼭대기에 중학교가 나왔다. 이 골목은 내가 사는 시장통 골목 하고는 전혀 달랐다. 정원이 넓은 전원주택단지였다. 높은 담장엔 깨진 유리 조각이 장식품처럼 졸로리 얹어져 있고 철조망이 몇 겹으로 처져있다.
까만 교복 통치마에 삼각형 하얀 카라, 상자 형태 교복 윗도리. 머리는 두 갈래로 땋았다. 체육 시간엔 자주색 체육복으로 갈아입었다. 학교 운동장은 찰흙 바닥이라 판판했고 딱딱했다.
은하는 예쁜 이름처럼 착하고 푸른 하늘 은하수처럼 맑았다. 2학년부터 2년 내내 같은 반이었다. 은하네 집은 전원주택단지에 살았다. 마당엔 꽃나무가 여러 그루 있었다. 자기 방이 따로 있었고 입식 부엌이었고 화장실도 수세식이었고 욕조까지 있었다. 부자라서 그런지 마음이 넓고 이해심이 많았다.
경미는 버스를 타고 나보다 더 멀리에서 왔다. 부모님이 세탁소를 했다. 자주색 기와지붕을 얹은 단층집에 방 두 칸, 다락방이 딸려 있었다. 다락방이 경미 방이었다. 은하네 집보다 경미네서 많이 잤다.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더웠지만, 숨어 있을 수 있어 안정감이 들었다. 소공녀가 되어 공책만 한 창문을 열었고, 빨간 머리 앤이 되어 제비꽃 길이 펼쳐졌고 선생님이 되는 꿈을 꾸었다. 작가 ‘이상’이 될 때도 있었다. 비가 오면 음습한 다락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그럴 땐 왠지 모를 슬픔이 밀려왔다. 경미와 유행하는 슬픈 가사 가요를 들으며 같이 울었다.
현자는 먹보였다. 자기가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나를 꼬드겨 손에 넣었다. 하루는 우리 집에 와서 찬장에 있는 떡을 나보다 먼저 발견하고는 달라고 했다. 안된다고 동생이랑 먹어야 하고 엄마한테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해도 기어코 떡을 한 덩이나 가져갔다, 현자네는 본처와 후처가 한집에서 살았다. 현자 엄마가 후처였다. 어떻게 같이 사냐고 괜찮냐고 했더니 그게 어때서 하는 몸짓이었다. 밝고 욕심 많은 현자를 보면서 의아했지만, 뭐든 자기 손에 넣어야 직성에 풀리는 걸 보면 아빠를 닮았겠구나 했다.
숙경이는 눈두덩이에 테이프를 잘라 붙여서 쌍꺼풀을 만들었다. 친하게 지난 건 아니지만 워낙 키가 크고 멋을 유난스럽게 부려서 눈에 띄었다.
체육 시간이 돼 급하게 뛰어가다가 넘어졌다. 숙경이가 얼른 달려와 나를 데리고 양호실로 갔는데 양호 선생님은 침대에 누워 코빼기도 안 보이고 신경질적인 목소리만 들렸다. 숙경이가 소독을 해주고 붕대를 접어 반창고를 붙여줬다. 상처가 깊어 불주사 맞은 자국처럼 선명하게 흉터가 남게 되었다.
교정엔 봄, 여름, 가을꽃이 피었다. 내가 사는 골목엔 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데, 중학교로 올라가는 골목길 담장 유리 조각 사이로 다알리아꽃이 힐끔거리고, 철조망 사이로 라일락꽃들이 두 갈래머리 여중생을 호기심이 가득 담긴 눈으로 쳐다봤다. 다닥다닥 붙은 눈이 부담스러웠지만 반가웠다.
소설책이 재미있고 생물 시간을 좋아했고 우정이라는 단어를 일기장에 빼곡하게 끄적였다.